대승불교의 이해
1. 대승불교의 시작 (출현 시기와 동기, 배경 등)
부처님 열반 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은 경전을 편찬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결집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 2차 결집 때 계율의 내용 중 열 가지 사안, 특히 화폐 보시의 수용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교단은 보수적인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로 분열하게 되었고, 이후 교단은 18 내지 20(혹은 30)개의 부로 분열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부파들은 각기 독자적인 율장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아함경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하면서 많은 論을 편찬하였다.
이와 같이 부파불교 시대의 승가가 經 연구와 수행에 전념하게 되자, 일반 재가자들은 신앙의 대상으로 탑을 찾게 되었다.
탑은 처음에 부처님 열반 후 건립되었는데, 이는 부처님의 사리와 사리를 담았던 항아리, 그리고 재를 10개로 나누어 그 안에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쇼카 왕이 인도를 통일한 후 힘의 통치 방식에서 벗어나 법의 통치를 지향하게 되면서 그 10개의 탑 안에 모셔진 사리를 한데 모아 인도 전역에 수많은 탑을 건립하고 안치하였다.
따라서 일반 재가자들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불탑 주위에 모여들게 되었고, 이러한 재가자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법사들이 등장하여 대중들에게 쉽게 설법을 해 주게 되었다. 이 때 행해진 설법의 주요 내용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이나 부처님의 일생 등으로서 보리를 얻기 위한 치열한 구도 정신과 중생 구제를 위한 한없는 자비의 정신을 담고 있었다. 이는 부처님의 참모습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통하여 배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곧 대승불교의 시작이다.
2.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간상 : 보살, 상구보리 하화중생.. 수행 부처님 닮아 성불
대승불교의 기본은 부처님의 참모습을 알고 그 모습을 닮아 부처님처럼 되자는 것이다. 부처님의 참모습은 법사들이 주로 설한 본생담에 나타나 있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삶에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굳건한 구법 의지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까지도 버리는 삶을 통해서 부처님의 본질은 지혜와 자비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전생의 여러 삶 속에서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지극한 마음을 냄으로써 흔들림 없이 수행 정진하여 마침내 성불하였다. 이와 같이 발보리심은 성불의 원동력이 된다. 발보리심으로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이 움트기 시작하여 성불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나 보리심을 발하면 그 삶의 과정은 성불로 가는 도중에 있게 되므로 언젠가는 성불할 수 있다고 보고, 이와 같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중생을 보살(Bodhisattva)이라고 한다.
즉 보살은 부처님의 참모습과 같이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보리를 추구하면서 자비를 실천하는 중생으로서, 대승불교의 최고의 인간상이다.
3. 대승불교의 실천 덕목 :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위한 6바라밀
대승불교의 기본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하는 구체적 덕목으로 6바라밀이 있다.
여섯 가지 바라밀에는 보시 바라밀, 지계 바라밀, 인욕 바라밀, 정진 바라밀, 선정 바라밀, 지혜 바라밀이 있으며, 바라밀이란 pāramitā의 음사로서 ‘완성’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보시 바라밀’이란 ‘완전한 보시’를 말하는데, 이는 지혜와 복덕을 구족한 부처님이 행하는 보시이므로 ‘부처님의 보시’이며, 이와 같은 보시를 행함으로써 부처님과 같아지므로 ‘부처님이 되게 하는 보시’라고도 할 수 있다. 나머지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바라밀도 이와 같다.
따라서 바라밀의 올바른 실천은 번뇌가 묻어 있지 않은 무루선, 즉 완전한 선을 행하는 데 있다.
이를 각 바라밀과 관련하여 보면, 보시 바라밀은 시자․수자․시물 등에 집착이 없이 청정한 무주상 보시이어야 한다. 또 지계 바라밀은 계를 지킨다는 집착 없이 자리이타의 입장에서 행해야 하며, 인욕과 정진 바라밀 역시 나라는 데 집착하지 않고 행해야 한다. 또한 선정 바라밀은 마음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좌선이나 진언․염불 등의 수행으로 삼매에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혜 바라밀은 나와 너, 이익과 손해, 행과 불행, 좋거나 나쁜 것을 구분하여 인식하고 자신에게 이익 되고 좋은 것에 집착하는 분별지가 아니라, 어느 것에도 집착이 없는 무분별지를 말한다. 불교에서 무분별지를 지혜라고 하는 이유는, 불교의 목적은 열반, 즉 영원한 행복인데, 대상은 인식한 그대로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혜 바라밀은 가장 중요한 바라밀로서, 다른 바라밀의 실천에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6바라밀을 흔들림 없이 잘 실천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얻어 그 공덕을 다른 사람과 같이 나누겠다는 서원이 필요하다. 발보리심은 성불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4. 대승불교의 경전들 : 천 년간 성립된 초기, 중기, 후기 경전들
기원전 1세기경 불탑을 거점으로 재가자 중심의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난 이래 천여 년에 걸쳐 대승 경전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초기 대승 경전으로는 반야경, 화엄경, 아미타경․관무량수경․무량수경 등 정토경, 법화경이 있으며, 중기 대승 경전으로는 여래장 사상의 승만경과 유식 사상의 해심밀경 등이 있다. 또 후기 대승 경전에는 밀교적 경향의 대일경, 금강정경 등이 있다.
○ 대승 불교는 기존의 붓다 관념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정립하였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을 끌었다. 대승에서는 신앙의 대상인 붓다의 본원(本願)과 정토(淨土)를 설하고 자비를 찬탄하며, 불신론(佛身論)을 그 중심에 두었다. 대승의 불신론은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붓다, 즉 법신(法身)과 중생 제도를 위한 붓다의 시현(示顯), 즉 색신(色身)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시방삼세(十方三世)에 수많은 붓다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특히 삼신불(三身佛)이라 하여 불신을 3종으로 구분하였는데, 그 내용은 경우에 따라 다양한 조합으로써 설명된다. 1) 자성신(自性身), 수용신(受用身), 변화신(變化身) 2)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 3) 법신, 보신, 화신(化身) 4) 진신(眞身), 보신, 응신 5) 법신, 지신(智身), 대비신(大悲身) 6) 법신, 응신, 화신
그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삼신불은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 3불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보신은 아미타불, 법신은 비로자나불, 화신은 석가모니불을 꼽는다. 하지만 그 외에도 경전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다양한 쌍을 이룬 3불상이 봉안되기도 한다. 예로부터 인도에서 브라마, 비슈누, 쉬바라는 3신을 숭배하는 신앙적 전통의 영향으로 불교에서도 3신불을 숭배하는 신앙이 생겨났으며,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찰에서도 3신불을 봉안하게 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대승 불교에서는 이러한 신앙적 실천의 주체로서의 보살을 강조했다. 보살이란 보디삿트와(bodhisattva)라는 말을 음역한 것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중생'이라는 뜻이다. 보살은 원래 성불하기 이전의 붓다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고 입문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승화시킨 데에는 대승의 구도자에게 붓다를 닮으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와 같이 기존의 아라한이라는 이상을 보살로서 대신한 대승에서는 중생 모두가 해탈을 이룰 때까지 스스로 열반에 들기를 거부하고 중생들 속에서 함께 수행하며 그들의 해탈을 위해 진력한다고 강조했다. 대승의 주창자들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불성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집착과 아집으로 인해서 가려진 불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부단한 수행을 쌓아야 한다고 설했다. 그들은 보살행(菩薩行)이라는 실천 덕목을 설하였는데, 여러 종류의 파라미타(pāramitā, 바라밀 또는 바라밀다)는 '피안에 도달하기 위해서 닦아야 할 수행 방법들'을 총칭한다. 파라미타는 정(定)과 혜(慧)의 2파라미타를 비롯하여, 4파라미타, 6파라미타, 7파라미타, 10파라미타, 32파라미타 등등 수없이 많은 조목들이 대승 경전에 소개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6파라미타이다. 6파라미타는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등으로서 불도 수행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들이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6파라미타는 모든 붓다를 낳은 어머니이며 모든 붓다 의지하는 보배라고 말할 만큼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한다. 10파라미타는 6파라미타에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 등 네 가지를 더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파라미타 사상에 근거한 가장 이상적인 대보살들로서 문수(文殊), 보현(普賢), 관음(觀音) 등의 여러 보살들이 대승 경전의 주인공으로서 등장하고 있다. 파라미타를 실천하는 보살들의 수행에는 그 정도에 따른 단계가 있다는 사상도 정립되었는데, 바로 10지(地) 등의 보살 계위이다. 10지는 보살이 수행하여 성불하기까지 총 52단계의 수행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제41부터 제50 단계까지를 10지라 한다. 10지는 차례대로 초지(初地), 2지, 3지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제1 환희지(歡喜地), 제2 이구지(離垢地), 제3 명지(明地), 제4 염지(焰地), 제5 난승지(難勝地), 제6 현전지(現前地), 제7 원행지(遠行地), 제8 불동지(不動地), 제9 선혜지(善慧地), 제10 법운지(法雲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10지에 이르러서야 보살은 비로소 불성(佛性)을 보며 중생을 구제하고 지혜를 갖추기 때문에, 10성(聖)이라 하며 성인의 칭호를 받는다. 이와 같은 10지 보살 사상은 파라미타의 덕목들과 함께 대승 불교를 발전시키는 핵심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대승 불교의 실천이 기반이 되었던 진리관은 생사 즉 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설하는 공성(空性) 사상이 근간을 이룬다. 보살은 무주처(無住處) 열반을 이상으로 하여 이타행을 실천하며, 미혹과 깨달음의 동일한 근거로서의 마음에 대해서도 공성에 의해 본질이 해명되어, 여래장(如來藏)이라든가 유심(唯心) 또는 유식(唯識)의 이론을 낳았다. 또한 붓다의 깨달음을 원점으로 하여 제법(諸法)의 연기가 곧 진여(眞如)이며 법계(法界)라고 하며, 그 특색을 공(空) 내지 공성(空性)이라 파악하여, 반야 파라미타에 의해 이것을 체득하는 것을 깨달음으로 삼는다. 이러한 사상을 토대로 한 대승 불교에서는 그 이전 교단의 가르침이 스스로 아라한이 되어 열반하는 것을 최상 목표로 했던 것은 다른 중생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편협한 가르침이라는 뜻에서 소승(小乘, hīnayāna)이라고 폄칭하였다.
대승(大乘)이란 ‘큰 수레’를 뜻하는 범어 마하야나(Mahāyāna)의 한역어로 소승(小乘), 즉 히나야나(H○nayāna)에 맞서는 말이다.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을 때 대승교도들은 스스로를 대승이라고 부르고, 그 이전의 부파 불교교단들을 가리켜 소승이라고 낮추어 불렀는데 ‘대승’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서력 기원을 전후하여 불교교단은 장원을 중심으로 정착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일정한 지역에 스투파(Stupa, 塔)가 건립되고 수행자가 거처하는 장소에 정사(精舍:수도하는 곳)를 세우는 등 교단은 안정된 기반 위에서 각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전국적 유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경제적 기반은 신자들이나 지역의 장자들이 시주한 토지였음이 확실하다. 교단의 경제적 안정은 불교교리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가능하게 했다. 이를 ‘아비달마’라고 한다.
아비달마란 말은 범어 아비다르마(abhidharma)의 음사(音寫)로서 문자 그대로 ‘법(法, dharma)에 대한(abhi)’ 연구를 뜻한다. 그것은 법의 이론적 분석과 종합으로서 여기서 수립된 교리체계는 매우 복잡하고 또한 치밀한 것이었다. 아비달마 교학의 사상적 특징은 인간의 내면세계와 객관세계를 분석하여 그들 상호간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려고 한 데 있다. 그러나 세부적인 문제에 이르면 각 부파에 따라 다시 입장이 달라진다. 삼세실유(三世實有:과거, 현재, 미래에 항상 있음)니 법체항유(法體恒有:진리의 몸은 영원함)니 하는 주장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본래 법이라는 것은 종교적 체험 속에서 자각되고 행위를 통하여 실천되어야 한다. 그 법을 외부적인 관점에서 대상화하고 논리적으로 고찰한다는 것은 청정한 ‘생명력’을 생활 속에서 기르려는 불교 본연의 실천적 성격과 어긋나는 것이다. 법의 연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연구의 진전이 곧 불교 본래의 종교성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 출가수행자의 재가 신자에 대한 교화도 형식적인 설교로 전락하여 비구와 재가신자의 관계는 공덕을 쌓게 하는 매체로서의 기계적인 기능만이 정착되었다. 교학의 연구는 진전되었지만 그것은 일상생활 속의 재가신자와는 동떨어진 깊숙한 승원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부 엘리트들의 사변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교단은 외형과 내면이 모두 세속화의 흐름과 타락의 기풍을 낳고 있었다. 이처럼 부파불교는 지나치게 번삽한 이론 전개를 일삼아 불교를 일부 출가자들만의 전유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출가수행자들이 중생을 향한 이타행보다는 그들의 수행 목표인 아라한과를 얻기 위한 자리 추구에만 몰두하는 폐단도 낳았다.
이러한 교단 상황에 대한 반발과 종교적 반성으로 일어난 것이 바로 대승불교 운동이다. 그와 같은 움직임은 대체로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하여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비달마 불교의 모든 모순을 극복하고 불교의 이론적인 측면과 실천적인 측면을 동시에 정비하고자 했던 움직임이 곧 대승불교운동이다. 당시 대승이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우선 대상의 실체를 인정함으로써 아집과 법집을 낳게 했던 유부(有部:아비달마 불교)의 법체항유설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자리행만을 고집하여 점차 대중의 지지를 상실해 가고 있던 아라한 중심의 불교를 더욱 대승적인 수행 목표인 보살 중심의 불교로 전환하여 불교에 생기를 불어 넣는 일이었다.
중관(中觀)과 유식설(唯識說)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대두된 대승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중관사상은 아비달마 교학의 실유(實有)사상을 타파하고 공관(空觀)에 입각한 중도의 진리를 제시했고, 유식사상은 불교의 초보적 심리설을 더욱 고차원적인 수준의 대승적 심리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사상은 대승불교의 이론적 토대이자 그 후 중국불교의 발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대승불교의 이해를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중관사상(mādhyamika)은 불멸 후 600-700년경 남인도 사람 용수(Nāgārjuna)가 확립시킨 이론이다. 그는 제2의 석가모니 또는 팔종(八宗)의 조사라는 찬사를 받고 있을 정도로 불교사상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흔히 인간들은 존재의 고정적 실체성을 믿는 경향을 띤다. 그 결과 대상의 영원불변성에 집착하게 되고 그것은 곧 여러 가지 번뇌망상을 낳는 원인이 된다. 용수에 따르면 이와 같은 존재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대상에 대한 어떠한 마음의 집착도 초월한 경지, 그것이 바로 무상정득각의 세계라고 한다. 그 세계는 생(生)과 멸(滅), 상(常)과 단(斷), 일(一)과 이(異), 거(去)와 래(來) 등 여덟 종류의 극단을 부정한 중도의 세계이다. 용수의 중관사상은 바로 이 팔부중도관(八不中道觀)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입장은 일체제법의 무자성(無自性:영원한 자성이 없음)을 강조하는 반야공사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유식사상(vijñanavādin)은 소승불교의 교학적 약점을 보완하고, 용수의 반야공사상이 지나치게 허무주의적 경향으로 흐르게 된 데 대한 반발로 나타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상의 기초자들로서는 미륵(Maitreya,彌勒), 무착(無着) 그리고 세친(Vasubandhu,世親) 등을 들 수 있다. 유식(vijñaptimātratā)이란 말은 인간을 중심으로 볼 때 정신과 물질 등 내외의 모든 존재들은 오직 심식(心識)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며 이 심식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정신과 객관세계의 관계에서 정신을 능동자, 객관세계를 수동자로 보는 입장이다. 따라서 정신의 소유자는 만법의 주인이며 선악제법은 오직 이 정신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 유식에서 말하는 식은 일반적으로 아뢰야식(ālaya-vijñāna)을 가리키지만, 8종의 식, 즉 안·이·비·설·신·의의 육식과 말나식(manas-vijñāna) 그리고 아뢰야식 모두를 가리키기도 한다.
아비달마 교학까지는 6식을 들고 있으나 유식학파에서는 6식 속에서 이들 식을 일으키는 운동 주체로서의 근원적 식을 상정하고 이를 아뢰야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아뢰야식을 자아라고 집착하는 말나식도 상정하게 되었다. 아뢰야식이 제8식, 말나식이 제7식이 된다. 제7말나식은 제6식의 의지처 역할을 하는 동시에 그 자체와 제8아뢰야식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식이다. 특히 이 식은 아뢰야식을 상대로 끊임없이 사량(思量), 집착하며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등 근본 번뇌를 야기시킨다. 이로 말미암아 아치(我痴)와 아견(我見) 그리고 아만(我慢) 및 아애(我愛) 등의 근본 4번뇌를 야기케 하여 제6의식 등 다른 식에게도 많은 지말전뇌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선과 악의 상대적인 작용을 끊임없이 발생시키고 많은 업력을 조성케 하여 생사윤회하는 고통의 원동력이 된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제8아뢰야식은 지금까지 말한 모든 식의 근본식이 되며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이는 아뢰야식이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 등 삼장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유식사상에 따르면 모든 식의 행위와 육체적 행위는 선악의 업력이 되어 이 아뢰야식에 보존된다고 한다. 이는 곧 아뢰야식의 능동적 기능을 표현한 것으로 이를 능장(能藏)이라고 불렀다. 동시에 아뢰야식은 수동적인 입장에서 그 업력을 받아 들여 보존하는 역할을 하므로 소장(所藏)이라고도 한다. 또한 아뢰야식이 집장(執藏)의 뜻도 갖는 것은 제7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된 망집(妄執)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모든 업력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선악업력을 다른 식에 공급하여 발동케 하므로 모든 선악의 행동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이 식의 작용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셈이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과거세의 업력을 보존한 이 식이 먼저 태어날 것이며, 내생으로 떠날 때도 금생의 업력을 보존하고 있다가 육체로부터 맨 마지막에 떠난다. 그것이 육도윤회의 인연을 따라 다시 이 세상에 생명체로 출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아뢰야식은 현재의 생명체가 내외의 사건과 현실을 일으키게 하는 주체가 되며 동시에 그 업력에 따른 생사윤회의 주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 아뢰야연기라고 부른다. 중관과 유식사상 이외에도 대승불교 이론에는 ‘모든 중생들에겐 부처가 될 씨앗이 감추어져 있다.’라고 주장하는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 등이 있다.
인도에서 일어난 대승불교사상은 그 뒤 중국으로 건너가 천태와 화엄 그리고 선 및 정토사상 등으로 발전되어 갔다. 법의 뿌리는 하나이되 그 가지는 점차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갔던 것이다. 한국불교는 이처럼 중국화된 대승불교를 받아 들여 지난 1600여 년 동안 때로는 영화를 누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질곡을 겪기도 하면서 그 끈질긴 사상의 생명력을 오늘에까지 이어 오고 있다.
대승불교의 종교적 특징은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의 표상인 보살(Bodhisattva) 사상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보살정신의 핵심은 자신이 피안(깨달음의 세계)으로 건너 가기 전에 다른 모든 존재들을 먼저 피안으로 건너게 한다는 ‘이타행’에 있다. 소승의 이승(聲聞:○rāvaka과 緣覺:pratyeka-buddha)은 자기 자신만이 차안(此岸:번뇌망상이 있는 생사의 세계)을 버리고 피안에 가려고 노력하며 차안에 남은 사람들의 일을 자기의 일처럼 여기는 마음이 없다.
대승이란 자리(自利)냐 아니면 이타(利他)냐 하는 이원적(二元的) 대립의 차원을 넘어 자리와 이타가 함께 공존하는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이타’는 자기를 희생하고 오직 남을 위해 산다는 의미의 이타주의(利他主義)와는 다르다. 거기서는 자리와 이타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보살은 이승(二乘)처럼 차안을 버리고 피안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 차안의 모든 사람을 피안으로 건너게 해준다. 즉, 차안과 피안을 왕래하는 나룻배의 주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차안과 피안을 왕래하는 바탕이 되는 입장이며, 세계 종교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승불교의 고유한 입장이다. ‘생사즉열반’이라는 말은 불이(不二)를 실천하는 보살의 선언이다.
대승불교는 붓다를 초세간적(超世間的) 존재로 보며 역사적 인물로 나타난 붓다는 그 화신(化身)으로 규정한다. 불교도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소승불교에서는 아라한(阿羅漢, arhat)이라고 부르는 깨달은 성인이다. 그렇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편협한 이기적 발상이라고 보고, 깨달음에 이르렀으나 다른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성불(成佛)을 뒤로 미루는 보살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보살의 가장 큰 공덕인 자비(慈悲)가 원시불교에서 강조했던 지혜(智慧)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보살을 통해 생기는 공덕은 중생들에게 옮겨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러한 관념이 우리 나라와 중국·일본의 정토교(淨土敎) 같은 타력적(他力的) 신앙을 낳기도 했다. 이처럼 대승불교는 어떤 특정한 인간이 특정한 교리를 설하여 성립시킨 종교라기보다는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몇 가지 종교 흐름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불교의 대중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서원을 통해 구원을 설하는 흐름도 있고, 또한 참선의 경험으로 공과 반야의 지혜를 설하는 ≪반야경≫ 유파도 있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불타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는 가르침도 있다.
이러한 갖가지의 흐름 속에서도 대승불교라는 하나의 통일성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것은 법의 자각을 중시하는 지혜의 요소와 보살로 불리는 수행자들이 표방한 자비행의 두 요소를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는 입장이 곧 그것이다.
대승불교란
대승불교(大乘佛敎)는 인도에서 전개된 새로운 불교운동이다. 인도에서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타마 붓다에 의해 불교가 흥기한 이래 초기불교 ․ 부파불교 ․ 대승불교 ․ 밀교의 역사적 전개가 이루어진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 ․ 부파불교의 역사적 전통을 바탕으로 새롭게 전개된 불교운동으로, 이전의 불교와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이렇게 다른 면모를 대승불교도는 스스로의 명칭에서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곧 대승이란 인도말로는 Mahāyāna로서, ‘큰 수레’를 의미한다. 이 말은 사람을 태우는 물건으로서 큰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곧 사람을 태워 고통의 세계에서 열반의 세계로 이끌어간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을 다 태워 열반의 세계로 이끈다는 큰 원(願)이 담겨있는 것이다. 대승경전의 다른 문헌에는 대승을 다른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다. 곧 『불설대승십법경(佛說大乘十法經, 大正藏 No.314)』에서는 “선남자야, 여래도 그와 같다. 승(乘)에 따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면 그 승을 대승(大乘)이라 하고, 상승(上乘)이라 하며, 묘승(妙乘)이라 하고, 미묘승(微妙乘)이라 하며, 승승(勝乘)이라 하고, 무상승(無上乘)이라 하며, 무악승(無惡乘)이라 하며, 무비승(無比乘)이라 하며, 무등승(無等乘)이라 하며, 또한 무등등승(無等等乘)이라 하나니, 선남자야, 이런 뜻으로 대승이라 하느니라”라고 말해 대승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대승의 입장에 의거하여 이전의 불교를 통틀어 소승(小乘)으로 부르기도 하였지만, 대승이 일어나던 인도에서는 다양한 부파(部派)의 불교가 전개되어 불교의 철학적 논의를 심화시키고 있었다. 그러한 철학적 논의가 주요한 논의의 대상이 된 불교를 일반적으로 아비달마(阿毘達磨) 불교라 지칭하지만, 대승불교는 그러한 아비달마 불교의 문제를 지적함과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자각을 바탕으로 불교운동을 전개시킨 것이다.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출가 수행자들만이 성자(聖者)의 반열에 오를 수 있고, 그 성자의 최고 단계는 아라한(阿羅漢)이지만 이 단계는 부처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곧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교주 붓다에 대한 존경과 경의가 남달랐던 점이 눈에 띄지만, 대승의 불교도는 붓다가 이룬 궁극적인 경지가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고 누구나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확고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대승의 불교도는 보살(菩薩)이라는 이상(理想)을 내걸었고, 누구나 다 보살이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보살이란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前生)에 수행 실천하던 수행자를 지칭한 말이었다. 이러한 보살의 개념을 대승불교도는 자신들의 이상으로 삼았으며, 이 보살의 이념에 근거해 철학적 논의와 수행실천의 체계를 수립하였다. 보살이란 인도말로는 Bodhisattva로서, 곧 보디 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삿트바 즉 사람이란 의미이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자신을 위한 깨달음의 추구[自利]와 타인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의도[利他]를 담아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따라서 대승불교도는 스스로는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추구하면서도 타인을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함은 물론 타인에 대한 배려와 봉사를 아끼지 않겠다고 맹서한 불교도의 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에서 대승의 출현은 불교의 새로운 자각이자 기존의 틀을 깨어버린 혁명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출가승가 중심의 불교전통에서 출가와 재가를 아우르는 만인(萬人)의 불교로 거듭남을 선언하여 불교를 모든 사람의 종교로 가져다 준 운동이 대승불교로서, 이 대승불교로 인해 불교는 불타의 근본정신인 대자비(大慈悲)가 모든 사람들에게 회향되고 실천되어지는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인도에서의 대승불교운동은 주변지역으로 전해졌으며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서 크게 환영을 받아 대승불교경전에 근거한 새로운 사상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동아시아의 불교를 대승불교라 지칭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대승불교경전
불교의 경전은 고타마 붓다 열반후 거행된 불전결집(佛典結集)을 통해 새롭게 정비되고, 전승되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경전은 후에 경(經) ․ 율(律) ․ 론(論)의 삼장(三藏)으로 정비되지만, 불전결집이 거행되던 초기에는 경과 율만이 먼저 정리되었다. 특히 경전의 첫머리에 나오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이란 말은 부처님을 가까이서 모셨던 아난(阿難)에 의해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기던 말로서, 이 말이 경전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관용어로 정착된 것이다. 경은 부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담은 것이며, 율은 불교교단의 규칙과 규율을 담은 문헌, 논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제자들의 해석, 설명 등을 담은 문헌이다. 특히 논은 인도말로 Abhidharma로 다르마 즉 법(法)에 대한 연구, 해석을 의미한다. 이 말은 부파불교의 특색을 나타내는 아비달마 불교를 지칭하여 부파불교시대에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설명이 이루어진 것을 반영한다.
이렇듯 대승불교의 흥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미 다수의 불교경전이 각각의 부파에 의해 전승, 전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승불교는 새롭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담은 경전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은 전통적인 체제 즉 ‘여시아문’과 같은 전통적인 용어와 체제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담은 새로운 경전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모든 대승경전에 나타나는 보살집단으로서, 곧 부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설법의 장소에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와는 별도로 등장하는 보살의 집단이다. 이 보살의 집단을 대표하는 자들이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미륵보살 등의 대보살이며, 이들을 대표로 다수의 보살이 함께 자리를 하고 있다. 이들 보살집단을 범어 대승경전에서는 Bodhisattvasaṁgha 또는 Bodhisattvagaṇa 등으로 표현하고, 이 말은 보살중(菩薩衆), 보살승(菩薩僧)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곧 대승의 불교도가 보살의 이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을 알려주고 있다. 비록 현존하는 대승경전이 방대하고 그 추구하는 사상적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하더라도 이 보살중이란 용어는 모든 대승경전에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어, 대승경전이 보살의 이념을 지향하는 새로운 불교집단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대승경전인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금강경(金剛經)』 등에서도 비록 한역의 경전에서는 보살중의 명칭이 빠진 경우가 있지만, 인도의 범어원전에는 그러한 보살중의 용어가 그대로 살아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 가장 널리 독송되는 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경』에는 보살집단이 나타나지 않지만, 인도의 원전을 충실히 번역한 의정(義淨)의 『금강경』에는 보살중의 용어가 잘 나타나고 있다. 의정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如是我聞。一時薄伽梵。在名稱大城戰勝林施孤獨園。與大苾芻衆千二百五十人俱。及大菩薩衆(大正藏 No.239). 이렇듯 대승경전은 대승불교도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또 자신들이 추구하는 입장을 다양한 경전을 통해 밝히고 있다. 그러한 입장을 나타내는 경전 중 초기대승경전으로 분류되는 경전들로 반야경전(般若經典), 법화경전(法華經典), 화엄경전(華嚴經典), 정토경전(淨土經典), 재가주의(在家主義) 경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다양한 경전 가운데 대승경전으로서 가장 초기에 만들어 진 것이 반야 계통의 경전으로서, 이들 경전은 대승의 입장을 보다 분명히 나타내 보이고 있다. 반야 계통의 경전이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의 정신을 선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전으로, 반야 즉 지혜(智慧)를 그 추구의 완성 즉 바라밀다로 삼고 있다. 곧 붓다는 지혜를 드러내고 완성한 인물로서, 따라서 이러한 반야 지혜의 완성이야말로 대승의 불교도가 추구하는 근본목적이란 뜻이 그 속에 담겨있다. 그런 반야 지혜의 완성을 궁극에 둔 실천체계가 모든 대승불교도가 받아들이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행으로서, 이 육바라밀은 모든 대승불교도가 실천수행하는 기본 덕목이 되고 있다. 곧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 ․ 지혜(智慧)의 여섯가지의 실천덕목이다. 이 육바라밀다의 체계는 후에 방편(方便) ․ 원(願) ․ 력(力) ․ 지(智)의 네 개가 더해져 십바라밀다의 실천체계로 정리된다. 이렇게 육바라밀, 십바라밀의 체계로 정리되는 대승불교의 실천 체계에서도 그 핵심되는 덕목은 반야바라밀다로서, 이 반야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후에 공사상(空思想)으로 전개되어 나가르주나(Nāgārjuna) 즉 용수(龍樹)에 의한 중관철학(中觀哲學)의 전개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중관철학의 뛰어난 사상가인 찬드라키르티(Candrakīrti)도 그의 『입중론(入中論)』에서 십바라밀다의 실천체계를 십지설(十地說)과 관련시켜 철학적 체계로 재정립하고, 특히 그 가운데서도 반야바라밀다의 단계를 중시하여 상세한 철학적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다.
이렇듯 대승경전 가운데 반야경전은 성립상 최초의 단계를 보여주지만, 다른 초기의 대승 경전에도 대승의 독자적인 입장이 잘 반영되어 있다. 법화경전에는 대승의 입장으로서 보살을 그 이전의 성문(聲聞), 연각(緣覺)과 대비하여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입장을 드러내며, 화엄경전에서도 보살의 실천단계를 십지(十地) 등으로 체계적인 정리가 이루어진다. 또한 정토경전에서는 모든 중생을 정토에 태어나게 한다는 큰 원(願)을 바탕으로 한 불국토의 세계가 전개되고 있다. 또한 재가주의 경전은 이전의 어떠한 경전에서도 볼 수 없었던 재가자가 중심이 되는 내용의 경전으로 그 대표적인 것으로 『유마경(維摩經)』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대승의 독특한 특징을 잘 나타내며, 대승불교가 이전의 부파불교와는 다른 모습을 유감없이 잘 보여주고 있다.
보살중
앞에서도 말했듯 대부분의 대승경전에서는 부처님의 설법전(說法前)에 보살의 집단 즉 보살중이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와는 별개의 집단을 이루며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대승경전의 내용은 이들 보살의 집단이 배우고 실천해야 할 내용들이 가르침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반야심경』에서는 관세음보살이 사리불에게 보살의 정신세계를 드러내 보이지만, 그러한 내용은 보살이 알고 배우고 실천해야할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이때 보살이 배워야 할 구체적인 내용을 『금강경』에서는 보살승(菩薩乘)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보살의 집단은 단순히 등장인물에 그치지 않고 경전의 가르침과 관련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한 보살의 집단을 서술하는 표현에서 보살의 집단이 어떠한 존재였는가도 엿볼 수 있다. 초기 반야경전으로서 중요한 경전으로 간주되는『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大正藏 No.223)』<제1권>에서도 부처님의 설법전에 비구승단과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와 함께 보살마하살이 있다고 밝힌 뒤, 보살마하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곧 “이들도 모두 다라니와 삼매를 얻어 공(空) ․ 무상(無相) ․ 무작(無作; 無願)을 실천하고 이미 등인(等忍)을 얻었고, 걸림없는 다라니를 얻었다. 모두가 다섯가지 신통력을 갖추었고, 마땅히 해야 할 말만 하며, 진리만을 믿고 받들었다. 또한 게으른 마음이 없고, 이미 자신의 이익과 명성을 구하는 마음을 버렸기에 법을 설함에 있어 달리 바라는 바가 없었다. 깊은 법인(法忍)에 의해 피안으로 건너 두려움없는 힘을 얻었으며, 악마와 관련된 일체의 일을 초월하였고, 모든 업장을 낱낱이 다 떠나 있었다. 미묘하게 인연의 법을 설하고, 한량없는 겁 이전부터 큰 서원을 세웠으므로 얼굴은 미소로 차있고, 언제나 먼저 인사를 하였고, 부드럽게 말하였으며, 대중 가운데 있을 때도 두려워하는 바 없었다.”라고 말해 보살이 어떠한 사람들인지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대승경전에 나타나는 보살중에 대한 서술은 당시 대승불교도 스스로의 입장을 보이는 것으로서 중요한 기술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대승경전을 바탕으로 대승불교의 철학적 체계를 세운 나가르주나 즉 용수(龍樹)는 이들 대승경전에 나타나는 보살중을 보다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용수는 동아시아 불교계에서는 8종의 조사(祖師)라고 불리어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모든 불교종파의 초조(初祖)로 간주된다. 다수의 저술 가운데 후대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지도론(大智度論, 大正藏 No.1509)』에서 그는 보살중을 보다 상세히 밝히고 있다. 곧 그는 “[문]성문의 경전에는 네 부류의 대중만을 말했는데 여기서는 어찌 따로이 보살대중을 말하는가. [답] 두 가지의 도가 있으니 첫째는 성문의 도요, 둘째는 보리살타의 도다(『대지도론』<제4권>)”라고 말해 전통적인 성문의 방식과는 별도의 보살의 방식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물론 이것은 대승이 전통적인 불교와는 별도의 독자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대지도론』의 같은 곳에서 또 보살중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문]보살에는 두 부류가 있으니 첫째는 출가(出家)한 이요 둘째는 재가(在家)이다. 재가보살은 총체적으로 우바새 ․ 우바이 중에 있다고 할 수 있고, 출가보살은 총체적으로 비구 ․ 비구니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은 어찌 따로 설하는가. [답] 비록 네 부류의 대중에 속하지만 응당 따로 설해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보살은 반드시 네 부류에 속하지만, 네 부류 가운데 보살에 속하지 않는 이가 있다. 어떤 자인가. 성문인 사람과 벽지불인 사람과 하늘에 태어나길 구하는 사람과 스스로의 삶을 즐기어 구하는 사람이 있어 이들 넷은 보살의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이 사람들은 ‘나는 부처를 이루리라’고 발원(發願)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해 보살에게도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의 두 부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용수의 말에 비추어 볼 때 보살의 가장 큰 특징은 부처를 이루겠다는 발원에 있음은 당연할 것이다. 곧 대승의 기본적 입장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성불(成佛) 사상에 의거하는 것을 용수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용수가 밝히고 있는 재가와 출가의 보살에 대한 언급은 보살중의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내용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용수는 그의 다른 저술인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大正藏 No.1521)』에서는 재가보살과 출가보살의 구체적인 행법(行法)이 상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십주비바사론』은 화엄경전 등에 보이는 십지설(十地說)에 의거해 보살의 실천행위를 체계적으로 논술하여 제1지인 환희지(歡喜地)에서는 재가보살의 행위를 제2지인 이구지(離垢地)에서는 출가보살의 행법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특징적인 것으로는 재가보살과 출가보살이 함께 닦아야 하는 행위로서 공행(共行)의 실천법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출가보살의 행법으로서 나타나는 12두타(頭陀)의 실천법은 당시 전통적인 승가에서도 엄격한 규율로 간주해 율장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으로, 따라서 이것은 출가보살의 삶이 매우 엄격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12두타란 1)아련야주(阿鍊若住) 2) 착납의(著衲衣) 3) 상걸식(常乞食) 4) 일좌식(一坐食) 5) 상좌(常坐) 6) 과중불음장(過中不飮漿) 7) 단삼의(但三衣) 8) 착갈의(著褐衣) 9) 수부좌(隨敷坐) 10) 재수하(在樹下) 11) 재총간자(在塚間者) 12) 재공지(在空地)의 열 둘을 가리킨다. 이 12두타 가운데 사람이 살지 않는 산속의 한적한 공간을 의미하는 아련야는 출가보살이 거주하는 필수적인 장소로 거론되던 곳으로, 다수의 대승경전에서도 아련야의 삶이 적극 강조되고 있다. 이렇듯 아련야주를 포함한 12두타의 실천법이 대승 출가보살의 실천적 삶이었던 것은 대승불교가 기존의 부파불교와 차별을 두고자 하였던 특유의 행법으로서, 이러한 엄격한 삶과 실천으로 인해 대승불교는 인도에서 그 위상을 세우고 기존의 불교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재가보살과 출가보살의 삶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는 대승경전은 이후로도 상당수 등장하고 있어, 그것은 대승불교도에 의해 대승경전이 꾸준하게 제작되어 왔던 것을 보여준다.
초기대승경전인 『유마경』이 제작된 이후에 만들어진 대승경전이 분명한 『대승본생심지관경(大乘本生心地觀經, 大正藏 No.159)』<제7권>에서는, 유마거사에게서 보듯 보살은 음녀(淫女)의 집에도 갈 수 있고 백정(白丁)의 집에도 가서 의연한 마음을 잃지 않고 묘법을 설해 불도(佛道)에 들게 한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무슨 인연으로 아련야에 머물러 보살의 행을 닦는 것만을 은근히 칭찬하고 다른 곳에 머물러 보살의 행을 닦는 것은 칭찬치 않습니까” 라고 미륵보살이 묻자 부처님은 “선남자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하여 보리의 도를 구하는데 두 보살이 있으니 첫째는 집에 있는 보살이요, 둘째는 집을 나온 보살이다. 집에 있는 보살은 교화하고 제도하기 위하여 음란한 집이나 백정의 집이라도 모두 친근히 하는 것이요, 집을 나온 보살은 그와 같지 않다. 그러나 이 보살에도 각각 9품이 있으니 상근기 3품은 모두 아련야에 머물러 간단없이 정진하여 유정을 이롭게 하는 것이요, 중 ․ 하 두 근기의 보살들은 마땅함에 따라 머무르는 바가 되어 방소와 처소를 정하지 아니하여 혹 아련야에도 머물고, 혹 취락에도 살면서 인연 따라 중생을 이롭고 안온하게 하는 것이니 이런 행의 문을 너희는 응당 관찰할 지어다”라고 말해 대승 출가보살의 주처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대승경전은 보살중의 구체적인 실태로서 재가보살과 출가보살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그 행위와 실천을 규정하여 대승의 입장에서의 수행실천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전개
인도불교 역사상 중요한 혁신운동으로 전개된 대승운동은 다수의 대승경전 제작과 함께 인도불교의 중요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대승경전에 의거해 대승불교의 철학적 체계를 세운 나가르주나(Nāgārjuna) 즉 용수(龍樹)의 등장으로 인해 대승불교의 입지가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아 갔기 때문이다. 곧 용수는 당시 제작된 다양한 대승경전을 바탕으로 대승불교의 종교적, 신앙적 체계를 세움과 동시에 『근본중송(根本中頌)』 등을 저술함으로써 철학적 체계를 세웠다. 용수가 세운 철학적 체계는 후대 중관철학(中觀哲學)으로 불리어 오랫동안 대승불교의 중요한 철학체계로서 역할을 하였다. 곧 용수가 세운 철학체계는 부파불교에 의해 혼란스러웠던 불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낸 것은 물론 당시 인도의 정통철학을 자임하던 바라문교(婆羅門敎)의 철학사상을 비판하여 불교의 면목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특히 용수가 강하게 비판하였던 정통철학 가운데 니야야(Nyāya) 학파에서는 용수의 비판 이후, 용수를 재비판하면서 이후 불교와 니야야 학파는 오랜 기간에 걸친 논쟁의 길로 접어든다. 따라서 인도에서 불교철학과 힌두철학의 기나긴 논쟁의 시발(始發)이 용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용수를 시초로 하여 전개된 불교의 중관철학은 이후 중기중관학파, 후기중관학파 등으로 이어져 불교철학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인도불교 후기에는 티베트에 불교를 전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이렇게 초기의 다양한 대승경전과 특히 반야바라밀다의 개념에 의거해 전개된 용수의 철학과는 별도로 후대 인간의 마음을 분석하고 규명하는 유식철학이 등장해 대승불교의 또 다른 한 축이 형성된다.
유식철학(唯識哲學)의 전개에는 대승경전으로서 새롭게 제작된 소위 중기대승경전으로서 유식계통, 여래장 계통의 경전이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해심밀경(解深密經)』, 『여래장경(如來藏經)』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대승불교도는 시대의 추이에 따라 중기대승경전에서 볼 수 있는 철학적인 경전을 제작함은 물론 대승불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문헌들도 다수 제작하였다. 중기대승경전에 의거해 대승의 철학사상으로서 유식사상, 여래장 사상 등이 전개되지만, 여래장 사상은 후에 유식사상과 융합되어 인도에서는 중관사상과 함께 유식사상이 대승불교철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더욱이 후대에는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이 결부된 프라마나(Pramāṇa) 학파 즉 불교논리학파가 생겨나 대승불교철학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철학은 인도에서 불교가 힌두교에 융합해 소멸할 때까지 그 역할을 다하였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전개에 따라 후대 또 다른 유형의 대승경전이 제작되는데 소위 후기 대승경전으로서 밀교(密敎) 계통의 경전이다. 인도 힌두교의 영향으로 불교의 사상이나 의례의식이 세밀해지고 신비화되어져 밀교 특유의 비밀불교가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밀교적인 다양한 의례와 행법을 담은 경전이 다수 만들어지고, 그것들은 또한 동아시아에 전해져 불교의 신앙과 의례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승과 소승
대승(大乘)이란 큰 수레 라는 뜻으로 교리를 비유한 수레이다. 어리석음의 차안(此岸)에서 사람들을 깨달음의 피 안(彼岸)으로 실어나른다. 큰 수레라고 말하는 이유는 첫번째, 그 가르침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교리, 소승불교(부파불교)의 주된 방향이 자기수양에 있었던 것이라면 대승불교에서는 자리와 이타를 겸하고 있다는 데에 대승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두번째, 대승불교는 재가신도 속에서 일어나 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별하지 않는 불교운동이기 때문이다. 석존은 재가신도에게도 적합한 수행을 설했을 것이지만 그러한 교리를 보존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출가하여 계율을 실행하지 않으면 해탈할 수 없다는 편협한 가르침이 되어버렸다. 대승수행자가 수행의 법으로 삼은 석가보살의 „6바라밀‟은 석가보살이 재가자로서 실행법의 수행으로 재가자의 수행이 주가 되어 있으며 이는 교리상 재가와 출가를 구별하지 않는 대승불교의 폭넓은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다.
셋째로, 어떤 사람이든 모두를 구제하려는 폭넓은 입장의 불교이다. 이행도(쉬운 길) 같이 어리석은 자나, 의지가 약한 자, 악에 굴복한 자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르침, 즉 불타의 자비에 의지하여 구제받는 신앙의 길을 제시했다.
–교법을 명주나 다라니로서 신봉하고 경전을 읽거나 간직하는 데에 공덕이 있다는 신앙
- 난행도(어려운 길)라 하여 스스로 보살의 자각에 입각해서 석가와 같은 격렬한 수행의 길도 제시한다. 이처럼 믿음과 실천의 불교라는 것과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불교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넷째로, 불신론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소승불교가 불타가 설한 법을 중시하기 때문에 설하는 주체로서의 불교에 관한 연구는 특별히 발전 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대승불교에서는 구제자로서의 불타가 요청되었고 초기의 대승경전에서는 매우 진보한 불타관을 드러내고 있다. 아미타불의 정토건립이나 중생구제를 설하는 것, 구원실성의 석가를 설한 세계에 편만한 비로자나불을 설한 것 등이 부처들은 모든 인간으로서의 석존을 초월하여 무한한 광명과 수명을 갖고 불가사의한 설득력을 가진 진리를 인격화한 불타를 설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불타의 본질과 위력의 근거를 고찰하여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등의 불신론을 설하기에 이르고 이렇듯 여러 가지 불신론이 발전한 데에 소승불교와는 다른 대승만의 특색이 있다.
다섯째로,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이란 석가의 전신인 석가보살과 미래불로서의 미륵보살이 주된 것이고 그밖에 과거불에도 보살의 시대를 상정하고 있지만 그 어느 것이라도 이미 불타가 된 인간의 전생을 말하는 것이다.(불제자라는 자각) 이에 대해 대승불교에서는 성불이 보증되지 않은 범부라도 보리심을 일으킴으로써 믿음에 기초를 두고 „나는 보살이다‟ 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처가 된다는 목적은 소승, 대승이 동일하고 같은 보살을 설하지만 그의미는 다르다.
그밖에 ‘버려진’ , ‘열등한’등의 의미가 있는 하나야나(소승) 이라 불린 소승불교는 자칭한 것이 아니고 대승교도가 붙였던 칭호라는 점이다. 또 반드시 모든 부파 불교가 소승이었던 것은 아니다. „설일체유부‟나 „독자부‟등을 중심으로 한 몇 몇 부파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부파 불교는 성문승이며 독각승(홀로 수행 하여 열반에 드려는 사람, 타인을 교화하지 않으므로 소승칭호가 붙음), 보살승(대승의 수행자를 이르는 말) -3승을 말한다.
대승불교의 교리
- 모든 사람이 보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보살을 교화하는 가르침만이 있다는 의미의 1승교리가 있다. 이1승 사상이 자성청정심 이나 여래장 사상으로 발전하고 실유불성 사상이 된다.
- 성불의 수행에서 수행이나 공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중요시 하는데 이 무집착에서 공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반야경)
- 설일체유부가 법계는 자성이 있다고 보는 것과 다른 법은 공이며 무자성이다 고 한다. 이 공의 교리는 대승불교가 갖는 특색중의 하나로 여러 가지 삼매 중 수능엄 삼매는 보살의 열렬한 수행을 추진하는 정신력을 단련하는 삼매로 특히 중요시되고 있다. <대품반야경>에는 108 삼매가 설해져 있다.
- 성불에 도달하기 위한 보살의 단계도 다양한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살의 10가 있고, 10주 또는 10행, 10회향의 단계를 거쳐야 하며 <법야경>에서는 네 종류의 단계를 설하기도 한다.
- 대승 불교의 가장 오래된 경전인 <도행반야경>의 1권에서는 마하연이라고 음역된 말이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는 점으로 대승이라는 자각은 대승불교가 일어난 동시에 성립되었을 것이다. 반면 소승이라는 용어는 없는 점으로 미루어 상당히 지난 후에 소승이라는 말이 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승불교의 성립
대승의 성립 연대 –<도행반야경>에 의한 추정
- 중국에 불교 경전이 본격적으로 번역된 시기는 서기 2세기 이후부터 이다. 후한의 환제시대(146~167재위)에 안세고가 낙양에 와서 소승경전 „34부 모두 40권‟을 번역했다. 대승경전은 환제 영제시대에 월지의 가루지참이 대승경전13부 모두를 27권을 번역했던 것이 중국에서의 불교 경전 번역 출간한 최초이다.
- 초기의 <반야경>에서는 아직 소승‟이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고, 후대에 이르러 삽입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때문에 „대승‟이라는 말은 „소승‟이라는 말과 관계없이 그 이전에 쓰였다고 보아도 된다.
- 대승의 초기 불교 사상 번역서
1, 지루가참 번역의 반야사상 반야경<반주삼매경> <도사경> <수능엄삼매경> <아촉불구경><보적경><도행반야 경>10권포함. <아사세왕경>
2, 라집 번역의 <소품반야경> <광찬반야경>
3, 무차라 중심의 번역 <방광> <광찬>
4, 지겸 번역(222~253)의 <대아미타경> <혜인삼매경> <사가매경> <차마갈경> <노여인경> 지루가참의 경전 내용만 보더라도 최초에 여러 경전들이 함께 존재하고 대승불교의 기원은 서기 전후의 시기 로 올라가며, 혹은 그 이전 까지도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을 것이다.
보살의 등장
보살의 의미
- 대승불교의 창건 공로자를 보살 마하살 이라고 부른다. „보리를 구하는 사람 , 미처 깨달음을 얻지 못할 때 보리를 얻고자 하는 유정, 보리를 얻게끔 확정되어 있는 유정 이라는 의미. 또는 깨달음을 추구하여 노력하고 있는 자
- 마하살은 위대한 사람 , 대사
보살의 수기
-반야경에서 석가보살이 연등여래로부터 장차 성불 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았다고 설한다.
- 불전문학에서의 석가보살은 장차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얻었던 보살, 성불이 보장된 보살이다. 이에 대해 반야에서는 성불이 결정되지 않은 보살이 많다. (범부 보살)
- 소승불교나 불전 문학에서 언급하는 보살은 모두 불타의 전생이다. 이미 불타가 된 사람들의 전생을 고찰하여 그들을 보살이라 부른다.
- 대승불교에서의 보살은 문수나 보현, 미륵이나 관음 등 소수의 대보살을 제외한 대승을 신봉하고 실천하는 자로서의 보살은 성불이 보증 (결정)되지 않은 범부 보살이다.
- 보리심을 일으키는, 석가보살과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이의 결심을 일으키는 의미라면 보살인 것이다.
불탑신앙과 보살
- 보살이라는 자각을 일깨워 주었을 것이다. 소승불교가 불타의 법을 귀의처로 삼는 것에 반해 부처의 사리와 경전, 또는 부처의 행적을 그려 넣은 탑을 신봉 하는 자들은 인격적 불타의 현존을 바랬으며 출가하여 엄격한 수행을 할 수 없는 재가신자였으므로 오직 자 비에 매달려 구제 받기를 바랐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신앙은 불타의 행적을 본받기로 결심하거나 자비를 바라며 공양물을 바쳤고 이러한 행위는 곧 예배의식을 갖추었으며‟ 그 구제에 의탁하고자 하는 일국의 무력한 신자들과 불타를 대신하여 (또는 신자를 인도키 위해)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들의 이중 구조가 되었을 것이다.
6바라밀의 계보
- 석가가 보살이었던 때에 닦았던 성불의 원인이 되는 행동으로 석가 부처의 본행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대승 불교의 6바라밀은 그 내용이 불전문학과 일치한다는 점으로 불전 문학의 계통을 이어 받고 있다.
- 6도 무극 이라고 번역 되는데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이 여섯 가지이며 이것을 시(施), 계, 인(忍), 진 (進), 일심(一心), 지혜(智慧)라고도 번역한다.
- <육도집경>에서는 아미타불과 상제보살 이야기를 삽입하고 있는 불전문학과 대승경전과의 연관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수행본기경> <보요경> <방광대장엄경> 6도에 첨가하여 대권 방편을 설하는데 이러한 점에서도 불전문학과 대승경전과의 연관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유부의 <대비바사론>에서 3아승기겁의 수행을 설하는 것은 4바라밀로 보시, 계, 정진, 반야이다. 이것은 불전문학에서의 6바라밀과는 다르다. 외국의 스승은 인욕과 정려의 2바라밀을 더했다. 이는 유부의 6도설과 대승의 6도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음을 나타낸다.
- 팔리어로 된 <자카타>의 석가보살의 수행에는 10바라밀 보시, 지계 출리, 지혜, 정진, 인욕, 진실, 결심, 자, 사로 대승의 6도와는 거리가 멀다.
- 불전 문학을 성립시킨 이것들은 부파 불교에 속하여 있었지만 문학의 집필자들 이었으므로 부파를 초월하여 횡 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 불타의 본행에 대한 불전작가들의 연구가 불탑교단에 계승되어 „불타가 구제한다‟는 교리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보살이라는 말의 등장
- 불전문학에서 널리 쓰이는 보살이라는 말은 한역으로 된 <장아함> <잡아함> <증일아함>등과 이역의 단독 경전들 가운데에도 발견된다.
- 보살이라는 말의 성립연대를 상정하는 가장 확실한 방도는 없으나 <사리불아비담론>의 비문불인품에서 73명의 사람을 열거 하는 중 성인, 성문인, 보살인, 연각인, 정각인…….등으로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기원전 2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무방하다.
- <자카타>에서 <본생담>을 퍼뜨린 불전문학 집필자들이 불타의 전생을 가리켜 이미 성불이 결정되어 있는 수행자로서의 자리를 부여코자 „보리‟라는 말을 생각해 내었다.
- 대승경전에서 보살이라는 말은 자명한 것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성립을 대승불교 성립 이전이라고 볼 수 있다.
재가 보살과 출가 보살
- 대승불교는 재가불교 운동에서부터 발전한 것이지만 최초에는 보살에 재가와 출가의 구별이 없었던 것 같다. 다만 경전에서 반복하여 설하고 있는 여래를 대신하여 설법하는 선남자, , 선여인들의 대부분은 재가자였을 것 이다.
- 재가의 보살들로는 유마거사<유마경>, 장자궁자<법화경>- 바그라팔라등의 500보살 바그라팔라<반주삼매경>
- 여덟 명의 재가 보살도 등장 욱가장자<법경경> 이들은 유력한 보살이며 실재의 인물을 반영한 듯하다.
구족계를 받지 않은 출가 보살
- 초기의 대승보살이 넓은 의미에서 재가자였다고 하는 의미는 출가 보살이 구족계를 받은 비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구족계를 받은 비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 구족계를 받은 비구라면 승가의 일원이 되고 승보에 속하게 된다. -승가는 비구와 비구니만으로 조직되며 비구란 걸서(乞士)라는 의미이며 출가자의 칭호이다.
불탑과 승가의 엄격한 구별
- 비구들은 승보에 속하기 때문에 불탑에 거주할 수가 없다. 불탑과 불탑에 속하는 재물은 불보에 속하기 때문이 다.
- 불탑이 부파 불교의 승원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에도 승가와는 경제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마하승기율>에서 “승가람을 세울 때 먼저 좋은 장소를 선정할 것이며 승지는 불지를 침범하지 못하고, 불지는 승지를 침범하지 못한다.” 고 하니 불탑에 보시된 것을 승가가 사용할 수 없으며 비구가 불탑에 거주 하면 서 불물을 받아 생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불탑에 거주한 사람 역시 비구가 될 수 없다)
대승경전에서의 비구와 사미
- 비구란 걸식하는 사람이란 의미로 출가 하여 타인의 신시(信施)로 생활 하는 사람을 모두 비구라 불러도 될 것 이다. 불교뿐 아이라 비구의 우파니샤드가 있고, <마누법전>이나 자이나교 문헌에서도 비구의 용례가 발견된 다.
- 율장에서는 걸구비구, 명자비구, 적주 비구 등 여러 가지 용례가 있었으니 부파불교에서는 백사갈마의 작법을 바르게 행하여 구족계를 받은 비구만이 율장에서 의미 하는 비구임을 설명하고 있다.
- 그러나 대승의 출가보살은 금욕생활을 하고 엄격한 수행을 실행하며 재가 보살의 보시에 의해 생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비구라 칭했다.
- 꼭 구족계를 받아야 비구라는 칭호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승경전 속에서 비구라던가 사미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을 바로 특정한 부파교단에 속하는 비구나 사미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보살의 계율
- 비구의 250계 중에는 수축금은계 ; 금은으로 장식한 불탑이나 불상 보살상을 만지는 일 금지. 착보계 ; 불탑이나 불상에 공양된 것을 손으로 집는 일 금지. 괴생종계 ; 꽃이나 화환 등 공양금지. 기악과 무용 공양 금지 ; 소승불교에서는 불교 음악이나 무용, 회화, 조각 등의 미술이 발전하지 못했다.
- 그러나 대승경전에는 불전에서 부처님의 덕을 찬양 노래하거나 기악공양이 반복 해설되어 있다. ; 출가보살에게는 금지.
- <도행반야경>에서는 보살에 재가와 출가의 구별이 없으나 <대품반야경>에서는 출가의 구별을 말하고 차츰 재 가 보살과 출가 보살의 분화가 생겨났다.
- 보살의 수행으로 6바라밀 10선계 화엄경의 10지품 등의 계율을 보면 그 계율에 따라서 재가자의 계율인지 출가자의 계율인지를 알 수가 있는데 점 점 확실한 구별을 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 출가자의 표지로 가사의를 입는 것 등은 소승의 비구가 행했지만 대승의 출가 보살도 가사의를 착용하는 등으로 이어지는 것도 있으며 대승의 출가자의 의, 식, 주의 모든 규정을 나타내기엔 보살의 바라밀 10선계가 부족하기 때문에 율장에 보충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대보적경>의 „우바리회‟ 에서는 계를 성문계와 보살계로 구붂 하고 강하게 성문계를 부정하고 있다.
- 시간이 경과되면서 재가보살과 출가보살이 분화되고, 최후에는 출가보살도 백마갈사의 작법에 의하여 구족계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 그러나 이 경우에도 특정한 부파 불교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아마도 대승의 정사에서 보살의 계사로부터 계를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보살중과 불탑 차이탸의 관계
보살의 집단 가나
- 비구의 교단은 비구승가라 하고, 보살의 집단은 보살 가나 (또는 보살 승가라고 표현하는 경전도 있음) 라 부른.
- 일반적 용어로는 상가이든 가나이든 모두 집단을 의미 하는 것이지만 불교용어로서의 상가는 불, 법, 승 이라는 3보중의 하나 이며 불제자의 교단을 가리킨다.
- 그러나 율장에서는 승가란 비구승가와 비구니승가의 두 종류뿐이다.
- 승가에 입단하기 위해서는 계단(戒壇)에서 구족계를 받아야 한다. ; 처자와 칚족, 재산, 지위, 가문을 버려야만 되 기 때문에 바라문 출신자나 수드라 출신자가 대등하게 승가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 재가신자의 경우 가문이나 직업 등을 이전대로 가지니 인도의 계급구별 사회에서 화합교단을 구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다. 승가가 없었으며 재가와 출가가 모여 승가를 구성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 출가자는 구족계를 받고 250 계율을 지킨다. 이 때 재가자에게 인사를 한다든가, 일어나서 맞이 하는 것 등의 여러 가지 금지규정이 있어서 대등하게 교섭한다는 것이 불가능 하다.
불탑을 거점으로 한 조직화
- 7세기 대중부의 승가는 엄격히 규율을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중부만 특수한 교단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 원시불교의 전통은 부파 불교의 교단에 계승되어 왔지만 기원전 후 새로운 대승교단이 나타났을 때는 붂명히 재가의 교단 이었다가 나중에 출가보살이 나타났던 것이다.
- <화엄경>의 정행품이나 <욱가장자경 . 십주비바사론> 등에는 보살수행생활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 불탑에는 신자들이 보시한 물품이 있었으므로 불탑을 생활거점으로 삼아 출가보살의 교단을 조직할 수 있었다. 이때 공동생활을 하면서 경험을 전수하거나 삼매등의 실습과 생활규범을 가르치는 등 교법을 전승하기 위한 필연적 교단을 구성하였으니 이 공동체가 가나이다.
부파의 승가와 보살 가나
-많은 대승경전에는 그 첫머리에 청문중을 열거하는데 먼저 비구와 비구니, 보살은 반드시 따로 따로 열거한다. “대비구중 1250인 보살 500인…..”이렇게 말이다.
보살 가나의 생활과 조직
- 보살 가나는 출가 보살들에 의해 형성되어 6바라밀의 실천자로서 보시바라밀의 실천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사람이 보살이다. 보시를 받는 사람의 의미는 아니다.
- 성문승의 비구는 걸식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원시불교 이래 보시를 받는 사람으로 정착되어 있었다.
- 재가신자는 우바새라 불리며 가까이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의. 식. 주. 약(藥)의 4사를 공양하는 사람이 라는 것에 대응된다.
- 부파 불교에서는 보시를 공양하는 우바새(재가신자)와 공양을 받는 비구승가와의 대응이 성립되어 있었지만 보 살 가나에는 그러한 불화가 없었다. 또 일부 부파 교단에서는 „불탑에 공양을 바쳐도 큰 과보를 얻지 못한다‟고 하며 불탑공양을 반대하였으나 당시 불탑에는 많은 공양물이 쌓여 있었을 것이고 교리적으로 부처의 집에서 태어난 불자이기에 공양물을 받을 자격 또한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모든 불탑에 항상 충분한 보시물이 없었다면 탁발 생활도 하였을 것으로 <화엄경>은 설하고 있다.
- <십주비바사론>에서 보살 가나의 조직은 출가 보살이 머무르는 장소를 탑사(대중을 접촉하는 장소) 와 아련야(수련하는 장소) 라고 말한다.
- 수행은 오로지 아련야에서 행하지만 사연이 있다면 탑사에 들어 간다. 병이 났을 때 요양하는 곳으로, 경전을 학습하는 장소로, 경전의 독송 등은 탑사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 탑사에서의 10사란
1, 병자에게 공급해 주는 일,
2, 병자를 위해 의약을 구하는 일
3, 병자를 위해 간호할 사람을 구하는 일,
4, 병자를 위해 설법 하는 일
5, 비구를 위해 설법 하는 일
6, 법을 듣고 교화 하는 일
7, 덕이 높은 사람을 공양 공경 하는 일
8, 성스런 분들께 공급해 주는 일
9, 심오한 경전을 독송 하는 일
10, 타인을 가르쳐 심오한 경전을 읽히는 일이다.
- 이렇듯 출가 보살의 생활 기반이 탑사와 아렦야이고 걸식을 주로 하며 옷은 가사옷(회색)이며, 항상 아사리(제자 지도)가 있으며 250계를 지키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 <십주비바사론> 시대의 출가 보살들의 생활은 성문승가의 비구들 생활과 큰 차이가 없었다.
경전신앙과 차이탸
-<반야경>은 불탑신앙을 반대하면서 <반야경>이라는 경전을 공양한다면 불탑을 공양하여 얻는 공덕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공덕이 크다고 한다.
- 반야바라밀공덕품 에서는 이 경을 독송하면 4천왕의 경호를 받고 무량부변의 복덕을 얻는다고 한다. 이것은 곧 반야경의 기본적 입장이며 반야경을 주문하고 그 경전에 꽃과 향을 바치며 예배 공양할 것을 장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배 방법은 불탑예배와 꼭 같다.
- 그 반야경을 안치하는 장소를 차이티라 부르며 모양은 사리탑과 흡사하고 사리탑과 동일시된 경우도 있으며 경전을 안치하여 예배하는 장소를 차이탸 라고 부르는 것도 <법화경>에서 발견된다.
- 이는 반야바라밀의 실천이 일반 민중에게는 극히 곤란하였고 실행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리 공양의 방법을 착용하면서도 사리공양을 배척하고, 반야경의 경전공양을 주장 하는 것은 불탑을 신앙하는 집단과는 다른 집단에서 반야경이 작성되어 신봉되었음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 반야경은 교법 이지만 예배의 대상으로 삼으니 신앙의 불교로 용이하게 전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살교단과 비문(碑文)의 관계
비문에 나타나지 않는 대승교단
대승불교가 출현했던 서기 전후의 시기에는 불탑의 건립이 성행했다. 이때의 비문들 중에는 불탑을 부파 교단에 봉헌했음을 나타내는 비문은 있으나 보살교단에 봉헌했음을 나타내는 비문은 없다. 즉 대승이라는 말은 한번도 사용되지 않은 것이다.
- 그러나 서기 1세기에는 많은 대승경전이 저술되었고 2세기 이후에는 대승경전의 역경승들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도래하였음에도 비문에 대승이란 말이 없었던 이유는
첫째 ; 불탑은 불보의 소유권인 까닭이다.
보살들은 불탑에서 기숙할 뿐 불탑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승지의 나무에 달린 과일은 필요에 따 라 사용해도 좋지만 불지의 나무에 달린 과일은 승가에서 쓸 수 없도록 규정하는 엄격한 율장이 있다. 북인도의 카로슈티 비문에서는 비문들 중에 불탑을 부파 교단에 보시했음을 표시한 비문은 전체의 2할 정 도이고 다른 8할 정도의 비문은 불탑의 건립만 언급할 뿐 누구의 소유로 귀속되는지를 명시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둘째로 ;보살 가나가 사방승가처럼 종교법인으로서의 법인격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살 불교는 재가자의 불교 운동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최초의 보살 가나에는 재가 보살과 출가 보살 양 쪽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곧 재물도 공동 소유가 되었고 양쪽 모두에게 타당한 규칙을 갖게 한다는 것이 오히려 교단의 규칙은 모호하고 교단의 독립성도 명확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계가 중요시되고 다양하게 설해져 있으나 율이 제정되지 않았고, 보살 가나는 종교적으로 독립하여 하나 의 인격체로서의 사회활동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즉 보살 가나가 종교적 활동은 했으나 사 회적으로서 하나의 독립된 단체였던 건 아니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대승교리의 특색
중심교리- 반야 사상, 화엄 사상, 법화 사상, 정토 사상, 여래장 사상, 중관 사상, 유식 사상, 불교 논리학 등이다.
보살 불교
- 대승불교의 근본 사상은 보살불교이다.
- 부파 불교의 목표가 열반이었다면 대승불교는 성불을 목적으로 한다.
불성
- 지루가참이 번역한 <유일마니보경> 엔 “들이나 산에서 연꽃이 피어나지 않고 방죽의 진흙탕 물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 니원(泥洹 열반) 속에서는 보살이 생겨나지 않고 애욕 속에 보살법이 생긴다.” 하여 번뇌 속에 이 미 보살을 보살이게 하는 법이 존재함을 말하고 있다.
- 불성(佛性) 이라는 용어가 뒤늦게 성립되었다 하더라도 불종(佛種), 여래종(如來種), 불자(佛子)등 일찍부터 대승 경전의 밑바닥엔 불성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 대승에서는 불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상이다.
1승(一乘) 사상
- <법화경>에서 설한 이 말은 대승교도라면 누구나 보살이라는 자각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보살을 교화하는 가르침만 있다면 된다는 것이 1승 사상인데 불성과 동일한 계통의 사상이다.
-원시불교의 4성 평등과 같이 비구가 되려면 가문이나 출신 등 사회적 속성을 버림으로 인격의 평등관을 받아 들였다.
공과 중관 사상
-반야란 지혜라는 의미인데, 이 공(空)의 지혜에 의해 6바라밀을 실행하면 모든 것은 집착이 없는 행이 되고, 다섯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에 흡수 된다는 것이다.
- 이 공의 사상은 원시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제법 무아(諸法無我)라는 관념을 받아들인 사상이다.
- 공 사상은 <아함경>이나 아비다르마 불교에도 있지만, 이 공사상을 더욱 심화시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성은 공이라 하고, 법이 공함과 법에 자성이 없음을 분명히 했던 것은 <반야경>이다.
- 공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면 어리석음에서 깨달음으로 전환하는 것도 불가능 하게 된다.
- 공사상을 체계화 하여 연기(緣起)나 중도(中道) 2제등을 공의 입장에서 조직했던 이가 용수이다.
- 이 계통이 중관파로 발전한 것이다.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 -성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보살의 수행으로 두 가지 불교를 낳았다.
난행도 불교
– 자력문(自力門)의 불교로서 6바라밀의 수행을 설하는 불교이다.
- 보살은 성불수행을 위해 원(願)을 세운다 즉 어떠한 곤란에도 물러나지 않는 견고한 결의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 중시되고 있다.
- 성불을 위해서 3아승기겁이라는 오랜 기간의 수행 동안 모든 자리이타의 행을 완성 해야 한다 는 말이다.
- 원(願)은 보살의 4홍서원으로 구체화되고 아미타불의 48원, 보현보살의 10대원, 약사여래의 12원, 아촉불의 18원등이 유명하다.
이행도 불교
–중생을 구제하는 불타의 위력이라는 문제, 즉 불타관과 불신론(佛身論)이 제기된다. 이는 삼매의 문제, 공의 사상, 유심(唯心), 유식(唯識)의 사상, 대승계의 문제 등이 있다.
보살의 단계
-불전문학에 나오는 10지(地)의 단계설을 받아들인 것으로 4종 보살이라는 구분이 있고, 또 10주의 단계, 10지 의 단계가 제시돼 있다.
-<화엄경>에 10주 10행 10회향 10지의 단계가 있음은 유명하다.
믿음의 불교
- 성불을 위해 이행도를 행하는 불교는 불타의 구제를 바라는 불교이며 신앙의 불교가 된다.
- 불타가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은 신앙의 불교가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아미타불의 교리이다. 아미타불은 광명 무 량, 수명무량의 불타이고 자비와 방편을 겸비한 불타이다. 즉 아미타불이 보살이었을 적에 세웠던 본원 중에 서 중생구제를 맹세하고 있다는 것 과, 이 본원을 달성키 위해 영겁의 기나긴 수행을 했다는 것, 그 결과로서 서방에 극락 국토를 건립했다. 그리고 여기에 중생을 맞아들여 구제하는 것이다. 이상세계 극락왕생 이라는 것은 사후의 일이고 그 구원은 신앙에 의지하니 이행도의 불교는 믿음의 불교가 되는 것이다.
- 난행도는 지혜에 의해 해탈 하는 길로 믿음을 깊게 하고 믿음의 힘을 강하게 함으로써 마음은 자제를 얻을 수 있다는 신해탈(信解脫)이 있다. 또 혜해탈(慧解脫)이 있는데 불교에서의 믿음은 맹목적, 비합리적인 믿음이 아 니라 지혜로 이어지고 지혜로 전화하는 믿음이다. 여기서 믿음에 말미암는 불교가 성립된다.
- 아미타불이 대표되지만 그 외에 아촉불의 정토나 미륵 하생의 신앙, 여래장의 신앙 등이 있다.
불타의 구제력
- 믿음의 불교에서는 불타의 구제력이 문제가 된다. 불타에게 중생을 구제하는 힘이 없다면 믿음의 불교는 성립하지 않는다.
- 불타가 초인적인 힘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이미 원시 불교 시대로부터 전해져 왔다. 신체적으로는 보통사람에게 는 없는 32상과 80종호를 갖추고, 정신적으로는 18불공법을 갖추고 있었으며 4신족(신통의 일종)을 잘 수습하고 있는데, 원한다면 1겁이라도 이 세상에 머무를 수가 있다고 설한다.
- 대승경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각 경전마다 특색 있는 불타상을 보여주는데, 무엇보다도 웅대한 불타를 보여주는 것이 <화엄경>의 „비로사나불‟이다. 이것은 광명의 불타이며 세계에 편만해 있는 불타이다.
- 특색 있는 불신론이 보이는 경전으로는 <금광명경> <능가경> <보성론> <법화론> <대승기신론> 등이다.
- 이처럼 불타의 본질에 관하여 깊이 고찰하여 초월적인 불타관을 전개한 데에 대승불교의 특색이 있다.
- 웅대한 보살론도 있는데 <수능엄삼매경>의 문수보살이다. 불전 문학에서의 성불을 위한 보살행에서 중생구제를 위한 보살행으로 전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또 보살이 되면 부처의 8상성도를 나타내어 자유자재로 중생 을 교화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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