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無

禪門撮要

홀로산꾼 2019. 3. 31. 09:38



鏡虛禪師 譯 惠菴禪師 編著의
禪門撮要(선문으로 살펴 깨쳐드는 요긴한 말씀)
                    淸峯禪師 補完 矯正  書


   


       
    






책 머리에

佛像에 禮拜하는 법
達磨祖師께서도 佛像에 禮拜하는 法에 대하여 累累히
말씀하신바 있거니와 山僧이 거듭하여 자세히 밝히고자 한다.
첫째, 佛像에 禮拜할 때에 그 佛像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먼저 바르게 알아야 한다.
어디에서 온 것일까? 卽 名自 自己의 마음에서 나타난
그림자이다. 佛像이 곧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 곧 佛像
이어서 둘이 아닌 것이다.
둘째, 어떻게 예배하여야 되는가?
몸으로 佛像에 禮拜하되 반드시 自己의 마음에다
禮拜할지언정 나타난 그림자인 等像佛에게만 恭敬心을
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셋째, 自己의 마음에다 禮拜하는 法을 알아야 한다.
마음에다 禮拜하라 하니, 마음이란 形相도 없고 부피도 없는데 어떻게 마음에다 절을 하라는가 하겠지만,
參禪하는 禪學者가 話頭를 드는 疑情中에서 禮拜하면
그것이 곧 마음에다 禮拜하는 것이된다.
마음 밖에 있는 等像佛에게 恭敬心을 내지 않으므로
우리가 肉眼으로 볼 수 없는 참부처님께 禮拜하는
참 禮拜가 될 것이다.
만일 그러지 않고 눈앞에 나타난 形相만 따라,
相에 着하여 절을 한다면 功德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惡道에 떨어질 因이 된다고 達磨祖師께서도 警告하신바 있다.
또 阿彌陀佛·觀世音菩薩·地藏菩薩等 모든 佛菩薩의 名號를 부르는 사람들도 佛菩薩의 名號를 부르는 생각을 잃지않고 念佛·禮拜하면 그것이 곧 마음 가운데의 부처님께 禮拜하는 길이 된다.
따라서 祈禱를 하거나 或은 呪力·着經等 名種 行道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이 한다면
그것은 곧 마음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큰 功德이 된다.
위로는 佛菩薩, 歷代祖師, 天下善知識과 多生父母, 十方施主의 恩惠에 報答하고 아래로는 四生六道의 沈淪을 건지게
되리라.
이 法은 久參衲子들 뿐 아니라 佛門에 처음 들어온
信徒까지라도 반드시 알아야 할 길로 믿고,
達磨祖師의 血脈論을 비롯한 몇편의 禪門語錄을 印布케 하는 바이니, 공부하는 四衆은 반드시 一讀하기를 바란다.     
  
      庚申 初秋 
               湖西 德崇山 滿空門人
                                   惠庵 謹識



선문촬요(禪門撮要) 

목차

책머리에··········································惠菴 玄門

제 一권
一  달마 혈맥론(達磨 血脈論)
 一. 心外無佛性 (마음 밖에 불성이 없다) .....5
 二. 迷心 萬行 未免輪廻 (미혹한 마음으로는 만행을
    하여도 윤회를 면치 못함.) .....12
 三. 明 敬所以 (공경하지 않아야 함을 밝힘).......22
 四. 道不在 山野 (도는 승속을 가려 있지 않음).....32
 五. 屠漢亦得成道 (백정도 또한 도를 이룰 수있음)......34    
제 二권
二. 달마 관심론(達磨觀心論)
 一. 觀心 (마음을 관(觀)하다) .........4
 二. 心具染淨緣起 (마음에는 깨끗함과 더러운 연을
    일으킴을 갖추고 있음) ...42 
 三. 眞心因妄不現 (진심이 망을 인하여 나타나지 못함)..44
 四.善法 以覺爲根者(바른 법은 깨달음으로써 근본을 삼음)...44
 五. 惡法以三毒爲根(나쁜 법은 삼독(三毒)이 근본임)...45
 六. 正明六賊 (여섯 가지 도적을 바르게 밝힘)....46
 七. 斷三毒根 (三독의 뿌리를 끊음).....47
 八. 了出三界 (깨달아 마치면 三계를 벗어남)...47
 九. 三界原因 (三계의 원인)...48
 十. 迷現六趣 (미혹하면 육취에 나타남)...49
 十一.  攝心解脫 (마음을 거두면 해탈임)...50
 十二. 卽三毒 現阿僧祗 (三독으로 아승지가 나타남)...51
 十三. 明三聚 六波羅密(三취정계와 六바라밀을 밝힘)...52
 十四. 心淨則佛土淨(마음이 깨끗하면 국토도 깨끗한 법)...55
 十五. 明六度 (六도를 밝힘)...55
 十六. 明法乳 (법의 젖을 밝힘)...57
 十七. 修造聖殿 (절을 고치고 짓는 법)...59
 十八. 鑄寫佛像 (불상·탱화를 조성하는 법)...60
 十九. 五分香義 (다섯가지 법향의 바른 이치)...61
 二十. 散花義 (꽃을 흩는 바른 이치)...63
 二十一. 明燈義 (등불 밝히는 바른 이치)...64
 二十二. 行道 (도를 행하는 법)...65
 二十三. 齋 戒 (재계의 뜻)...66
 二十四. 齋 食 (재식의 뜻)...67
 二十五. 斷 食 (단식의 이치)...68
 二十六. 禮 拜 (바른 예배)...69
 二十七. 洗 浴 (목욕의 참뜻)...70
 二十八. 明念佛 (염불을 밝힘)...74
 二十九. 會相歸心 (형상을 모아 마음으로 돌아감)...76
 三十. 佛像 塔廟의 義 (불상과 탑묘조성의 바른뜻)...77
 三十一. 心觀覺了 (마음을 살펴 깨쳐 마치라)...78

선문촬요(禪門撮要) 제 上권

一.  달마 혈맥론(達磨 血脈論)

1. 心外無佛性 (마음 밖에 불성이 없다)

三界混起나 同歸一心이니 前佛後佛이 以心傳心하여
不立文字니라 問曰하되 若不立文字이면 以何爲心이오
答曰하되 汝問吾가 卽是汝心이요 吾答汝것이 卽是吾心이니 吾若無心이면 因何解答汝하며 汝若無心이면 因何解問吾問吾인가 卽是汝心이니라 從無始曠大劫以來로 乃至 施爲運動하여 一切時中에 一切處所가 皆是汝의 本心이며
皆是汝의 本佛이니 卽心是佛道도 亦復如是니라 除此心外로 終無別佛可得이니 離此心外로 覔菩提涅槃은 無有是處니라
自性은 眞實하여 非因非果며 法卽是心義이니
自心是菩提이며 自心이 是涅槃니라 若言하되 心外에
有佛及菩提可得하면 無有是處거늘 佛及菩提가 皆在何處인가 譬如有人이 以手로 捉虛空得否인가 虛空은 但有名이요 亦無相貌니 取不得捨不得이니라 是捉空不得처럼
除此心外로 覔佛終不可得也니라
三계가 혼돈하여 일어났으나 모두가 한 마음(一心)으로 돌아가나니, 앞 부처님과 뒷 부처님이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여 문자를 세우(의존)지 않았느니라.
묻기를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마음을 삼사옵니까?”
답하기를 “그대가 나에게 묻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요,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는 것이 곧 나의 마음이니, 내가 만약 마음이 없다면 무엇을 인하여 그대에게 대답하며,
그대가 만약 마음이 없다면 무엇을 인하여 나에게 물을 것인가? 곧 이것이 그대의 마음이니라. 끝없는 옛부터 광대한 겁 이래로 온갖 동작을 하는데 이르러 일체 시간 가운데 일체 처소가 모두가 곧 그대의 근본 마음이며, 모두가 곧 그대의 근본 부처이니, 곧 마음이 바로 부처라 말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이 마음을 제하고 밖으로는 끝내 딴 부처를 찾을 수 없나니 이 마음을 떠나서 밖으로 보리와 열반을 구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니라.
자기 성품(自性)은 진실해서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며 법이 곧 이 바른 마음이니, 자기의 마음이 곧 보리이며 자기의 마음이 곧 열반인 것이니라.
만일 말하기를 ‘마음 밖에 부처와 보리가 있어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런 곳이 있지 않거늘
부처와 보리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잡을 수 있겠는가?
허공이란 다만 이름만 있는 것이요 역시 형상의 모습이 없나니 취하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는 것이니라.
곧 허공을 잡을 수 없는 것 같이, 이 마음을 제하고 밖으로 부처를 찾는 것은 끝내 가능하지 못하니라.

佛是自心作得인데 因何離此心하고 外覔佛인가 前佛後佛이 只言其心이니 心卽是佛이요 佛卽是心이라
心外無佛이요 佛外無心이니라 若言心外有佛하면
佛在何處인가 心外에 旣無佛인데 何起佛見인가
遞相誑惑하여 不能了本心하고 被他無情物攝하여 無自由로다
若也不信이면 自誑無益이니라 佛無過患이건만 衆生顚倒하여 不覺不知 自心是佛이니라 若知自心是佛하면 不應心外에 覔佛하라 佛不度佛이니 將心覔佛하면 不識佛이니라
但是外佛者이니 盡是不識自心是佛이니라
亦不得將佛禮佛하며 佛不得將心念佛하라 佛不誦經하며 佛不持戒하며 佛不犯戒하며 佛無持犯하며 亦不造善惡이니라
若欲覔佛이면 須是見性해야 卽是佛이요 若不見性하고
念佛誦經持齋持戒해도 亦無益處니라 念佛은 得因果하고 誦經하면 得聰明하고 持戒하면 得生天하고 布施하면
得福報이나 覔佛終不可得也니라
부처란 자기 마음으로 지은 것이거늘 어찌 이 마음을
여의고 밖으로 찾으리오.
앞 부처님과 뒷 부처님이 다만 마음 하나만을 말씀하셨으니 마음이 곧 이 부처요 부처가 곧 이 마음이라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밖에는 마음이 없느니라.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말하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마음 밖에 부처가 없거늘 어찌 부처라는 소견을 일으키리오. 서로서로 속여서 미혹하여 근본 마음을
밝게 알지 못하고 무정물(無情物=불상 조각을 말함)에
얽매여서 자유롭지 못하도다.
만일 믿지 못한다면 스스로 속이는지라 이익이 없느니라. 부처는 허물이 없건만 중생이 뒤집혀(顚倒)서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인 줄 깨달아 알지도 못하느니라.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인줄 안다면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지어다. 부처가 부처를 제도하지 못하나니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찾으면 부처를 알지 못하리라.
다만 곧 밖의 부처인 것이니, 모두가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모르는 것이니라.
역시 부처를 가지고 부처에게 절하지 말며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염(念)하지 말라. 부처는 경을 읽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를 가지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를 범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지킴도 범함도 없으며, 또한 선과 악을
짓지도 않느니라.
만일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곧 성품을 보면
곧 이 부처인 것이요, 성품을 보지 못하고 염불을 하고 경을 가지고 읽고 계를 지니고 계를 지켜도 역시 아무런 이익이 없느니라.
염불은 인과를 얻고 경을 읽으면 총명해지며,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나고 보시를 하면 복의 과보를 받으나 부처는 끝내 찾을 수 없느니라.
 
若自己를 不明了이면 須參善知識하여 了却生死根本하라 若不見性이면 卽不明善知識이니 若不如此하고
縱說得十二部經하여도 亦不免生死하여 輪回三界受苦하여 無出期時니라 昔에 有善性比丘는 誦得十二部經해도
猶自不免輪廻는 緣爲不見性이니라.
善星도 旣如此거늘 今時人이 誦得三五本經論하고
以爲佛法者는 愚人也니라 若不識得自心은 誦得閑文書는 都無用處니라 若要覔佛하면 直須見性이니 性卽是佛이니라 佛卽是自在人이며 無事無作人이니라 若不見性이면
終日茫茫히 向外馳求하여 覔佛해도 元來不得이니라
雖無一物可得하나 若未會하면 亦須參善知識하여
切須苦求하여 令心會解니라
만일 자기를 분명히 알지 못했거든 반드시 선지식에게
참문해서 생사의 근본을 깨칠지니라.
만일 성품을 보지 못했다면 밝은 선지식이라 할 수 없나니 만약 이와같지 못하고 비록 十二부경(部經=경전의 내용에 따른 분류=부처님의 일대시교)을 다 외운다 하여도
역시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여 三界를 윤회하며 고통을
받아 벗어날 기한이 없느니라.
옛적에 선성(善性)이란 비구가 十二부경을 다 외웠으나 여전히 윤회를 면치 못한 것은 오직 성품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니라. 선성도 이와 같았거늘 요즘 사람들이 겨우 서너권의 경론(經論)을 읽고 법을 삼나니 어리석은 사람이니라. 만일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는 부질없이 문구나 외워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느니라.
만일 부처를 찾으려 한다면 모름지기 성품을 보아야 하나니, 성품이 곧 부처이니라.
부처란 곧 자유로운 사람이며 일없고 조작 없는 사람이니라.
만일 성품을 보지 못하면 종일토록 분주히 밖을 향해
구하여 부처를 찾아도 애당초에 찾지 못할 것이니라.
비록 한 물건도 얻을 것이 없다고는 하나 아직 알지 못하면 역시 반드시 선지식을 참문해서 간절히 애써 구하여
마음이 열리게 할지니라.

生死事大하니 不得空過하라 自誑無益이니라 縱有珍寶
如山하고 眷屬이 如恒河沙라도 開眼卽見이나 合眼還見인가 故知有爲之法은 如夢幻等이니 若不急尋師하면
空過一生이리라 然卽佛性 自有이나 若不因師하면
終不明了이니 不因師悟者는 萬中希有니라 若自己
以緣會合하여 得聖人意는 卽不用이니 叅善知識이니
此卽是生而知之勝學也이나 若未悟解면 須勤苦叅學이니 因敎方得悟하니라 若自明了하면 不學亦得이니 不同迷人이나 不能分別皁白하면서 妄言宣 佛勅이면 謗佛妄法이니
如斯等類는 說法如雨라도 盡是魔說이요 卽非佛說이니라 師是魔王이요 弟子是魔民이니 迷人은 任他指揮에
不覺墮生死海니라.
다만 나고 죽는 일이 크니 헛되이 보내지 말라. 스스로 속아서 이익이 없느니라.
진기한 보물이 산 같이 쌓여있고 권속이 항하의 모래
같이 많더라도 눈을 뜰 때에는 보이나 눈을 감아도
보이던가? 그러므로 유위의 법은 꿈이나 허깨비 같은
것이니 만일 서둘러서 스승을 찾지 않으면 헛되이
한 평생을 보내게 되리라.
그러하여 곧 불성은 스스로 본래 가지고 있으나 만약
스승을 인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깨닫지 못하리니
스승으로 인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가 드무니라.
만일 자기 스스로 인연 따라 계합해 알아 성인의 뜻을
얻었다 하는 이는 곧 쓸모가 없으니 선지식을 참문 하여야 하나니 이는 곧 태어나면서 익혀진 뛰어남이나 만일 깨닫지 못했을진데는 모름지기 애써서 참구해 배워야 하리니,
가르침에 의하여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느니라.
만일 자기를 분명히 깨달았으면 배우지 않아도 되나니, 미혹한 사람과는 같지 않으나 검고 흰 것을 분별치
못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노라고 망령되게 말(妄言)을 하면 부처를 비방하고 법을 그르칠 것이니 이러한 무리들은 빗발 같이 설법을 하더라도 모두가 악마의 말이요 곧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니라.
스승은 곧 악마의 왕이요 제자는 곧 악마의 백성이니
미혹한 사람들은 그의 부림(지휘)에 따라 모르는 결에
생사의 바다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但是不見性人이 妄稱是佛하나 此等衆生은 是大罪人이니 誑他一切衆生하여 令入魔界니라 若不見性하면
說得十二部經敎라도 盡是魔說이요 魔家眷屬이니
不是佛家弟子니라 旣不辨皁白인데 憑何免生死리오
若見性하면 卽是佛이요 不見性하면 卽是衆生이니라
若離衆生性하고 別有佛性하여 可得者하면 佛은 今在何處인가 卽衆生性이 卽是佛性也이니 性外無佛하여 佛卽是性이라 除此性하고 外無佛可得하며 佛外는 無性可得이니라
오직 이 성품을 보지 못한 사람이 망령되이
부처님(覺人)이라 하나 이런 중생들은 곧 큰 죄인이니
모든 중생들을 속여서 악마의 경계에 들게 하느니라.
만약 성품을 보지 못하면 설사 十二부경의 가르침을 모두 연설하여도 모두가 곧 악마의 말이요 악마의 권속이니
부처의 제자는 아니니라. 이미 검고 흰 것을 가릴 줄
모르거늘 무엇에 의하여 생사를 면하리오?
만일 성품을 보면 곧 부처요 성품을 보지 못하면 곧
이 중생이니라.
중생의 성품을 여의고 부처의 성품이 따로 있어 얻을 수가
있다고 한다면 부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곧 중생의
성품이 곧 부처의 성품이니 성품 밖에 부처가 없어
부처가 곧 이 성품이라 이 성품을 제하고 밖으로 부처를 얻을 수 없으며 부처 밖에는 성품을 얻을 수 없느니라.”

二. 迷心 萬行 未免輪廻
(미혹한 마음으로는 만행을 하여도 윤회를 면치 못함)

問曰하되 若不見性해도 念佛誦經布施하고 持戒精進하여 廣興福利 得成佛否이오 答曰하되 不得이니라 又問曰하되 因何不得이오 答曰하되 有少法可得하면 是有爲法이며
是因果의 是-受報이며 是-輪廻法이라 不免生死인데
何時 得成佛道리오 成佛려면 須是見性이니 若不見性하면 因果等語도 是外道法이니라 若是佛은 不習外道法이니
佛是無業人이며 無因果이니 但有少法可得하면 盡是謗佛이니 憑何得成이리오 但有住着 一心一能 一解一見도 佛都不許니라 佛無持犯이니 心性本空하고 亦非垢淨諸法이라 無修無證이며 無因無果니라 佛不持戒이며 佛不修善이며 佛不造惡이며 佛不精進이며 佛不懈怠이니 佛是無作人이라
但有住着心見이면 佛卽不許也니라
묻기를 “성품을 보지 못했더라도 염불하고 경 읽고 보시하고 계를 지키고 정진해서 널리 복리를 닦으면 부처를 이루지 못하겠나이까?”
답하기를 “못하느니라.”
또 묻기를 “어찌하여 못하옵니까?”
답하기를 “조그만치라도 얻을 법이 있다면 이는 함이
있는(有爲) 법이며 곧 인과법의 과보를 받으며, 곧 윤회하는 법이라 생사를 면치 못하거늘 언제 불도를 이루리오.
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곧 성품을 보아야 하나니, 성품을 보지 못하면 인과 등의 말도 곧 모두가 외도의 법이니라. 
부처는 외도의 법을 익히지 않나니, 부처는 곧 업(業)이 없는 사람이며 인과도 없으니 다만 조그마한 법이라도
얻을 것이 있다면 모두가 부처를 비방하는 짓이니 무엇을 의지하여 부처를 이루리오.
한 마음, 한 기능, 한 견해, 한 소견이라도 집착함이 있음을 부처는 도무지 허용치 않느니라.
부처는 지키고 범함이 없으니 마음의 성품(心性)이
본래 공하여, 역시 더럽거나 깨끗한 법도 아닌지라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으며 인도 없고 과도 없느니라.
부처는 계를 지키지도 않으며, 부처는 착한것을 닦지도 않으며, 부처는 악을 짓지도 않으며, 부처는 정진을 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게으르지도 않나니 부처란 조작이 없는 사람이라 다만 마음에 집착하는 소견이 있으면 부처는
가까이 허락지 않느니라.

佛不是佛이니 莫作佛解하라 若不見此義하면 一切時中
一切處所나 皆是不了本心니라 若不見性하고 一切時中에 擬作無作想是하면 大罪人이며 是痴人이니 落無記空中하여 昏昏如醉人하여 不辨好惡이니라 若擬修無作法하면
先須見性然後에 息慮緣이니 若不見性하고 得成佛道는
無有是處有人하여 撥無因果하고 熾然作惡業하여 妄言하되 本空作惡無過하면 如此之人은 墮無間黑暗地獄하여
永無出期이니 若是智人은 不應如是見解니라
부처라 하면 곧 부처가 아니니 부처라는 견해를 짓지
말지어다. 만일 이런 바른 이치를 터득하지 못하면 언제 어디서나 근본 마음을 두루 바르게 깨닫지 못하느니라.
성품을 보지 못하고서 언제나 조작이 없다는 생각만한다면 이는 큰 죄인이며 어리석은 사람이니 무기공(無記空=아무 분별없는 공)에 떨어져 캄캄하기가 마치 취한 사람 같아서 좋고 나쁨을 가리지 못하는 것이니라.
만일 조작이 없는 법을 두루 닦으려 하거든 우선 성품을 본 뒤에 반연하는 생각을 쉴지니, 성품을 보지 못하고
불도를 성취했다는 이런 사람이 있어 아무것도 없다하며 인과를 무시하고 분주히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 망령되이 말하기를 ‘본래 공해서 나쁜 짓을 하여도 허물이 없다’ 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무간지옥·흑암지옥에 빠져서
영원히 벗어날 기약이 없으리니, 지혜로운 사람은 이와같은 견해를 짓지 않아야 하니라.”

問曰하되 旣若施爲運動하는 一切時中에 皆是本心이면
色身無常之時에는 云何不見本心인가 答曰하되 本心常現前해도 汝自不見이니라 問曰하되 心旣見在인데 何故不見이오 師云하되 汝會作夢否인가 答曰하되 會作夢이오 問曰하되 汝作夢之時에 是汝本身否인가 答曰하되 是本身이니다
又問하되汝言語施爲運動이 以汝別不別인가 答曰하되
不別이니다 師云하되 旣若不別이면 卽此身이
是汝本法身이며 卽此法身이 是汝本心이니라.
묻기를 “이미 분별하고 움직이는 온갖 시간 가운데
모든 것이 이 근본 마음이라면 색신(育身)이 죽을 때에는 어찌하여 본심이 보이지 않사옵니까?”
답하기를 “본심이 항상 눈앞에 나타나도 그대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니라.”
묻기를 “마음이 이미 있거늘 어찌하여 보지 못하나이까?”
사께서 이르기를 “그대는 꿈을 꾸어보았는가?”
답하기를 “꿈을 꿔 봤사옵니다”
묻기를 “그대가 꿈을 꿀 때에 그대의 근본 몸이었던가?”
답하기를 “예, 근본 몸이었사옵니다.”
또 묻기를 “그대가 말하고 분별하고 움직이던 것이
그대와 다르던가, 같던가?”
답하기를 “다르지 않았사옵니다.”
사께서 이르기를 “이미 다르지 않다면 곧 이 몸이 그대의 근본 법신이며, 곧 이 법신이 곧 그대의 근본 마음이니라.

此心이 從無始廣大劫來로 與如今不別하여 未曾有生死하니 不生不滅하며 不增不減하며 不垢不淨하며 不好不惡하고 不來不去하며 亦無是非하며 亦無男女相하며 亦無僧俗老少하며 無聖無凡하며 亦無佛亦無衆生하며 亦無修證하며 亦無因果하며 亦無筋力하며 亦無相貌가 猶如虛空하여 取不得捨不得이라 山河石壁도 不能爲礙하며 出沒往來에 自在神通하여 透五蘊山하며 渡生死海이니 一切業이 拘此法身不得이니라
이 마음이 시작 없는 광대한 겁으로부터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일찍이 나고 죽은 적이 없어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또한 옳고 그름도 없으며
역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없으며 역시 승과 속인, 늙음과 젊음이 없으며, 성인도 없고 범부도 없으며 또한 부처도 없고 역시 중생도 없으며 역시 닦아 증득할 것도 없으며 또한 원인도 결과도 없으며 또한 근육의 힘도 없으며
모양도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취하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는 것이라. 산이나 강이나 석벽이라도
장애하지 못하며 들고 나고 가고 옴에 자재하게 신통하여
五온의 산을 통과하며 생사의 바다를 건너 일체 업이
이 법신을 구속하지 못하느니라.

此心은 微妙難見이니 此心은 不同色相이며 此心이
是佛이니라 人皆欲見이나 於此光明中에 運手動足者가 如恒河沙면서도 及乎問着하면 摠道不得이 猶如木人相似이니 摠是自己受用인데 因何不識인가 佛言하되 一切衆生이
盡是迷人이라 因此作業하여 墮生死海하여 欲出還沒하니 只爲不見性하니 衆生若不迷하면 因何問着하면 其中無有一人 得會者인가 自家運手動足을 因何不識인가 故知하라
聖人語不錯이나 迷人이 自不會曉인가 故知此心難明이니 惟佛一人만 能會此心하고 餘人天及衆生等은 盡不明了니라 若智慧로 明了此心하면 方名法性하며 亦名解脫이니
生死不拘하며 一切法이 拘他不得으로 是名大自在王如來하며 亦名不思議 亦名聖體하며 亦名長生不死 亦名大仙이니라
이 마음은 미묘하여 보기 어려우니 이 마음은 물질의
모습과는 같지 않으며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라.
사람들이 모두가 보고자하나 이 광명 가운데 손을 흔들고 발을 움직이는 일이 항하의 모래수 같으면서도 물어보게 되면 모두가 대답하지 못함이 마치 허수아비 같으니,
모두가 자기가 쓰고 있는(受用=활동)것이거늘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중생이 모두가 미혹한
사람이라 이로 인하여 업을 지어 생사의 바다에 빠져서 나오려 하다가도 도리어 빠지나니 오직 성품을 보지
못한 때문이라하셨으니, 중생이 미혹하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물으면 그 가운데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는가?
스스로 손을 젓고 발을 움직이는 것임을 어찌하여 밝게 알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알라. 성인의 말씀은 틀리지
않거늘 미혹한이가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니라.
그러므로 이 마음은 알아서 밝히기 어려우니 오직 부처님 한 분 만이 능히 이 마음을 아시고 그 밖의 인간과
천상계의 중생들은 모두 깨달아 밝히지 못한 것이니라.
만약, 지혜로써 이 마음을 밝게 깨달으면 바야흐로 법성(法性)이라 이름하며, 또한 해탈(解脫)이라고도 이름 하나니, 생사가 구속하지 못하며 일체 법이 구속하지 못하기에 곧 대자재여래(大自在王佛)라 이름하며, 또한 부사의(不思議)라고도 하며 역시 성인의 몸 이라고도 이름하며,
또한 장생불사(長生不死)라고도 이름하며 또한 큰선인(大仙)이라고도 하느니라.

名雖不同이나 體卽是一니라  聖人의 種種分明이 皆不離自心이니 心量廣大하여 應用無窮하니라 應眼見色하고 應耳聞聲하며 應鼻嚊香하며 應舌知味하며 乃至施爲運動이 皆是自心이며 一切時中에 但有言語道斷한 卽是自心이니라 故云하되
如來色無盡이며 智慧도 亦復然하니 色無盡이 是自心이니라 心識이 善能分別一切하며 乃至施爲運用이 皆是智慧이니 心無形相이나 智慧는 亦無盡하니라 故云하되 如來色無盡하고 智慧亦復然하니 四大色身은 卽是煩惱色身이라 卽有生滅이나 法身은 常住無所住하여 如來法身은 常不變異니라 故經云하되 衆生도 應知佛性 本身有之身이니 迦葉은 只是悟得本性이요 本性卽是心이요 心卽是性이니 卽此同諸佛心이라
前佛後佛이 只傳此心이니 除此心外하고 無佛可得이니
이름은 비록 같지 않으나 본체는 곧 하나인 것이니라. 성인의 갖가지 밝음이 모두가 자기의 마음을 여의지 않았나니, 마음의 헤아림이 광대하여 끝없이 응용(應用) 하느니라.
눈에 응하여는 형상을 보고, 귀에 응하여는 소리를 들으며 코에 응하여는 냄새를 맡으며, 혀에 응하여는 맛을 알며, 나아가서는 온갖 활동이 모두가 자기의 마음이며 언제나 다만 언어의 길이 끊이고 마음길이 끊어진 곧 이것이
자기의 마음이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여래의 몸매(色:법신)가 다함이 없으며 지혜도 또한 그러하다”하시니, 몸매가 다함없는 것이 곧 자기의 마음이니라.
마음의 아는것(心識)이 능히 바르게 일체를 분별하며,
나아가 온갖 행하여 움직이며 쓰는 것이 모두가 바로
지혜이니, 마음은 형상이 없으나 지혜는 또한 다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부처님의 몸매(법신)가 다함이 없고 또한 지혜도 그러하다’하셨으니, 四대(지수화풍)로 된 몸매는 곧 번뇌의 몸인지라 곧 생멸이 있거니와 법신(法身)은
항상 머무르되 머무는 바가 없어서 여래의 법신은 항상 달리 변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중생이라도 응당 불성인 본래의 몸이 있는 몸임을 알아야 한다’하셨으니 가섭(迦葉)은
다만 곧 이 본성을 깨달았을 뿐이요 다시 다른 것이
없었느니라.
본성(법의 성품:自性)이 곧 이러한 마음이요 마음이 곧
이러한 성품이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마음이라 앞
부처님와 뒷 부처님이 오직 이 마음을 전하신 것이니
이 마음을 제하고 밖으로 부처를 찾을수 없느니라.

顚倒衆生이 不知自心是佛하고 向外馳求하며 終日忙忙하며 念佛禮佛하니 佛在何處인가 不應作如是等見이니라
但識自心하면 心外更無別佛이니라 經云하되 凡所有相은 皆是虛妄하고 又云하되 經所在之處 卽爲有佛하니
自心是佛이니 不應將佛禮佛이니라 但是有佛와 及菩薩相貌가 忽爾現前해도 切不可禮敬이니라 我心空寂하여
本無如是相貌이니 若取相하면 卽是魔攝되어 盡落邪道니라 若知幻從心起하여 卽不用禮이니 禮者不知하고 知者不禮니라 禮被魔攝이니 恐學人不知故로 作是解니라
뒤바뀐 중생이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밖을 향해 구하되 종일토록 헤매면서 부처를 염하고
부처에게 절을 하니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이와 같은
소견을 짓지 말지니라. 다만 자기의 마음을 알면 마음
밖에 별다른 부처가 없느니라.
경에 이르기를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경 있는 곳에 부처가 있다’하셨으니, 자기 마음이 곧 부처이니 부처를 가지고 부처에게 절하지 말지니라.
다만 이렇게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홀연히 앞에 나타나도 절대로 예경하지 말지니라. 내 마음은 공적하여 본래
이와 같은 모습이 없나니 만일 형상을 취하면 곧 마구니에 포섭되어서 모두가 삿된 도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허깨비가 마음을 쫓아 일어난 줄을 알아 곧 예경하지
않아야 하나니, 절하는 이는 알지 못하고, 알면 절하지
않느니라. 예경하면 마구니에 포섭되리니 학인(學人)이
알지 못할까 걱정되므로 이렇게 풀이하노라.

諸佛如來本性體上은 都無如是相貌이니 切須在意니라
但有異境界하면 切不用採括하고 亦莫生怕佈하며
不要疑惑이니라 我心이 本來淸淨한데 何處에 有如許相貌리오 乃至 天龍夜叉 鬼神 帝釋梵王等相도 亦不用心生敬重하며 亦莫怕懼니라 我心이 本來空寂하여 一切相貌가 皆是妄相이니 但莫取相이니라 若起佛見法見이거나 及佛菩薩等相貌에 而生敬重하면 自墮衆生位中이니라 若欲眞會이면 
但莫取一切相하면 卽得이라 更無別語니라 故經云하되
凡所有相은 皆是虛妄이라 都無定實이며 幻無定相이라
是無常法이니 但不取相하면 合他聖意니라 故經云하되
離一切相하면 卽名諸佛이니라
모든 부처님의 본래실상의 바탕 위에는 도무지 이와 같은 모습이 없나니 모름지기 명심 할지니라.
다만 기이한 경계가 나타나거든 절대로 채근하지도 말고 또한 두려워하지도 말며 의혹을 내지도 말지니라.
내 마음이 본래 청정하거늘 어디에 이와 같은 모습이
있으리오. 나아가 하늘의 용·야차·귀신·제석·범왕(梵王)등
상에게도 또한 공경하는 생각을 내지 말며,
또한 두려워하지도 말지니라. 내 마음이 본래 비어
고요한지라 일체 모습이 모두가 허망한 형상이니, 다만 형상을 취하지 말지니라. 만일 부처라는 소견이나 법이란 소견을 일으키고  부처나 보살등의 모습에 공경할 생각을 내면 스스로 중생의 자리에 떨어지니라.
만일 참으로 알고자 한다면 다만 일체상을 취하지 않으면 곧 성취하는 것이라 다시 다른 말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하셨으니, 도무지 정해진 실다움이 없으며,
환(幻)이라 정해진 상이 없는지라 이것이 무상한 법이니, 다만 형상을 취하지 않으면 거룩한 뜻에 부합되리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일체 상을 여의면
곧  모든 부처님이라 이름한다‘하셨느니라.”

三. 明 敬所以 (공경하지 않아야 함을 밝힘)

問曰하되 因何不得禮佛菩薩等인가 答曰하되 天魔波旬과 阿修羅等이 示見神通 皆作得菩薩相貌하여 種種變化라
是外道이니 摠不是佛이니라 佛是自心이니 莫錯禮拜하라 佛은 是西國語이며 此土 云覺性이니 覺者란 是靈覺으로 應機接物이니 揚眉瞹目하며 運手動足이 皆是自己
靈覺之性이니라 性卽是心이요 心卽是佛이며 佛卽是道요 道卽是佛이니 佛之一字는 非凡夫所測이니라
又云하되 見本性 爲佛하니 若不見本性하면 卽非佛也니라 假使說得千經萬論도 若不見本性이면 只是凡夫이며
非是佛法이니라 至道幽深하여 不可話會인데 典敎으로
憑何所及인가 但見本性이면 一字不識도 亦得이니라 見性하면 卽是佛이니 聖體本來淸淨하여 無有雜穢니라 所有言說은 皆是聖人의 從心起用이니 用體本來空하여 名言尙不及인데 十二部經이 憑何得及이리오 道本圓成이니 不用修證이며 道非聲色이라 微妙難見이니 如人飮水冷暖을 自知니라
不可向人說也이니 唯有如來能知하며 餘人天等類는
都不覺知니라 凡夫智不及으로 所以有執相하여 不了自心 本來空寂하고 妄執相及一切法하여 卽墮外道니라
묻기를 “어찌하여 부처님과 보살들에게 절을 하지 말라고 하시옵니까?”
답하기를 “하늘의 마와 파순(波旬)과 아수라(阿修羅) 등이 신통을 나투어 보여 모든 보살의 모습을 지어 갖가지로 변화한 것이니라 이는 외도인지라 모두가 곧 부처가 아니니라.
부처란 곧 자기의 마음이니, 부처라 그릇 절하지 말라.
부처란 곧 인도말(붓다)이며 중국말에서는 각성(覺性)이니각이란 곧 신령스러운 깨달음 또는 아는 것으로, 근기에 따라 응하고 만물에 접하는 것이니, 눈썹을 치키고 눈을 깜박이며 손을 움직이고 발을 옮기는 것이 모두가 곧
자기의 신령스럽게 아는(반야지혜) 성품이니라.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도요, 도가 곧 부처이니, 부처라는 한 글자는 범부가 헤아릴
바가 아니니라.
또 이르기를 ‘보는 근본 성품이 부처라’하나, 만약 근본 성품을 보지 못하면 곧 부처님(覺人)이 아니니라. 설사
천경만론(千經萬論)을 강설하더라도 성품을 보지 못했으면 단지 곧 범부이며, 곧 불법이 아니니라.
지극한 도는 깊고도 그윽하여 말로는 알 수 없거늘,
경전의 가르침으로 어찌 미칠 수 있으리오. 다만 본성을 보기만 하면 한 글자도 몰라도 역시 증득 할수 있느니라.
견성이 곧 부처이니, 성스러운 본체는 본래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느니라.
모든 말씀으로 설한 것이 있는 것은 곧 모두가 곧 성인의 마음을 쫒아 일어난 작용이니, 작용의 바탕이 본래 공하여 명칭이나 말로써 미칠 수 없거늘 十二부경이 어찌
미칠 수 있으리오.
도는 본래 원만하게 이루어졌나니 닦고 증득함이 필요치 않으며, 도는 소리나 물질이 아니어서 미묘하여 보기
어려우니, 사람이 물을 마시매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가 아는 것과 같으니라. 남을 향해 말해주지 못하느니 오직 여래만이 능히 알며 그 외는 인간이나 천상 등의 무리는 도무지 깨닫지도 알지도 못한 것이니라.
범부는 지혜가 미치지 못하여 상에 집착하는 것이 있어 자기 마음이 본래 공적한 줄을 밝게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상과 일체 법에 집착하게 되어 곧 외도에 떨어지게 되니라.

若知諸法이 從心生하면 不應有執이니 執卽不知니라
若見本性하면 十二部經이 摠是閑文字니라 千經萬論이
只是明心이니 言下契會하면 敎將何用이오 至理絶言이라 敎是言詞이니 實不是道니라 道本無言이니 言說是妄니라 若夜夢에 見樓閣宮殿象馬之屬 及樹木叢林池亭如 是等相하면 不得起一念樂着이니 盡是托生之處이니 切須在意하라
臨終之時에 不得(都不뺌)取相하면 卽得除疑이나 心瞥起하면 卽魔攝니라 法身은 本來淸淨無受이나 只緣迷故로 不覺不知이니 因玆故妄受報로 所以有樂着하여 不得自在니라
모든 법이 마음에서 새긴 것임을 알면 응당 집착하지
않게 되리니 집착하면 곧 알지 못하느니라. 만약 근본
성품을 보게되면 十二부경이 모두가 부질없는 문자니라. 천경만론(千經萬論)이 오직 마음을 밝힌 것이니, 말끝에 계합해 알면 교가 무슨 소용이리오.
지극한 진리는 말이 끊어진 것이라, 교는 곧 말로서 가르친 것이니 실다운 바른 도가 아니니라.
도는 본래 말이 없으니 말로 설한것은 곧 허망한 것이니라.
만약 밤 꿈에 누각이나 궁전이나 상마(象馬)의 무리나
나무·숲·못·정자 등의 모습을 보거든 한 생각이라도 즐겨 집착심을 일으키지 말지니 모두가 이것(망념)이 의탁해서 생기는 곳이니 부디 주의할지니라. 임종할 때에 전혀
성상을 취하지 않으면 곧 의혹을 제하거니와 마음에 망념을 일으키게 되면 곧 마구니에 포섭될 것이니라.  
법신은 본래 청정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없으나 오직 미혹한 까닭에 깨달아 알지 못하나니 이로 인하여 망령된 업보를 받는 까닭이므로 이른바 즐거움을 집착하여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라.

只今도 若悟得 本來身心하면 卽不染習이니라 若從凡入聖하여 示見種種雜類等은 自爲衆生故이니  聖人은 逆順皆得自在하여 一切業이 不拘他得아니라 聖成久 有大威德이라 一切品類業이 被他聖人轉하니 天堂地獄도 無奈何他니라
凡夫神識이 昏昧하여 不同聖人 內外明徹이니 若有疑라도 卽不作이니 作卽流浪生死하여 後悔해도 無相救處니라
貧窮困苦가 若皆從妄想生이니 若了是心이면 遞相勤勉하여 但無作而作하면 卽入如來知見니라 初發心人은 神識이
摠不定이니 若夢中 頻見異境해도 輒不用疑이니
皆是自心起故이니 不從外來니라 夢에 若見光明出現
過於日輪하면 卽餘習가 頓盡하고  法界性現이니라
若有此事하면 卽是成佛之因이니  唯自知이니 不可向人說이니라
오로지 지금이라도 본래의 몸인 마음을 깨닫기만 하면 곧 습기에 물들지 않으리라. 성인의 경지에서 범부의 경지에 들어가서 갖가지 잡된 모습들로 나타나 보이는 것은 스스로 중생을 위한 까닭이니, 성인은 역·순(逆順)에 모두 자재함을 얻어 일체 업이 구속하지 못하느니라.
성인의 지위를 이룬지 오래되어 큰 위덕이 있어 온갖
종류가 성인(반야)의 부림으로 구르니 천당과 지옥도
그(성인)를 어찌하지 못하니라.
범부는 신령스럽게 아는 것이 어두워서 성인이 안팎이
밝은 것 같지 못하나니, 만약 의심이 있거든 일으키지
말지니 짓게 되면 곧 생사의 바다에 헤매게 되어서
후회하여도 구제할 길이 없느니라.
빈궁과 고통이 모두가 망상을 쫒아 생겼나니, 만약 이 마음을 밝게 깨닫고자 하면 부지런히 서로 서로 경책하여 다만 작용하되 작용함이 없이하면 곧 여래의 지견(知見)에 들리라.
처음으로 발심한 사람은 신령스럽게 아는 것이 도무지
안정되지 못하나니, 만약 꿈속에 자주 이상한 경계를
보더라도 선뜻 의심하지 말지니 모두가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므로 밖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니라.
꿈에 만약 광명이 나타나 햇빛보다 밝은 것을 보게 되면 곧 나머지 습기가 몰록 다하고 법계의 성품이 나타나리라. 만일 이런 일이 있으면 곧 이것이 성불의 인이 될 것이니, 오직 자기만이 알 뿐이요 남에게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니라.

或靜園林中 行住坐臥다가 眼見光明 或大或小라도 莫與人說하여 亦不得取이니 亦是自性光明이니라 或夜靜暗中에 行住坐臥 眼見光明이라도 如晝無異이나 不得怪이니
並是自心欲明顯이니라 或夜夢中에 見星月分明하면
亦自心諸緣欲息이니 亦不得向人說이니라
夢若昏昏 猶如陰暗中行하면 亦是自心에 煩惱障重 亦自知니라
若見本性이면 不用讀經念佛이니 廣學多知 無益이니
神識 轉昏이니라
說敎는 只爲標心이니 若識心하면 何用看敎리오 若從凡入聖이면 卽須息業養神하여 隨分過日니라 若多嗔喜하면 令性轉與道相違이니 自賺無益이니라 聖人은 於生死中에 自在出沒하며 隱顯現不定이니 一切業이 拘他不得이며 聖人破邪魔니라
一切衆生이 但見本性하면 餘習頓滅하고 神識不昧이니
須是直下便會只在如令 欲眞會道이면 寞執一法하고
息業養神니라 餘習亦盡하면 自然明白하며 不假用功이니라
혹 고요한 숲 속에서 다니고 멈추고 앉고 눕다가 크고 작은 광명이 눈에 보이더라도 사람과 더불어 말하지 말며,
또한 취하지 말지니, 역시 이것이 자기 성품의 광명이니라.
혹 고요한 어두운 밤에 다니고 멈추고 앉고 누웠다가 광명이 눈에 보이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그림과 같으나 괴이한 것이 아니니 자기의 마음이 밝게 드러나려는 조짐이니라.
혹 밤 꿈속에서 별과 달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도 또한
자기 마음의 모든 반연이 쉬려는 것이니, 역시 남에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마치 꿈에 어두워서 밤중을 다니는 것 같으면 또한 곧 자기 마음에 번뇌의 장애가
무거움을 역시 스스로 알아야 하느니라.
만약 근본 성품을 보았으면 경을 읽거나 염불을 할 필요가 없나니 널리 배우고 많이 아는 것이 이익 됨이 없으니
신령스럽게 아는 것이 어두워지게 될 것이니라.
교법을 시설한 것은 오직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니 마음을 알았거늘 어찌 교를 보아야 할 것이리오.
만일 범부로부터 성인의 경지에 들고자 한다면 곧 마땅히 업을 쉬고 정신을 다스리며 분수에 따라 세월을 보낼지니라. 성냄과 기뻐함이 많으면 성품이 바뀌어 도와 더불어 서로 어기나니 스스로를 속일뿐 이익이 없느니라.
성인은 생사 가운데서 자유롭게 드나들며 숨고 나타남이 정해지지 않나니 일체 업이 구속하지 못하며 성인은 삿된 마군들을 깨트리느니라.
일체 중생이 다만 본성을 보게 되면 남은 습기가 몰록
멸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것이 어둡지 않게 되나니 모름지기 곧 바로 그 자리에서 문득 깨닫게 되나니 참으로 도를
알고자 하면 한 법도 집착하지 말고 업을 쉬고 정신을
다스려 나머지 습기가 다하면 자연히 밝게 밝아져서
공력을 빌려 쓸 것이 아니니라.

外道는 不會佛意하여 用功最多해도 違背聖意이니
終日驅驅하게 念佛傳經해도 昏於神性하여 不免輪廻니라 佛是閑人이니 何用驅驅하여 廣求名利하여 後時何用이오 但不見性人은 讀經念佛하며 長學精進하며 六時行道하며 長坐不臥하며 廣學多聞을 以爲佛法이니 此等衆生은
盡是謗佛法人이니라 前佛後佛이 只言見性이니 諸行無常인데 若不見性하고 妄言하되 我得 阿耨菩提하니 此是大罪人이니라 十大弟子인 阿難聲聞中得 弟一이나 佛無識이나
只令聲聞二乘外道無識이니 識數修證하면 墮在因果中니라 是衆生業報로 不免生死하며 違背佛意이니 卽是謗佛衆生이라 殺却無罪過니라 經云하되 闡提人은 不生信心이니
殺却無罪過니라 若有信心한 此人은 是佛位人이니
若不見性은 卽 不用取次인데 謗他良善하며 自譧無益하니라 善惡歷然하고 因果分明하니 天堂地獄中이 只在眼前이니라
외도(外道)는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공력은 가장 많이 써도 성스러운 뜻을 거슬리니 종일토록 서둘러 염불하고 경을 읽어 보내도 신령스런 성품이 어두워 윤회를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부처는 곧 한가한 사람이니 어찌 서둘러 명리(名利)를
널리 구하여 후에 무엇에 쓰리오. 다만 성품을 보지 못한 사람은 경을 읽고 염불하며 오래도록 배우고 정진하며
하루 여섯 차례 예불하며 오래 앉아 눕지 않으며 널리
배워 많이 듣는 것을 불법으로 여기나니, 이런 중생들은 모두가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이니라.
앞의 부처님과 뒤의 부처님이 오직 성품을 보라는 말씀만 하셨나니, 제행이 무상하거늘 성품을 보지 못하고 망령되이 말하기를 ‘내가 위없는 도를 이루었노’하니 이는 곧 큰 죄를 지은 사람이니라.
十대제자 가운데서 아난이 많이 듣고 널리 배워서 식견(識見:아는 것)이 으뜸이었으나 부처님은 알음알이가
없나니 ‘성문과 이승과 외도들로 하여금 오직 알음알이를 없애도록 하여야한다’ 하셨으니 아는 것을 셈해서 닦아 증득한다 하면 인과에 떨어져 있게 되는 것이니라.
이는 중생의 업보로 생사를 면치 못하며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서 등지는 것이니 곧 부처를 비방하는 중생인지라 죽여 버려도 죄가 없느니라.
경에 이르기를 ‘천제인 사람(闡提=선을 끊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믿는 마음을 내지 않나니 죽여도 죄가 없다’
하셨느니라.
만약 믿음이 있는 이러한 사람은 바로 부처 지위의 사람이니 만약  성품을 보지 못했으면 차선책을 쓸 것이 아니거늘 곧 다른 진실하고 올바른 이를 비방하며 스스로 속여서 이로울 것이 없느니라. 선과 악이 뚜렷하고 인과가
분명하니 천당과 지옥 가운데가 오직 눈앞에 있느니라.

愚人不信하여 見墮黑暗地獄해도 亦不覺不知이니
只緣業重故로 所以不信이니라 譬如無目人 不信道日有光明이니 從向伊說 亦不信니라 只緣盲故이니 憑何辨得日光이리오 愚人도 亦得如是하여 見今墮畜生雜類거나 誕在貧窮下賤하여 求生不得 求死不得이니라 雖受是苦라도 直問著하면
亦言我今快樂 不異天堂이니 故知하라 一切衆生이 生處爲樂하여 亦不覺不知니라 如斯惡人은 只緣障重故니라
所以不能發信心者하면 不自由他也니라 若見自心是佛하면 不在剃除鬚髮이니 白衣도 亦是佛이며 若不見性하면
剃除鬚髮해도 亦是外道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믿지 않으므로 흑암지옥(黑暗地獄)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역시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나니 오직 업장이 무거우므로 믿지 않게 된 것이니라.
비유하면 소경이 태양의 광명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으니, 설사 말해 주더라도 역시 믿지 않을 것이니라.
오직 눈이 멀었기 때문이니 무엇을 의지하여 태양의 광명을 변별할  수 있으리오.
어리석은 사람도 역시 이와 같아서 당장 보면 축생 등
잡된 무리에 떨어지거나 빈궁하고 하천하게 태어나
있게 되어 살려 해도 살 수 없고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니라.
비록 이런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직접 물어보면 역시
‘나는 지금 쾌락한 것이 천당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나니, 그러므로 알라.  일체 중생이 태어난 곳에서 쾌락을 삼아 역시 깨닫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악한 사람은 오직 업장이 두터운 까닭이니라.
이른바 신심을 내지 못하면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라. 만일 스스로의 마음이 곧 부처인 줄 안다면 머리와 수염을 깎는데 관계지 않나니 속인도 역시 부처님인 것이며 만약 성품을 보지 못하면 머리와 수염을 깎았더라도 역시 외도이니라.”

四. 道不在 山野 (도는 승속을 가려 있지 않음)

問曰하되 白衣는 有妻子하여 婬欲不除인데 憑河得成佛인가 答曰하되 只言見性이 不言婬欲으며 只爲不見性하여
但得見性하면 婬欲이 本來空寂하여 不假斷除하여
亦不樂着이니 縱有餘習이라도 不能危害니라 何以故인가 性本淸淨故이니 雖處在五蘊色身中해도 其性이 本來淸淨해서 不得汚染이니라 法身은 本來無受하여 無飢無渴하며
無寒熱하며 無病하며 無恩愛하며 無眷屬이며 無苦樂이며 無好惡하며 無長短이며 無强弱하여 本來無有一物可得이나 只緣有此色身因으로 卽有飢渴 寒熱疾病等相이니 若不賺하면 卽一任作하라 若於生死中에 得自在하여 轉一切法하여
輿聖人神通하여 自在無碍하면 無處不安이니라 若心有疑이면 決定透一切하여 境界不過하여 不作最好作了하면
不免生死輪廻이나 若見性하면 旃陀羅 亦得成佛하니라
묻기를 “속인(白衣)은 처자식이 있어 음욕을 제하지
못했거늘 무엇을 의지하여 성불을 하옵니까?”
답하기를 “견성(見性)만을 말했을 뿐 음욕은 말하지 않으며 오직 성품 보지 못한 것만 다스려 다만 성품을 보기만
하면 음욕이 본래 공적해서 끊어 제할 것이 아니어서,
역시 즐겨 집착하지 않으리니, 설사 남은 습기가 있더라도 해롭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성품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니, 비록 五온의 색신 속에 자리해 있더라도 그 성품이 본래 청정해서 물들이지 못하느니라.
법신(法身)은 본래 받아들임(受用)이 없어 주림과 목마름도 없으며, 추위도 더위도 없으며, 병도 없으며, 은혜와 사랑도 없으며, 권속(집안 식솔)도 없으며, 괴로움과 즐거움도
없으며, 좋고 나쁨도 없으며, 길고 짧음도 없으며, 강함과 약함도 없어서 본래 한 물건도 얻을 것이 없으나 오직
이 색신이 있는 연고로 주림과 곧 목마름, 추위와 더위, 괴질병 등의 모습이 있게 되는 것이니, 곧 스스로 속이지 않게 되었거든 마음대로 한번 해보라.
만약 생사 가운데서 자유로움을 얻어서 일체 법을 굴리어 성인들의 신통과 더불어 자유로워 걸림이 없으면 편안치 않은 곳이 없으리라.
만일 마음에 의심이 있으면 결정코 일체를 투득하여
통과하지 못할 것이니 조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니 조작하여 마치면 생사 윤회를 면하지 못하나 만약 성품을 보면 전다라(살생을 업으로 하는 천민)라도
역시 성불을 하느니라.”

五. 屠漢 亦得成道 (백정도 또한 도를 이룰 수 있음)

問曰하되 旃陀羅는 殺生作業인데 如何得成佛인가
答曰하되 只言見性이지 不言作業이니 縱作業해도 不同迷人하여 一切業 拘他不得이니라 從無始曠大劫來하며 只爲不見性하여 墮地獄中이나 所以作業으로 輪廻生死이나 從悟得本性하면 終不作業이니라 若不見性하면 念佛해도 免報不得이니
非論殺生命이니라若見成하여 疑心頓除하면 殺生命이라도 亦不奈他何이니라 自西天二十八祖도 只是遞傳心印이며 吾今 來此土도 唯傳頓敎 大乘이니 卽心是佛이요
不言持戒精進苦行 乃至 入水火登於劒輪 一食長坐不臥어니 盡是外道有爲法이니라 若識得施爲運動 靈覺之性하면  汝가 卽諸佛心이니라 前佛後佛이 只言傳心이며 更無別法이니 若識此心이면 間一字不識도 亦是佛이니라 若不識自己
靈覺之性하면 假使身破如微塵이어도 覓佛해도
終不可得也니라
묻기를 “전다라는 살생으로 업을 삼거늘 어떻게 성불 할수 있사옵니까?”
답하기를 “오직 성품을 보라고만 말했을 뿐이지, 업 짓는 것은 말하지 않았나니, 설사 업을 짓더라도 미혹한 사람과는 같지 않아서 일체 업이 그를 구속하지 못하느니라.
시작 없는 광대한 겁으로부터 오면서 오직 성품을 보지 못하여 지옥에 떨어졌으나 이른바 업을 지어 생사에 윤회하나 근본 성품을 깨닫게 되면 끝내 업을 짓지 않게 되느니라. 만일 성품을 보지 못하면 염불을 하더라도 과보를 면할 수 없는 것이니, 살생하는 직업을 논할 것이 아니니라.
만약 성품을 보아 의심을 몰록 없애면 생명을 살해하더라도 역시 그를 어쩌지 못하니라.
서천(西天)의 二十八조들도 오직 마음(心印)을 전하셨으며 내가 이제 이 땅에 온 것도 오로지 돈교(頓敎=직지인심으로 몰록 깨쳐드는 가르침)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니 곧 마음이 곧 부처인 것 이니라 계행이나 지키고 정진과 고행과 나아가서는 불이나 물에 들며 칼산에 오르며 한 끼 먹고 오래 앉아 눕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모두가 외도의 유위법이니라.
만약에 행하고 움직이며 신령스럽게 깨닫는 성품임을
알면 그대의 마음이 곧 부처님들의 마음이니라.
앞의 부처님과 뒷 부처님이 오직 마음을 전하는 것을
말씀하셨으며 다시 다른 법이 없으셨으니, 만약 이 마음을 알면 한 글자도 몰라도 역시 부처님이니라.
만일 자기의 신령스럽게 깨닫는 성품을 알지 못하면 설사 몸이 부서져 먼지같이 되더라도 부처를 끝내 찾지 못하느니라.

佛者는 亦名法身하며 亦名佛心이니 此心은 無形相하고 無因果하며 無筋骨이며 猶如虛空이라 取不得이니
不同質界이니 不同外道이니라 此心 除如來一人能會하고 其餘衆生迷人은 不明了니라
부처란 또한 법신(法身)이라 이름하며 또한 불심이라고도 하나니, 이 마음은 형상도 없고 인과도 없으며 힘줄도
뼈도 없어 마치 허공과 같아 잡을 수 없나니 물질의 세계와 같지 않은 것이니 외도와는 같지 않느니라.
이 마음은 여래만이 능히 아시고 그 외의 중생인 미혹한 사람은 똑똑히 알지 못하느니라.

此心은 不離四大 色身中이니 若離是心이면 卽無能運動이니라 是身無知 如草木瓦礫이라 身是無情거늘 因何運動이리오 若自心動이며 乃至語言施爲運動하고 見聞覺知가
皆是動心動用이니라 動是心動이요 動卽其用이니
動用外無心하고 心外無動이니라 動不是心이라 心不是動이니 動本無心하고 心本無動이니라 動不離心이나 心不離動이니 無心離離이며 無心動動이니라 是心用用으로 是心動動이니라 卽心用用이며 卽心動動이니 用卽心用 不動不用이라서
用體本空이라 空本無動니라 動用同心이나 心本無動이니라 故經云하되  動而無所動이니 終日去來而하되 未曾去來하고 終日見而하되 未曾見하며 終日笑而하되 未曾笑하고
終日聞而하되 未曾聞하며 終日知而하되 未曾知하고
終日喜而하되 未曾喜하며 終日行而하되 未曾行하고
終日住而하되 未曾住니라
이 마음은 색신가운데 四대를 여의지 않았나니 만일
이 마음을 여의고서는 곧 움직임도 없느니라.
이 몸은 아는 것(知)이 없어 초목이나 기와쪽 같은지라 몸은 곧 정(아는 것)이 없거늘 무엇으로 인하여 움직이리오. 스스로 마음이 움직이면 나아가서 말하고 행하며 움직이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모두가 이 마음의 움직임인 작용(用)의 움직인 것이니라.
움직임이 곧 마음의 움직임이요 움직임이 그 작용이니
움직여 작용하는 것 밖에 마음이 없고 마음 밖에 움직임이 없는 것이니라.
 움직이는 것은 이 마음이 아니어서 마음은 곧 움직이지 않나니, 움직이는 것이 본래 마음이 없어서 마음은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이니라.
움직임이 마음을 여의지 않으나 움직임은 마음을 여의지 않으며 마음은 움직임을 여의지 않으니 마음은 여읜 것도 여의었다는 것도 없으며, 마음에는 움직인다는 것도
움직였다는 것도 없느니라.
이 마음의 작용이 작용한 것이니 곧 마음의 움직임이
움직인 것이며, 곧 마음의 작용으로 작용하는 것이니,
곧 마음 의 움직임이 움직이는 것이니라.
곧 마음이 작용한 것이 작용이며 곧 마음이 움직인 것이 움직임이니 작용은 곧 마음의 작용이나 움직임도 아니요,
작용되는 것도 아니어서 작용의 바탕이 본래 빈 것이라 빈 것은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이니라. 움직여 작용하는 것이 같은 마음이나 마음의 근본은 움직임이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움직이되 움직인 바가 없다’ 하셨으니, 종일토록 가고 오되 가고 온 것이 없고 종일토록 보되 보는 것이 없으며 종일토록 웃되 웃는 것이 없고 종일토록 듣되 듣는 것이 없으며 종일토록 알되 아는 것이 없고 종일토록 기뻐하되 기뻐하는 것이 없으며 종일토록
다니되 다니는 것이 없고 종일토록 머무르되 머무는 것이
없는 것이니라.

故經云 言語道斷이요 心行處滅이니 見聞覺知가 本自圓寂 乃至 嗔喜痛痒이 何異木人이니 只緣推尋 痛痒 不可得이니라
故經云 惡業은 卽得苦報하고 善業은 有善報하니
不但嗔墮地獄 喜卽生天이니 若知嗔喜性空하여 但不執하면 卽業脫 이니라 若不見性하고 講經해도 決無憑이니라
說亦無盡이라 畧標邪正如是이나 不及一一也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말길이 끊겼음이요 마음(생각)으로 미칠 곳이 없는 것이다’하셨으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본래가 스스로 원적(圓寂:원만하고 고요함)하거늘 나아가 성내고 기뻐하고 아프고 가려운 것이 어찌 나무로 만든 사람과 다른 것이 리오. 오로지 찾아봐도 아픔과 가려움을 찾을 수 없는 연고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나쁜 업은 곧 괴로운 과보를 받고 착한 업은 곧 좋은 과보가 있게 된 것이라’하셨으니 다만 성내면 지옥에 떨어지고 기뻐하면 하늘에 태어나게 되는 것만이 아니니 성냄과 기뻐함의 성품이 공한 줄 알아
다만 집착하지 않으면 곧 업力을 벗어나리라.
만약 성품을 보지 못하고 경을 강설하더라도 결코 의거할 것이 없느니라.
설명하자면 다 할 수 없기에 삿됨과 바름을 이렇게 간략히 표방하였으나 낱낱이 미치지 못하였노라.”

頌曰하되
心心心難可尋이로다 
寬時遍法界하고      窄也不容鍼이니 
我本求心不求佛이니  了知三界空無物하니라 
若欲求佛但求心이니  只這心心心是佛이니 
我本求心心自知이라  求心不得待心知하면
佛性不從心外得이니  心生便是罪生時니라

게송으로 이르기를
마음 마음 마음이여 찾기가 어렵도다.
너그러울 때면 법계에 두루하고
움츠리면 바늘 끝도 용납지 못하나니
나는 본래 마음을 찾았으나 부처를 구하지 않았나니
三계가 공하여 아무 것도 없음을 밝게 알았느니라.
부처를 구하려거든 다만 마음만을 구할지니
다만 이 마음 마음하는 마음이 곧 부처니라.
내 본래 마음을 구하나 마음은 스스로 아는 것이라
마음을 구하려면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알지 못하며
부처의 성품은 마음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니
마음(생각)이 일어나면 문득 곧 죄가 생기는 때이니라.

傳法偈(법을 전하는 게송)
吾本來此土는   傳法救迷情이니
一華開五葉하여 結果自然成이리라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해 미혹한 중생을 건지려 함이니
한 송이 꽃에 다섯 잎 피어
열매가 저절로 맺어지리라.


선문촬요(禪門撮要) 제 2권

二. 달마 관심론(達磨觀心論)

一. 觀心 (마음을 관(觀)함)
 
 惠可問曰하되 若有人志求佛道 當修何法이 最爲省要인가 師答曰하되 唯觀心一法이 總攝諸行이니 名爲省要니라

 혜가가 묻기를 “불도를 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면 마땅히 어떠한 수행법이 가장 요긴한 것을 살펴야 하나이까?”
사께서 답하기를 “오직 마음을 관찰하는 한 가지 법이 모든 수행을 포섭하나니 요긴한 살핌(省要)인 것이라 하느니라.”

問曰하되 云何一法總攝諸行인가 師答曰하되
心者은 萬法之根本也이라 一切諸法이 唯心所生이니
若能了心하면 萬行俱備니라 猶如大樹하여 所有枝條 及諸華果가 皆悉因根나니 裁樹者는 存根而始生이요 伐樹者하여 去根而必死이니 若了心修道하면 則省功而易成이요 若不了心하고 而修道하면 乃費功而하고 無益하니라 故知하라 一切善惡은 皆由自心이니 心外別求하면 終無是處니라
묻기를 “어떤 한 법을 모두를 포섭하는 모든 수행이라
하시옵니까?”
사께서 답해 이르기를 “마음은 만법의 근본이라 일체
법이 오직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니, 마음을 능히 밝게
깨닫게 되면 만가지 수행(萬行)을 갖춘 것이니라.
비유하면 큰 나무와 같나니 가지와 모든 꽃과 열매가 모두 뿌리로 인하여 있는 것이니, 나무를 가꾸는데는 뿌리가 있어야 비로소 살 것이요, 나무를 베어 뿌리가 없게 되면 반드시 죽는 것이니, 마음을 밝히는 도를 닦으면 노력을 적게 들여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요, 마음을 밝게 깨닫지 못하고 도를 닦으면 헛수고만 하고 이익은 없으리라.
그러므로 알라. 일체 선과 악이 모두가 스스로의
마음에서 연유한 것이니, 마음 밖에서 달리 구하면 끝내
옳지 못하니라.”

二. 心具染淨緣起
(마음에는 깨끗함과 더러운 연을 일으킴을 가추고 있음) 

又問曰하되 云何觀心稱之爲了인가 答曰하되 普薩摩訶薩이 行深般若波羅蜜多時에 了四大五蘊이 本空無我를
了見自心起用이 有二種差別이니 云何爲二인가 一者淨心이요
二者染心이니 其淨心者은 卽是無漏眞如之心이요
其染心者는  卽是有漏無明之心이라 此二種心은
自然本來俱有하여 雖假緣和合이나 互不相生이니라
또 묻기를 “어떻게 마음을 보는 것으로 깨달았다
하는 것이옵니까?”
답하기를 “보살마하살이 깊이 행하여 반야바라밀다를
행할때에 四대와 五온이 본래 공하여 <나>가 없음을
밝게 깨달아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두 가지가 차별이 있으니, 어째서 둘인가? 첫째는 청정한 마음이요, 둘째는 더러운 마음이니 그 청정한 마음이라 하는 것은 곧 이 샘이 없는(無漏:번뇌) 진여(眞如)의 마음이요,
그 더러운 마음이라 하는 것은 곧 이 새어버리는(有漏:망념) 무명(無明)의 마음인 것이니라.
이 두 가지 마음은 본래부터 함께 갖춰 있어서  비록
거짓 인연에 의해 화합했으나 서로 상으로서 생기는 것이 아니니라.

淨心은 常樂善因하고 染心은 常思惡業이니 若眞如自覺하여 覺不受所染則을 稱之爲聖하며 遂能遠離諸苦하면
證涅槃樂이요 若隨染造惡되어 受其纏覆則하면 名之爲凡하여 於是 沈淪三界하여 受鍾鍾苦니라 何以故인가 由彼染心하여 障眞如體故니라
청정한 마음은 항상 착한 인연(善因)을 즐기고 더러운 마음은 항상 나쁜 업(惡業)을 생각하나니, 만일 진여(眞如)를
스스로 깨달아 깨달음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음을 수용한 바의 이치를 성인이라 칭하며 모든 괴로움을 멀리 여읨을 성취하면 열반락을 증득할 것이요, 만약 더러움을 쫒아 악업을 짓게 되어 그것에 얽혀서 덮힘을 받으면 범부라 이름하여 곧 삼계(三界)에 빠져서 갖가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니라. 어째서인가? 더러운 마음이 연유하여 진여의 바탕을 가렸기 때문이니라.”

三. 眞心因妄不現 (진심이 망념을 인하여 나타나지 못함)
 
十地經云하되 衆生身中에 有金剛佛性이 猶如日輪體明圓滿 廣大無邊이나 只爲五陰黑雲所覆하여 猶如甁內燈光
不能顯現하고 又涅槃經云하되 一切衆生이 皆有佛性이나 無明覆故 不得解脫이니라
십지경(十地經)에 이르기를 ‘중생의 몸 가운데에 금강(金剛) 같은 불성이 있음이 마치 태양의 바탕이 밝고 원만하고 광대하고 끝이 없는 것과 같으나 오직 오음(五陰)의 검은 구름에 가려져 마치 병(甁) 안의 등불 빛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하셨고 또 열반경(涅槃經)에 이르기를 ‘일체 중생이 모두가 불성(佛性)이 있으나 무명이 가려졌기 때문에 해탈치 못한다’하셨느니라.

四. 善法 以覺爲根者 (바른 법은 깨달음으로 근본을 삼음)

佛性은 者覺也이니 但能自覺하여 覺智明了해져 離其所覆하면 則名解脫이니라 故知一切諸善 以覺爲根이니라 因其覺根하여
遂能顯現諸功德樹이니 涅槃之果가 由此而成이라
如是觀心하면 可名爲了니라
불성(佛性)이란 깨달음이니, 다만 능히 스스로가 깨쳐
깨달은 지혜가 또렷이 밝아져 덮였던 것을 여의면
해탈(解脫)이라 이름 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일체 바른 법은 깨달음이 근본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라. 깨달음을 뿌리로 인하여 모든 공덕의 나무가 능히 나타나니 열반의 열매가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 이와같이 마음을 관찰하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니라.

五.惡法以三毒爲根(나쁜법은 삼독(三毒)으로써 근본이됨)

又問曰하되 上說眞如佛性 一切功德 因覺爲根 이나
未審이니 無明之心의 一切諸惡은 以何爲根인가 答曰하되 無明之心이 雖有八萬四千 煩惱情欲으로 恒沙衆惡 無量無邊이나 取要言之하면 皆因三毒하여 以爲根本이니라其三毒者는 卽貪嗔痴也이니 此三毒心이 自然 本來具有 한 一切諸惡 猶如大樹 根雖是一이 所生枝葉이 基數無邊이니 彼三毒根이 一一根中에 生諸惡業은 百千萬億倍나
過於前하여 不可爲喩이니라
또 묻기를 “위에서 진여불성과 일체공덕이 깨달음의 근본인이 된다 설하셨으나 알지 못하겠사오니 밝지 못(無明)한 마음의 일체 악은 무엇이 뿌리가 되나이까?”
답해 이르기를 “밝지 못한 마음이 비록 八만四천 번뇌와 탐내고 집착함(情欲)이 있어서 항하(恒河)의 모래 같이
한량없고 끝없이 많으나 요긴함을 간추려 말한다면
모두가 삼독(三毒)으로 인하여 근본이 되는 것이니라.
그 삼독(三毒)이라 하는 것은 탐심(貪心)·진심(嗔心)·치심(痴心)이니 이 세 가지 독한 마음이 자연히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일체 악이 마치 큰 나무가 뿌리는 오직 곧 하나인 것같이 거기에서 생긴 가지와 잎이 무수한 것과 같으니 이 삼독의 뿌리가 낱낱 뿌리 가운데서 모든 악업을 내는 것은 백·천·만억 배나 앞의 비유보다 더하여 비유하지를 못하니라.

六. 正明六賊 (여섯 가지 도적을 바르게 밝힘)

如是三毒은 於一本體에서 自爲三毒이나 若應現六根을
亦名六賊이니 六賊者은 卽六識也이며 由此六識하여
出入諸根하며 貪着萬境하여 然成惡業되어 障眞如體故로 名六賊니라 一切衆生 由此三毒 及以六賊하여 惑亂身心으로 沈淪生死하며 輪廻六趣하며 受諸苦惱가 猶如江河 因小泉源 涓流不絶이 乃能彌漫 波濤萬里니라
이와 같은 삼독은 하나인 본체(本體)에서 스스로 삼독이 되었거니와 六근(根)에 응해서 나타나는 것을 六적(賊)이라고도 이름 하나니, 六적이라 하는 것은 곧 六식(識)이며 이 六식으로 말미암아 모든 여섯가지 감관(根)으로 드나들면서 온갖 경계를  탐착하게 되어 자연히 악업(惡業)을 이루게 되어 진여의 본체를 장애하므로 여섯가지 도적(六賊)이라 이름 하는 것이니라.
일체 중생이 이 삼독과 六적으로 몸과 마음을 어지럽힘으로 말미암아 생사에 빠져 들며 여섯 갈래(趣)에 윤회하며  온갖 고통을 받는 것이, 마치 큰 강이 작은 샘에서 쉬지 않고 흐름으로 인하여 마침내는 철철 넘쳐흘러 만리의 파도가 출렁이는 것 같으니라.

七. 斷三毒根 (三독의 뿌리를 끊음)

若復有人하여 斷其根源하면 則衆流皆息이니라 求解脫者는 能轉三毒하여 爲三聚淨戒하고 能轉六賊하여 爲六波羅密하면 自然 永離一切諸苦니라
만약 사람이 돌이켜 그 근원을 끊으면 모든 흐름이 모두  쉬게 되는 법이니라.
다시 해탈을 구하는 것은 능히 삼독을 굴려서 능히 삼취정계(청정)로 바꾸고 육적을 굴려서 능히 육바라밀로 바꾸면 자연히 일체 모든 고통을 영원히 여의게 되는 것이니라.”


八. 了出三界 (깨달아 마치면 三계를 벗어남)

又問曰하되 三毒六賊이 廣大無邊인데 若唯觀心하면
云何免彼無窮之苦 答曰하되 三界業報는 唯心所生이니
若能了心하면 於三界中에서 則出三界니라

또 묻기를 “삼독과 육적이 끝없이 크고 넓은 것이거늘 오직 마음을 살피기만 하면 어찌 저 무궁한 고통을 벗어난다 하옵니까?”
답하기를 “三界의 업보(業報)는 오직 마음에서
생긴 것이니, 마음을 깨달으면 삼계 가운데서 三계를
벗어나는 법이니라.

九. 三界原因 (三계의 원인)

其三界者는 則三毒也이니 貪爲欲界요 嗔爲色界요 癡爲無色界 由此三毒心으로 結集諸惡하여 業報成就되어 輪廻六趣故로 名爲三界니라 又三毒造하는 業輕重으로 受報不同하여 分歸六處故名六趣
그 三계가 즉  三독이니, 탐욕이 욕계(欲界)이며 성냄이 색계(色界)요, 어리석음이 무색계(無色界)라, 이 三독심으로 말미암아 온갖 나쁜 것이 모여 업보(業報)가 이루어져서 六취(趣)를 윤회(輪廻)하는 것이므로 三계라 이름 하는 것이니라. 또 삼독 이것은 업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과보를 받는 것이 같지 않아서 여섯곳으로 돌아가게 되므로 여섯가지 갈래(六趣)라 이름하는 것이니라.”

十. 迷現六趣 (미혹하면 육취에 나타남)

又問曰하되 云何輕重이 分之爲六인가
答曰하되 若有衆生이 不了正因하고 迷心修善해도
未免三界하여 生三輕趣니라 云何三輕인가 所謂迷修十善하되
妄求快樂하면 未免貪界하여 生於天趣하고 迷持五戒하며 妄起愛憎하면 未免嗔界해 生於人趣하고 迷執有爲하여  信邪求福하면 未免痴界하여 生於修羅趣니 如是三類를
名爲三輕趣니라

또 묻기를 “어찌하여 가볍고 무거움이 여섯가지로 나눠지게 되옵니까?”
답하기를 “중생이 바른 원인(正因)을 깨닫지 못하고 미혹한 마음으로 착한 것(善)을 닦아도 삼계를 면치 못하여 세 가지 가벼운 갈래(三輕趣)에 태어나게 되느니라.
무엇을 세 가지 가벼운 갈래라 하는가? 하면 이른바 미혹한 마음으로 十선(善)을 닦되 망령되이 쾌락을 구하려하면 탐욕의 경계를 면치 못해서 하늘 갈래(天趣)에 태어나고, 미혹한 마음으로 五계(戒)를 지키며 망령되이 미움과 사랑을 일으키면 성냄의 경계를 면치 못해서 인간 갈래(人趣)에 태어나고, 미혹한 마음으로 함이 있음(有爲)에 집착하여 삿된 것을 믿고 복을 구하면 어리석은 경계를 면치 못하여 아수라의 갈래(修羅趣)에 태어나니 이와 같은 세 종류를 세 가지 가벼운 갈래라 하느니라. 

云何三重인가 所謂縱三毒心하여 唯造惡業하여 墮三重趣하니 若貪業重者는 墮餓鬼趣하고 嗔業重者는 墮地獄趣하고
痴業重者는  墮畜生趣이니 如是三重과 通前三輕하면
遂成六趣니라
무엇이 세 가지 무거운 것이라 하는가? 하면 이른바 三독의 마음을 쫓아 오직 나쁜 업을 짓게 되어 3계의 무거운 곳에 떨어지나니 탐욕이 무거우면 아귀의 갈래(餓鬼趣)에 떨어지고 성냄이 무거우면 지옥의 갈래(地獄趣)에 떨어지고 어리석음의 업이 무거우면 축생의 갈래(畜生趣)에 떨어지나니, 이와 같은 세 가지 무거운 것과 앞의 세 가지 가벼운 갈래를 합하면 마침내 여섯 갈래를 쫓아 이루게 되느니라.

十一.  攝心解脫 (마음을 거두면 해탈임)

故知하라 惡業이 由自心生이니 但能攝心하여 離諸邪惡하면 三界六趣輪廻가 之苦自然消滅하여 能盡諸苦이니
則名解脫이니라
그러므로 알라. 나쁜 업이 마음을 연유하여 생긴 것이니, 다만 마음을 능히 거두어 모든 삿된 악을 여의면 三계6취 윤회의 고통이 자연히 사라져서 능히 모든 고통이 다하리니 해탈 하는 법이라 이름하니라.”

十二. 卽三毒 現阿僧祗 (三독으로 아승지가 나타남)

又問曰하되 如佛所說 我於阿僧祗劫을 無量勤苦하면
倣成佛道인데 云何 今說唯除三毒 則名解脫인가 答曰하되 佛所說은 言無虛妄也이니라 阿僧祗者는 卽三毒心也이니 胡名은 阿僧祗라며 漢言은 不可數이니 此心中에
有恒沙惡念하여 一一念中에 皆有一劫이니라 恒沙者는
不可數也이니 以三毒惡念이 如恒沙故로 言不可數也니라眞如之性이 旣被三毒之所覆이니 若不超彼恒河沙之惡念하고 云何名解脫이리오 今者 能除貪嗔痴等 三毒心是하면
則名爲度得 三大阿僧祗劫이나 末世衆生이 愚癡鈍根로
不解如來 甚深妙義 三阿僧祗秘密之說하고 遂言하되
歷此塵劫해야 方得成佛이라니  末劫의 豈不疑誤修하여 行之人을 退菩提道也니라
또 묻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한 것 같이 ‘내가 아승지겁을 한량없는 고통을 겪으며 바야흐로 불도를 성취하였노라’하셨거늘 어찌하여 이르시기를 지금 오직 삼독만 제하면 해탈하는 법이라 말씀하시옵니까?
답하기를“부처님이 설하신 것은 틀림이 없나니라. 아승지라 하는 것은 곧 三독의 마음이니, 인도말(胡語)로는 아승지(阿僧祗)라 하며 중국말로는 헤아리지 못하는 수(不可數)이니 이 마음 가운데 항하사의 모래 수 같이 나쁜 생각이 있어서 낱낱 생각 가운데에 모두 일 겁이 있느니라. 항하사라 하는 것은 헤아리지 못한다는 수이니 三독의 나쁜 생각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으므로 헤아리지 못하는 수라고 말 하는 것이니라.
진여(眞如)의 성품이 이미 三독에 덮였으니, 항하의 모래 수 같은 나쁜 생각을 뛰어넘지 못하고서 어찌 해탈이라 하리오.
이제 탐·진·치 삼독심을 능히 없애면 곧 삼대 아승지겁을 제도한 것이라 하는 이치이거늘 말세의 중생이 어리석은 둔한 근기로 여래의 매우 깊고도 묘한 삼아승지겁의 비밀한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마침내 말하기를 ‘이렇게 많은 겁을 지내야 비로소 부처를 이룬다’하니 말겁의 수행을 괴이하게 수행을 그르쳐 보리의 도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니라”

十三. 明三聚 六波羅密 (三취정계와 六바라밀을 밝힘)

又問曰하되 菩薩摩訶薩이 由持三聚淨戒하여 行六波羅密해야 方成佛道인데 今令學者 唯持觀心하니 不修戒行하고
云何成佛이오
또 묻기를 “보살 마하살이 三취정계를 지킴으로 말미암아 六바라밀을 행하여야 바야흐로 불도를 이루거늘 이제 학인들로 하여금 오직 마음만 지켜 살피라 하시니 계행을 닦지 않고서 어찌 부처를 이룬다 하는 것이옵니까?”

答曰하되 三聚淨戒者는 則制三毒心也니 制一毒하면
成無量善聚니라 者會也이니 以能制三毒卽有하면
三無量善이 普會於心기에 名三聚淨戒이니라 六波羅密者는 卽淨六根이니 胡名은 波羅密이요 漢言은 達彼岸이니라 以六根淸淨하여 不染世塵하면 卽是出煩惱하여 便至彼岸也이니 故名六波羅蜜이니라
답하기를 “삼취정계(聚淨戒)라 하는 것은 三독의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니, 하나의 독을 제어하면 무량한 바른 것들(善聚)을 성취하게 되느니라.
취(聚)라 하는것은 모인다는 뜻이니, 三독의 마음을 능히 제어하면 세 가지 한량없는 바른 것(善)이 두루 마음에 모이기에 三취정계라 이름 하는 것이니라.
六바라밀이라 하는 것은 곧 六근(根)을 맑게 한다는 뜻이니, 인도말로는 바라밀이요, 중국말로는 달피안(達彼岸=도피안:저 언덕에 이르름)이니라.
六근이 청정하여 세속번뇌에 물들지 않으면 곧 번뇌를
뛰어나서 문득 언덕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므로 六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니라.”

又問曰하되 如經所說 三聚淨戒者는 誓斷一切惡하며
誓修一切善하며 誓度一切衆生인데 今者 唯言制三毒心하니 豈不文義 有所乖也인가
答曰하되 佛所說經은 是眞實하여 應無謬也니라 菩薩摩訶薩이 於過去因中에 修菩薩行時에 爲對三毒하여 發三誓願하여 持三聚淨戒하니 常修戒는 對貪毒하여 誓斷一切惡故요
常修定은 對嗔毒이니 誓修一切善故요 常修慧는 對痴毒이니 誓度一切衆生故니라
또 묻기를 “경에 설한 바와 같이 三취정계라 하는 것은 일체 악을 끊기를 서원하며, 일체 바른 것을 닦기를 서원하며,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를 서원하는 것이거늘 이제 말씀하시기를 ‘오직 三독심을 제어하기만 하라’하시니, 어찌 글의 뜻이 어긋나는 것이 아니리까?”
답하기를 “부처님께서 설하신바 경전은 곧 진실하여 틀림이 없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이 과거에 인행(因行) 가운데 보살의 행을 닦을 때에 三독을 물리치기 위하여 세가지 서원을 세워 三취정계를 지키셨으니, 항상 계를 닦은 것은 탐독(貪毒)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니 일체 악을 끊기를 서원한 까닭이요, 항상 선정을 닦는 것은 진심의 독(嗔毒)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니 일체 바른것을 닦기 서원한 까닭이요, 항상 지혜를 닦은 것은 어리석음의
독(痴毒)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니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를 서원한 까닭인 것이니라.

由持如是戒定慧等의 三種淨法故로 超彼三毒惡業하여
成佛道也이니 以能制三毒하면 卽諸惡消滅故로 名之爲斷하고 以能持三聚淨戒하면 卽諸善具足故로 名之爲修이니
以能斷惡修善하면 則萬行成就되니 自他俱利되어 普濟群生故로 名之爲度하니라 故知하라 所修戒行 不離於心니라
이와 같이 계·정·혜 등 세 가지 깨끗한 법을 지키므로
三독의 악업으로부터 벗어나서 불도를 이루었나니, 三독을 능히 제어하면 곧 모든 악이 소멸하므로 끊음(斷)이라 하고 능히 三취정계를 지키면 곧 모든 바른 것이 갖춰지므로 닦음(修)이라 하나니 악을 능히 끊고 바른 것을 닦음으로써 만행(萬行)이 스스로 성취되는 법이니 나와 남이 이로움이 모두 갖춰지게 되어 널리 중생들을 두루 건지게 되므로 제도한다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계행을 닦는 것도 마음을 여읜 것이 아닌 것이니라.

十四. 心淨則佛土淨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도 깨끗한 법)

若自心淨하며 一切衆生이 皆悉淸淨이니라 故經云하되
心垢則衆生垢요 心淨則衆生淨하고 又云하되 欲淨佛土면 先淨其心이니 隨其心淨 則佛土淨하니 若能制得 三種毒心하면 三聚淨戒를 自能成就니라
만약 자기의 마음이 청정하면 일체 중생이 모두가 청정해지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마음이 더러우면 중생이 더러워지는 법이요 마음이 깨끗하면 중생이 깨끗해지는 법이라”하시고, 또 이르기를 “불국토(佛土)를 깨끗이 하려면 먼저 그 마음을 깨끗이 할지니, 그 마음이 깨끗해지면
따라서 불국토가 깨끗해지는 법이니라”하셨으니,
능히 세가지 독한 마음을 제어할 수 있으면 삼취정계를 스스로 성취하게 되는 것이니라.”

十五. 明六度 (六도를 밝힘)

又問曰하되 如經所說이 六波羅蜜者는 亦名六度이니
所謂 布施持戒 忍辱精進 禪定智慧인데 今言 六根淸淨을 名爲六波羅蜜者라니 苦爲通會이며 又度者는 其義云何인가
答曰하되 欲修六度하면 當淨六根하고 欲淨六根하면
先降六賊이니라 能捨眼賊하면 離諸色境하여 心無固恡을 名爲布施하며 能禁耳賊하면 於彼聲塵을 不令縱逸을
名爲持戒하고 能伏鼻賊하면 等諸香臭에 自在調柔를
名爲忍辱하며 能制舌賊하면 不貪邪味하며 讚詠講說하되 無疲厭心을 名爲精進하고 能伏身賊하면 於諸觸欲에
湛然不動을 名爲禪定하며 能調意賊하면 不順無明하고
常修覺慧하여 樂諸功德을 名爲智慧니라 又度者는 運也이니 六波羅蜜은 喩若船筏라 能運衆生하여 達彼岸故로 云六度니라
또 묻기를 “경에 설한 것과 같이 육도라고도 하니 六도라 하는 것은 이른바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인데 이제 말씀하시기를 ‘六근이 청정한 것을 六바라밀이라’하시니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며 또 제도한다는 그 뜻이 무엇이옵니까?”
답하기를 “六도(度)를 닦고자하면 마땅히 육근(根)을 깨끗이 하여야 하고, 육근을 깨끗이 하려면 먼저 육적(賊)을 항복시켜야 하니라.
능히 눈의 도적(眼賊)을 버리면 모든 물질 경계(色境)를 여의어서 마음에 인색함이 없어지는 것을 보시라 하며, 능히 귀의 도적(耳賊)을 막으면 속세의 소리에 끄달리지 않는 것을 지계라 하고, 능히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면
모든 향취와 악취에 평등하여 자재하게 길들여지는 것을 인욕이라 하며, 능히 혀의 도적(舌賊)을 제어하면 삿된 맛을 탐내지 않으며 노래하고 강설하되 그침이 없는 마음을
정진이라 하고, 능히 몸의 도적(身賊)을 항복시키면 모든 애욕에 초연하여 요동치지 않는 것을 선정이라 하며,
능히 뜻의 도적(意賊)을 조복하면 무명(無明)을 따르지 않고 항상 각성의 지혜(覺慧)로 닦아 모든 공덕의 즐거움을
지혜라 하느니라.
또 도(度)라 하는 것은 운반한다(運)는 뜻이니 육바라밀은 비유하면 땟목(船筏) 같은 것이라 능히 중생들을 운반하여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六도라 이르는 것이니라.”

十六. 明法乳 (법의 젖을 밝힘)
 
又問曰하되 經에 文所說釋迦如來 爲菩薩時 曾飮三斗
六升乳麋하고 方成佛道인데 卽先因食乳後에 證佛果인데 豈唯觀心하면 得解脫也인가 答曰하되 誡如所說 無虛妄也이니  必因食乳然始成佛이니 佛所說食乳者는 非是世間
不淨之乳이니 乃是眞如淸淨法乳니라 三斗者는 卽三聚淨戒요
六升者는 六波羅蜜이니 佛成道時에 由食此淸淨法乳로
方證佛果거늘 若言如來가 食於世間
婬欲和合不淨羶腥之乳者하면 豈不成謗之甚乎리오 如來者는 自是金剛不壞無漏法身이라 永離世間諸苦인데 豈須如是不淨之乳로 以免飢渴也인가 如經所說이니 此牛는 不在高原하고 不在下濕하며 不食粟夌糠麩하며 不與特牛 同群하고 其牛 身作紫摩金色이니라
또 묻기를 “경에 석가모니 여래께서 보살행을 닦으실 때  일찍이 서말 여섯 되의 젖을 마시고서야 비로소 불도를 성취하셨다 하셨거늘 곧 먼저 젖을 마신후에야 불과를 증득하셨거늘 어찌 오직 마음을 관하기만 하면 해탈을 한다 하옵니까?”
답하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훈계는 허망함이 없으니 반드시 젖을 마시고서야 비로서 성불을 하는 것이나 부처님께서 설하신바의 젖은 세간의 깨끗지 못한 젖이 아니라 이는 곧 진여의 청정한 법의 젖(法乳)이니라.
서말이라 하는 것은 곧 三취정계요, 여섯 되라 하는 것은 六바라밀이니,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실 때에 이 청정한 법유를 마신 연유로 비로소 불과(佛果)를 증득하셨거늘 만약 말하기를 ‘여래께서 세상의 음욕으로 섞인 깨끗지 못한 누린내 나는 젖을 잡수셨다’하면 어찌 부처님을 비방함이 지나치지 않으리오.
여래는 스스로 곧 금강과 같이 굳어서 무너지지 않는 샘이 없는 법신(無漏眞身)이라 세간의 모든 고통을 영원히
여의었거늘 어찌 모름지기 이같이 부정한 젖으로 기갈을 면하였겠는가? 경에 설하신 바와같이 이 소는 높은 언덕에 있지도 않고 낮은 습지에 있지도 않으며 곡식이나 겨도 먹지 않으며 잡된 소들과 어울리지 않고 몸은 자마금(紫磨金)의 빛깔인 것이니라.   

言此牛者는 則毗盧遮那佛也이니 以大慈悲로 憐愍一切故로 於淸淨法體中에서 流出如是 三聚淨戒 六波羅蜜微妙한
法乳하여 乳飮一切求解脫者이니 食如是淸淨之牛淸淨之乳를 非獨如來 飮之成道이며 一切衆生이 若能飮者하면
皆得成 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이 ‘소’라 하는 것은 비로자나 부처인즉, 대자대비로써
일체 중생을 가엾이 여기시므로 청정한 법체 가운데로부터 이와 같이 三취정계와 六바라밀의 미묘한 법의 젖(法乳)을 흘려, 해탈을 구하는 일체를 젖을 먹이시나니, 이와같이 깨끗한 소의 청정한 젖을 여래 혼자 마시고 도를 이루시는 것이 아니며 일체 중생들이 능히 마시게 되면 모두가
위없고 바르고 참된 도를 성취하여 얻을 것이니라.”

十七. 修造聖殿 (절을 고치고 짓는 법)  
 
 又問曰하되 佛說經中하되 令衆生 修造伽藍하며
鑄寫形像하며 燒香散花거나 燃長明燈하며 日夜六時를
行道持齋禮拜하며 種種功德으로 皆成佛道하니
苦唯觀心으로 總攝諸行이라 說如是事應虛妄也이오 答曰하되 佛所說經는 有無量方便以니 一切衆生의 鈍根狹劣하여 不悟甚深之義 所以하되 假有爲事 喩無爲理이니 若復不修內行하고 唯只外求하며 希望獲福하며 無有是處니라 言伽藍者는 梵音此言로 淸淨處也라 若永除三毒하여 常淨六根하여 身心湛然하고 內外淸淨하면 是則修伽籃也니라
또 묻기를 “경 가운데 부처님이 설하시기를 중생들이 ‘절을 짓고 수리하며 불상을 그리거나 조성하며 향을 사르고 꽃을 흩거나 등을 오래 밝게 사르며 밤·낮 여섯 차례 예불하고 재계를 지키고 절을 하면 갖가지 공덕으로 모두가 불도를 이루리라’하셨는데 오직 ‘마음을 관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모두 거둬 들이는 행이라’라고 설한 것과 같이 이러한 일은 응당 허망한 것이옵니까?”
답하기를 “부처님이 설한 경전에는 한량없는 방편이 있으니 일체 중생들의 근기가 둔하고 좁고 하열하여 깊고 깊은 바른뜻을 깨닫지 못하는 까닭으로 유위(有爲)의 일을 가설하여 무위(無爲)의 이치를 비유하신 것이니, 안으로 행하여 닦지 아니하고 오직 다만 밖으로 구하기만하며 복의 과보(福報)만 바란다면 옳지 못하느니라.
가람이라 말하는 것은 이 말이 범어로 청정처(淸淨處=깨끗한 도량)라는 것이니, 삼독을 영원히 제어하여 육근을 항상 깨끗이 하여, 몸과 마음이 깊고 초연(湛然)하여 안팎이 청정하면 이것이 가람을 짓는 이치이니라.

十八. 鑄寫佛像 (불상·탱화를 조성하는 법)

又鑄寫形像者는 卽一切衆生이 求佛道也이니 所謂修諸覺行은 假像이니 如來眞容妙相이 豈道鑄金銅之所作也리오 是故로 求解脫者는 以身爲爐하며 以法爲火하고 以智慧로 爲工匠하며 三聚淨戒와 六波羅蜜로 以爲模樣하여 鎔鍊身中 眞如佛性하여 遍入一切戒律模中하여 如敎奉行하되 一無缺漏하면
自然成就眞容之相이니 所謂 究竟常住하는 微妙法身이니 非是有爲敗壞之法이니라 若人求道하며 不解鑄寫眞容하면 憑何輙言成功德也리오
또 불상을 조성한다는 것은 곧 일체 중생이 불도를 구하고자 함인 것이니, 이른바 모든 깨닫는 행을 닦는 것으로는
거짓된 모습이니 여래의 참모습과 묘한 상이 어찌 금이나 구리를 부어서 조성한 것을 말하는 것이리오.
이러하므로 해탈을 구하는 자는 몸으로써 용광로를 삼으며 법으로써 불을 삼고 지혜로써 장인(工匠)을 삼으며,
三취정계와 六바라밀로써 거푸집(연마장)을 삼아 몸 안에 있는 진여의 불성을 녹여 일체 계율의 거푸집(연마장) 속에 넣어 가르침대로 받들어 실천하되 하나도 빠뜨림이 없게 하면 자연히 참모습의 상이 이뤄지게 되나니, 이른바 구경의 항상 머무는 미묘한 법신이니, 이것이 함이 있어 무너지는 것이 아닌 법이니라.
사람들이 도를 구하면서 참모습을 조성하거나 그릴 줄 모른다면 무엇을 의지하여 공덕을 성취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오.

十九. 五分香義 (다섯가지 법향의 바른 이치)

燒香者는 亦非世間有相之香이라 乃是無爲의 正法之香이니 薰諸臭穢하고 斷無明惡業하여 悉令消滅이니라 其正法香는 有五種이니 一者 戒香이니 所謂能斷諸惡하고 能修諸善이요 二者는 定香이니 所謂深信大乘로 心無退轉이요 三者는 慧香이니 所謂常於身心을 內外觀察이요 四者는 解脫香이니 所謂能斷一切 無明結縛이요 五者는 解脫知見香이니
所謂覺察常明하며 通達無礙니라 如是五香을 名最上香하며 世間無比이니 佛在世日에
令諸弟子에게 以智慧火으로 燒如是 無價寶香하여 進供十方 一切諸佛인데 今時衆生이 愚痴鈍根하여 不解如來眞實之義하고 唯將外火하여 燒於世間 沈檀薰陸質碍之香하여 希望福報하니 云何可得하리오
향을 피운다는 것은 역시 세간의 형상이 있는 향이 아니라 이것은 함이 없는 바른 법의 향이니, 모든 더러운 냄새를 물리치고 무명의 악업을 끊어서 모든 것을 소멸케 하는 것이니라.
그 바른 법의 향이라 하는 것은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계향(戒香)이니 이른바 모든 악을 끊고 모든 선을 닦는 것이요, 둘째는 정향(定香)이니 이른바 바른 대승(大乘)을 깊이 믿어 물러남이 없는 마음인 것이요, 셋째는 혜향(慧香)이니 이른바 몸과 마음을 안팎에서 잘 관찰하는 것이요, 넷째는 해탈향(解脫香)이니 일체 무명의 얽매임을 푸는 것이요, 다섯째는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니 이른바 느끼고 살핌이 항상 밝아서 걸림 없이 통달하는 것이니라.
이와같은 다섯 가지 향을 최상의 향이라 하며 세상에서 견줄 것 없나니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셨던 날에 제자들로 하여금 지혜의 불로써 이와같이 값을 매길 수 없는 향을 사루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나아가 공양하라 하셨거늘, 요즘의 중생들이 근기가 둔하고 어리석어서 부처님의
진실한 바른 뜻을 알지 못하고 오직 밖의 불을 가져 세간에서 불전에 켜는 향(沉檀, 薰陸)들인 형체 있는 향을 사루어 복의 과보를 바라니, 어찌 얻어 가질 수 있으리오.

二十. 散花義 (꽃을 흩는 바른 이치)
 
又散花者로 義亦如是이니 所謂演說 正法諸 功德花하여 饒益有情하고 散治一切眞如之性하여 普施莊嚴이니
此功德花를 佛所稱嘆한 究竟常住인 無凋落期니라 若復有人하여 散如是花하면 獲福無量이나 若言如來하되 令諸弟子 及衆生等에게 剪截艶綵하고 傷損草木하여
以爲散花하면 無有是處니라 所以者何인가 持淨戒者는
於諸天地 森羅萬像을 不令觸死니라 誤損者도 猶獲大罪인데 况復今者로 加毁淨戒하고 傷損萬物하고 求於福報하리오 欲益反損이니 豈有是乎리오
또 꽃을 흩는다 하는 것도 바른 뜻이 역시 이와 같으니, 이른바 바른 모든 법의 공덕 꽃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演說) 유정(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일체 진여의 성품으로 두루 다스려서 널리 두루 베풀어 장엄하는 것이니,
이 공덕의 꽃을 부처님께서 찬탄하신 항상하는 구경인
것으로 시들거나 떨어짐이 없는 것이니라.
어떤 사람이 거듭하여 이와 같이 꽃을 흩는다면 한량없는 복덕을 거둘 것이나 만일 여래께서 말씀하기를 “제자들과 중생들로 하여금 고운 비단을 짜고 초목을 잘라서 꽃을 흩게 하셨다”한다면 옳지 못하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계행을 지키는 청정함이란 천지의 삼라만상 모든 것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라. 잘못하여 해치는 것도 큰 죄를 받거늘 하물며 이제 다시금 청정한 계율을 범하고 만물을 손상하고서 복덕의 과보를 구할 수 있으리오. 이익코자 하나 도리어 손해되는 것이니 어찌 옳은 것이라 하리오.

二十一. 明燈義 (등불 밝히는 바른 이치)

又長明燈者는 正覺心也이니 覺知明了를 喩之爲燈니라
是故 一切求解脫者는 常以身爲燈臺하고 心爲燈盞하고
信爲燈炷하고 僧諸戒行以爲添油하며 智慧明로
達喩如燈光이니라 常燃如是覺燈하여 炤破一切無明痴暗니라 能以此法으로 轉相開悟하면 卽是一燈으로 燃百千燈이라 以燈續明하여 終無盡故로 故號長明이니라 過去有佛이니 名曰하되 燃燈이니 義亦如是이나 愚痴衆生이 不會如來 方便之說하고 專行虛妄으로 執着有爲하여
遂然世間 蘇油之燈하여 以照空室로 乃稱依敎하니 豈不謬乎리오
所以者何인가 佛放眉間 一毫之光으로 尙照十萬八千世界하며 若身光이 盡現則普照十方이니 豈假如是世俗之燈로
以爲利益이리오 審察斯理 應不然乎리오
또 장명등(長明燈)이라 하는 것은 바르게 깨닫는 마음이니, 깨달아 아는 것을 밝게 깨달아 마치는 것을 등 불빛에 비유하는 것이니라.
이러하므로 해탈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은 항상 몸으로써 등대를 삼고 마음을 등잔을 삼고 믿음으로 심지를 삼아, 계향(계향=계행)이 증진하는 것으로 기름을 붓는 것으로 삼으며, 지혜가 밝아지는 것으로서 등빛같이 삼는 것을 비유와 같이 통달하게 되는 것이니라.
항상 이와 같이 깨달음의 등을 켜서 일체 무명한 어리석은 어두움을 비춰 깨뜨려야 하느니라. 능히 이러한 법으로써 차츰 깨닫게 되면 곧 이러한 한 등으로 백 천 등을 켜게 되는 것이라 등이 광명을 이음으로써 마침내 다함이 없는  까닭에 그러므로 長明燈이라 부르는 것이니라.
과거에 부처님이 계셨으니 이름하여 연등(燃燈=등을 켬)이시니, 역시 이치가 이와 같으나 어리석은 중생들이 여래께서 방편으로 설하신 것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허망한 짓으로 하여 함이 있는 법에 집착해서 세간의 깨기름이나 태워서 빈 방을 비추는 것으로써 가르침에 의한 것이라고 여기니 어찌 잘못이 아니리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부처님이 눈썹 사이의 한 터럭으로 광명을 놓아 十만 八천의 세계를 비추시며, 만약 몸의 광명이 모두 나투면 十방세계를 두루 비추나니, 어찌 이와 같은 세속의 거짓 등불로 이익을 삼을 것이리오. 이러한 이치를 자세히 살핀다면 마땅히 그르다 하지 않을 것이리오.

二十二. 行道 (도를 행하는 법)
 
又六時行道者는 所謂六根之中에 於一切時에 常行佛道이니 佛者覺也이니 卽時修諸覺行하여 調伏六根하여 六情淸淨하여 長時不捨를 名爲六時行道니라 塔者는 身心也이니
常令覺慧로 巡遶身心을 念念不停 名爲遶塔이니라 過去諸聖도 曾行此道하여 得涅槃인데 今時世人이 求解脫者하면서
不會斯理니 何名行道리오 竊見今時 鈍根之輩는 會不內行하고 唯執外求하며 將質礙身 遶世間塔하며 日夜走驟하여
徒自疲勞하니 而於眞性에 一無利益이라 迷愚之輩
甚誠可愍歟로다
또 여섯 차례 도를 행한다 하는 것(예불)은 이른바 六근 가운데서 언제나 항상 불도를 행하는 것이니, 부처란 깨달음이니 즉시 모든 깨달음의 행을 닦아 六근을 조복시켜 6정을 청정하게 하여 오래도록 버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여섯 차례 도를 행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탑이란 것은 몸과 마음이니, 항상 밝은 지혜로 몸과 마음을 돌리는 것을 생각 생각이 그치지 않음을 탑돌이라 하는 것이니라.
과거의 모든 성인들도 일찍이 이 도를 행하여 열반을 얻으셨거늘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이 이치를 알지 못하니, 어찌 도를 행한다 하리오. 요즘 둔한 무리는 안으로 행을 닦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직 밖으로 집착하여 구하며 육신으로 세간의 탑을 돌며 밤낮으로 분주하게 달려 부질없이 피로하기만 하니 참성품에는 하나도 이익이 없으니 미혹하고 어리석은 무리들이 매우 가엾은 일인 것이로다.

二十三. 齋 戒 (재계의 뜻)

又 持齋者는 當須會意이나 不達其理徒施虛功이니
齋者薺也이니 所謂勤治身心하여 不令散亂이요 持者는
護也이니 所謂於諸戒行을 如法護持하되 必須禁六情制三毒하며 勤修覺察하여 淸淨身心하여 了如是義를 可名爲齋니라
마땅히 뜻을 알아야 하나 그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면 헛수고만 하게 되는 것이니 또 계를 지킨다(持齋) 하는 것은, 재(齋)는 가지런히 한다는 뜻이니 이른바 몸과 마음을 부지런히 다스려 산란하지 않게 한다는 것이요, 지(持)는 보호한다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계행을 법다이 지키되 반드시 六정(情)을 금하고 三독(毒)을 제어하며 깨달음을 살펴 부지런히 닦아 마음을 깨끗이 하여 이러한 바른 뜻을 밝게 깨달아야 재라 할 수 있는 것이니라.

二十四. 齋 食 (재식의 뜻)

又持齋者는 食有五種이니 一者는 法喜食이니 所謂
依如來正法하여 歡喜奉行이요 二者는 禪悅食이니 所謂
內外澄寂하여 身心悅樂이요 三者는 念食이니 所謂
常念諸佛하여 心口相應이요 四者는 願食이니 所謂行住坐臥에도 常行善願이요 五者는 解脫食이니 所謂心常淸淨하여
不染世塵하여 持五淨食者가 名爲齋食이니라 若復有人하여 不食如是五種淨食하고 自言持齋하면 無有是處이니라
또 계를 지킨다 (持齋)하는 것은 밥이란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희식(法喜食)이니 이른바 여래의 바른 법에 의하여 기쁜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는 것이요, 둘째는 선열식(禪悅食)이니 이른바 안팎이 밝고 고요하여 몸과 마음이 즐거운 것이요, 셋째는 염식(念食)이니 이른바 항상 부처님들을 생각하여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는 것이요, 넷째는 원식(願食)이니, 이른바 다니거나 서거나 앉거나 누워서도 항상 바른 서원을 행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해탈식(解脫食)이니, 이른바 마음이 항상 청정하여 세상 번뇌에 물들지 않아  다섯가지 청정함을 지키는 것을 재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니라.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 이와 같이 깨끗한 음식을 먹지않고 스스로 계를 지킨다고 말을 하면 이런곳이 있음이 없느니라.
 
二十五. 斷 食 (단식의 이치)

又有斷食言인 斷食者는 斷無明惡業之食인데 若輒觸者는
名爲破齋이니 齋若有破하고 云何檴福이리오 世有迷愚하여 不梧斯理하고 身心放逸하여 造諸惡業하며 貪恣欲情하며 不生慙愧하면서 唯斷外食을 自爲持齋하니 何異痴兒
見爛壞死屍하고 稱言有命이리오 必無是處니라
또 음식을 끊는다고 하는 말인 단식은 무명악업(無明惡業)의 음식을 끊는 것이거늘 만약 이것에 저촉되면 재를 깨뜨린 것이라 하는 것이니 재를 만약 깨뜨리고서 어찌 복덕을 얻을 수 있으리오. 세상에 미혹하고 어리석어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몸과 마음을 함부로 방종하게 하여 온갖 나쁜 업을 지으며 욕정(慾情)을 마음대로 탐내면서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서 오직 밖으로 음식만을 끊는 것을 스스로 재계를 지킨다 하니 어찌 어리석은 아이가 죽어 썩은 시체를 보고 살아있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과 다르리오. 이것은 반드시 옳지 못한 것이니라.

二十六. 禮 拜 (바른 예배)

又禮拜者는 常如法也이니 必須理軆內明하고 事相外變이라 理不可捨이나 事有行藏이니 會如是義하면 乃名依法하니라 夫禮者는 敬也이요 拜者伏也이니 所謂恭敬眞性하고
屈伏無明해야 名爲禮拜니라 以恭敬故로 不敢毁傷하고
以屈伏故로 無令縱逸나니 若能惡情 永滅하고 善念恒存하면 雖不現相이라도 常爲禮拜니라 其相者는 則身相也니
欲爲令諸世俗 表謙下心이니 故須屈伏外身하여 現恭敬相이니라 用之則現이요 捨之則藏이니 擧外明內는 性相應也니라
若復不行理法하고 唯執外相하면 內則迷故로 縱於貪嗔癡하여 常爲惡念하며 外則空顯身相으로를 何名禮拜리오
無慙於聖故로 誑凡이니 不免輪墮이니라 豈成功德이리오 旣無所得이니 云何求道니라
또 예배(禮拜)라 하는 것은 항상 법답게 한다는 뜻이니, 반드시 진리의 바탕은 안으로 밝고 일의 겉모습은 변하는 것이라 진리(理)는 버리지 못하나 일(事)은 드러난 것과 숨은 것(변화)이 있으니, 이와 같은 바른 이치를 알면 비로소 법에 의지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니 무릇 예(禮)라 하는 것은 공경이며, 절(拜) 하는 것은 조복한다는 것이니, 이른바 참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하여 예배라 하는 것이니라.
공경함으로써 헐뜯지 아니하고, 굴복되었음으로써 방종함이 없게 되나니, 만약 능히 악한 뜻을 영원히 멸하고 착한 생각이 항상 이어져 있으면 비록 겉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항상 예배하는 것이니라.
그 보이는 것은 몸짓인 것이니 모든 세속인으로 하여금  하심 함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겉으로 몸을 굽혀 공경하는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니라.
작용하면 나타나는 것이요, 버리면(捨) 감추어지나니, 밖으로 움직(절)여 안이 밝아져서 성품과 모습이 응하여야 하느니라.
만약 뒤집혀서 법다운 이치로 행하지 않고 오직 겉모습의 예배(절)만을 집착한다면 안으로는 미혹하게 되므로 탐욕과 화로 어리석게 되어 항상 나쁜 생각을 지으면서 겉으로는 공허한 겉모습만을 드러내는 짓을 어찌 예배라 하리오. 성인에게 부끄러움이 없음으로 범부를 속이는 것이니 반드시 윤회에 떨어짐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어찌 공덕을 이루리오. 이미 얻을 바가 없거늘 어찌 도를 구한다고 하리오

二十七. 洗 浴 (목욕의 참뜻)

又問曰하되 如溫室經云하되 說洗浴衆僧 得福無量이니
此則憑何事法이 功德始成 若有觀心해도 可相應不인가
答曰하되 洗浴衆僧者는 非說世間有爲事也이니 世尊堂爾爲諸弟子하여 說溫室經하여 欲令受持洗浴之法이니 是故로  假諸世事하여 譬喩眞宗하여 隱說七事 供養功德이니라
其七事者는 一者는 淨水요 二者는 燃火요 三者는 澡豆요 四者는 楊枝이며 五者는 淨灰요 六者는 蘇膏며 七者는 內衣니라  擧此七事喩於七法하여 一切衆生이 用此七法하여 沐浴莊嚴하면 能除三毒하고 無明垢穢니라 其七法者는
一者는 法戒이니 洗溫참?非하여 猶如淨水 去諸塵垢이요
二者는 智慧이니 觀察內外하되 猶如燃火 能溫淨水며
三者는 分別이니 揀棄諸惡이 猶如澡豆가 能淨垢膩이요 四者는 眞實이니 斷諸妄語가 猶如楊枝 能消口氣이며
五者는 正信이니 決意無慮가 猶如淨灰摩身 能辟諸風이요 六者는 調息이니 軟伏諸剛强하기를 猶如酥膏 通潤皮膚며 七者는 慚愧이니 悔諸惡業을 猶如內衣 遮蔽醜形이니라 以上七事가 並是經中에 秘密之藏이나 如來當爾爲諸
大乘利根者說이니 非爲小乘智淺下劣者凡夫 所說以니
今人이 無能梧解니라
또 묻기를 “온실경(溫室冼浴衆僧經)에 이르기를 ‘여러 스님들을 목욕시켜 주면 한량없는 복을 누린다’ 설하셨으니,
이 어떤 일을 법으로 의지하는 것이 공덕을 비로써 성취할 수 있나이까? 만약 마음을 관하는 것만으로는 상응(相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오이까?”
답해 이르기를 “스님들을 목욕시킨다 하는 것은 세간의 함이 있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니, 세존께서 모든 제자들을 위하여 ‘온실경’을 설하시어 목욕하는 법을 받아지니게 하신 것이니 이는 세상 일(事)을 빌려서 참종지(眞宗)와 비유하여 일곱 가지 일로 공양공덕을 은밀하게 말씀하신 것이니라.
그 일곱 가지라 하는 것은 첫째는 맑은 물이요, 둘째는 불을 피우는 일이요, 셋째는 비누(澡豆)요, 넷째는 버드나무 칫솔(楊枝)이요, 다섯째는 맑은 재(淨灰)요, 여섯째는 우유 기름이요, 일곱째는 속옷이니라.
이 일곱가지를 들어서 일곱가지 법을 비유하여 일체 중생들이 이 일곱 가지 법을 써서 목욕하고 장엄하면 능히 三독무명의 때(垢)를 벗길 수 있는 것이니라.
일곱가지 법이라 하는 것은 첫째는 법과 계율이니 잘못된 허물을 따뜻하게 데워서 씻기를 마치 맑은 물로 모든 더러움을 씻는 것과 같은 일이요, 둘째는 지혜이니 안팎을 관찰하기를 마치 타오르는 불과 같이 능히 맑은 물을 데우는 것과 같은 것이며, 셋째는 분별(分別)이니 모든 악을 가려버리는 것이 마치 비누로 능히 때를 제거하는 것 같은 것이요, 넷째는 진실(眞實)이니 온갖 거짓말을 끊는 것이 마치 버드나무로 칫솔질로 능히 입안을 깨끗이 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다섯째는 바른 믿음이니 뜻을 결정코 헛됨이 없게 하는 것이 마치 맑은 재로 몸을 문질러 모든 풍병을 능히 물리치는 것과 같은 것이요, 여섯째는 호흡의 조절이니 모든 굳은 습기를 조복받기를 마치 우유기름이 피부를 윤택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일곱째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니 모든 나쁜 업을 뉘우치기를 마치 속옷이 추한 알몸을 가리는 것 같은 것이니라.
이 상의 일이 곧 경 가운데 비밀스럽게 감춰진 것이거늘
여래께서 여러 대승의 근기가 예리한 이를 상대로 설하신 것이니 소승의 지혜가 얕고 근기가 하열한 범부에게 설한 것이 아니니 요즘 사람들이 능히 깨달을 수 없을 뿐인 것이니라.

其溫室者는 則身是也이니 所以然智慧火로 溫淨戒湯하여 沐浴身中 眞如佛性하되 受持七法하여 以自莊嚴니라
當時比丘는 聰明利智하여 皆悟聖意하여 如說修行하여
功德成就해서 俱登聖果이나 今時衆生은 愚痴鈍根이라
莫測斯事하고 將世間水하여 洗質碍身하며 自言依敎하니 豈非誤也리오 且眞如佛性은 非是凡形이니 煩惱塵垢는
本來無相거늘 豈可將碍水하여 洗無明身인가 事不相應거늘 云何悟道리오 若言碍身 得淸淨者하면 常觀하라 此身은 本因貪欲하여 不淨所生이라 臭穢駢闐하여 內外充塞하라 若洗此身하여 求於淨者면 猶如洗泥 終無得淨이니
如此驗之로 明知外洗 非佛說也니라
온실(溫室)이라 하는 것은 곧 몸인 것이니, 이른바 지혜의 불로써 계율의 탕을 맑고 따뜻이 데워서 몸 가운데의 진여·불성을 목욕하기를 일곱 가지를 지녀 스스로 장엄하여야 하는 것이니라.
그때의 비구들은 총명하고 지혜가 날카로워 모두가 성인의 뜻을 깨달아 말씀대로 수행하여 공덕을 성취해서 구족한 성과를 증득하여 거룩한 지위에 올랐으나 지금의 중생들은 어리석고 둔한 근기라 이러한 일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세간의 물을 가져 육신의 때를 씻으면서 스스로 가르침에 의하노라 말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리오.
그리고 진여인 불성은 곧 범상한 형체가 아니니 번뇌의 때는 본래 모습이 없거늘 어찌 물을 가져 무명의 몸을 씻으리오. 사리가 맞지 않거늘 어찌 도를 깨달았다 하리오.
만약 육신이 깨끗함을 얻었다고 말하려면 항상 관찰하기를 ‘이 몸은 본래 탐욕으로 인하여 깨끗지 못한 것으로 생긴 것이어서 악취와 때와 똥이 뒤섞여 안팎에 가득하다’하라.
만약 이 몸을 씻어서 깨끗이 하기를 바란다면 마치 진흙을 씻어도 끝내 맑아질 수 없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증험으로 씻으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니라.”

二十八. 明念佛 (염불을 밝힘)

又問曰하되 經所說言하되 志心念佛하면必得徃生 西方淨土이니 以此妙門則으로 應成佛인데 如何觀心하면 求於解脫이라 答曰하되 夫念佛者는 當修正念이니 了義爲正하고
不了義爲邪니라 正念은 必得西方邪念으로 云何達彼리오 佛者는 覺也이니 所謂覺察身心하고 勿令起惡이요 念者는 憶也이니 所謂憶特戒行하여 不忘精勤이니라 了如是義해야 名爲正念이니 故知하라 念在於心 不在言也니라
또 묻기를 “경에 설하신 바로는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반드시 서방정토에 왕생한다’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묘문(정토로 들어가는 묘한 법문)으로 응당히 성불할 것이거늘 어찌 마음만 관하면 해탈을 구한다 하시옵니까?”
 답하기를 “대체로 염불이라 하는 것은 마땅히 바른 생각을 닦는 것이니, 바른 깨달음(了義)을 바르다 하고, 불요의(不了義)를 삿되다 하느니라. 바른 생각은 반드시 서방에 나거니와 삿된 생각으로 어떻게 저쪽(피안)에 도달한다하리오.
부처라 하는 것은 깨달음이니 이른바 몸과 마음을 살펴 깨치고 악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요, 생각한다 하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니 이른바 계행을 기억해 가져서 잊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은 바른 뜻을 깨쳐 알아야 바른 생각이라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알라. 생각은 마음에 있는 것이요 말에 있지 않는 것이니라.
  
因筌求魚하고 得魚忘筌이며 因言得意이니 得意忘言이니라 旣稱念佛之名이면 須行念佛之軆니라 若念無實體하여
口誦空名하면 徒自虛空이니 有何成益이리오
且如誦之與念이니 名義懸殊하니 在口曰誦하고 在心曰念이니라 故知하라 念從心起라 名爲覺行之門이요 誦在口中은
即是音聲之相이니 執相求福이라 終無是乎니라
통발(筌)을 인하여 고기를 잡고 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버리는 것이며, 말을 인하여 뜻을 얻나니 뜻을 얻었으면 말을 잊어야 하는 것이니라. 이미 염불이라 명칭을 붙였다면 모름지기 염불의 실체로 행할지니라.
만일 생각에 실체가 없이 입으로만 헛되게 이름만 외운다면 스스로 빈 것을 쫓을 뿐이니 무슨 이익을 성취할 수 있으리오.
또 외우는 것과 더불어 염(念)하는 것이 같아야 하는 것이니 이름과 바른 뜻이 아득히 다른 것이니 입으로 하면 외운다 하고, 마음으로 하면 염한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염하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남을 쫓는지라 깨치는 수행의 문이라 하는 것이요, 입만으로 외우는 것은 곧 음성의 모습이니 형상에 집착하여 복을 구하는 것이라 끝내 옳지 못한 것이니라.

二十九. 會相歸心 (형상을 모아 마음으로 돌아감)

故經云하되 凡所有相는 皆是虛妄이라 又云하되 若以色見我거나 以音聲求我하면 是人은行邪道이니 不能見如來리라 以此觀之하되 乃知事相는 非眞正也니라 故知하라 過去諸聖이 所修功德은 皆非外說이니 唯只論心이니라 心是衆聖之源이며 心爲萬惡之主이니 涅槃常樂이 由自心生이라 三界輪廻도 亦從心起니라 心爲出世之門戶요 心是解脫之關津이니 知門戶者하면 豈廬難成하며 識關津者인데 何憂不逹하리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하셨고, 또 이르기를 ‘만약 모양으로써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나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로써 살피건대 일(事)의 형상은 참으로 바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알라. 과거 모든 성인들이 닦은바 공덕은 모두가 딴 말씀이 아니니 오직 마음을 논하셨을 뿐이니라.
마음은 곧 성인들의 근원이며, 마음은 모든 악한 것의 주인이기도 하나니, 위없는 참 즐거움이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라 三계의 윤회도 역시 마음을 쫓아 일어 나는 것이니라.
마음은 세간을 벗어나는 문턱이요, 마음은 곧 해탈하는 나루터이니 문턱을 알면 어찌 이루지 못할 것을 염려하며, 나루터를 알거늘 어찌 도달치 못할 것을 근심하리오.

三十. 佛像 塔廟의 義 (불상과 탑묘조성의 바른뜻)

竊見今時淺識하면 唯知立相爲功하여 廣費財寶하고
多傷水陸하며 妄營像塔하며 虛役人功하여 積木壘泥하고 塗靑畵綵하며 傾心盡力하니 損己迷他이니 未解慚愧이니 何曾覺悟리오 見有爲則하고 勤勤愛着하나 說無相則하면 兀兀如迷로다 且貪世上之小樂하다 不覺當來之大苦나니 此之修學하면 徒自疲勞이라 肯正歸邪이니 誑言獲福이니라
요즘의 식견이 얕은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오직 상을 세우는 것으로 공덕을 삼는 것으로 알아 재물과 보물을 많이 허비하고 물과 육지의 많은 것들을 손상하며 망령되이 불상과 탑을 세우며 헛되이 사람들의 공을 수고롭게 하여 나무나 진흙을 쌓아 올리고 울긋불긋 채색을 하며 마음과 힘을 다 기울이니 자기도 손해되고 남도 미혹하게 하나니,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거늘 어찌 일찍이 깨달을 것이리오. 
함이 있는(有爲) 법칙을 보고는 부지런히 애착하나 형상 없는(無相) 법을 설해 주면 꼼짝도 하지 못하는 모양같이 미혹하도다.
잠깐 세상의 조그마한 쾌락을 탐하다가 앞으로 오는 세상의 큰 고통을 깨닫지 못하나니 이런 공부를 닦으면 부질없이 스스로를 피로하게 할 뿐이라 바름을 등지고 삿된 길로 돌아가는 것이니 거짓말로 복을 얻는다 하는 것이니라.

三十一. 心觀覺了 (마음을 살펴 깨쳐 마치라)

但能攝心內照하여 覺觀常明하라 絕三毒心하여 永使消亡하고 閉六賊門하여 不令侵擾하면 自洹沙功德과 種種莊嚴과
無量法門을 一一成就리라 超凡證聖이 目擊非遙라
悟在須叟인데 何煩皓首리오 眞門幽秘이니 寧可具陳이나 略說觀心하여 詳其少分이노라
다만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비춰서 항상 밝게 살펴(觀) 깨치도록 하라.
三독의 마음을 끊어 영원히 녹여 없애고 六적(賊)의 문을 닫아서 다시 침범치 못하게 하면 항하의 모래 수 만한 공덕과 갖가지 장엄과 한량없는 법문을 낱낱이 성취하리라.
범부를 뛰어넘어 성과를 증오하는 것이 눈 깜짝 사이에 멀지 않는지라. 깨달음이 잠깐 사이에 있거늘 어찌 흰머리가 되기를 기다리리오.
참으로 실답게 깨달아 드는 문이 그윽하고 비밀스러우니, 편안하게 두루 갖추어 일러줄 수 있으리오만 마음을 살피(觀)는 것을 간략히 설하여 그 조그만치나마 자세히 밝혔노라.”  
************ 1권 끝 *************책 발간 법문 끝.****

선문촬요(禪門撮要) 제 三권

三. 보조 수심결(菩照修心決)

一. 擧苦示眞 (괴로움을 들어 참됨을 보임) 

三界熱惱가 猶如火宅인데 其忍淹留하여 甘受長苦인가 欲免輪廻이면 莫若求佛이요 若欲求佛이면 佛卽是心인데
心何遠覓이리오 不離身中이나 色身是假라 有生有滅이나 眞心은 如空하여 不斷不變이니라 故云하되 百骸潰散하여 歸火歸風이나 一物 長靈하게 蓋天蓋地니라

三계(界)의 뜨거운 번뇌가 마치 불타는 집(火宅)같거늘 거기에 머물러 오랜 고통을 받을 것이련가?
윤회를 면하려면 부처를 구하지 않아야만 하느니, 만약 부처를 구하려 한다면 부처는 곧 마음이거늘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으리오.
색신의 몸 가운데를 여의지 않았으나 색신(色身)은 곧 거짓이라 생이 있고 멸이 있으나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짐도 변하지도 않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백골(百骸)은 무너지고 흩어져서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나, 한 물건은 영원히 신령하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하니라.

二.迷心修道終無利益
(미혹한 마음으로 도를 닦으면 마침내 이익이 없음)

嗟夫라 今之人은 迷來久矣하여 不識自心 是眞佛하고 不識自性 是眞法인데 欲求法而하되 遠推諸聖하며 欲求佛而하되 不觀己心이니라 若言心外有佛하고 性外有法하여 堅執此情하며 欲求佛道者라면 縱經塵劫토록 燒身燃臂하며 敲骨出髓하며 刺血寫經하고 長坐不臥하며 一食卯齋하고 乃至轉讀 一大藏敎하는 修種種苦行도 如蒸沙作飯하여 只益自勞爾니라
슬프도다! 요즘 사람들은 미혹한지가 오래되어, 자기의 마음이 곧 참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성품이 참법인 것을 알지 못하고 법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멀리 여러 성인에게서 찾으며, 부처를 구하고자 하면서도 자기의 마음을 관하지 않느니라.
만약 말하기를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거나 성품 밖에 법이 있다고 하여 이 뜻을 굳게 고집하며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비록 미진겁을 지내도록 몸을 태우고 팔을 뜨며, 뼈를 깨고 골수를 뽑으며 피를 뽑아 경전을 쓰고 오래 앉아 눕지 않으며 하루에 한 끼니만 먹고 나아가 일대장경의 가르침을 모두 해독하는데 까지 이르는 갖가지 고행을 닦아도 모래를 삶아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단지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니라.

三. 聖凡一道 只明一心
(성인과 범부가 한가지 도로 오직 마음 하나만을 밝힘)

但識自心하면 恒沙法門과 無量妙義를 不求而得하니라 故 世尊云하되 普觀一切衆生하니 具有如來智慧德相이라 又云하되 一切衆生種種幻化도 皆生如來圓覺妙心이니 是知離此心外 無佛可成이니라 過去諸如來도 只是明心底人이며 現在諸賢聖도 亦是修心底人이며 未來修學人도 當依如是法이니 願諸修道之人은 切莫外求니라 心性無染하여 本自圓成이니 但離妄緣하면 卽如如佛이니라
다만 자기의 마음을 알기만 하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이치를 구하지 않아도 증득하게 되니라.
그러므로 세존께서 이르시기를 “일체 중생들을 두루 살펴보니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을 갖추고 있다”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일체 중생의 갖가지 허깨비(虛幻)들도 모두 여래의 원각묘심(圓覺妙心)에서 나온 것이라”하셨으니,
이로써 마음을 떠나서 밖에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곧 알 것이니라.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다만 이 마음을 밝히신 사람이며, 현재의 모든 현성도 역시 이 마음을 닦은 사람이며, 미래에 닦을 학인도 마땅히 이와 같은 법에 의지해야 하리니, 바라건대 모든 도를 닦는 사람들은 절대로 밖에서 구하지 말지어다.
마음의 성품은 물들지 않아 본래부터 자연히 뚜렷이 이루어진 것이니 다만 허망한 인연만 여의면 곧 여여(如如)한 부처니라.

四. 衆生日用 不知這一物
(중생은 날마다 활용하면서도 그 한 물건을 알지 못함)

問하되 若言佛性 現在此身이면 旣在身中인댄 不離凡夫인데 因何로 我今不見佛性고 更爲消釋하여 悉令開悟하오 答하되 在汝身中인데 汝自不見이니라 汝於十二時中에 知飢知渴하고 知寒知熱하며 或瞋或喜가 竟是何物인가 且色身은 是地水火風四緣의 所集이라 其質이 頑而無情하니 豈能見聞覺知리오 能見聞覺知者는 必是汝佛性이니라 故로 臨濟云하되 四大는 不解說法聽法하며 虛空도 不解說法聽法이나 只汝目前에 歷歷孤明하여 勿形段者가 始解說法聽法하니 所謂勿形段者가 是諸佛之法印이며 亦是汝 本來心也니라
묻기를 “불성이 나타난 이 몸에 있다고 말씀 하실 것 같으면, 이미 몸 가운데 있어서 범부를 여의지 않았거늘 무슨 까닭으로 저는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하옵니까? 다시 소상히 해석하여 모두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답하기를 “그대의 몸 가운데 있건만 그대가 스스로 보지 못하니라. 그대가 하루 동안 시장하고 목마르고 추위와 더위를 알며 혹은 성내기도 하고 혹은 기뻐하는 것이 끝내 이 무엇인가?
또 색신은 곧 흙. 물. 열기. 바람인 네가지 인연이 모인 것인지라, 그 성질이 무뎌서 정식이 없거늘 어찌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겠는가? 능히 견. 문. 각. 지하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불성인 것이니라.
그러므로 임제(臨濟)선사가 이르기를“四대(大)는 설법을 하지도 법을 듣고 알지도 못하며, 허공도 법을 설하지도 법을 듣고 알지도 못하나, 다만 그대의 눈앞에 또렷하고 분명하나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비로소 설법도 청법도 할 줄 안다” 하셨으니 이른바 형용할 수 없는 것이 곧 부처님들의 법인(法印)이며, 역시 곧 그대의 본래의 마음이니라.

五. 擧古明證 (옛 성인의 깨친 인연을 들어 밝게 증명함)

則佛性이 現在汝身인데 何假外求리오 汝若不信하여 略擧古聖入道因緣하여 令汝除疑리니 汝須諦信하라 昔異見王이 問婆羅提尊者曰하되 何者是佛인가 尊者曰하되 見性이 是佛이오 王曰하되 師는 見性否인가 尊者曰하되 我見佛性이오 王曰하되 性在何處인가 尊者曰하되 性在作用이오 王曰하되 是何作用이기에 我今不見인가 尊者曰하되 今現作用이나 王自不見이오 王曰하되 於我有否인가 尊者曰하되 王若作用하면 無有不是이나 王若不用하면 軆亦難見이오 王曰하되 若當用時에는 幾處出現인가 尊者曰하되 若出現時에는 當有其八이오 王曰하되 其八出現을 當爲我說하오 尊者曰하되 在胎曰身하고 處世曰人하고 在眼曰見하고 在耳曰聞하고 在鼻辨香하고 在舌談論하고 在手執捉하고 在足運奔하니 徧現俱該沙界하고 收攝하면 在一微塵하면서 識者이니 知是佛性이나 不識者는 喚作精魂하자 王聞하고 心卽開悟니라 又僧이 問歸宗和尙하되 如何是佛하니 宗云하되 我今向汝道하나 恐汝不信이니라 僧云하되 和尙誠言을 焉敢不信하니 師云하되 卽汝是하라 僧云하되 如何保任하니 師云하되 一翳在眼하면 空華亂墜하자 其僧이 言下有省하니라 上來所擧으로 古聖入道因緣이 明白簡易하여 不妨省力이니 因此公案하여 若有信解處하면 卽與古聖하여 把手共行하리라
 곧 불성(佛性)이 그대의 몸에 나타나 있거늘 어찌 거짓된 밖을 향해 구하리오?
그대가 믿지 못할까 하여 옛 성인들이 깨달은 인연을 간략하게 들어서 그대로 하여금 의심을 제하게 해 주리니 그대는 모름지기 살펴서 믿으라.
옛적에 이견왕(異見王)이 바라제(婆羅提)존자에게 묻기를“무엇이 부처인가요?”하니 존자가 말하기를 “보는 성품이 곧 부처요”하자 왕이 말하기를 “선사께서는 성품을 보셨나이까?”하니
존자가 말하기를 “내가 보는 것이 부처의 성품이오.”하자
왕이 말하기를 “성품이 어디에 있소이까?”하니
존자가 말하기를“성품은 작용하는데 있소이다.”하자
왕이 말하기를 “곧 어떠한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볼 수 없는 것이오?”하니 존자가 말하기를 “지금도 작용을 나타내나 왕께서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오”하자 
왕이 말하기를 “나 에게도 있소이까?”하니
존자가 말하기를 “왕께서 작용을 하시면 그 아닌 것이 없으나 왕께서 작용하지 않으면 모습을 역시 보기가 어렵나이다”하자
왕이 말하기를 “응당 작용할 때에는 몇 군데로 나타나오?”하니 존자가 말하기를“나타날 때에는 여덟 가지가 있사옵니다.”하자 왕이 말하기를“그 여덟 가지로 나타나는 것을 마땅히 저에게 설해 주소서”하니
존자가 말하기를“태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머물러 있으면 사람이라 하고, 눈에서는 본다 하고, 귀에서는 듣는다 하고, 코에서는 맡는다 하고, 혀에서는 말을 하고, 손에서는 물건을 잡고, 발로는 운동해 다니고 두루 나타나면 항하사 세계를 덮으며, 거두어 모으면 한 티끌 속에 있으나 아는 자는 이를 불성임을 아나, 모르는 자는“정신이다. 혼이다”라고 지어 부르옵니다.”하자 왕이 듣고 마음이 곧 깨쳐 열리었느니라.
또 僧이 귀종(歸宗)화상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이옵니까?’하니 귀종이 이르기를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해 주고자하나 그대가 믿지 않을까 걱정이니라.’하자
僧이 이르기를 ‘화상께서 하시는 옳은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사옵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그대가 곧 그니라.’ 하자
僧이 이르기를 “어떻게 보임(保任=보존해 지킴)하오리까?”하니선사가 이르기를“눈꺼풀 하나가 눈을 가리면 허공꽃이 어지러이 떨어지느니라.”하자 그 僧이 말 아래 깨쳤느니라.
위에 든 것으로 옛 성인들의 도에 드신 인연이 명백하고 간편하여 힘써 깨닫는데 주저할 것이 아니니, 이 공안(公案)으로 인하여 믿어 깨닫게 되면 곧 옛성인과 더불어 손을 맞잡고 거닐게 되리라.”

六. 依悟而修 非一時頓現神通
(깨달음을 의지하여 닦는 것이요, 일시에 신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님)

問하되 汝言見性하니 若眞見性이면 卽是聖人이니 應現神通變化하여 與人有殊인데  何故 今時修心之輩는 無有一人 發現神通變化耶 인가 答하되 汝不得輕發狂言하라 不分邪正하면 是爲迷倒之人이라 今時學道之人이 口談眞理하며 心生退屈하여 反墮無分之失者하고 皆汝所疑니라 學道해도 而不知先後하고 說理하나 而不分本末者하면 是名邪見이라 不名修學하니 非唯自誤라 兼亦誤他이니 其可不愼歟리오
 묻기를“그대가 말하기를 성품을 보았다 하니, 참으로 성품을 보았다면 곧 성인이리니 응당히 신통변화를 나투어 다른 사람과 다름이 있어야 할 것이거늘 무슨 까닭으로 요즘의 마음 닦는 무리들은 한 사람도 신통과 변화를 드러내어 나투지 못하옵니까?”
답하기를“그대는 함부로 미친 말을 하지 말라. 삿됨과 바른것(邪正)을 분별치 못하면 곧 미혹으로 뒤바뀐 사람이 되니라.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면서 생각은 퇴굴(退屈:굴복되어 물러남)하여 도리어 분명한 것을 잃고 잘못됨에 떨어지는 것은 모두가 그대가 의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라.
도를 배우면서도 앞과 뒤를 알지 못하고 이치를 말하나 본분사와 지말을 분별하지 못하면 곧 삿된 소견이라 도를 닦는다고 할 수 없나니 비록 스스로를 그르칠 뿐 아니라 겸하여 남까지 그르치나니 삼가 하지 않을 것이리오?

夫入道多門이나 以要言之하면 不出頓悟漸修兩門耳니라 雖曰하되 頓悟頓修가 是最上根機得入也이나 若推過去하면 己是多生을 依悟而修하여 漸薰而來하다 至於今生하여  聞卽發悟하여一時頓畢이니 以實而論하면 是亦先悟後修之機也니라 則而此頓漸軌轍兩門은 是千聖之軌轍也이니 則從上諸聖이 莫不 先悟後修 因修乃證이니라 所言의 神通變化는 依悟而修하여 漸薫所現으로 非謂悟時 卽發現也니라
 무릇 도에 들어가는 문은 많으나 요약해서 말하면 돈오(頓悟=활짝 깨침)와 점수(漸修=차츰 닦음)의 두 문을 벗어나지 않느니라. 비록 말하기를 돈오(頓悟=활짝 깨침)와 돈수(頓修=활짝 닦음)가 최상의 근기가 증득하여 든다하나 과거를 미루어 보면 이미 곧 여러 생(生)을 깨침을 위해 닦아서 점차로 익혀 오다가 금생에 이르러 듣자말자 활짝 깨달음이 드러나 한꺼번에 (닦음을)마친 것이니, 실상으로써 사리를 밝힌다면 이 또한 먼저 깨닫고 나중에 닦는 기틀이니라.
곧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곧 여러 성인의 법도(軌轍)이니, 곧 예로부터 모든 성인들이 모두가 먼저 깨닫고 나중에 닦으셨으며 닦음으로 인하여 증득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말한 바의 신통변화는 깨달음에 의하여 닦아서 점검 훈습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으로 깨닫는 즉시 곧 드러나는 것이 아니니라.
淸峯 註解: 이장의 문장은 일관성이 없어 모순이 있다 하리다.

如經云하되 理卽頓悟이니 乘悟倂消이나 事非頓除라 因次第盡 이로다 故로 圭峰도 深明先悟後修之義曰하되 識氷池而全水하나 借陽氣以鎔消하나 悟凡夫而卽覺해도 資法力以熏修해야 氷消則水流潤하여 方呈漑滌之功하니 妄盡則心靈通하여 應現通光之用이니 是知事上神通變化 非一日之能成이니라 乃漸熏而發現也니라 況事上神通은 於達人分上에는 猶爲妖怪之事라 亦是聖末邊事라 雖或現之라도 不可要用인데 今時迷癡輩는 妄謂一念悟時에 卽隨現 無量妙用 神通變化하니 若作是解하면 所謂不知先後하며 亦不分本末也이니 旣不知先後本末하고 欲求佛道라면 如將方木 逗圓孔이니 豈非大錯리오 旣不知方便故로 作懸崖之想하여 自生退屈하여 斷佛種性者가 不爲不多矣라 旣自未明하여 亦未信他人 有解悟處하고 見無神通者로 乃生輕慢하니 欺賢誑聖이라 良可悲哉로다
이같이 경(經)에도 이르기를“이치로는 활짝 깨달아 깨달음에 오르면 아울러 (습기가)소멸하는 것이나, 현실(事)로는 몰록 (습이)제거되지 않는지라 차츰 따라 멸진한다.”하셨느니라.
그러므로 규봉(圭峰)화상도 먼저 깨닫고 나중에 닦는 바른 이치를 깊이 밝혀 이르기를 “얼음언 못 전부가 물인 것은 아나 햇볕을 빌려야 녹나니, 범부가 곧 부처(覺)임을 깨달았어도  법력(法力)을 바탕으로 습기를 닦나니, 얼음이 녹아 물이 흥건히 흘러야 바야흐로 적시고 씻는 공력이 나타나나니 망념이 다하면 마음이 신령하게 통해서 응당히 신통과 광명의 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라”하였으니 이렇게 곧 현실적인 신통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 익혀야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니라.
하물며 현실상 신통이란 깨달아 통달한 분상(경지)에서는 마치 요망하고 괴이한 일이라, 역시 성인에게는 지엽적인 말단의 하찮은 일이라 비록 나타나더라도 요긴하게 쓰지 않는 것이거늘 요즘의 어리석은 무리들은 망령되이 말하기를 “한 생각 깨달으면 즉시 한량없는 미묘한 작용인 신통 변화가 따라서 나타난다”하니,
만약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른바 앞뒤를 알지 못하며, 역시 근본과 지말을 분간치 못하는 것이니, 이미 선후(앞뒤)와 본말(근본과 지엽적인것)을 알지 못하고서 불법의 도를 구하려 한다면 모난 막대기를 가져다 둥근 구멍을 막으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리오?
이미 방편임을 알지 못하므로 아득하다는 생각을 지어 스스로 퇴굴(굴복하여 물러남)심을 내어 부처의 斷佛種性者가 不爲不多矣라 부처의 씨앗인 성품(佛心種)을 끊는 이가 적지 않느니라.
이윽고 스스로가 밝지 못하니 역시 다른이의 깨달은 견처가 있음을 믿지 않고 신통이 없다는 소견으로 이에 업신여기는 마음을 내어 어진이를 속이고 성인을 기만하나니 참으로 슬프도다”

七. 辨先頓悟漸修(먼저 몰록깨닫고 차츰닦음을 밝힘)

問하되 汝言하되 頓悟漸修兩門을 千聖軌轍也하니 悟旣頓悟이면 何假漸修며 修若漸修라면 何言頓悟인가 頓漸二義를 更爲宣說하여 令絶餘疑하소서
答하되 頓悟者는 凡夫迷時에 四大爲身하고 妄想爲心하여 不知自性 是眞法身하고 不知自己靈知하여 是眞佛也하여 心外覓佛하여 波波浪走하다 忽被先覺者의 指示入路하여 一念廻光하여 見自本性이니 而此性地는 元無煩惱이며 無漏智性이 本自具足하여 卽與諸佛어 分毫不殊故로 云頓悟也하니라 漸修者는 雖悟本性 與佛無殊이나 無始習氣를 難卒頓除故로 依悟而修하여 漸熏功成하여 長養聖胎하여 久久成聖故로 云漸修也니라 比如孩子初生之日에 諸根具足하여 與他無異나 然其力未充이나 頗經歲月해야 方始成人이니라

묻기를“말씀하시기를 ‘몰록 깨달음과 점차 닦음의 양문을 여러 성인들의 법도(軌轍)라’ 하니 이미 활짝 깨달은 깨달음이라면 어찌 다시 점차 닦을 것이며, 닦은 것을 만약 점차 닦는다면 활짝 깨달았다 말 하겠사옵니까? 활짝 깨달음과 점차 닦는 두 가지 바른 이치를 다시 설해 주셔서 남은 의심을 끊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답하기를“활짝 깨닫는다 하는 것은 범부가 미혹했을 때에 四대(大)를 몸을 삼고 망상(妄想)을 마음으로 삼아 자기의 성품이 참 법신(法身)임을 모르고 곧 참법신인 자기의 신령스럽게 아는 것이 참 부처인 줄 몰라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헐떡이며 헤매다가 홀연히 먼저 깨친자(先覺者)의 깨쳐드는 지시(가리켜줌)로 길을 들어 한 생각을 찰라에 돌려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나니 이 성품 자리에는 원래 번뇌가 없으며 샘이 없는(無漏) 지혜 성품이 본래 스스로 구족하여 곧 모든 부처님들과 더불어 털끝만치도 다르지 않음으로 ‘활짝 깨달았다’ 하느니라.
점차 닦는다 하는 것은 비록 본성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끝없는 옛부터 익힌 습기를 갑자기 버리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하여 닦아 점차 익힌 공(功)으로 이뤄서 성인이 될 요인(聖胎=)을 길러 오래오래 지나서 성인이 되므로 점차로 닦는다 하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모든 감관(根)이 갖춰져서 다른 이(성인)와 다름이 없으나, 그러나 그 힘이 충실치 못하다가 세월이 좀 지나서야 바야흐로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니라.”

八. 求悟方便轉轉蹉過 (깨닫는 방법을 구하면 더욱 어긋남)

問하되 作何方便하여 一念廻機하여 便悟自性하리까? 答하되 只汝自心인데 更作什麽方便이리오 若作方便하여 更求解會하면 比如有人 不見自眼 以謂無眼 更欲求見이니 旣是自眼인데 如何更見이리오 若知不失하면 卽爲見眼이니 更無求見之心인데 豈有不見之想이리오 自己靈知도 是 旣是自心인데 何更求會리오 若欲求會하면 便會不得이니 但知不會하면 是卽見性이니라
묻기를“어떤 방편을 지어 한 생각에 기틀을 돌이켜서 문득 자성을 깨달으리까?”
답하기를“오직 그대 자신의 마음이거늘 다시 무슨 방편을 지으리오? 만약 방편을 지어 알려고 구한다면 사람이 자기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눈이 없다’하면서 다시 보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니 이미 곧 자기의 눈이거늘 어떻게 다시 보리오?
만약 잃지 않은 줄 알면 곧 눈을 본 것이니 다시 보려는 마음마저 없거늘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어찌 있으리오?
자기의 신령하게 아는 것도 또한 이미 자기의 마음이거늘 어찌 다시 알기를 구하리오?
만약 알기를 바란다면 알지 못하리니, 다만 알지 못할 줄 알면 이것이 곧 보는 것이 성품이니라.”

九. 直示空寂靈知(비어고요하고 신령하게 아는것을 바로보임)
 
問하되 上上之人은 聞卽易會이나 中下之人은 不無疑惑이니 更說方便하여 令迷者趣入써 答하되 道不屬知不知이니 汝除 却將迷待悟之心하고 聽我言說하라 諸法如夢 亦如幻化이니 故로 妄念本寂이며 塵境本空이니라
묻기를“높은 근기의 사람은 들으면 곧 쉽게 알겠으나 중·하근기의 사람은 의혹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 방편을 설하시어 미혹한 무리로 하여금 깨달아 들게 하여 주소서.”
답하기를“도는 알거나 모르는 데 속하지 않으니, 그대는 미혹을 제하고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고 내가 말하는 설명을 들으라. 모든 법이 꿈같고 또한 허깨비(幻化) 같으니 그러므로 망념이 본래 고요한 것이며 티끌 경계가 본래 공한 것이니라.

諸法皆空之處에 靈知不昧이니 卽此空寂靈知之心이 是汝本來面目이며 亦是三世諸佛과 歷代祖師인 天下善知識이 密密相傳底法印也니라 若悟此心하면 眞所謂不踐階梯하고 徑登佛地하여 步步超三界하여 歸家頓絕疑이며  便與人天爲師이며 悲智相資로 具足二利하여 堪受人天供養되어 日消萬兩黃金하리라 汝若如是되면 眞大丈夫로 一生能事己畢矣니라
모든 법이 모두 공한 곳에 신령하게 아는 것이 매(昧)하지 않으니, 곧 이 비어 고요하되 신령하게 아는 마음이 곧 그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며 또한 곧 三세의 모든 부처님들과 역대 조사들인 천하의 선지식(善知識)이 비밀히 서로 전하신 법인(法印)이니라.
만약 이 마음을 깨달으면 진실로 이른바 단계를 밟지 않고 지름길로 부처님의 지위에 올라 걸음마다 三계(界)를 뛰어나 집에 돌아가서 활짝 의심을 끊게 될 것이며, 문득 모든 인간과 더불어 하늘의 스승이 될 것이며 자비와 지혜를 바탕의 밑천으로 두 가지(복덕) 이익이 구족해서 인간과 하늘의 묘한 공양을 받게 되어 날마다 황금 만 냥을 쓰게 될 것이니라.
그대가 이와 같게 되면 참으로 대장부로 일생의 큰일을 마치게 되는 것이니라.

十.直指人心 本來是佛(사람의 마음이 본래 곧 부처임을 바로보임)

問하되 據吾分上하여 何者가 是空寂靈知之心耶인가 答하되 汝今問我者이 是汝 空寂靈知之心인데 何不返照하고 猶爲外覓인가 我今據汝分上하여 直指本心하여 今汝便悟하리니 汝須淨心하고 聽我言說하라 從朝至暮까지 十二時中에 或見或聞하고 或笑或語하며 或嗔或喜하고 或是或非하며 種施爲運轉이니 且道하라 畢竟 是誰能伊麽運轉 施爲耶인가 若言色身運轉이면 何故로 有人이 一念命終하여 都未壞爛이나 卽眼不自見하며 耳不能聞하고 鼻不辨香하며 舌不談論하고 身不動搖하며 手不執捉하고 足不運奔耶인가 是知能見聞動作 必是汝本心 不是汝色身也니라 況此色身은 四大性空하여 如鏡中像이며 亦如水月이거늘 豈能了了常知하며 明明不昧하며 感而逐通恆沙妙用也리오 故云하되 神通併妙用은 運水及搬柴하니 且入理多端이나  指汝一門하여 令汝還源하리라
묻기를“저의 분상에 의거하여 어떤 것이 이 비어 고요하되 신령하게 아는 마음이옵나이까?”
답하기를“그대가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곧 비어 고요하되 신령하게 아는 마음이거늘 어찌 반조(返照)하지 않고 여전히 밖을 향해 구하는 것인가?
내가 지금 그대의 분상에 의거하여 근본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 그대로 하여금 문득 깨닫게 하리니, 그대는 마음을 맑게 하고 내가 설하는 말을 들으라.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하루 가운데 보고 듣고 웃고 말하며, 성내고 기뻐하며, 옳고 그르다 하며 갖가지로 활동을 하는 것이니 말해보라! 결국 이것이 누가 운전하고 행하게 하는 것인가?
만일에 말하기를‘색신(色身)이 운전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사람이 잠깐 사이에 목숨이 끊어지게 되어 전혀 썩지 않았으나 곧 눈은 보지 못하며, 귀는 듣지 못하고, 코는 냄새를 맡지 못하며, 혀는 말을 하지 못하고, 몸은 요동치 못하며, 손은 잡지 못하고, 발은 다니지 못하는가?
이로써 능히 보고 듣고 동작하는 것이 반드시 그대의 본심(本心)이요 그대의 색신(몸뚱이)이 아님을 알 것이니라.
하물며 이 색신은 四대(大)의 성품이 공하여 거울 속의 그림자 같으며 물속의 달과 같거늘 어찌 능히 분명하게 깨쳐(了了) 항상 알며 밝고 밝아(明明) 매하지 않으면서 느끼는 대로 곧 항하사 같은 묘한 작용(妙用)을 달통 하리오?
그러므로 이르기를 ‘신통과 묘용은 곧 물 깃고 나무 나르는 것이라’ 하였으니 또 바르게 깨쳐 드는 이치는 많으나 그대에게 한문(一門:하나의 깨쳐드는문)을 가리켜 주어 그대로 하여금 근원에 돌아가게 하리라.”

十一. 直示觀音入理門
(소리를 관하여 깨쳐드는 이치의 문을 바로 보임)

汝還聞鴉鳴 鵲噪之聲麽인가 曰聞하니 曰하되 汝返聞汝聞性하라 還하니 有許多聲麽인가 曰하되 到這裡는 一切聲와 一切分別이 俱不可得하니 曰하되 奇哉奇哉라 此是觀音入理之門이니라 我更問你하리라 你道하되 到這裡하여 一切聲와 一切分別이 總不可得이니 旣不可得이면 當伊麽時는 莫是虛空麽인가 曰하되 元來不空 明明不昧이오 曰하되 作麽生是 不空之軆인가 曰하되 亦無相貌 言之不可及이오
“그대는 저 까마귀 소리와 까치의 울음소리를 듣는가?”
말하기를“듣사옵니다.”
말하기를“그대는 그대의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들어보라, 돌이켜보니 여러 가지 소리가 있는가?”
말하기를“이속에 이르러서는 일체의 소리와 일체 분별이 전혀 없사옵니다.”
말하기를“기특하고 기특하도다. 이것이 곧 관음이 진리에 깨쳐든 문이니라.”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물으리라.
“그대가 말하기를‘이속에 이르러서는 모든 소리와 모든 분별이 전혀 없다’하였으니, 이미 전혀 없다면 마땅히 그때는 곧 허공이 아닌가?”하니
말하기를“원래 비지 않아서 밝고 밝아 어둡지 않사옵니다.”
말하기를“어떤 것이 공하지 않은 바탕인가?”
말하기를“역시 모습이 없으니 말로는 미치지 못하나이다.”

曰하되 此是諸佛諸祖壽命이니 更莫疑也하라 旣無相貌이면 還有大小麽리오. 旣無大小인데 還有邊際麽리오 無邊際故로 無內外하고 無內外故로 無遠近하고 無遠近故로 無彼此니라 無彼此則이니 無往來이며 無往來則이니 無生死이며 無生死則이니 無古今이며 無古今則이니 無迷悟이며 無迷悟則이니 無凡聖이며 無凡聖則이니 無染淨이며 無染淨則이니 無是非는 無是非則이니 一切名言를 俱不可得이니라 旣總無라면 如是一切根境과 一切妄念와 乃至種種相貌와 種種名言과 俱不可得이니 此豈非本來空寂이며 本來無物也리오 然諸法皆空之處에 靈知不昧하며 不同無情이니 性自神解이니 此是汝空寂靈知인 淸淨心軆니라
말하기를“이것이 바로 여러 부처님과 조사들의 수명이니 더 의심하지 말라. 이미 형상과 모습이 없다면 크고 작음은 있겠는가? 크고 작음이 없을진대 끝은 있겠는가? 끝이 없으므로 안팎이 없고, 안팎이 없으므로 멀고 가까움이 없고, 멀고 가까움이 없으므로 너와 나가 없느니라.
너와 나가 없으니 가고 옴이 없고, 가고 옴이 없으니 나고 죽음이 없고, 나고 죽음이 없으니 옛과 지금이 없고, 옛과 지금이 없으니 미혹과 깨달음이 없고, 미혹과 깨달음이 없으니 범부와 성인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 없으니 더러움과 깨끗함이 없고, 더러움과 깨끗함이 없으면 옳고 그름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으니 온갖 이름과 말을 모두 얻을 수 없느니라.
이미 이러한 것이 전혀 없다면 온갖 감관과 경계와 그리고 온갖 망념(妄念)과 나아가서는 갖가지 모습과 갖가지 이름과 말을 모두 얻을 수 없나니 이 어찌 본래 공적(空賊)한 것이 아니며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리요?
그러나 모든 법이 모두 공한 곳에 신령하게 아는 것이 어둡지 않아서 무정물과는 달리 성품 스스로가 신비롭게 알줄 아나니, 이것이 그대의 비어 고요하고 신령한 아는 것(空寂靈知)이며 청정한 마음 바탕이니라.

而此淸淨 空寂之心은 是三世諸佛 勝淨明心이며 亦是衆生의 本源覺性이니 悟此而守之者하면 坐一如而不動解脫하고 迷此而背之者하면 往六趣하여 而長刧輪廻하니라 故云하되 迷一心而往六趣者는 去也動也요 悟法界而하여 復一心者는 來也靜也이니 雖迷悟之有殊이나 乃本源則一也니라 所以云하되 言法者는 謂衆生心하니 而此空寂之心이 在聖而不増하고 在凡而不減이니라 故云하되 在聖智而不耀하고 隱凡心而不昧하니라 旣不增於聖하고 不少於凡인데 佛祖奚以異於人이오만 而所 以異於人者는 能自護心念耳니라
이 청정하여 비고 고요한 마음은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님들의 뛰어난 청정하고 밝은 마음이며 또한 중생들의 근원인 각성(覺性)이니, 이것을 깨달아 지키면 한결같이(一如) 앉아서 해탈의 경지에서 요동치 않게 되고, 이것을 미혹하여 등지게 되면 六취(趣)로 가서 여러 겁을 헤매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한 마음이 미혹해서 六취로 가는 것은 감(去)이며 움직임(動)이요, 법계를 깨달아서 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은 옴(來)이며 고요함(靜)이라”하셨으니, 미혹과 깨달음은 다르나 그 근원은 하나니라.
그런 까닭으로 이르기를 “법이라고 말 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이라”하셨으니, 이 비고 고요한 마음이 성인에게서도 늘지 않고, 범부에게서도 줄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성인의 지혜에서도 빛나지 않고, 범부의 마음에 숨어서 어둡지 않다”하셨느니라.
이미 성인에게서 늘지 않고, 범부에게서 작아지지 않다면 불조(佛祖)가 어찌하여 사람(범부중생)들과 다를까만 그 까닭은 사람들과 다른 것은 능히 스스로 마음(心)이 일으키는 생각(念)을 지키는 것이니라.

十二. 結 勸 (수행하기를 권함)

汝若信得及하면 疑情頓息하리니 出丈夫之志해서 發眞正見解하여 親甞其味하고 自到自肯之地則하면 是爲修心人이 解悟處也이니 更無階級次第니라 故云하되 頓也라며 如云하되 於信因中에 契諸佛果德에 分毫不殊해야 方成信也니라
그대가 믿기만 한다면 의심을 활짝 쉬게 되리니, 장부의 뜻을 내어 진정한 견해를 일으켜서 친히 그 맛을 맛보고, 자기 스스로 긍정할 경지에 곧 이르면 이것이 마음 닦는 사람의 깨쳐 알 곳이니 다시 계급(階級)도 차례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활짝 깨달음(頓悟)이라’하고, 이같이 이르기를 ‘믿음의 인(因)가운데 모든 부처님의 맺은 덕(果德:이룬 불지)에 부합되어 털끝만치도 다르지 않아야 바야흐로 믿음으로 이룬다’ 하느니라.

十三. 重示悟後漸修 (깨친후 점차 닦음을 거듭 보임)

問하되 旣悟此理하여 更無階級이면 何假後修하여 漸熏漸成耶인가 答하되 悟後漸修之義를 前己具說이나 而復疑情 未釋이니 不妨重說이니 汝須淨心하고 諦聽諦聽하라 凡夫無始曠大刧來로 至於今日까지 流轉五道하며 生來死去하며 堅執我相하여 妄想顚倒로 無明種習이 久與成性이다가 雖到今生하여 頓悟自性 本來空寂 與佛無殊해도 而此舊習을 卒難除斷故로 逢逆順境하면 瞋喜是非가 熾然起滅하여 客塵煩惱가 與前無異이면 若不以般若 加功着力하면 焉能對治無明하여 得到大休 大歇之地리오
묻기를 “이미 이런 이치를 깨달아 다시 계급이 없다면 어찌 뒤에 다시 점차 익히고 점차 이룬다 하는 것이옵니까?”
답하기를 “깨친 뒤에 점차 닦는 이치를 전에 이미 갖추어 설했으나 아직도 의혹을 풀지 못했으니 다시 설명함이 무방하리니 그대는 마음을 맑혀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으라.
범부가 시작없는 옛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5도(道=지옥·아귀·축생·인도·천상)를 윤회하며 태어나고 죽어가며 아상(我相=내있음)을 굳게 집착하여 전도된 망상의 훈습된 종자가 오랜 무명으로 더불어 성품을 이루었다가 비록 금생에 이르러서 자기의 성품이 본래 공적해서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활짝 깨달았어도 이 묵은 습기를 갑자기 제하기는 어려우므로 어지러운 경계나 거슬리지 않는 경계를 만나면 성냄과 기쁨과 옳고 그름이 어지러이 일어났다가 사라져서 밖으로 여러가지 번뇌가 예전과 다름이 없는 것은 만약 반야로써 공력을 들이지 않는다면 어찌 능히 무명을 다스려서 크게 다하여 크게 쉬는 경지에 이를 수 있으리오?

如云하되 頓悟雖同佛이나 多生習氣深이라 風停波尙湧하며 理現念猶侵하며 又杲禪師云하되 往往利根之輩가 不費多力 打發此事 便生容易之心으로 更不修治하다 日久月深하면 依前流浪하다 未免輪廻하니 則豈可以一期所悟하여 便撥置後修耶리오 故悟後도 長須照察하여 妄念忽起하면 都不隨之이니 損之又損하여 以至無爲래야 方始究竟이니 天下善知識이 悟後牧牛行是也니라 雖有後修이나 己先頓悟妄念 本空心性本淨이니 於惡을 斷斷而無斷하고 於善 修修而無修한 此乃眞修眞斷矣니라 故云하되 雖備修萬行해도 唯以無念으로 爲宗하니라
이와 같음으로 이르기를 “활짝 깨달으면 부처님과 같으나 여러 생의 습기가 깊은지라 바람은 멈추어도 파도는 여전히 출렁이며 진리가 나타나도 망념은 오히려 침노한다” 하셨으며, 또 대혜 종고(宗杲)선사가 이르기를 “간혹 영리한 무리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이 일을 밝히고서는 문득 수월하다고 낸 마음으로 더 닦아 다스리지 않다가 날이 오래되고 달이 깊어지면 전처럼 떠돌다가 윤회를 면치 못하게 된다.”하셨으니, 어찌 잠시 깨달은 바가 있다하여 다시 닦는 일을 던져 버려서야 되리오?
그러므로 깨달은 뒤에도 오래도록 비춰 살펴서 망념(妄念)이 문득 일어나면 도무지 따르지 말지니 덜고 또 덜어서 함이 없음(無爲)에 이르러야 비로소 바야흐로 깨달음을 마친 것이니 천하의 선지식(善知識)이 깨달은 뒤에 목우행(牧牛行=마음을 다스리는 행)을 한 것이 이것이니라.
비록 나중에 닦을 것이 있다고는 하나 먼저 망념이 본래 공하고 심성(心性)이 본래 맑은 줄을 이미 먼저 활짝 깨달았으니, 악을 끊되 끊을 것이 없는 것을 끊으며 선을 닦되 닦을 것이 없는 것을 닦는 이것이 참으로 닦고 참으로 끊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비록 만행(萬行=갖가지 수행)을 골고루 갖춰 닦는다 하여도 오직 무념(無念)으로 근본(宗)을 삼는다”하였느니라.

圭峰이 總判先悟後 修之義하여 云하되 頓悟此性 元無煩惱하며 無漏智性 本自具足하고 與佛無殊를 依此而修者를 是名最上乘禪이라며 亦名如來淸淨禪也이니 若能念念修習하면 自然漸得百千三昧이니 達磨門下에 展轉相傳者가 是此禪也하니 則頓悟漸修之義가 如車二輪하여 闕一不可니라
或者는 不知善惡性空하고 堅坐不動하며 捺伏身心으로 如石壓草로 以爲修心이니 是大惑矣니라 故云하되 聲聞은 心心斷惑하나 能斷之心이 是賊이라 但諦觀殺盜淫妄이 從性而起이나 起卽無起라 當處便寂인데 何須更斷하리오 所以云하되 不怕念起하고 唯恐覺遲하며 又云하되 念起卽覺하라 覺之卽無하니라 故悟人分上에는  雖有客塵煩惱라도 俱是醍醐니라 但照惑無本하면 空華三界라 如風捲煙하고 幻化六塵이 如湯消氷이니라
규봉(圭峰)선사가 깨달은 뒤에 닦는 바른 이치를 통틀어 판별하여 이르기를 “이 성품은 원래 번뇌가 없으며 샘이 없는 지혜(無漏智)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구족한 것을 활짝 깨달아 부처님과 더불어 다르지 않음에 의하여 닦는 것을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하고, 또한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라 하나니, 생각마다 닦아 익히면 백천삼매를 자연히 점차 증득 하리니, 달마(達磨)의 문하에서 대대로 전한 것이 곧 이 선법(禪法)이니라”하셨으니, 활짝 깨달은 뒤에 차츰 닦는 바른 이치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로써는 않되는 것이니라.
혹 선과악의 성품이 공한 줄을 알지 못하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눌러 억제하기를 돌로 풀을 누른 것과 같이 하는 것으로써 마음 닦는 것으로 삼으니 이는 크게 어리석은 것(惑)이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성문은 마음(생각)으로써 마음(생각)의 미혹을 끊으려하나 끊으려는 마음(생각)이 도적이라”하였으니, 다만 자세히 살펴보면 살생·투도·음행·망어가 성품으로부터 일어남이나 곧 일어남이 일어나지 않음이라, 그 자리(當處)가 문득 적멸이거니 어찌 다시 끊으려 하리오?
이러한 까닭으로 이르기를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달음이 늦는 것만을 두려워한다.”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생각이 일어나면 곧 깨달으라. 깨달음이 곧 없음이라”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의 경지(分上)에는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있어도 모두가 제호(醍醐=최상의 맛)가 되느니라.
다만 미혹의 근본이 없는 줄 비춰 알면 삼계가 허공꽃(空華)이라 바람에 걷히는 연기와 같고, 허깨비(幻化)같은 육진번뇌가 끓는 물에 녹는 얼음과 같으니라.

若能如是이 念念修習하기를 不忘照顧하여 定慧等持하면 則愛惡自然淡薄이며 悲智自然增明하며 罪業이 自然斷除되어 功行이 自然增進해서 煩惱盡時에 生死卽絕하리라 若微細流注永斷하고 圓覺大智朗然獨存하면 卽現千百億化身하여 於十方國中에 赴感應機하되 似月現九霄하면 影分萬水하듯 應用無窮하며 度有緣衆生하되 快樂無憂이니 名之爲大覺世尊하니라
만약 이와 같이 생각마다 닦아 익히기를 돌이켜 살피기를 잊지 않아 정(定)과 혜(慧)를 고루 지니면 사랑도 미움도 자연히 엷어지는 법이며 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밝아 늘어나며 죄업이 자연히 끊어져 제어되어 공덕수행이 자연히 두터워져 번뇌가 다할 때에 생사가 곧 끊어지리라.
미세한 번뇌의 흐름(流注)이 영원히 끊어지고 원만한 깨달음의 큰 지혜가 오롯이 홀로 있게 되면 곧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을 나타내어 十방국토 가운데 근기 따라 감응하기를 마치 달이 중천에 나타나면 그림자가 모든 물에 나누어 비치듯 끝없이 응용하여 쓰면서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기를 즐겁고 근심이 없으니 크게 깨친 세존(大覺 世尊)이라 이름 하느니라.”

十四. 正示二門定慧 (정과 혜를 바로 보임)

問하되 後修門中에 定慧等持之義를 實未明了하니 更爲宣說하여 委示開迷 引入解脫之門하소서 答하되 若設法義는 入理千門이 莫非定慧이니 取其綱要則하면 但自性上 軆用二義이니 前所謂空寂靈知是也니라 定是體요 慧是用也이니 卽體之用故로 慧不離定이며 卽用之體故로 定不離慧이며 定則慧故로 寂而常知며 慧則定故로 知而常寂이라 如曹溪云하되 心地無亂이 自性定이요 心地無癡自性慧니라 若悟如是하여 任運寂知하면 遮照無二則을 是爲頓門箇者가 雙修定慧也니라 定不離慧이며 定則慧故로 寂而常知며 慧則定故로 知而常寂이라 如曹溪云하되 心地無亂이 自性定이요 心地無癡自性慧니라 若悟如是하여 任運寂知하면 遮照無二則을 是爲頓門箇者가 雙修定慧也니라
묻기를“깨달은 뒤에 닦는 문 가운데 정과 혜를 고루 지니는 이치를 아직도 분명히 알지 못하겠으니 다시 설하여 베풀어 주셔서 미혹을 열고 해탈의 문에 들게 이끌어 주소서.”
답하기를“법의 이치의 바른 뜻(法義)을 설치한다면 진리에 들어가는 것은 여러 문이나 정혜(定慧=선정과 지혜) 아닌 것이 없으니 그 요긴한 이치를 대략(綱要) 취하면, 다만 자기 성품상의 체(體)와 용(用) 두 가지의 바른 뜻이니, 전에 이른바 비어 고요하나 신령하게 안다 한 그것이니라.
정(定)이 곧 바탕(體)이요 혜(慧)는 곧 작용이니, 곧 본체가 작용이므로 혜가 定을 여의지 않으며 곧 정이 곧 혜를 여의지 않으므로 작용이 본체이므로 선정이 혜를 벗어나지 않으며 정이 혜인즉 고요하나 항상 아는 것이며 혜가 즉 정이므로 항상 고요하면서도 아는 것이라 따라서 조계(曹溪:6조혜능)화상께서 이르기를‘마음 바탕에 어지러움 없는 것이 자기 성품의 선정이요, 마음 바탕에 어리석음 없는 것이 자기 성품의 지혜라’ 하셨느니라.
만약 이와 같이 깨달아 고요함과 아는 것이 자유자재(任運)하게 되면 가림과 비춤이 둘이 없는 이치를 곧 몰록 깨달아 드는 문으로 삼게 되는 이가 정과 혜를 쌍으로 닦은 것이니라.

若言하되 先以寂寂으로 治於緣慮하고 後以惺惺으로 治於昏住하여 先後對治로 均調昏亂하여 以入於靜者이면 是爲漸門劣機 所行也니라 雖云하되 惺寂等持이나 未免取靜爲行則이니 豈爲了事人이 不離本寂本知하고 任運雙修者也리오 故曹溪云하되 自悟修行은 不在於諍이니 若諍先後면 卽是迷人이니라 則達人分上에는 定慧等持之義는 不落功用이니 元自無爲 更無特地時節이니 見色聞聲時에도 但伊麽하고 着衣喫飯時에도 但伊麽하며 屙尿送尿時에도 但伊麽하고 對人接話時에도 但伊麽하며 乃至行往坐臥나 或語或黙이나 或喜或怒이나 一切時中에도 一一如是이 似虛舟駕浪하고 隨高隨下하며 如流水轉山 遇曲遇直而이 心心無知이라 今日도 騰騰任運하며 明日도 任運騰騰하게 隨順衆緣하되 無障無礙하여 於善於惡을 不斷不修해도 質直無僞하여 視聽尋常 則이라 絶一塵而作對인데 何勞遣蕩之功이며 無一念而生情이니 不假忘緣之力이니라
만약 말하기를‘먼저 적적(寂寂:고요함)으로써 어지러움(緣慮)을 다스리고, 나중에 성성(惺惺:또렷함)으로써 혼침(昏沈:졸림이나 흐리멍텅함)을 고루 조절하여 고요함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이것은 차츰 깨달아 드는 문으로 하열한 근기가 수행하는 것이니라.
오직 이르기를 ‘성성과 적적을 균등히 지닌다고는 하나 고요함만 취하여 수행을 삼는 이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일을 마친 사람(了事人)이 본래의 고요함과 본래의 신령스런 아는 것을 여의지 않고서 자유자재(任運)하여 쌍으로 닦는 것이라 하리오?
그러므로 조계(曹溪六祖)께서 이르기를 ‘수행하여 스스로 깨닫는 것은 다투(가림)는데 있지 않나니 만약 앞과 뒤를 다투면 곧 이런 미혹한 사람이라’하니라.
통달한 사람의 경지에서는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지닌다는 바른 이치는 공용(功用=애써서 노력함)에 떨어지지 않나니, 원래부터 자성은 함이 없어 다시 특이한 경지의 때가 없으니 색을 보거나 소리를 들을 때에도 다만 그러하고, 옷을 입거나 밥을 먹을 때에도 다만 그러하며 똥을 누고 오줌을 눌 때에도 다만 그러하고 사람을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다만 그러하며 나아가 다니거나 멈추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잠잠하거나 기뻐하거나 성내거나에 이르기까지 항상 이와 같이 마치 빈 배를 파도 위에 띄우면 물결을 타고 높아졌다 낮아졌다 산을 돌며 구비 돌다 직선으로 흐르는 것 같이 마음은 마음을 앎이 없는 것이라.
오늘도 훨훨(騰騰) 자유자재(任運)하며 내일도 훨훨 자유자재하게 온갖 인연 따라 순응하기를 장애도 없고 막힘도 없어서 선과 악을 끊지 않고 닦지 않아도 곧고 거짓이 없어서 보고 듣는 일에 예사로운 법이라 한 티끌도 상대되는 것이 없거늘 어찌 수고로이 떨어버리려는 공을 들일 것이며 한생각도 망정(妄情)을 낼 것이 없으니 망령된 인연을 잊으려는 노력을 빌릴 것이 아닌 것이니라.

然障濃習重하고 觀劣心浮하여 無明之力大하고 般若之力小하여 於善惡境界에 末免被動靜互換하여 心不恬淡者이면 不無忘緣遣蕩功夫矣니라 如云하되 六根이 攝境하고 心不隨緣을 謂之定하고 心境俱空하여 照鑑無惑을 謂之慧니라 此雖隨相門定慧로 漸門劣機所行也이나 對治門中이 不可無也니라 若掉擧熾盛하면 則先以定門으로 稱理攝散하여 心不隨緣하게 契乎本寂하고 若昏沈尤多하면 則次以慧門으로 擇法觀空 照鑑無惑하여 契乎本知하니라 以定治乎亂想하고 以慧로 治乎無記하여 動靜相忘하고  對治功終則하면 對境而念念歸宗하고 遇緣而心心契道하여 任運雙修해야 方爲無事人이니 若如是則하면 眞可謂定慧等持이면 明見佛性者也하니라  
그러나 업장이 두터우며 습기가 무겁고 수행(觀行)이 미약하며 마음이 들떠서 무명의 힘이 크고 반야의 힘이 작아 선과 악의 경계에 시끄럽거나 고요함에 끄달림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마음이 고요하고 담담하지 않다면 망연을 잊고 떨어버리는 공부가 없지 않으니라.
그러하여 이르기를 ‘六근(根)이 경계를 거두고 반연을 따르지 않는 마음을 선정이라 하고,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공함을 비춰 살펴 의혹이 없는 것을 지혜라 한다’ 하셨느니라.
이것이 비록 상을 쫓는 법문(법을 깨쳐드는 門)의 정과 혜로 점차로 닦아드는 하열한 근기들의 수행이기는 하나 경계를 대하여 다스려 드는 가운데가 없지를 않는 것이니라.
만약 산란(掉擧)한 생각이 치성하면 먼저 곧 선정의 문으로써 이치에 맞게 어지러운 생각을 거둬 잡아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게 본래의 고요함에 계합하고, 만약 혼침(졸음)이 너무 많거든 곧 다음에 지혜의 문으로써 일체를 보아 공함을 관찰해서 비춤에 미혹이 없는 본래의 아는것(本知)에 계합하여야 하느니라.
선정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로서 무기(無記:선도 악도 아닌 중간으로 즉 멍청함)를 다스려서 움직임과 고요함에 잊고 다스리는 공부를 마치게 되면 경계를 대하되 생각마다 근원으로 돌아가고 반연을 만나도 마음마다 도에 계합해서 자유자재하게 쌍으로 닦아야 바야흐로 일없는 사람(無事人)이 되리니, 능히 이와같이 되면 참으로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지니고 불성을 밝게 보았다 하니라.”

十五. 詳明二門定慧 (선정과 지혜의 두문을 상세히 밝힘)

問하되 據汝所判하면 悟後修門中에 定慧等持之義가 有二種하여 一은 自性定慧  二는 隨相定慧이니 自性門則을 曰하되 任運寂知가 元自無爲라 絶一塵而作對인데 何勞遣蕩之功이며 無一念而生情이니 不假忘緣之力하고 判云하되 此是頓門箇者가 不離自性하고 定慧等持也하고 隨相門則 曰하되 稱理攝散하여 擇法觀空하여 均調昏亂해서 以入無爲하고 判云하되 此是漸門으로 劣機所行也하니 就此兩門定慧에 不無疑焉이니라 若言하되 一人所行也라면 爲復先依自性門하여 定慧雙修然後에 更用隨相門으로 對治之功耶인가 爲復先依隨相門하여 定慧均調昏亂然後에 以入自性門耶인가 若先以自性 定慧則라면 任運寂知는 更無對治之功인데 何須更取隨相門定慧耶라면 如將皓玉 彫文喪德이며 若先以隨相門定慧로 對治功成然後에 趣於自性門則이면 宛是漸門中劣機가 悟前漸薫也인데 豈云하되 頓門箇者가 先悟後修하여 用無功之功也이며 若一時無前後則라면 二門定慧頓漸의 有異인데 如何一時並行也인가 則頓門箇者는 依自性門하여 任運忘功이며 漸門劣機는 趣隨相門하여 對治勞功이니 二門之機 頓漸이 不同하고 優劣皎然인데 云何하되 先悟後修門中이라 並釋二種耶인가 請爲通會하게 令絶疑情하오
묻기를 “스님(汝)의 판별에 의하면 깨달은 뒤에 닦아들어 가는 가운데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지니는 이치가 두 종류가 있어 하나는 자기 성품의 정과 혜(自性定慧)요, 둘째는 상을 쫓는 정과 혜(隨相定慧)이니 자성으로 들어가(自性門)는 이치를 말하기를 ‘자유자재하게 고요한 앎이 원래부터 스스로 함이 없는(無爲)것이라서 한 티끌도 상대될 것이 없거늘 어찌 피곤하게 버리고 쓸어버리는 공부를 해야 할 것이며, 한 생각도 정을 냄이 없어 반연을 잊는 힘을 빌리지 않는 것이라’하시고 판별하시기를‘이것은 활짝 깨달아 든 이가 자기성품(自性)을 여의지 않고서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지니는 것이라’하셨고, 경계를 따라 깨쳐 들어가는(隨相門) 이치를 일러 ‘산란을 거둬잡는 이치를 일컬어 법상을 가려 공함을 살펴서 혼침과 산란을 균등하게 조절해서 함이 없음에 들어간다’하시며 판별 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점차로 닦아드는 것으로 낮은 근기가 수행하는 것이라’하시니 이 두가지 정과 혜로 들어간다는 것을 따르기에는 의혹이 없지 않나이다.
만약 말기를 ‘한 사람의 수행할 바라’한다면 먼저 자성문(自性門)에 의해서 돌이켜 정과 혜를 쌍으로 닦은 뒤에 다시 수상문(隨相門)을 써서 경계를 대하여 다스리는 공부를 하여야 되는 것인지? 다시 반대로 먼저 수상문에 의하여 혼침과 산란을 균등하게 다스린 후에 자성문으로써 들어가야 되는 것이옵니까?
만약 먼저 자성의 정과 혜에 의지하는 이치라면 자유자재 하고 고요히 아는것(寂知)은 다시 대하여 다스릴 공부가 없는 것이거늘 어찌 다시 수상문의 정과 혜를 성취하여야 할 것이라면 흰 옥에다 문채를 새겨서 옥의 덕을 해치는 것과 같으며 만약 먼저 수상문의 정과 혜로써 경계를 대하여 다스리는 공부가 이루어진 뒤에 자성에 들어가 다다르는 이치라면 이것은 완연히 점차 닦아 드는 하열한 근기(劣機)가 깨닫기 전에 점차로 익히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이르기를 ‘활짝 깨달아 드는 것이 먼저 깨닫고서 나중에 닦는 공부할 것 없는 공부를 하는 것이라’하는 것이며, 만약 동시라서 앞뒤가 없는 이치라면 두문의 선정과 지혜가 돈(頓=활짝)과 점(漸=차츰)의 차이가 있거늘 어떻게 동시에 함께 수행 할 수 있겠나이까?
활짝 깨달아 드는 것은 자성문에 의하면 자유자재하여 공부를 잊을 것이며, 점차 닦는 부문의 하열한 근기는 수상문을 쫓아 나아가서 경계를 대하여 다스리는 공부를 힘써야 하는 것이니, 두 부문의 근기가 돈과 점이 같지 않고 우수함과 열등함이 분명하거늘 어찌하여 이르시기를 ‘먼저 깨닫고 나중 닦아 들어가는 가운데라’고 두 가지를 함께 해석하시옵니까? 청하옵건데  깨쳐 통하도록 의심을 끊어 주시옵소서”
答하되 所釋皎然인데 汝自生疑로다 隨言生解하니 轉生疑惑이니라 得意忘言하면 不勞致詰니라 若就兩門하여 各判所行則하면 修自性定慧者는 此是頓門으로 用無功之功으로 並運雙寂이니 自修自性하여 自成佛道者也니라
修隨相門定慧者는 此是未悟前에 漸門劣機가 用對治之功하여 心心斷惑하고 取靜爲行者로 而此二門所行은 頓漸 各異이니 不可叅亂也니라 然이나 悟後修門中과 兼論隨相門中 對治者는 非全取漸機所行也라 取其方便하는 假道托宿而己니라 何故하면 於此頓門도 亦有機勝者하고 亦有機劣者이니 不可一例 判其行李也니라 若煩惱淡薄하고 身心輕安하여 於善離善하고 於惡離惡하여 不動八風하고 寂然三受者하면 依自性定慧하여 任運雙修이니 天眞無作이며 動靜常禪이라 成就自然之理인데 隨相門對治之義也리오 無病이면 不求藥니라 雖先頓悟해도 濃厚習氣堅重하여 對境而念念生情하고 遇緣而心心作對하여 被他昏亂使殺하여 昧却寂知常然者하면 卽借隨相門定慧하여 不忘對治하고 均調昏亂하여 以入無爲가 卽其宜矣니라 雖借對治功夫하여 暫調習氣하나 以先頓悟心性 本淨하고 煩惱本空故로 卽不落漸門 劣機汚染修也니라 何者인가 修在悟前則이면 雖用功不忘하여 念念熏修이나 着着生疑 未能無礙함이 如有一物 礙在胷中하여 不安之相 常現在前하다 日久月深토록 對治功熟하면 則身心客塵 恰似輕安하니라雖復輕安하나 疑根未斷이 如石壓草하여 猶於生死界에 不得自在故로 云하되 修在悟前하면 非眞修也니라 悟人分上에는 雖有對治方便이나 念念無礙라 不落汚染이니 日久月深하면 自然契合天眞妙性하여 任運寂知가 念念攀緣一切境하되 心心永斷諸煩惱하여 不離自性하며 定慧等持하여 成就無上菩提하면 與前機勝者와 更無差別則이니 隨相門定慧를 雖是漸機所行이나  於悟人分上에는 可謂點鐵成金이니라 若知如是則이면 豈以二門定慧에 有先後次第라는 二見之疑乎리오
대답하기를 "해석한 것이 분명하거늘 그대 스스로 의혹을 내는구나. 말을 쫓아 알려는 생각을 내니 전도되어 의혹을 내는 것이니라.
뜻을 얻고 말을 잊으면 궁리하여 애써 따질 필요가 없으니라.
만약 두 문을 쫓아 수행의 이치를 판별하면 자성정혜를 닦는다는 것은 이것이 곧 활짝 깨달아 든다는 것으로 공력을 쓸것이 없는 공력으로 쌍으로 고요하나 나란히 운용하는 것이니 자성은 스스로가 닦아져 불도가 스스로 이뤄진 것이니라. 
수상문(修相門)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것은 곧 깨닫지 못한 이전에 점차 닦아드는 하열한 근기가 경계를 대하여 다스리는 노력을 써서 생각마다 미혹을 끊고 고요함을 취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 것이니라.
이 두 부문으로 수행한다는 것은 돈과 점이 각각 다른 것이니 혼동하지 말지니라.
그러나 깨달은 뒤에 닦아드는 가운데와 수상문중에 경계를 대하여 다스리는 것을 겸하여 사리를 밝힌 것은 점차 닦음을 취하는 근기가 수행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취하는 길을 빌려 다스려서 머묾을 의탁 하게 되는 것이니라.
어째서인가 하면 이 활짝 깨닫는 문에도 또한 근기가 뛰어남이 있고, 또한 근기가 열등함이 있으니 한가지 법으로써 그 수행의 열매를 판별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만약 번뇌가 얇고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輕安)하여 선(善)을 대하되 선을 여의고 악을 만나되 악을 여의어 여덟가지 바람(속세의 경계)에 요동치 않고 세가지(我,法,俱)를 받아들임에 고요하면 자성의 정과 지혜에 의하여 자유자재하게 쌍으로 닦을지니 천진(天眞)하여 작위(作)가 없으며 움직이고 고요함에 항상 선정인지라 자연히 진리를 성취했거늘 어찌 수상문의 상대적으로 다스리는 법을 빌리는 것이 옳으리오. 병이 없으면 약을 구하지 않느니라.
비록 먼저 활짝 깨달았다 해도 습기가 짙고 견고하게 무거워서 경계를 대하면 생각마다 망정을 일으키고 인연을 만나면 생각마다 상대를 만들어 혼침과 산란에 끄달려서 고요하게 아는것(寂知)이 항상함이 물러나 어두우면, 곧 상을 쫓아 들어가는(門) 선정과 지혜를 빌려 경계를 대하여 다스림을 잊지 않고 혼침과 산란을 균등히 조절해서 함이 없는(無爲)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곧 마땅하니라.
비록 경계를 대하여 다스리는 공부로 잠시 습기를 조절한다 하나 심성(心性)이 본래 깨끗하고 번뇌가 본래 공한 것을 먼저 활짝 깨달았으므로 곧 점차 닦아드는 하열한 근기의 더럽혀진 수행(汚染修)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니라.
어째서인가? 수행이 깨닫기 전에 있는 법칙이면 비록 잊지 않고 애를 써서(用功) 생각마다 익히고 닦으나 닫는 곳곳마다 의혹을 내어 능히 장애가 없지(無礙)를 못함이 한 물건이 가슴속에 걸려 있는것 같아서 불안한 모습이 항상 앞에 나타나 있다가 날이 오래고 달이 깊도록 경계를 대상으로 다스려 공부가 익어지면 몸과 마음의 번뇌가 흡사 가볍고 편안하게 되는 것 같으니라.
비록 다시 가볍고 평안해지기는 했으나 의혹의 뿌리가 끊이지 않음이 돌로 풀을 누른 것 같아서 아직도 생사의 세계에서 자유자재하지 못하므로 이르기를‘닦음이 깨달음의 앞에 있으면 참 닦음이 아니라’하는 것이니라.
깨달은 사람의 분상(경지)에는 비록 경계를 대해 다스리는 방편이 있으나 생각마다 방해로움이 없어서 더렵혀짐에 떨어지지 않나니,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지면 자연히 천진하고 묘한 성품에 계합하여 자유자재하게 공해서 고요하며 신령스럽게 아는 것(空寂靈知)이 생각마다 일체 경계를 반연하되 마음(생각)마다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어서 자성을 여의지 않으며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지녀 위없는 보리를 성취하면 앞서 뛰어난 근기와 더불어 차별이 없는 이치이니, 수상문의 선정과 지혜를 비록 이처럼 점차 닦는 근기가 수행하는 것이나 깨친 이의 경지에서는 가히 이르자면 무쇠를 두드려 금을 이루는 격이라 하니라.
만약 이와 같은 이치를 안다면 어찌 두 부문의 선정과 지혜에 앞뒤의 차례가 있다는 두가지 소견으로 의심 하리오?

*註釋: 지금까지의 이 장에서 일러주신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에 관하여서 某甲의 견처(見處)로서는 동의하기에는 미심쩍은 바가 없지 않은바 某甲이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문장을 법다이 의해(意解)한다면 활짝 깨침으로써 점차 닦음도 동시에 마친 뜻으로 살펴야 할 것이다.

 위 말씀들은 某甲의 견처로서 살피건대는 본인이 닦아 증한 체험을 근거로 한 말씀으로 납득 하겠다 하리다.

十六. 勸 結 (수행을 권하는 말씀을 맺음)

願諸修道之人은 硏味此語하여 更莫狐疑 自生退屈하라 若具丈夫之志하고 求無上菩提者라면 捨此奚以哉리오 切莫執文하고 直須了義하여 一一歸就自己하여 契合本宗則하면 無師之智가 自然現前하여 天眞之理了然不昧하여 成就慧身이라 不由他悟니라 而此妙旨 雖是諸人分上이나 若非夙植般若種智 大根器者이면 不能一念而生正信이니라 豈徒不信이라 亦乃謗讟하여 返招無間者하는 比比有之니라 雖不信受라도 一經於耳하여 暫時結緣이면 其功厥德 不可稱量이니라 如唯心訣云하되 聞而不信이라도 尙結佛種之因하고 學而不成이라도 猶蓋人天之福하여 不失成佛 之正因하니 況聞而信하며 學而成 守護不忘者하면 其功德을 豈能度量이리오 追念過去輪廻之業하면 不知其幾千刧 墮黑闇入無間 受種種苦하며 又不知其幾何 而欲求佛道 不逢善友 長劫沈淪 冥冥無覺하여 造諸惡業인가 時或一思하면 不覺長吁하니 其可放緩하다 再受前殃하리오 又不知誰復使 我今値人生 爲萬物之靈하고 不昧修眞之路인가 實謂盲龜遇木이며 纖芥投鍼이니 其爲慶幸을 曷勝道哉리오 我今若自生退屈하거나 或生懈怠하여 而恒常望後하다 須臾失命하고 退墮惡趣하여 受諸苦痛之時에 雖欲願聞一句佛法하며 信解受持하여 欲免辛酸해도 豈可復得乎리오 及 到臨危하여 悔無所益이라 願諸修道之人은 莫生放逸하며 莫着貪淫하고 如救頭燃하듯 不忘照顧하라 無常迅速하여 身如朝露하고 命若西光하여 今日雖存이나 明亦難保이니 切須在意하고 切須在意하라 且憑世間有爲之善도 亦可免三途苦輪하여 於天上人間에서 得殊勝果報하여 受諸快樂인데 况此最上乘하고 甚深法門을 暫時生信하여 所成功德은 不可以比喩 說其小分이니라 如經云하되 若人이 以三千大千世界七寶로 布施供養爾所 世界衆生하되 皆得充滿 又敎化爾所 世界一切衆生하여 令得四果하면 其功德이 無量無邊하나 不如一食頃에 正思此法 所獲功德하니 是知건데 我此法門 最尊最貴하여 於諸功德도 比况不及하니라 故經云하되 一念淨心이 是道場이라 勝造恒沙 七寶塔하니 寶塔은 畢竟碎爲塵이나 一念淨心은 成正覺이라니 願諸修道之人은 硏味此語하여 切須在意하라 此身을 不向今生度하면 更待何生度此身이리오 今若不修하면 萬刧差違이나 今若强修하면 難修之行도 漸得不難하여 功行自進하리라 嗟夫 今時人은 飢逢王膳하되 不知下口하고 病遇醫王 不知服藥이니 不曰하되 如之何如之何者 吾未如之何也 己矣니라 且世間有爲之事는 其狀可見하고 其功可驗하여 人得一事해도 嘆其希有하나 我此心宗은 無形可觀하고 無狀可見하여 言語道斷이요 心行處滅故로 天魔外道가 毁謗無門하고 釋梵諸天의 稱讚不及인데 况凡夫淺識之流가 其能髣髴이 悲夫라 井蛙가 焉知滄海之濶이며 野干이 何能獅子之吼리오 故知하라 末法世中 聞此法門하고 生希有想하여 信解受持者하면 己於無量刧中에 承事諸聖하며 植諸善根하고 深結 般若正因한 最上根性也故로 金剛經云하되 於此章句에 能生信心者는 當知是人은 己於無量佛所서  種諸善根하고 又云하되 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이니라 願諸求道之人은 莫生怯弱하고 須發勇猛之心이니 宿刧善因 未可知也니라 若不信殊勝 甘爲下劣하여 生艱阻之想하여 今不修之則하면 縱有宿世善根이라도 今斷之故로 彌在其難하여 展轉遠矣리라 今旣到寶所이니 不可空手而還이니 一失人身하면 萬刧難復이니라 請須愼之라 豈有智者가 知其寶所도 反不求之하고 長怨孤貧하 若欲獲寶하면 放下皮囊이니라
바라노니, 모든 도를 닦는 사람들은 이 말의 뜻을 궁구하여 다시는 의심하여 스스로 굴복하여 물러서지 말도록 하여야 할 것이니라.
만약 장부의 의지를 갖추고 위없는 불도를 구한다면 이것을 버리고 어찌 하리오?
부디 문자에만 집착하지 말고 곧바로 바른 뜻을 밝혀 낱낱이 자기(本心)로 돌려 근본 종지의 이치에 계합하다면 스승없는 지혜가 자연히 앞에 나타나 천진한 진리가 또렷하여 어둡지 않아서 지혜의 몸(慧身)을 이루게 되는 것이라 달리 깨달음을 말미암지 않는 것이니라.
 이 묘한 선지는 비록 곧 모든 사람의 경지이기는 하나 전생부터 반야종지(般若種智)를 심은 뛰어난 근기가 아니면 한 생각도 바른 믿음을 내지 못할 것이니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크게 헐뜯고 비방해서 도리어 무간지옥을 부르는 이가 흔히 있느니라.
비록 믿어 받아 드리지는 않았을 지라도 한번 귀를 잠깐 스친 인연을 맺는다면 그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나니라. 유심결(唯心訣)에 이르기를 ‘듣고 믿지 않을지라도 부처 종자(佛種)의 因을 맺고, 배워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인간과 하늘의 복을 뒤덮어 성불할 바른 인(因)을 잃지 않는다’하셨으니 하물며 듣고 믿으며 배워 이뤄서 잘 지켜 잃지 않으면 그 공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오?
 과거 윤회한 업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몇 천겁을 흑암지옥에 떨어졌고 무간지옥에 들어가 갖가지 고통을 받았는지를 알지 못하며, 또 얼마나 불도를 구하려 했으나 어진 벗(선지식)을 만나지 못해 오랜 겁을 생사의 물결에 빠져 헤매면서 아득하여 깨침이 없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온갖 나뿐 업을 지었던가? 혹간 한번 생각하면 모르는 결에 긴 한숨이 나오나니 어찌 방일하고 나태하다 지난날의 재앙을 거듭 받으리오? 또 무엇이 나로 하여금 지금 사람으로 태어나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며 참다운 수행의 길을 어둡지 않게 할 것인가? 실로 이르기를 눈먼 거북이 나무토막을 만난 격이며 작은 겨자씨를 바늘 끝에 꽂힌 격이니 그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움을 어떻게 뛰어난 말로 이를 것이리오.
 내가 지금 만약 스스로 굴복하여 물러설 생각을 내거나 혹 게으른 생각을 내어서 항상 뒤로 미루다가 잠깐사이에 목숨을 잃고 나쁜 갈래에 물러나 떨어져서 온갖 고통을 받게 될 때 비록 단 한 구절의 불법을 듣고자 하며 믿고 이해하여 받아 지녀서 고통을 벗어나고자 하여도 어찌 다시 성취 할 것이며 위급함에 임하여서 뉘우친들 이익이 없을 것이니라.”
 바라건대 모든 수도하는 사람들은 방일한 생각을 내지 말며, 탐욕 음욕에 집착하지 말고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살펴 돌아보기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니라.
 무상이 신속하여 몸은 아침이슬 같고 목숨은 지는 해와 같아서 오늘은 비록 있으나 내일을 또한 보존하기 어려우니 부디 명심하고 부디 명심하라. 
 우선 세간의 유위의 착한 일을 의지하기만 하여도 역시 三악도의 괴로운 윤회를 벗어나 천상계와 인간세계에서 뛰어난 과보를 얻어 온갖 쾌락을 누리거늘 하물며 이 가장 높고 심히 깊은 법을 깨쳐드는 것(法門)에 오르는 것을 잠시나마 믿는 마음을 내어 이루는 바의 공덕은 비유로써 그 작은 부분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따라서 경에 이르기를 ‘만약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의 七보로써 그 세계의 중생들에게 베풀어 공양하기를 모두가 만족하게 하며, 또 그 세계의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四과(果)를 얻게 한다면 그 공덕이 한량없고 끝이 없으나, 밥 한끼 먹을 동안 이 법을 바르게 사유하여 얻은 공덕만 같지 않다’하니 이것으로 알건대 ‘내가 법(진리)을 깨쳐드는 것(法門)은 가장 귀하고 가장 높아 모든 공덕도 하물며 미칠 수 없는 것이라’하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이 이 도량이라, 항하사 수의 七보탑을 조성한 것 보다 뛰어나니, 보배탑은 끝내 부서져 먼지가 되는 것이나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 하셨으니 바라건대 모든 수도하는 사람은 이 말의 뜻을 궁구하여 부디 명심하라.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에 이 몸을 제도하기를 기대하리요.
지금 닦지 않으면 만겁에 어긋나나 이제 굳게 닦으면 닦기 어려운 수행도 차츰 어렵지 않게 되어 공든 수행(功行)이 저절로 증진하리라.
 애닲다. 요즘 사람들은 시장하던 차에 성찬(王膳)을 만났어도 먹을 줄을 모르고, 병이 들어 훌륭한 의사를 만나도 약 먹을 줄 모르나니, 안타까워서 이르기를 ‘어찌할꼬! 어찌할꼬! 나도 어찌할 수 없도다’ 하니라
 또 세간의 함이 있는(유위) 일은 그 형상을 볼 수 있고, 그 공을 징험할 수 있어 사람들이 한가지 일만 얻더라도 희유하다고 찬탄하지만 나의 이 마음 근원(宗)은 형태를 살피 수 없고 모양을 볼 수 없으며 언어(言語)의 길이 끊기고 마음이 갈 곳이 끊어진 것이므로 하늘의 마군이나 외도가 헐뜯어 들 수가 없으며 모든 하늘의 모든 제석·범천 등의 칭송이 미치지 못하거늘 하물며 식견이 얕은 범부의 무리가 비슷하게나마 미치리오. 
 슬프도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어찌 푸른 바다의 넓음을 알 것이며, 들 여우가 어찌 사자의 소리를 낼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알라. 말법의 시대 가운데 이 법문을 듣고 희유하다는 생각을 내어 믿고 받들어 지니게 된다면 이미 한량없는 겁 동안에 여러 성인을 받들어 섬기며 모든 선근(善根)을 심어서 반야의 바른 因을 깊이심은 가장 높은 성근(根性)이므로 금강경에 이르기를 ‘이 글귀에 능히 믿음을 내는 자는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부처님 계시는 곳에서 온갖 선근을 심은 것이라’하셨고, 또 이르기를 ‘대승(大乘)의 마음을 낸 이를 위하여 설하며 최상승(最上乘)의 마음을 낸 이를 위하여 설한 것이니라’하셨느니라.
 원하건대 도를 구하는 사람들은 두려워서 약한 생각을 내지 말고 모름지기 용맹한 마음을 일으켜야 할 것이니, 전생에 선근의 인을 심었음을 알지 못한 것일 뿐이니라.
 만일 뛰어난 도리를 믿지 않고 하열하고 못난이로 자처하여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지금 닦지 않은즉 전생에 심은 선근이 있더라도 금생에 끊어지므로 그 어려움이 두루하여 변해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니라. 지금 이미 보배 있는 곳에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할 것이니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오랜 세월동안 돌이키기 어려우니라. 바라노니 삼가 할지니라.    어찌 지혜 있는 자가 그 보배 있는 곳을 알면서도 돌이켜 필요한 것을 찾지 않고 오래도록 외롭고 가난함을 원망 하리오?
보배를 얻고자하면 가죽푸대(皮囊=육신)를 내려놓아야(집착하지 말아야) 할지니라.

四. 보조 진심직설(普照 眞心直說)

一. 眞心正信 (참 마음을 바른 믿음)

華嚴云하되 信爲道源功德母라 長養一切諸善根 又唯識云하되 信如水淸珠 能淸濁水故로 是知萬善發生 信爲前導니라 故佛經에 首立如是我聞은 生信之所謂也니라 或曰하되 祖門之信과 與敎門信이 有何異耶인가 曰하되 多種不同이니 敎門은 令人天信於因果하되 有愛福樂者는 信十善爲妙因 人天爲樂果하며 有樂空寂者는 信生滅因緣 爲正因 苦集滅道 爲聖果하며  有樂佛果者는 信三劫六度 爲大因 菩提涅槃 爲正果라 祖門正信은 非同前也니라 不信一切有爲因果하고 只要信自己 本來是佛하며 天眞自性은 人人具足하고 涅槃妙體는 箇箇圓成하여 不假他求로 從來自備니라 三祖云하되 圓同太虛하여 無欠無餘이나 良有取捨하여 所以不如하며 誌公云하되 有相身中無相身이요 無明路上에 無生路라하며 永嘉云하되 無明實性 卽佛性 幻化空身이 卽法身이라니 故知하라 衆生本來是佛이니라 旣生正信 須要解滋 永明云하되 信而不解하면 增長無明하고 解而不信하면 增長邪見하니 故知하라 信解相兼해야 得入道疾이니라
 화엄경(華嚴經)에 이르기를 ‘믿음은 도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라 일체 선근(善根)을 자라게 한다’하셨으며, 또 유식(唯識)에 이르기를 ‘믿음은 물을 맑히는 구슬(水淸珠)이 능히 흐린 물을 맑히는 것 같으므로 곧 모든 선(善)이 생겨나는 것은 믿음이 앞서 이끄는 것이라’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불경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를 앞에 둔 것도 믿음을 내게 하기 위한 것이니라.
묻기를 “문(祖門=선문)의 믿음과 더불어 교문(敎門=교학)의 믿음이 어떻게 다른가?”
답하기를 “여러가지로 같지 않으니, 교문은 인천(人天)의 무리로 하여금 인과의 법을 믿게 하되 복락(福樂)을 좋아하는 자는 十선(善)의 묘한因을 지어서 인간과 하늘의 즐거운 과보를 받는 것을 믿게 하며, 비어 고요한 것(空寂)을 즐기는 자는 생멸의 인연을 없애고 바른 인을 지어 고집멸도(苦集滅道)를 성스러운 과보로 믿게하며, 불과(佛果)를 즐기는 자는 삼아승지겁(劫)에 六도윤회(度)를 큰 因으로 삼아 보리열반의 바른 과를 믿게 한 것이라, 조사의 문을 바르게 믿음은 앞의 것과 같지 않느니라.
 온갖 유위의 인과를 믿지 않고 오직 자기가 본래 곧 부처임을 믿는 것을 요하며, 천진한 자성은 사람마다 갖추었고 열반의 미묘한 바탕(妙體)은 낱낱이 원만히 이루어져 남에게 구하지 않는 것으로 원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졌느니라.
 三조(祖)께서 이르기를 ‘원만하기가 큰허공 같아서 모자람도 남음도 없건만 취하고 버리는 것을 좋아함이 있는 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다’하셨으며, 지공(誌公)은 이르기를 ‘형상있는 몸 가운데 형상없는 몸이요, 밝지못한(無明) 길 위에 생함이 없는 길이라’하셨으며, 영가(永嘉)는 이르기를 ‘무명의 실다운 성품이 곧 부처의 성품이요 허깨비인 빈 몸이 곧 법신(法身)이라’하셨으니, 그러므로 알라. 중생이 본래 곧 부처이니라.
이미 바른 믿음을 내었다면 모름지기 더욱 잘 알아야 하나니, 영명(永明)이 이르기를 ‘믿고도 알지 못하면 무명만을 더하고, 알고도 믿지 않으면 삿된 소견만 더한다’하셨으니 그러므로 알라. 믿음과 앎을 겸하여야 도의 틈으로 들어 갈수 있는 것이니라.

或曰하되 初發信心이나 未能入道라도 有利益否인가 曰하되 起信論云하되 若人이 聞是法己하고 不生怯弱하면 當知니 是人은 定紹佛種하여 必爲諸佛之所授記하리라 假使有人이 能化三千大千世界 滿中衆生하여 令行十善해도 不如有人 於一念頃 正思惟此法하니 過前功德 不可爲喩라며 又般若經云하되 乃至 一念生淨信者는 如來悉知悉見하니 是諸衆生은 得如是無量福德하니 是知欲行千里 初步要正이니 初步若錯하면 千里俱錯하니 入無爲國이면 初信要正이라 初信旣失하면 萬善俱退故로 祖師云하되 毫釐有差 天地懸隔이 是此理也니라
 묻기를 “처음으로 신심을 일으켰으나 도에 들어가지 못했더라도 이익이 있겠사옵니까?”
 답하기를 “기신론(起信論)에 이르기를 ‘사람이 이 법을 듣고 두려워하는 생각을 내지 않으면 마땅히 알지니 이 사람은 결정코 부처의 종자를 이어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수기를 받으리라. 가령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해서 모두가 十선(善)을 닦게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잠깐이라도 이 법을 바르게 사유(正思)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앞의 공덕을 뛰어넘어 비유할 수 없다’하셨으며 또 반야경(般若經)에 이르기를 ‘또는 한 순간이라도 깨끗한 믿음을 내는 자는 여래가 모두 알고 모두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은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는다’ 하셨으니 천리 길을 가려하면 첫 걸음이 발라야 할 것임을 곧 알아야 하는 것이니 첫 걸음이 어긋나면 천리가 모두 어긋나는 것이니 함이 없는 나라(無爲國)에 들어가려면 처음 믿음이 바른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서 처음 믿음을 이미 잃으면 만가지 바른것이 모두 물러나므로 조사(승찬)께서 이르기를 ‘털끝만치의 어긋남이 있어도 하늘과 땅만치 아득히 벌어진다’한 것이 곧 이 이치인 것이니라.”

二. 直心異名 (바른 마음의 다른 이름)

或曰하되 已生正信인데 未知 何名眞心인가 曰하되 離妄 名眞하고 靈鑑曰心이니  楞嚴經中 發明此心이니라 或曰하되 但名眞心인가 別有異號耶인가 曰하되 佛敎祖敎立名이 不同이니 且佛敎者는 菩薩戒에는 呼爲心地라니 發生萬善故요 般若經에는 喚作菩提이니 與覺爲體故며 華嚴經에는 立爲法界니 交徹融攝故요 金剛經에는 號爲如來니 無所從來故며 般若經에는 呼爲涅槃이니 衆聖所歸故요 金光明에는 號曰如如이니 眞常不變故며 淨名經에는 號曰法身이니 報化依止故요 起信論에는 名曰眞如이니 不生不滅故며 涅槃經에는 呼爲佛性이니 三身本軆故요 圓覺中에는 名曰總持이니 流出功德故며 勝曼經에는 號曰如來藏이니 隱覆含攝故요 了義經에는 名爲圓覺이니 破暗獨照故며 由是로 壽禪師唯心訣云하되 一法千名이라 應緣立號하니 備在衆經을 不能具引하니라
 묻기를 “바른 믿음을 이미 내었거늘 무엇을 참마음이라 하는 것이옵니까?”
 답하기를 “허망함을 여읜 것을 참(眞)이라 하고, 신령스럽게 보는 것을 마음(心)이라 말 하는 것이니, 능엄경(楞嚴經) 가운데 이 마음을 밝혀 놓았느니라.”
 묻기를 “참 마음이란 단지 이름이옵니까? 다른 호칭이 별도로 있사옵니까?”
 답하기를 “부처님의 가르침과 조사의 가리킴에 세운 이름이 같지 않으니, 또 부처님의 가르침인 보살계(菩薩戒)에는 마음바탕(心地)이라 부르니 모든 선(善)을 나투는 까닭이요, 반야경(般若經)에는 보리(菩提)라 부르니 깨달음과 더불어 바탕이 되는 까닭이며, 화엄경(華嚴經)에는 법계(法界)라 세웠으니 서로 통함이 융통하여 모든 것을 거둬들이는 까닭이요, 금강경(金剛經)에는 여래(如來)라 부르니 쫓아온 바가 없기 때문이며, 반야경에는 열반(涅槃)으로도 불렀으니 뭇 성인들의 돌아가는 바이기 때문이요, 금광명경(金光明經)에는 부르기를 여여(如如)라 하였으니 참되어서 항상 변하지 않는 까닭이며, 정명경(淨明經:유마경)에는 법신(法身)이라 부르니 보신(報身)·화신(化身)의 의지처인 까닭이요, 기신론(起信論)에는 진여(眞如)라 이름하니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까닭이며,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불성(佛性)이라 부르니 삼신(三身)의 근본 바탕인 까닭이요, 원각경(圓覺經) 가운데서는 총지라 이름하여 부르나니 공덕(功德)을 흘러내기 때문이며, 승만경(勝曼經)에는 여래장(如來藏)이라 부르니 가려져 숨었으나 두루 머금고 있는(隱覆合攝)까닭이요, 요의경(了義經)에는 원각(圓覺)이라 이름 하니, 어두움을 깨뜨리고 홀로 비추는 까닭이니라.
 이러한 연유로 수선사(壽禪師)의 유심결(唯心訣)에 이르기를 ‘한 법에 천 이름이라, 인연 따라 이름을 세웠다’하셨으니, 많은 경에 갖추어 있는 것들을 모두 이끌어다가 베풀지(引用) 못하노라.”

或曰하되 佛敎已知이나 祖敎何如인가 曰하되 祖師門下는 杜絶名言하여 一名不立이니 何更多名이나 應感隨機하니其名亦衆이니라 有時呼爲自己이니 衆生本性故요 有時名爲正眼이니 鑑諸有相故며 有時號曰妙心이니 虛靈照故 有時名曰主人翁이니 從來荷負故요  有時呼爲<無底鉢>이니 隨處生涯故며 有時喚作没絃琴이니 韻出今時故요 有時號曰無盡燈이니 照破迷情故며 有時名曰無根樹이니 根蒂堅牢故요 有時呼爲吹毛劒이니 截斷塵根故며 有時喚作無爲國이니 海晏河淸故요 有時號曰牟尼珠이니 濟益貧窮故며 有時名曰無鑐鎻이니 開閉六情故요 乃至名泥牛 木馬 心源 心印 心鏡 心月 心珠 種種異名을 不可具錄이니라 若達眞心하면 諸名盡曉이나 昧此眞心하면 諸名皆滯故로 於眞心을 切宜子細니라
 묻기를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미 알았으나 조사의 가르침이란 어떤 것이옵니까?” 답하기를 “조사문 아래에는 이름도 말도 모두 끊어져서 한 이름도 세우지 않거니 어찌 다시 여러가지 이름이오만 근기따라 감응하니 그 이름이 또한 많게 된 것이니라.
 어떤 때는 자기(自己)라 부르니 중생의 근본 성품인 까닭이요, 어떤 때는 정안(正眼:바른 안목)이라 이름하니 모든 있는 상을 바르게 비춰보는 까닭이며, 어떤 때는 묘심(妙心:묘한 마음)이라 부르니, 비었으나 신령스럽게 비추는 까닭이요, 어떤 때는 주인옹(主人翁)이라 이름하니 원래부터 짊어진 까닭이며, 어떤 때는 무저발(無底鉢:밑없는 발우)이라 부르니 어느 곳이나 경계 따라 사는 까닭이며, 어떤 때는 몰현금(沒絃琴:줄없는 거문고)이라 부르니 지금 소리를 내는 까닭이요, 어떤 때는 무진등(無盡燈:꺼짐 없는 등불)이라 부르니 미혹한 생각을 비춰 어둠을 깨뜨리는 까닭이며, 어떤 때는 무근저(無根樹:뿌리없는 나무)라 이름하니 뿌리에서 꼭지까지 견고한 까닭이요, 어떤 때는 취모검(吹毛劍)이라 부르니 번뇌의 뿌리를 잘라버리는 까닭이며, 어떤 때는 무위국(無爲國:함이 없는 나라)이라 부르니 바다 같이 평온하고 강 같이 맑은 까닭이요, 어떤 때는 마니주(牟尼珠)라 부르니 가난함을 구제하여 이롭게 하는  까닭이며, 어떤 때는 무유쇄(無鑐鎖:열쇠없는 자물쇠)라 하니 여섯가지 감정을 열고 닫는 까닭이요, 나아가서는 이름하여 이우(泥牛:진흑소)·목마(木馬:나무말)·심근(心根:마음근원)·심인(心印:마음도장)·심경(心鏡:마음거울)·심월(心月:마음달)·심주(心珠:마음구슬)등 갖가지 딴 이름을 모두 갖춰 기록하지 못하노라.
 만약 참마음을 깨달으면 모든 이름을 다 깨달을 수 있거니와 이 참마음이 어두우면 모든 이름도 모두 막히므로 참마음을 마땅히 바르게 자세히 살필지니라.”

三. 眞心妙體 (참마음의 묘한 바탕)

 或曰하되 眞心已知名字이나 其體如何耶인가 曰하되 放光般若經云하되 般若無所有相이라 無生滅相하고 起信論 云하되 眞如自體者는 一切凡夫 聲聞 緣覺 菩薩 諸佛 無有增減하여 非前際生이며 非後際滅이며 畢竟常恒 從本已來에 性自滿足一切功德하니 據此經論도 眞心本體는 超出因果하며 通貫古今이며 不立凡聖이니 無諸對待이 如太虛空 徧一切處하여 妙體凝寂하여 絶諸戱論이니라 不生不滅이며 非有非無며 不動不搖하며 湛然常住니 喚作舊日의 <主人翁>하며 名曰하되 <威音那畔人>이며   又名하여서 <空劫前自己>하니 一種平懷해도 無纖毫瑕翳나 一切山河와 大地草木叢林이며 萬像森羅인 染淨諸法 皆從中出이니 故로 圓覺經云하되 善男子여 無上法王에 有大多羅尼門이니 名爲圓覺하니 流出一切淸淨 眞如菩提와 涅槃 及波羅密하여 敎授菩薩하며 圭峰云하되 心也者는 冲虛妙粹하게도 炳煥靈明하여 無去無來로 冥通三際하며 非中非外라 洞徹十方하며 不滅不生인데 豈四山之可害이며 離性離相인데 奚五色之能盲하니라 永明이 唯心訣云하되 夫此心者은 衆妙群靈而普會라 爲萬法之王로 三乘五性而冥歸하며 作千聖之母로 獨尊獨貴하여 無比無儔한 實大道之源이며 是眞法要니라
 묻기를 “참마음의 이름은 이미 알았거니와 그 바탕(體)는 어떤 것인지오?”
 답하기를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에 이르기를 ‘반야는 형상이 없는 것이라 생멸의 모습이 아니다’하였고, 기신론(起信論)에 이르기를 ‘진여자체는 일체 범부·성문·연각·보살·모든 부처님에 늘고 줄어듬(增減)이 없어서 예전에 생긴 것도 아니며 후에도 사라지지 않아 끝내 항상 변하지 않으며 원래부터 이미 성품 스스로 일체 공덕을 원만히 갖추었다’하셨으니, 이런 경론(經論)에 의거하여도 참마음의 본체는 인과를 벗어났으며 옛과 지금(古今)을 꿰뚫었으며 범부와 성인을 세우지 않으니 모든 상대할 것 없음이 큰 허공이 모든 곳에 두루한 것과 같아 묘한 바탕은 또렷하고 고요하여 모든 쓸모없는 이론(戲論)이 끊어져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으며 가득하고 고요한 것으로 항상 머무나니, 옛날의 주인옹(主人翁:주인이 되는 어른)이라 지어 부르며, 이름하여 말하기를 ‘위음왕 이전의 사람(威音那畔人)이라’고 하며, 또 이름 하여서는 ‘공겁(空劫=천지 창조 이전)이전의 자기’라고도 하나니 일체(一種)를 평등하게 품고도 털끝만한 허물도 가릴 것이 없으나 일체 산과 강과 대지의 숲과 나무며 산림이며 삼라만상(萬像森羅:우주에 펼펴진 모든 현상)인 더럽고 깨끗한 모든 법이 그 속에서 왔나니, 그러므로 원각경(圓覺經)에 이르기를 ‘선남자(善男子)여! 위없는 법왕(法王)에게 큰 다라니문(陀羅尼門:무량무변하여 악한 법을 버리고 바른법을 가져 잃지 않고 무거운 죄를 없애 열반에 들게함)이 있어 원각(圓覺:원만한 깨달음)이라 이름 하나니 일체 청정한 진여보리와 열반 및 바라밀을 흘려내어 보살들을 가르친다’ 하셨으며, 규봉(圭峰)선사가 이르기를 ‘마음이란 텅빈 가운데 순수하게 묘하게도 환하여 신령스럽게 밝아서 감도 없고 옴도 없이 그윽히 三제(際=과거·현제·미래)에 통하고, 중간도 아니며 바깥도 아니라 밝게 천지(十方)에 통하며, 멸하지도 않고 나는 것도 않거늘 어찌 4대(四山:생,노,병,사)가 해칠 수 있으며, 성품도 여의고 상도 여의었거늘 어찌 오온(五色)이 어둡힐 수 있으리오’하셨느니라.
 영명(永明)선사가 유심결(唯心訣)에 이르기를 ‘무릇 이 마음이란 두루 묘하고 신령함이 모두 모였는지라 모든것(萬法)의 왕으로 3승(三乘:성문,연각,보살)과 5성(五性:기쁨.호남.욕심.두려움.근심)이 그윽히 의지하며 모든 성인(千聖)의 어머니로 홀로 있으며 홀로 귀하여 견줄 것이 없으며 짝할 것도 없는 실로 대도(大道)의 근원이며 곧 참다운 법(眞法)의 요지라’하셨으니

信之則三世菩薩 同學이 盡學此心也며 三世諸佛이 同證이 盡證此心也요 一大藏敎가 詮顯 盡顯此心也이며 一切衆生의 迷妄이 盡迷此心也이요 一切行人發悟하여 盡悟此心也며  一切諸祖相傳도 盡傳此心也요 天下衲僧叅訪도 盡叅此心也니라 達此心則 頭頭皆是며 物物全彰하며 迷此心則이면 處處顚倒되어 念念痴狂이니라  此體는 是一切衆生이 本有之佛性이며 乃一切世界가 生發之根源故로 世尊이 鷲峰良久하고 善現이 岩下忘言이며 達磨가 少室壁觀하고 居士는 毘耶杜口는  悉皆發明 此心妙體故로 初入祖門庭者는 要先識此心軆也니라
믿으리니 三세의 보살이 함께 배운 것이 바로 이 마음을 배운 것이며, 三세의 부처가 같이 증오한 것이 이 마음을 증득한 것이요, 일대장교(一大藏敎)가 표현한 것이 이 마음을 표현한 것이며, 일체 중생의 미혹과 망념도 이 마음이 미혹한 것이요, 일체 수행인이 깨닫고자 마음을 일으켜서 이 마음을 깨달은 것이며, 일체 조사들이 서로 전한 것도 이 마음을 전한 것이요, 천하의 납자(衲子)들이 두루 (선지식)찾아 참문 한 것도 이 마음을 참구한 것이니라. 
이 마음을 통달하면 일마다 모두 바르며 갖가지에 완연히 밝으며, 이 마음이 미혹하면 곳곳에서 뒤집어져 생각마다 어리석게 되는 것이니라.
이 바탕이 되는 성품(體)은 곧 일체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이며, 이에 일체 세계가 생겨난 근원이므로 ‘세존께서 축봉(鷲峰)에서 침묵(良久)하시고, 수보리(善現)가 바위 밑에서 말을 잊었으며 달마(達磨)는 소림굴(少室)에서 벽을 관하고, 유마거사는 비야리(毗耶離)성에서 입을 걸어(다뭄)두었다’ 하는 것은 모두 다 이 마음의 미묘한 본체를 밝히신 것이므로 처음으로 조사의 집안으로 들어온 자는 이 마음의 본체를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 긴요한 것이니라.”

四. 眞心妙用 (참마음의 묘한 작용)

或曰하되 妙體已知이나 何名妙用耶인가 曰하되 古人云하되 
묻기를“묘한 바탕(體)는 이미 알았으나 무엇이 묘한 작용인지요?”
답하기를“옛사람이 이르기를
風動心搖樹하고 雲生性起塵이니
若明今日事하면 昧却本來人이니라
바람이 움직이면 마음이 나무를 흔들고
구름이 일면 성품위에 티끌이 인다.
만약 오늘의 일을 밝히려하면
본래의 사람을 어둡히는 것이니라.” 하였으니
乃妙體起用也니라 眞心妙體는 本來不動하여 安靜眞常이며 眞常體上에서 妙用現前이라 不妨隨流得妙故로 祖師頌云하되 
 이것이 묘한 본체가 일으킨 작용인 것이니라. 참마음의 묘한 바탕(體)은 본래 움직이지 않아 평안하고 고요하며 참다워 항상하는 것이니, 참으로 항상하는 바탕에서 묘한 작용이 앞에 나타나는 것이라 흐름에 따라 묘함을 증득함이 방해롭지 않으므로 조사께서 송(頌)하시기를 
  心隨萬境轉하나 轉處實能幽로다
  隨流認得性하면 無喜亦無憂하리
  마음이 경계를 따라 바뀌나
  바뀌는 곳마다 그윽하도다
  흐름을 따라 성품을 바로 알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느니라.

故로 一切時中이나 動用施를 爲東行西往하며 喫飯着衣하며 拈匙弄筯하며 左顧右盻가 皆是眞心妙用現前인데 凡夫는 迷倒로 於着衣時는 只作着衣會하고 喫飯時는 只作喫飯會이니 一切事業에 但隨相轉이는 所以로 在日用而不覺하고 在目前而不知니라 若是識性底人은 動用施爲에 不曾昧却故로 祖師云하되 在胎名神하고 處世名人하며 在眼觀照하고 在耳聽聞하며 在鼻辨香하고 在口談論하며 在手執捉하고 在足運奔하며 徧現하면 俱該法界하 收攝하면 在一微塵이니 知之者이면 爲是佛性하나 不識者이면  喚作精魂하니 所以로 道吾舞笏이나 石鞏拈弓이나 秘魔擎杈나 俱胝竪指나 忻州打地나 雲岩師子하는 莫不發明 這着大用이니 於日用不迷하면 自然縱橫無礙니라
그러므로 어느때나 움직이고 행하여 쓰기를 동쪽으로 걷고 서쪽으로 가며, 밥먹고 옷을 입으며 숫가락을 들고 젓가락을 놀리며, 왼쪽을 돌아보고 오른쪽을 흘겨보는 것이 모두가 곧 참마음의 묘한 작용이 앞에 나타난 것이거늘, 범부는 미혹으로 뒤집혀져서 옷을 입을 때는 오로지 옷 입는 다는 것만 알고 밥 먹을 때는 오로지 밥 먹는다는 것만 아나니, 일체 하는 일에 오직 상만 쫓아 움직이는 까닭에 일상생활에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눈앞에 있으나 알지 못하느니라.
이러한 성품을 아는 사람은 움직여 쓰며 행함에 어둡지(昧) 않느니라.
그러므로 조사(바라제존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태에 있으면 혼(神:불가사의함)이라 이름 하고
세상에 있으면 사람이라(人)이름 하며 
눈에 있으면 살펴본다(觀照) 하고
귀에 있으면 들어서 안다(聽聞) 하며
코에 있으면 냄새를 구별한다(辨香) 하고
입에 있으면 말로 논의한다(談論) 하며
손에 있으면 잡는다(執捉) 하고
발에 있으면 움직이고 달린다(運奔) 하며 
두루 나타나면 법계에 꽉 차(俱該)고
거둬들이면(收攝) 한 티끌에 들어가는 것이니
알면 곧 불성이라 하나 모르면 이것을 넋(精魂)이라 부르게 된다’ 하였으니,
그러한 까닭으로 도오(道吾)가 홀(笏)을 들어 춤춘 것이나
석공(石鞏)이 활(弓)을 든 것이나
비마(秘魔)가 주장자를 휘두른 것이나    
구지(俱胝)가 손가락을 세운 것이나
흔주(忻州)가 땅을 친 것이나
운암(雲岩)이 사자를 놀렸다는 이것들이 큰 작용을 밝히지 않은 것이 없으니 날마다 씀에 미혹하지 않으면 자연히 가로 세로(무엇에나)에 걸림이 없는 것이니라.”

五. 眞心體用一異(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은 하나인가 다른가)

或曰하되 眞心軆用은 未審是一是異耶오 曰하되 約相則 非一이나 約性則非異니라 故로 此体用은 非一非異이니 何以知然인가 試爲論之리라 妙體不動하여 絶諸對待하여 離一切相이니 非達性契證者는 莫測其理也니라 妙用隨緣하여 應諸萬類하나 妄立虛相하여 似有形狀으로 約此有相 無相故로 非一也니라 又用從體發이니 用不離體하며 能發用이라 體不離用이니 約此不相離理故로 非異也니라 如水 以濕爲體이니 體無動故로 波以動爲相은 因風起故로 水性波相이 動與不動故로 非一也니라 然波外無水하고 水外無波이나 濕性是一故니 非異也이니 類上用體一異를 可知矣리라   
묻기를 “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은 곧 하나인가 곧 다른가를 모르겠사옵니다”
답하기를 “相의 이치를 따르면 하나가 아니나, 성품의 이치를 따르면 다르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이 체와 용은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니 어째서 그러한가를 아는가? 점검하여 사리를 헤아려보리라.
 미묘한 바탕(體:본체)은 움직임이 없어 일체 상대가 끊어져 일체 상을 여의었으니 성품에 계합한 증득으로 통달하지 않으면 그 이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
 미묘한 작용은 연을 쫓아 모든 것들에 응하나 망령되게도 허망한 차별상을 세워서 형상이 있음과 상이 없음을 따르므로 하나가 아닌 것이니라.
 또 작용은 본체(근본바탕)로부터 일어나는지라 작용이 본체를 여의지 않으며 본체가 능히 작용을 일으키는지라 본체가 작용을 여의지 않나니, 이 서로 여의지 않는 이치를 따르므로 다르지 않느니라.
 마치 물은 습기(濕)로써 본체를 삼나니 본체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요, 파도는 움직임으로써 형상을 삼은 것은 바람으로 因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물의 성품과 파도의 상이 움직임과 더불어 움직이지 않는 것이므로 하나가 아니니라.
 그러나 파도밖에 물이 없고 물밖에 파도가 없어 습한 성품은 곧 하나이므로 다르지 않으니, 온갖 것들의 바탕(體)과 작용(用) 상의 하나와 다름을 가히 알 수 있으리라.”  

六. 眞心在迷 (참마음이 미혹 속에 있음)

或曰하되 眞心體用이 人人具有이면 何爲聖凡不同耶인가 曰하되 眞心은 聖凡本同이나 凡夫는 妄心認物하여 失自淨性하여 爲此所隔所以로 眞心不得現前이 但如暗中樹影이 地下流泉이 有而不識耳니라 故經云하되 善男子야 譬如淸淨摩尼寶珠  映於五色 隨方各現인데 諸愚痴者가 見彼摩尼하고 實有五色이니라 善男子야 圓覺淨性이 現於身心하여 隨類各應인데 彼愚痴者는 說淨圓覺 實見如是 身心自性은 亦復如是니라
肇論云하되 乾坤之內 字宙之間에 中有一寶하여 秘在形山하니 此乃眞心在纒也니라 又慈恩云하되 法身本有하여 諸佛共同凡夫하나 由妄覆으로 有而不覺 煩惱纒裡 得如來藏名하며 裵公云하되 終日圓覺이나 而未嘗圓覺者하여 凡夫也하니 故知하라 眞心은 雖在塵勞해도 不爲塵勞所染하니 如白玉投泥어도 其色이 不改也니라 
묻기를 “참마음인 본체와 작용이 사람마다 갖추어져 있다면 어찌하여 범부와 성인이 같지 않사옵니까?”
답하기를 “진심은 범부와 성인이 같으나 범부는 망령된 마음(생각)으로 만물을 인정하여 스스로의 맑은 성품을 잃어 이것을 가린 까닭으로 참마음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 다만 어둠 속의 나무그림자와 땅 속에 샘물이 흐르는 것 같이 있어도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선남자야, 비유하면 청정한 마니주가 5색이 비치는 것은 방향을 따라서 각기 나타나는 것 같은 것이거늘 어리석은 이가 그 마니주를 보고  5색이 실지로 있다 하느니라.
 선남자야, 원만히 깨달음(圓覺)인 맑은 성품이 몸과 마음(생각)으로 나타나서 온갖 것을 따라서 각기 응하거늘, 그 어리석은 이는 맑은 원각에 이 몸과 마음이 스스로의 성품이 실지로 있다는 소견으로 말 하는 것은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니라’하셨으며, 조론(肇論)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속 우주(宇宙) 사이에 한 보배가 가운데 있어 육신의 산에 감춰져 있다”하셨으니 이것이 곧 참마음이 얽매어 있는 것이니라.  
 또 자은(慈恩)이 이르기를 “법신이 본래부터 있어서 부처님과 범부들이 함께 같건만 망념으로 뒤집혀진 까닭으로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번뇌로 속으로 얽매었기에 여래장이란 이름을 얻었다”하셨으며, 배공(裵休)이 이르기를 “종일토록 원만한 깨달음(圓覺)이로되 원각을 알지 못하여 범부라 한다”하셨으니, 그러므로 알라 참마음은 비록 번뇌가 있을지라도 번뇌에 물들지 않는 것이니, 백옥을 진흙에 던져도 그 빛은 바뀌지 않는 것 같으니라.”

七. 眞心息妄 (참마음은 망심을 쉰 것임)
 
或曰하되 眞心在妄則이면 是凡夫인데 如何得出妄成聖耶인가 曰하되 古云하되 妄心無處卽菩提요 生死涅槃이 本平等하다 經云하되 彼之衆生의 幻身이 滅故로 幻心亦滅하고 幻心滅故로 幻塵亦滅하고 幻塵滅故로 幻滅亦滅하고 幻滅滅故로 非幻 不滅이니 譬如磨鏡 垢盡明現하며 永嘉亦云하되 心是根이요 法是塵이니 兩種은 猶如鏡上痕하여 痕垢盡時에 光始現하고 心法雙忘하면 性卽眞이라 此乃出妄而成眞也니라 或曰하되 莊生云하되 心者其熱燋火하고 其寒凝氷하며 其疾俛仰之間에 再撫四海之外하며 其居也淵而靜하고 其動也는 懸而天者는 其惟人心乎이니 此莊生이 先說凡夫心不可治伏 如此也이거니와 未審宗門 以何法 治妄心也이다 曰하되 以無心法으로 治妄心也니라 或曰하되 人若無心하면 便同草木이니 無心之說 請施方便하오 曰하되 今云無心은 非無心軆요 名無心也는 但心中無物을 名曰 無心이니라 如言空甁하면 甁中無物을 名曰空甁하고 非甁體無 名空甁也니라 故로 祖師云하되 汝但於心 無事하고 於事無心하면 自然虛而靈하고 寂而妙하리라 是此心旨也니라
묻기를“참마음이 망심이 있은즉 곧 범부이거늘 어떻게 망(妄)에서 벗어나서 성인을 이루겠는지요?”
답하기를“옛사람이 말하기를 ‘허망한 마음이 다한 곳이 곧 보리요, 생사와 열반이 원래 평등하다’하였으며, 경에 이르기를 ‘중생의 허환(虛幻)한 몸이 멸하므로 허환한 마음도 멸하고, 허환한 마음이 멸하므로 허환한 티끌도 멸하고, 허환한 티끌이 멸하므로 허환함이 멸했다는 것도 멸하고, 허환함이 멸했다 하는 것도 멸하므로 허환 아닌 것은 멸하지 않나니, 비유하건대 거울을 갈 때에 녹(垢)이 다하면 광명이 나타나는 것 같다’하셨으며, 영가(永嘉)스님도 이르기를 ‘마음은 뿌리요 법은 곧 티끌이니, 두 가지는 마치 거울 위의 먼지 같아서 먼지와 때가 다할 때에 광명은 비로써 나타나고, 마음과 법을 쌍으로 잊게되면 성품은 곧 참됨이라’하였으니, 이것이 곧 망을 벗어나서 참을 이루는 것이니라.”
묻기를“장생(莊生=장자)이 이르기를‘마음이란 뜨거움은 불을 태우고, 차가움은 얼음을 얼리며, 빠름은 구부렸다 펴는 사이에 四해 밖을 돌고 돌며, 멈춤은 깊고도 고요하고, 움직임은 깊고도 높은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뿐이로다’하였으니, 이는 장생이 범부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함을 이와 같이 먼저 말하였거니, 이와 같이 종문(宗門=선문)에서는 어떤 법으로 허망한 마음을 다스리는지 의심스럽나이다.”
답하기를 “무심(無心)의 법으로써 망심(妄心)을 다스리느니라.”묻기를“사람이 만약 무심하면 초목과 같을 것이니, 청하옵건대 방편을 베풀어 무심에 대하여 설하여 주십시오.”
답하기를“이제 무심이라 이른 것은 마음이란 본체가 없는 것이 아니요, 다만 마음가운데는 어떤 물건도 없는 것을 무심이라 한 것이니라. 마치 빈병(空甁)을 말할 것 같으면, 병 속에 물건 없는 것을 빈병이라 이름하고, 병 자체가 없는 것을 빈병이라 하지 않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조사(德山宣鑑)께서 이르시기를‘그대가 다만 마음에 일이 없고, 일에 마음이 없으면 자연히 텅비어 신령스럽고 고요하여 묘하리라’하셨느니, 이것이 이 마음의 이치니라.

據此則以無妄心이언정 非無眞心妙用也니라 從來諸師이 說做無心功夫가 類名不同이니 今總大義하여 略明十種이니라 一曰은 覺察이니 謂做功夫時에 平常絶念하여 隄防念起니라 一念纔生하면 便與覺破하니 妄念破覺하면 後念不生이니라 此之覺智도 亦不須用이니 妄覺俱忘을 名曰無心故로 祖師云하되 不怕念起하고 只恐覺遲라며 又偈云하되 不用求眞 唯須息見이니 此是覺察息妄功夫也니라 二曰은 休歇이니 謂做功夫時에 不思善不思惡아 心起便休며 遇緣便歇이니 古人云하되 一條白練去하듯 冷湫湫地去하듯 古廟裡香爐去하라 直得絶廉纖離分別하여 如痴似兀하여야 方有少分相應되니 此休歇妄心功夫也니라 三曰은 泯心存境이니 謂做功夫時에 於一切妄念을 俱息하여 不顧外境고 但自息心이라 妄心이 已息하면 何害有境이리오 卽古人의 奪人不奪境法門也니라 故로 有語云하되 是處에 有芳草하되 滿城無故人하고 又龐公云하되 但自無心於萬物하면 何妨萬物 常圍繞리오 此是泯心存境息妄功夫也니라 四曰은 泯境存心이니 謂做功夫時에 將一切內外諸境가 悉觀爲空寂하고 只存一心하여 孤標獨立이니라 所以로 古人云하되 不與萬法으로 爲侶不與諸塵作對하라 心若着境하면 心卽是妄하나 今旣無境인데 何妄之有리오 乃眞心獨照하여 不礙於道라 卽古人이 奪境不奪人也故로 有語云하되 上園花已謝이나 車馬尙駢闐하고 又云하되 三千劒客은 今何在인가 獨計莊周定太平하니 此是泯境存心息妄功夫也니라 五曰은  泯心泯境이니 謂做功夫時에 先空寂外境하고 次滅內心이니라 旣內外心境俱寂인데 畢竟妄從何有故로 灌溪云하되 十方에 無壁落하되 四面에 亦無門하여 赤躶躶淨灑灑이니 卽祖師가 人境兩俱奪法門也니라 故로 有語云하되 雲散水流去하니 寂然天地空하며 又云하되 人牛俱不見이니 正是月明時라 此泯心泯境息妄功夫也니라 六曰은 存心存境이니 謂做功夫時心住心位하고 境住境位하여 有時에는 心境相對則心不取境이며 境不臨心하여 各不相到하면 自然妄念이 不生하고 於道無礙故라 經云하되 是法이 住法位하여 世間相常住하니 卽祖師가 人境俱不奪法門也니라 故로 有語云하되 一片月生海하니 幾家人上樓인가 又云하되 山花千萬㭆에 遊子不知歸하니 此是存境存心滅妄功夫也니라 七曰은  內外全軆이니 謂做功夫時에 於山河大地-日月星辰-內身外器一切諸法이 同眞心軆니라 湛然虛明하여 無一毫異하여 大千沙界를 打成一片하면 更於何處에 得妄心來리오 所以로 肇法師云하되 天地與我同根이요 萬物이 與我同体라하니 此是內外全軆滅妄功夫也니라 八曰은  內外全用으로 謂做功夫時이니 將一切內外身心器界諸法及一切動用施爲하여 悉觀作眞心妙用이니라 一切心念纔生이 便是妙用現前이라 旣一切皆是妙用이니 妄心이 向甚麽處安着하라 故로 永嘉云하되 無明實性이 卽佛性이요 幻化空身이 卽法身이라 誌公의 十二時歌에 云하되 平朝寅이 狂機內隱道人身이로다 坐臥不知元是道하고 只麽忙忙受苦辛라하니 此是內外全하여 用息妄功夫也니라 九曰은 卽體卽用으로 謂做功夫時이니 雖冥合眞體 一味空寂하나 而於中 內隱靈明으로 乃體卽用也니라 故로 永嘉云하되 惺惺寂寂은 是하고 惺惺妄想非하며 寂寂惺惺은 是하고 寂寂無記는 非니라 旣寂寂中에 不容無記하고 惺惺中에 不容亂想하면 所有妄心이 如何得生이리오 此是卽體卽用으로 滅妄功夫也니라 十曰은  透出體用이니 謂做功夫時에 不分內外하며 亦不辨東西南北이니라 將四方八面을 只作一箇大解脫門으로 圓陀陀地하여 體用不分하고 無分毫滲漏로 通身打成一片하면 其妄何處得起리오 古人云하되 通身無縫罅이라 上下忒團圝하니 是乃透出體用하여 滅妄功夫也니라 已上十種做功夫法을 不須全用하니 但得一門하여 功夫成就되면 其妄自滅하고 眞心卽現하리니 隨根宿習하되 曾於何法有緣하여 卽便習之니라 此之功夫는 乃無功之功이요 非有心功力也이니 此箇休歇妄心法門이 最緊要故로 偏多說하나 無文繁也하라  
이에 의하건대 허망한 마음이 없을지언정 참마음의 묘한 작용이 없는 것이 아니니라.
옛부터 여러 조사들이 무심의 공부를 말씀하신 종류가 각각 같지 않았으니 이제 그 대의를 총괄하여 열 부문으로 밝히리라.
 첫째는 깨달아 살핌(覺察)이니, 즉 공부를 할 때에 항상 잡념을 끊어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니라. 한 생각이 생기기만 하면 당장 깨달아서 깨뜨려야 하나니, 허망한 생각을 깨달아 깨뜨리면 뒷생각이 나지 않으리라. 이 깨닫는 지혜도 역시 쓰지 말지니, 허망함과 깨달음을 모두 잊는 것을 이름하여 무심이라 하므로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달음이 늦음을 걱정하라’하였으며, 또 게송으로 이르시기를 ‘참(眞)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념된 소견을 쉬도록 하라’하셨으니, 이것이 허망을 쉬는 공부니라.  
 둘째는 쉼(休歇)이니, 이른바 공부할 때에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아 마음이 일어나면 곧 쉬며 반연(緣)을 만나거든 역시 쉬는 것이니라.
옛사람(石霜慶諸)이 이르기를 ‘한 가닥의 베(布)를 희게 다듬듯, 서늘한 가을비 내리듯, 옛 사당(古廟) 안의 향로 같이 하라’하였으니, 고운 먼지까지 끊고 분별을 떠나 바보 같고 천치 같이 되어야 바야흐로 조금이나마 서로 응하게(相應:合一) 되느니, 이것이 망심을 쉬는 공부니라.
 셋째는 마음을 없애고 경계를 남기는 공부니, 즉 공부할 때에 온갖 망념을 모두 쉬어서 바깥 경계를 돌아보지 않고 다만 자기의 마음만을 쉬는 것이니라. 
허망한 생각이 이미 쉬었으면 경계가 남은들 무슨 방해로움이 있으리요? 이는 곧 옛어른(臨濟義玄)의 말씀이 ‘사람은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다(奪人不奪境)’는 법문이니라.
그러므로 누군가가 이르기를 ‘이곳에 꽃다운 풀밭이 있으되 다정한 친구는 하나도 없다’하셨고, 또 방공(龐居士)이 이르기를 ‘다만 만물에 대하여 스스로 무심하면 만물이 항상 둘러싸여있은들 무슨 방해가 있으리오?’ 하였으니, 이것이 마음을 없애고 경계를 남기어 망을 쉬는 공부니라.
 넷째는 경계를 잊고 마음을 남기는 공부니, 즉 공부할 때에 안팎의 모든 경계를 모두가 공적함을 관찰하고 오직 한 마음만을 남겨서 외로이 우뚝 세우는 것이니라.
이른바 옛사람이 이르기를 ‘만법(萬法)과 더불어 짝하지 말고, 모든 경계와 상대되지 말라. 마음이 경계에 집착하면 마음이 허망하겠지만 지금 이미 경계가 없거늘 무슨 허망함이 있으리요?’하였으니, 참마음은 홀로 비추어서 도에 걸리지 않는 것이니라.
곧 옛사람이 ‘경계를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다(奪境不奪人)’한 것이므로 어떤 이가 말하기를 ‘동산에 꽃은 이미 다 졌으나 수레와 말은 여전히 붐빈다’하였고, 또 이르기를 ‘三천명의 검객(劍客)은 지금 어디에 있는고? 장주(莊周)가 태평세계 이룰 것만 홀로 계교하도다.’하니, 이것이 경계를 잊고 마음을 남기는 마음 쉬는 공부니라.
 다섯째는 마음도 없애고 경계도 없애는 것이니, 즉 공부할 때에 먼저 바깥 경계를 비워 고요하게 하고 다음에 안으로 마음을 멸하는 것이니라. 
이미 안팎으로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고요해졌거늘 끝내 망심이 무엇을 쫓아 있으리오? 그러므로 관계(灌溪志閑)가 이르기를 ‘시방에 벽(壁)이 없고 사방에 문(門)도 없어 벌거벗은 듯, 맑아 씻은 듯하다’하였으니, 곧 조사(임제 의현)의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는다(人境兩는俱 奪)’는 법문이니라.
그러므로 누군가가 이르기를 ‘구름이 흩어지고 물이 흘러가니 고요하여 천지가 비었다’하며, 또 이르기를 ‘사람과 소를 모두 볼 수 없으니 바로 이것이 달이 밝을 때라’하니, 이는 마음과 경계를 모두 잊어 허망함을 쉬는 공부니라.
 여섯째는 마음과 경계를 모두 남기는 공부니, 즉 공부할 때에 마음이 마음의 지위에 머무르고 경계가 경계의 지위에 머물러서 때로는 마음과 경계가 마주쳐도 마음이 경계를 취하지 않으며, 경계가 마음을 따르지 않아 제각기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자연히 망념이 생기지 않고 도에 걸림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경(法華經)에 이르기를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의 모습이 항상 머무른다.’하셨으니, 곧 조사가 이르기를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人境俱不奪)’는  법문이니라.
그러므로 어떤 이가 이르기를 ‘한 조각의 달이 바다 위에 떠오르니 몇 사람이나 누대 위로 오르던가?’하고, 또 이르기를 ‘산의 꽃 천만송이에 노는이들 돌아갈 줄 모르더라’하였으니, 이것이 마음과 경계를 모두 남기고 망(妄)을 멸하는 공부니라.
 일곱째는 안팎이 온전한 본체이니, 공부할 때에 산·강·땅·해·달·별·안의몸과 바깥세계 등 모든 법이 다 같이 참마음의 본체가 되는 것이니라. 말끔히 비고 밝아서 한 터럭의 차이도 없어서 모래 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를 한 조각으로 만들면 다시 어느 곳에 망심(妄心)이 생길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조법사(僧肇)가 이르기를 ‘하늘·땅이 나와 같은 뿌리요, 만물(萬物)이 나와 한 몸이라’하였으니, 이것이 안팎이 온전히 본체가 되어 망을 없애는 공부니라.
 여덟째는 안팎이 온전한 작용(用)으로 공부를 할 때이니, 온갖 안팎의 몸과 마음과 국토 등 모든 법과 그리고 일체 온갖 움직여 씀을 베풀어서 모두를 참마음의 묘한 작용임을 관(觀)하는 것이니라.
온갖 생각이 생기자마자 그대로가 곧 묘한 작용이 앞에 나타나는 것이라. 이미 모든 것이 다 곧 묘한 작용이거니 허망한 마음이 어디에 붙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영가(永嘉)께서 이르시기를 ‘무명의 실다운 성품이 곧 부처 성품(佛性)이요, 허깨비 같이 빈 몸이 곧 법신이라’하셨으며, 지공(誌公)의 十二시가(時歌)에 이르기를 ‘첫새벽 인시(寅時)여, 미친 탈춤 속에 도인(道人)의 몸이 숨었도다. 앉고 누움이 원래 이 도인줄 모르고 공연히 바쁘게 고통만 부르도다.’하셨으니, 이것이 곧 안팎이 완전히 작용하여 망을 쉬는 공부니라.
 아홉째는 본체 그대로가 곧 작용으로 공부할 때이니, 참 본체의 한맛(一味)인 공적에 부합하나 그 가운데 안으로 신령하고 맑음을 숨기는 것으로서 곧 본체가 곧 작용인 것이니라.
그러므로 영가께서 이르시기를‘성성(惺惺=또렷또렷 함)하고 적적(寂寂=고요함)은 옳고, 성성하고 망상(妄想)함은 그르며, 적적하고 성성함은 옳고, 적적하고 무기(無記=선도 악도 생각함이 없음)는 그르다’하셨으니, 이미 적적한 가운데 無記를 용납지 않고 성성한 가운데 망상을 용납지 않으면 온갖 망상이 어찌 생길 수 있으리오? 이것이 곧 본체 즉 작용으로 망을 없애는 공부니라.
 열째는 본체와 작용을 뛰어나니, 공부할 때에 안팎을 나누지 않으며 동·서·남·북도 가리지 않는 것이니라.
사방과 팔면을 몽땅 하나의 큰 해탈문(解脫門)으로 삼아 둥글고 둥글어 본체와 작용을 나누지 않고 털끝만치의 누락도 없이 온몸으로 한 조각을 이루면 망심이 어디서 일어나리요?
옛사람이 이르기를‘온몸에 꿰맨 자국이 없는지라 위아래가 온통 한 덩어리라’하였으니, 이것이 본체와 작용을 뛰어나 망심을 멸하는 공부니라.
 이상의 열가지 공부하는 법을 전부다 쓸 필요가 없으니, 다만 한 부문만을 가려서 공부가 성취되면 망혹이 저절로 사라지고 참마음이 곧 나타나리니, 근기와 전생 습성에 따르되 어느 법에 인연이 맞는지를 살펴서 익힐지어다.
이 공부는 애를 써서하는 공부가 아니요, 마음(생각)을 힘드려 하는 공부가 아니니, 이렇게 망심 쉬는 법문이 가장 긴요하므로 치우쳐 많이 말하였으나 번거로움을 싫어하지 말지어다.”

八. 眞心四儀 (참 마음의 네가지 올바름)

或曰하되 前說息妄이니 未審은 但只坐習인지 亦通行住等耶인가 曰하되 經論하되 多說坐習은 所以易成故로 亦通行住等은 久久漸成純熟故니라 起信論云하되 若修止者면 住於靜處하여 端坐正意하고 不依氣息하며 不依形色하며 不依於空하며 不依地水火風하며 乃至不依見聞覺知하며 一切諸想을 隨念皆除하되 亦遣除想이니 以一切法이 本來無想이니라 念念不生하고 念念不滅하니 亦不得隨心 外念境界後에야 以心除心이니라 心若馳散하면 卽當收來하여 住於正念하라 是正念者은 當知唯心이요 無外境界이니 卽復此心은 亦無自相으로 念念不可得이니라 若從坐起하여 去來進止하며 有所施作이라도 於一切時에 常念方便하여 隨順觀察하여 久習純熟하면 其心이 得住니라 以心住故로 漸漸猛利하여 隨順得入眞如三昧하여 深伏煩惱하며 信心增長하여 速成不退니와 唯除疑惑 不信誹謗 重罪業障 我慢懈怠하니 如是等人은 所不能入하니 據此則通四威儀也니라 圓覺經云하되 先依如來奢摩陀行하여 堅持禁戒하며 安處徒衆커나 宴坐靜室하니 此初習也니라 永嘉云하되 行亦禪坐亦禪이라 語黙動靜體安然하니 據此 亦通四儀耳니라 總論功力하면 坐尙不能息心인데 况行住等에서 豈能入道耶리오 若是用得純熟底人이며 千聖興來라도 驚不起하고 萬般魔妖라도 不廻顧커늘 豈况行住坐中에 不能做功夫也리오 如人이 欲讐恨於人해도 乃至行住坐臥 飮食하며 動用하는 一切時中에 不能忘了이며 欲愛樂於人도 亦復如是이니 且憎愛有心中事로 尙尙於有心中 容得인데 今做功夫는 是無心事이니 又何疑四儀中 不常現前耶로 只恐不信不爲이니 若爲若信則하며 威儀中에 道必不失也니라

묻기를 “앞에서 망심 쉬는 것을 말씀하셨으나 의문인 것은 다만 앉아서만 익히는지? 또한 다니고 멈출 때에도 통하는지요?”
답하기를 “경에 논하기를 앉아서 익히는 법을 많이 말씀하신것은 성취하기가 쉽기 때문이요, 다니거나 멈출 때에도 통한다 한 것은 오래오래 익혀야 점점 익어지기 때문이니라.”
기신론(起信論)에 이르기를‘만일 지(止=선정)를 닦으려거든 고요한 곳에 머물러서 단정히 앉아 뜻을 바르게 하고, 기운이나 호흡에 의하지 말며 형상이나 빛에도 의하지 말며 허공에도 의하지 말며 땅·물·불·바람에도 의지하지 말며, 나아가서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에도 의지하지 말며, 온갖 망상을 생각나는 대로 모두 除(없앰)하되 제한다는 생각도 버릴지니, 온갖 법이 본래 망상이 없기 때문이니라.
생각 생각이 나지 않고 생각 생각이 멸하지 않나니, 마음을 따라 바깥 경계도 생각지 않은 뒤에야 마음으로 마음을 제하게 되느니라.
마음이 만약 흩어지면 곧 거두어 와서 바른 생각(正念)에 머물라. 이 정념이란 것은 오직 마음뿐이요 바깥 경계가 없나니 이 마음은 제 모습도 없어서 생각 생각을 얻을 수 없느니라.
만일 자리에서 일어나 가고 오고 나아가고 물러가며, 온갖 분별동작을 하더라도 언제나 항상 방편을 생각해서 순리를 따라 관찰해서 오래 익히어 순일하게 익어지면 그 마음이 머물러지리라.
 마음이 멈추었으므로 차츰 용맹해져서 순리에 따라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들어가서 번뇌를 깊이 굴복시키며 신심이 늘어나서 물러나지 않는 지위를 속히 이루려니와 오직 의혹하는 자와 믿지 않고 비방하는 자와 무거운 죄업이 가리운 자와 아만으로 게으른 자만은 제외하나니 이런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한다’하셨으니, 이에 의거한즉 네가지 위의에 통하느니라.
원각경(圓覺經)에 이르기를‘먼저 여래의 사마타(奢摩他:망념을 쉬고 마음을 한곳에 머뭄) 행에 의지해서 계율을 굳게 지키며 대중 속에 머무르거나 조용한 방에 가만히 앉으라’하셨으니, 이는 처음 익히는 것이니라.
영가(永嘉)께서 이르시기를‘다닐 때에도 禪定이요, 앉을 때에도 선정이라, 말하거나 침묵할 때와 움직이거나 고요할 때에도 본체는 언제나 태연하다’하셨으니, 이에 의함도 또한 네가지 위의에 통하니라.
공부의 힘을 통틀어서 말한다면 앉아서도 마음을 쉬기 어렵거늘 하물며 다니고 멈추는 등에서 어찌 능히 도에 들 수 있으리요?
 만약 작용이 순일하게 익어진 사람이라면 천 성인이 나타나더라도 꼼짝도 하지 않고 만가지의 마가 나타나더라도 돌아보지도 않거늘 어찌 다니고 멈추고 앉는 가운데 공부를 하지 못하리요? 마치 어떤 사람이 남에게 원수를 갚으려 해도 다니고 멈추고 앉고 눕고 음식을 들며 온갖 동작 하는 일체 시 가운데 잠시도 잊지 못하는 것이며, 남을 사랑하는 경우도 다시 이와 같나니, 미움과 사랑은 마음속의 일로서 오히려 마음 가운데 있어 그러하거늘 지금 이 공부는 무심의 일이니 하물며 네가지 위의 가운데서 항상 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의심 하리오?
다만 믿지 않고 행하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니, 만약 믿고 행하기만 한다면 네가지 위의(행·주·좌·와) 가운데 반드시 도를 잃지 않으리라.”

九. 眞心所在 (참마음이 있는 곳)

或曰하되 息妄心而하면 眞心現矣하니 然則眞心體用은 今在何處이오 曰하되 眞心妙體가 徧一切處하니 永嘉云하되 不離當處常湛然하여 覓則知君不可見하며 經云하되 虛空性故로 常不動故며 如來藏中는 無起滅故니라 大法眼云하되 處處菩提路요 頭頭功德林이라 此卽是體所在也니라 眞心妙用은 隨感隨現이 如谷應聲이니 法燈云하되 今古應無墜하여 分明在目前이니라 片雲은 生晩谷하고 孤鶴은 下遙天이라 所以로 魏府元華嚴云하되 佛法이 在日用處하며 在行住坐臥處하며 喫茶喫飯處하며 語言相問處하며 所作所爲하나 擧心動念하면 又却不是也이니 故知하라 體卽徧一切處하여 悉能起用하고 但因緣有無不定故로 妙用不定耳이나 非無妙用也니라 修心之人이 欲入無爲海 度諸生死하면 莫迷眞心體用所在也니라
묻기를“망심을 쉬면 참마음이 나타난다 하니, 그렇다면 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요?”
답하기를“참마음의 묘한 본체가 온갖 곳에 두루 하나니, 영가(永嘉)선사가 이르기를‘제자리(當處)를 여의지 않고 항상 담연(湛然:담담하고 고요)하여 찾으면 그대는 보지 못할 줄 알 것이다’하였으며, 경에 이르기를‘허공의 성품이기 때문이며 항상 요동치 않기 때문이며 여래장(如來藏) 가운데는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기 때문이라’하셨고, 대법안(大法眼 文益)은 이르기를‘곳곳마다 보리의 길이요 일마다 공덕의 숲(功德林)이라’하셨으니, 이것이 곧 마음이 있는 곳이니라.
참마음의 묘한 작용은 느낌(感)에 따라 나타남이 마치 골짜기에 메아리가 응하는 것 같나니, 법등(法燈)이 이르기를‘예나 지금이나 응당 떨어짐이 없이 분명히 눈앞에 있노라. 조각구름은 늦은 골짜기에서 나고 외로운 학(鶴)은 먼 하늘 끝에 내린다’하였느니라. 까닭으로 위부(魏府)의 원화엄(元華嚴)이 이르기를‘불법이 일상생활 속에 있으며, 다니고 멈추고 앉고 눕는데 있으며, 차 먹고 밥 먹는 곳에 있으며, 말하고 문답하는 곳에 있으며 동작과 분별하는 곳에 있으나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이면 또 옳지 못하다’하였으니, 그러므로 알라. 본체는 곳 온갖 곳에 두루하여 능히 모든 작용을 일으키고 다만 인연의 있고 없음이 일정치 않은 까닭에 묘한 작용도 일정하지 않으나 묘한 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니라.
마음을 닦는 사람이 무위(無爲)의 바다에 들어가서 모든 생사를 건지려한다면 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있는 곳을 미혹하지 말아야 하니라.

十. 眞心出死 (참마음은 죽음을 벗어남)

或曰하되 嘗聞見性之人은 出離生死然이나 往昔諸祖인 是見性之人이 皆有生有死하며 今現見世間修道之人도 有生有死事이니 如何云出生死耶인가 曰하되 生死本無거늘 妄計爲有니라 如人이 病眼하여 見空中花하나 無病人說하되 無空花하면 病者不信타가 目病若無하면 空花自滅하여 方信花無하니 只花未滅해도 其花亦空이라 但病者가 妄執爲花라도 非軆實有也니라 如人이 妄認生死爲有하면 或無生死人이 告云하되 本無生死해도 彼人不信타가 一朝妄息하여 生死自除하면 方知生死本來是無이니 只生死未息時에는 亦非實有이나 以妄認生死有니라 故經云하되 善男子 一切衆生이 從無始來로 種種顚倒가 如迷人이 四方易處를 妄認四大하여 爲自身相로 六塵緣影을 爲自心相하니 譬彼病目으로 見空中花하며 乃至如衆空花이 滅於虛空도 不可說言有定滅處니라 何以故하면 無生處故니라 一切衆生이 於無生中에 妄見生滅하니 是故로 說名輪轉生死니라 據此經文하되 信知達悟圓覺眞心 本無生死하리라 今知無生死而어도 不能脫生死者는 功夫不到故也니라 故로 敎中說하되 菴婆女가 問文殊云하되 明知生是不生之法이나 爲甚麽로 被生死之所流인가 文殊云하되 其力未充故라 後有進山主가 問修山主云하되 明知生是不生之法해도 爲甚麽로 却被生死之所流하니 修云하되 笋畢竟成竹去하나 如今 作筏使得麽인가 所以로 知無生死가 不如體無生死하고 體無生死가 不如契無生死하고 契無生死가 不如用無生死니라 今人이 尙不知無生死거늘 况體無生死거나 契無生死거나 用無生死耶리오 故로 認生死者하면 不信無生死法이 不亦宜乎리오
혹 묻기를“일찍이 들으니 ‘성품을 본(見性) 사람은 생사(生死)를 벗어난다’ 하였으나 옛 조사들인 곧 견성한 사람이 모두 나고 죽음이 있었으며, 현재 세간에서 수도하는 사람들을 보아도 남도 있고 죽는 일도 있으니,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 하는 것인지요?”
답하기를“생사가 본래 없거늘 허망하게 계교하여 있다고 여길 뿐이니라. 마치 사람이 눈병이 나서 허공에 꽃이 있다고 보나 병 없는 사람이 말하기를‘허공에 꽃이 없다’하면 병든자가 믿지 않다가 눈병이 없어지면 허공꽃이 없어지니 비로소 허공꽃이 없는 것을 믿나니, 다만 꽃이 사라지지 않아도 그 꽃은 역시 空한 것이라 다만 병들은 자가 망령되게 꽃이라고 집착할지라도 모습(體)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니라.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를 그릇 인정하여 있다고 할 때에 생사가 없는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고 일러줘도 그 사람이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지면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음을 알게 되나니 다만, 생사가 쉬지 않았을 때에는 역시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나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나니라.
그러므로 경(圓覺經)에 이르기를‘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시작없는 옛부터 지금까지 갖가지로 뒤바뀜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처소의 네방향(四方)과 사대를 망령되이 인정하여 자기 몸의 모습을 삼아 여섯경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자기 마음의 모습으로 삼나니,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 가운데 꽃을 보며, 나아가서는 마치 온갖 허공꽃이 허공에서 멸할 지라도 결정코 멸하는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무슨 까닭인가?하면 생기는 곳이 없기 때문이니라. 일체 중생이 생하는 것이 없는 가운데서 망령되게 생멸을 보나니 이러하므로 ‘이름하여 생사에 굴리어지게 된다(輪廻)’ 하니라.
이 경문에 의하건대 원각(圓覺)의 참마음을 통달하여 깨달으면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믿으리라.
지금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공부가 철저(到底)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경전(敎學)에 설하기를 ‘암바녀(庵婆女)가 문수(文殊)보살에게 묻기를 ‘生이 곧 생함이 없는 법임을 분명하게 알았으나 무엇 때문에 생사의 흐름(輪廻)을 받나이까?’하니, 문수가 이르기를 ‘그 힘이 충실치 못하기 때문이라’하셨으며, 후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生)이 곧 생 아닌 법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무엇 때문에 생사의 흐름을 받나이까?’하니, 수산주가 이르기를 ‘죽순(筍)이 결국 대(竹)가 되나 지금 당장에 뗏목을 만들면 쓸수 있겠는가?’하였으니,
그 까닭에 생사 없는 줄 아는 것이 생사 없음을 체득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생사 없음을 체득하는 것이 생사 없음에 계합(契合)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생사 없음을 계합하는 것이 생사 없음을 쓰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요즘 사람들이 오히려 생사 없음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 없음을 체득하거나 계합하거나 활용할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면 생사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리오?”

十一.眞心正助(참마음의 주(正)된 노력과 보조(助)가 되는 노력)

或曰하되 如前息妄하면 眞心現前이나 且如妄未息時에는 但只歇妄하는 做無心功夫인가 更有別法하여 可對治諸妄인가 曰하되 正助不同也이니 以無心息妄으로 爲正이니 以習衆善로 爲助니라 譬如明鏡 爲塵所覆이 雖以手力 揩拭하나 要須妙藥으로 磨瑩光始現也이니 塵垢는 煩惱也요 手力無心功夫也요 磨藥衆善也요  鏡光眞心也니라 
起信論云하되 復次 信成就發心者는 發何等心하면 略有三種이니 云何爲三하면 一者는 直心이니 正念眞如法故 二者는 深心이니 集一切善行故며 三者는 大悲心이니 欲拔一切衆生苦故니라 問曰하되 上說法界一相 佛體無二하고 何故로 不唯念眞如하고 復假求學諸善之行 答曰하되 譬如大摩尼寶가 體性明淨이나 而有鑛穢之垢하여 若人雖念寶性해도 不以方便 種種磨治하면 終無得淨이니라 如是衆生眞如之法의 體性空淨이나 而有無量煩惱染垢이니 若人이 雖念眞如해도 不以方便 種種熏習이 亦無得淨이니 以垢無量으로 徧一切法故로 修一切善行하여 以爲對治로 若人修行一切善法하면 自然歸順眞如法故니라 據此所論하면 以休歇妄心로 爲正하고 修諸善法으로 爲助니라 若修善時에는 與無心相應하여 不取着因果이니 若取因果하면 便落凡夫人天報中하여 難證眞如라 不脫生死니라 若與無心相應하면 乃是證眞如之方便이며 脫生死之要術이며 兼得廣大福德이니라 金剛般若經云하되 須菩提야 菩薩이 無住相布施하면 其福德이 不可思量하니 今見世人 有叅學者하면 纔知有箇本來佛性하면 乃便自恃天眞하고 不習衆善이니 豈只於眞心不達이며 亦乃翻成懈怠하여 惡道를 尙不能免인데 况脫生死리오 此見大錯也니라
 묻기를“앞서처럼 망령된 생각(妄心)을 쉬면 참마음이 나타나나 또한 망념을 쉬지 못하였을 때는 다만 망념만을 없애는 무심공부를 닦아야 하옵니까? 다시 별도의 법이 있어서 모든 망념을 상대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옵니까?”
답하기를 “바른것(正:근본)과 돕는것(助:수단)이 같지 않으니 무심은 망념을 쉬는 것으로써 바름(正:근본)을 삼고, 온갖 선을 익히는 것으로써 조(助:수단)를 삼느니라. 비유하면 밝은 거울이 먼지에 덮힌 것과 같이 비록 손으로 힘써 털고 닦으나 바라건대 모름지기 묘한 약으로 갈아 빛을 내야 비로소 광체가 나타나는 것이니 먼지와 때는 번뇌요 손의 힘은 무심공부요, 닦는 약은 바른 행들이요, 거울의 빛은 참마음이니라.
대승기신론(起信論)에 이르기를‘다음으로 믿음을 성취하는 발심(信成就發心)이란 어떤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인가? 하면 대략 세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세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곧은 마음(直心)이니 진여의 법을 바르게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깊은 마음(深心)이니 온갖 착한 행에 이르기 때문이요, 셋째는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大悲心)이니 일체 중생을 괴로움으로부터 건지려하기 때문이니라.

 묻기를“위에서 말하기를‘법계는 한 덩이라 부처의 본체는 둘이 없다’고 하셨는데 무슨 까닭에 진여의 법만을 오직 생각하지 않고, 다시 온갖 바른 행을 빌려 배움을 구하여야 하옵니까?”
답하기를“비유하건대 마치 큰 마니주(摩尼)보배가 근본(體) 성품은 밝아 맑으나 광물의 더러운 때가 있는 것이 만약 사람도 비록 보배의 성품은 생각했다 하여도 방편으로써 갈고 닦지 않으면 끝내 맑아질 수 없는 것이니라.
이와같이 중생의 진여법의 바탕(體)의 성품은 비어 맑으나 한량없는 번뇌의 때가 있으니, 사람이 비록 진여를 생각하더라도 방편으로써 갖가지로 익혀(薰習) 저장하지 않으면 역시 맑아질 수 없으니, 때(번뇌, 망상)가 한량이 없음으로써 일체 법에 두루하기 때문으로 일체 선행을 닦아 상대적으로 다스림으로써 사람이 일체선업을 닦으면 자연히 진여의 법에 돌아가 순응하게 되는 까닭이라”하셨으니, 이(大乘起信論)에 의하건대 망심을 쉬어 비움으로써 정(正:근본)을 삼고, 모든 착한 법을 닦는 것으로써 조(助:수단)를 삼느니라.
만일 바른것(正)을 닦을 때에는 무심(無心)과 더불어 상응(相應)하여 인과에 집착하여 취하지 말지니, 만일 인과를 의지하면 곧바로 범부인 인간과 하늘의 과보(報)가운데 떨어져서 진여를 증득하기 어려운지라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느니라.
무심과 더불어 서로 응(相應)하면 이에 이것이 진여를 증득하는 방편이며 생사를 벗어나는 요긴한 수단(術)인 것이며, 겸하여 광대한 복덕을 얻게 될 것이니라.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에 이르기를‘수보리야! 보살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다’하셨으니 요즘 세상 사람들이 참선하는 것을 보면, 겨우 한낮 본래의 불성이 있는 줄을 알기만 하면 이에 문득 스스로 본래 천연한 참인 것만을 믿고 뭇 바른 것을 익히지 않으니, 어찌 참마음에 통달하지 못할 뿐이겠는가? 또한 도리어 게으름을 이루어 나쁜길(惡道)을 면하지 못할 것이거늘 하물며 생사를 벗어날 수 있으리오? 이것은 크게 그릇된 소견이니라.”

十二. 眞心功德 (참마음의 공덕)

或曰하되 有心修因하는 不疑功德矣하나 無心修因에 功德何來인가 曰有心修因하면 得有爲果하고 無心爲因하면 顯性功德이니라 此諸功德은 本來自具이나 妄覆不顯하니 今旣妄除하면 功德現前니라 故永嘉云하되 三身四智體中圓하고 八解六通이 心地印하니 乃是體中에 自具性功德也니라 古頌하되 若人靜坐一須臾가 勝造恒沙七寶塔하나니 寶塔은 畢竟化爲塵하나 一念淨心은 成正覺이니 故知無心功夫 大於有心也하라 洪州水潦和尙이 叅馬祖하여 問如何是 西來的的意인가 被馬祖 一踏踏倒하며 忽然發悟起來撫掌大笑云하되 也大奇也大奇로다 百千三昧와 無量妙義를 只向一毛頭上도 便一時識得根源去로다 乃作禮而退하였으니 據此則功德이 不從外來라 本自具足也니라 四祖가 謂懶融禪師曰하되 夫百千法門이 同歸方寸하고 河沙功德이 總在心源이노라 一切戒門-定門-慧門-神通變化悉가 自具足하여 不離汝心이라 據祖師語해도 無心功德이 甚多거늘 但好事相功德者는 於無心功德에 自不生信耳니라
묻기를“마음 있음으로 인행을 닦는 공덕은 의심치 않겠지만
무심으로 인행을 닦는대 공덕이 어찌 온다 하는지요?”
답하기를“마음 있음으로 인행을 닦으면 유위의 과보를 받고, 마음 없음으로 인행을 닦으면 성품의 공덕을 드러내느니라.
이 모든 공덕은 본래부터 스스로 갖춰진 것이나 망령이 덮히어 드러나지 못하나니, 이제 이미 망령을 제하였으면 공덕이 앞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영가(永嘉)선사께서 이르시기를‘세 몸(三身;법신·보신·화신)과 네가지 지혜(四智)가 본체 가운데 원만하고, 여덟가지 해탈(八解)과 여섯가지 신통(六神通)이 마음 바탕에 새겨졌다’하셨으니, 이것이 본체 가운데 갖추어진 성품의 공덕이니라.
옛사람이 칭송(頌)하기를 ‘어떤 사람이 잠깐 동안만이라도 고요히 앉는 것이 항하의 모래수 만큼의 七보로 탑을 세운 것보다 뛰어나(殊勝)나니, 보배탑은 마침내 티끌로 변하지만 한 생각 맑은 마음은 바른 깨달음(正覺)을 이룬다’하셨으니, 그러므로 무심공부의 힘이 유심공부보다 크다는 것을 알라.
홍주(洪州)의 수료(水遼)화상이 마조(馬祖)대사에게 참예 하여  ‘어떤 것이 (조사가)서쪽에서 온 분명한 뜻입니까?’묻다가 마조에게 한번 걷어차여 쓰러지면서 갑자기 깨닫고 일어나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며 이르기를‘매우 기이하고 기이 하도다, 백 천 삼매와 한량없는 묘한 이치를 오직 한 털끝까지 문득 일시에 근원까지 깨달았도다.’하시고 절을 하고는 물러갔으니, 이를 본보기로 의하여도 공덕이 밖으로 쫓아 온것이 아니라 본래 스스로 구족한 것이니라.
四祖가 나융(懶融)선사에게 말하기를‘무릇 백천가지 법문이 모두가 마음(方寸)으로 돌아가고, 항하사의 공덕이 모두가 마음 근원에 있노라. 온갖 계율의 문·선정의 문·지혜의 문·신통변화 모두가 스스로 구족하여 그대 마음을 여의지 않았노라’하셨으니, 사조의 말씀에 의하여도 무심의 공덕이 아주 많거늘 다만 형상 공덕만을 좋아하는 자는 무심공덕에 스스로 믿음을 내지 못하느니라.”

十三. 眞心驗功 (참마음 공부의 증험)

或曰하되 眞心現前하면 如何知是眞心 成熟無礙也인가 曰하되 學道之人이 得眞心現前時에 但習氣未除이면 若遇熟境하면 有時失念하니 如牧牛에 雖調到牽 拽隨順處라도 猶不敢放了鞭繩니라 直待心調步穩해저 赶趁入苗稼中해도 不傷苗稼여야 方敢撒手也니라 到此地步되면 便不用牧童鞭繩해도 自然無傷苗稼이니 如道人이 得眞心後에 先且用功保養하여 有大力用해야 方可利生이라 若驗此眞心時에는 先將平生所憎愛底境을 時時想在面前하여 如依前起憎愛心하면 則道心未熟이요 若不生憎愛心하면 是 道心熟也니라 雖然如此成熟이라도 猶未是自然不起憎愛를 又再驗心이니라 若遇憎愛境時에 特然起憎愛心하여 令取憎愛境界해도 若心不起하면 是心無礙가 如露地白牛 不傷苗稼也이니 古有呵佛罵祖者는 是與此心相應이나 今見하니 纔入宗門하여 未知道之遠近이면서 便學呵佛罵祖者인데 太早計也니라
 묻기를“참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어떻게 이것이 참마음이 성숙하여 걸림이 없는 것인지 알 수 있나이까?”
답하기를“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마음이 앞에 나타날 때 습기를 제하지 못했으면 익혀진 경계를 만나면 때로는 생각(念)을 잃어 버리나니, 마치 소를 기르는데 비록 이끄는 대로 잘 따를 지라도 오히려 더 고삐와 채찍을 놓아 주지 않고, 바르게 마음이 길들여지고 걸음이 평온해져서 곡식밭가운데로 몰고 들어가도 곡식을 상하지 않게 되어야 비로소 손을 떼게 되는 것이니라.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되면 목동이 채찍과 고삐를 쓰지 않아도 자연히 곡식을 상하지 않게 되나니, 그와 같이 도를 닦는 사람이 참마음을 증득한 뒤에 먼저 공들여 보호하고 지켜(保養)서 큰 힘을 쓸 수 있게 되어야 비로소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느니라.
만약 이 참마음을 증험하려 할 때는 먼저 평소에 미워하고 사랑하던 경계를 때때로 면전에 상상(想像)하여 전과 같이 미워함과 사랑함의 생각이 일어나면 도의 마음이 아직은 익지 않은 것이요,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나지 않으면 이는 도의 마음이 익어진 것이니라.
 비록 이런 경지에 이르렀더라도 아직은 미움과 사랑이 자연히 일어나지 않는 경지는 아니니, 또 다시 증험 해 볼지니라.
 만일 미움과 사랑의 경계를 만날 때에 특별히 미움과 사랑의 경계를 취하려 하여도 그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 마음은 걸림없이 된 것이 한데(露地)에 드러난 흰소(白牛)가 곡식을 해치지 않는 것 같으리니, 옛부터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나무라는 이들이 있는 것은 곧 이 마음과 더불어 서로 응하는 것이나, 요즘 보니, 겨우 종문(宗門)에 들어와서 도의 멀고 가까움도 알지 못하면서 문득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나무라는 법부터 배우는데 너무나 경솔한 계교니라.”

十四. 眞心無知 (참마음은 알음알이가 없다)

或曰하되 眞心與妄心이 對境時에 如何辨別眞妄耶인가 曰하되 妄心對境은 有知而知라 於順違境에 起貪嗔心이니 又於中容境에 起癡心也로 旣於境上에 起貪嗔癡三毒하면 足見是妄心也니라 祖師云하되 逆順相爭이 是爲心病이라 故로 知對於可不可者 是妄心也니라 若眞心者이면 無知而知라 平懷圓照故로 異於草木하고 不生憎愛故로 異於妄心이니 卽對境虛明하여 不憎不愛하며 無知而知者眞心故로 肇論云하되 夫聖心者은 微妙無相이라 不可爲有 用之彌勤이라 不可爲無하고 乃至非有故로 知而無知하고 非無故로 無知而知하니 是以 無知卽知로 無以言異於聖人心也니라 又 妄心은 在有着有하고 在無着無하여 常在二邊하여 不知中道하여 永嘉云하되 捨妄心取眞理하면 取捨之心이 成巧僞나니 學人은 不了用修行하여 深成認賊將爲子이니 若是眞心은 居有無而하되 不落有無하고 常處中道故 祖師云하되 不逐有緣하고 勿住空忍하라 一種平懷하면 泯然自盡이니라
묻기를“참마음과 더불어 망령된 마음이 경계를 대할 때, 어떻게 참과 망심인가를 분별하옵니까?”
답하기를“허망한 마음으로 경계를 대하는 것은 알음아리(知)가  있음으로써 아는지라 거슬리고 거슬리지 않(順)는 경계에 탐욕·성냄·어리석음 등의 마음을 일으키나니, 또 그 중간의 경계에 대해서 이미 경계에 대하여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인 三독을 일으킨다면 족히 그것은 망심임을 알 수 있느니라.
조사(三祖 僧璨)께서 이르시기를‘거슬림과 거슬리지 않음이 서로 다투는 것이 곧 마음의 병통이라’하셨으니,그러므로 옳음과 옳지 못함을 상대하는 것이 허망한 마음임을 알 수 있느니라.
만일 참마음이라면 알음아리가 없음으로써 아는지라 원만한 생각으로 두루 비추는 까닭에 초목과는 다르고, 미움도 사랑도 일으키지 않는 까닭에 망심과 다르나니, 곧 경계를 대하여 비어 밝아 미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으며, 알음이 없음으로서 아는 것이 참마음이므로 조론(肇論)에 이르기를‘무릇 성스러운 마음이란 미묘해서 형상이 없는지라 있다고 할 수 없고, 쓸수록 더욱 부지런한지라 없다고 할 수도 없도다’하시고, 나아가서‘있는 것이 아니므로 알되 알음아리가 없고, 없는 것이 아니므로 알음알이가 없이 안다’하셨으니, 이러 하므로써 알음이 없으되 아는지라 성인의 마음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느니라.
 또 허망한 마음은 있음에는 있음에 집착하고, 없음에는 없음에 집착하여 항상 양(二) 변견(邊見)에 치우쳐 중도(中道)를 알지 못하나니, 영가선사가 이르시기를‘망심을 버리고 진리(眞理)를 취하면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나니, 學人들이 수행을 잘 하지 못해서 도적을 잘못 알아 자식으로 여기는 병이 깊노라’하셨으니, 이 진심은 있음과 없음에 있으나 있음과 없음에 떨어지지 않고 항상 중도에 처하느니라.
그러므로 조사(三祖 僧璨)께서 이르시기를‘있음에 반연(攀緣)하여 쫓지 말고, 空이란 것에도 머물지 말라. 한 가지로 평탄하면 저절로 다하리라’하셨으며,

肇論云하되 是以로 聖人은 處有不有요 居無不無이니 雖不取於有無 然 不捨於有無한 所以로 和光塵勞이듯 周旋五趣하되 寂然而往하고 忽爾而來하여 恬淡無爲而無不爲니라 此가 說聖人이 垂手爲人하여 周旋五趣하면 接化衆生하되 雖往來而이나 無往來相이니라 妄心은 不爾故로 眞心妄心은 不同也니라 又眞心은 乃平常心也요 妄心은 乃不平常心也니라 或曰하되 何名平常心也인가 曰하되 人人 具有一點靈明하되 湛若虛空하여 徧一切處이니 對俗事는 假名理性하고 對行識 權號眞心이니라 無分毫分別하되 遇緣不昧하고 無一念取捨하되 觸物皆周하나 不逐萬境遷移하고 設使隨流得妙라도 不離當處常湛然하며 覓則知君不可見가 乃眞心也니라 或曰하되 何名不平常心耶인가 曰하되 境有聖與凡하고 境有染與淨하며 境有斷與常하고 境有理與事하며 境有生與滅하고 境有動與靜하며 境有去與來하고 境有好與醜하며 境有善與惡하고 境有因與果니라 境有細論則萬別千差이나 今乃 且擧十對한 皆名不平常境也니라 心隨此不平常境而生하고 不平常境而滅하니라 不平常境心은 對前平常眞心에 所以로 名不平常妄心也하고 眞心本具하여 不隨不平常境生하여 起種種差別所以로 名平常眞心也니라 或曰하되 眞心平常하여 無諸異因하면 奈何여 佛說因果善惡報應乎인가 曰하되 妄心 逐種種境하며 不了種種境하여 遂起種種心하니 佛說種種因果法하여 治伏種種妄心하여 須立因果也니라 若此眞心은 不逐種種境하되 由是하여 不起種種心으로 佛卽不說種種法이거늘 何有因果也리오 或曰하되 眞心은 平常不生耶인가 曰하되 眞心은 有時施用이 非逐境生이며 但妙用遊戱이나 不昧因果耳니라
조론에 이르기를‘이로써 성인은 있음에 처하되 있음이 아니요, 없음에 있으되 없음이 아니니, 비록 있음과 없음을 취하지 않으나 있음과 없음을 버리지도 않는 까닭으로 햇빛과 먼지가 섞이듯이 다섯 갈래(五趣)에 두루 돌아다니되 고요히 갔다가 홀연이 와서 담담히 함이 없으되 하지 않는 것이 없노라’하셨으니, 이것이 성인이 사람들을 위하여 사람을 위하여 손을 내밀어 다섯 갈래에 두루 하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손을 위하여 내밀어 건져주고자 다섯갈래(五趣)로 두루 돌아다니며 교화하기를 비록 왕래하지만 왕래하는 형상이 없는 것이니라.
망심은 그렇지 않으므로 眞心과 妄心이 같지 않으니라.
또 참마음(眞心)은 평상심(平常心)이요, 망령된 마음(妄心)은  마음이 항상 평상치 못한 것이니라.”
묻기를 “무엇이 평상의 마음이라 하는 것인지요?”
답하기를“사람마다 한 점의 신령스런 광명을 갖춰있되 허공과 같이 담연하여 일체처에 두루 하나니, 세속 일(俗事)을 대하여는 이성(理性)이라 거짓이름 하고, 정신의 움직임(行識)에 대하여는 방편으로 참마음이라 부르니라.
털끝만치의 분별도 없으되 인연을 만나면 어둡지 않고, 한 생각도 취하고 버릴 것이 없으되 접촉하는 닿는 물건마다 모두 두루 하나 만가지 경계를 따라 변천(變遷)하여 따르지 않느니라. 설사 흐름에 따라 묘함을 얻을지라도 항상 담연(湛然:맑아 고요)하여 제자리를 여의지 않으며, 찾은즉 그대가 보지 못 할 줄 아는 것이 참마음이니라.”
묻기를“어떤 것이 이름하여 평상치 못한 마음(不平常心)이라 하는 것이옵니까?”
답하기를“경계에는 성인과 범부가 있고, 경계에는 더러움과 깨끗함이 있으며, 경계에는 없어짐과 항상함이 있고, 경계에는 이치와 현상이 있으며, 경계에는 남과 없어짐이 있고, 경계에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으며, 경계에는 감과 옴이 있고, 경계에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있으며, 경계에는 선과 악이 있고, 경계에는 원인(因)과 결과(果)가 있나니, 자세히 논한다면 천만 가지 차별이 있으나 지금 열가지 상대를 들어 모두가 평상치 못한 경계라 하느니라.
마음이 이 평상이 아닌 경계를 따라 생기고, 이 평상이 아닌 경계를 따라 사라지는 것이니라. 평상이 아닌 경계의 마음이란
앞서 평상의 참마음에 대립시키는 까닭으로 평상이 아닌 망심이라 하고, 참마음은 본래 갖추어져 있어 평상이 아닌 경계에 따라 갖가지 차별을 일으키지 않는 까닭으로 평상의 참마음이라 하는 것이니라.
묻기를 “참마음이 평상하여 모든 차별된 인(因)이 없다면 어찌하여 부처님은 인과(因果)와 선악(善惡)과 갚음(報應)을 말씀하셨는가요?”
답하기를“망심은 갖가지 경계를 쫓으면서 갖가지 경계를 알지 못하여 갖가지 마음을 쫓아 일으키나니, 부처님께서 갖가지 인과법을 설하셔서 갖가지 망심을 조복시켜 주시려고 인과법을 세우셨나니라. 이 진심은 갖가지 경계를 따르지 않으며, 이로 말미암아 갖가지 마음을 일으키지 않기에 부처님께서 곧 갖가지 법을 말씀하시지 않았나니 어찌 인과가 있으리요?”
묻기를 “참마음은 평상으로 나지 않는 것인가요?”
답하기를 “참마음은 때로 작용하나 경계를 따라 생기는 것은 아니며, 다만 묘한 작용만으로 활동(遊戱)하며 인과에 어둡지  않느니라.”

十五. 眞心所往 (참마음이 가는 곳)

或曰하되 未達眞心人은 由迷眞心故로 作善惡因하니 由作善因故로 生善道中하고 由作惡因故로 入惡道中하니 逐業受生은 其理不疑이나 若達眞心人은 妄情歇盡하여 契證眞心하여 無善惡因하면 一靈身後에 何所依託耶인가 曰하되 莫謂有依託者 勝無依託耶하며 又 莫將無依託者-同人間飄零之蕩子 似鬼趣無主之孤魂하라 特爲此問은 求有依託耶인가 或曰하니 然이라 曰하되 達性則不然也이니 一切衆生은 迷覺性故로 妄情愛念으로 結業爲因하여 生六趣中하여 受善惡報니라 假如天業爲因하면 只得天果이니 除合生處하고 餘並不得受用하니라 諸趣皆爾니라 旣從其業故로 合生處爲樂하고 不生處爲非樂 以合生處 爲自己依託하고 不生處는 爲他人依託하니 所以로 有妄情則하면 有妄因하고 有妄因則有妄果하고 有妄果則有依託하고 有依託則하니 分彼此하고 分彼此則하니 有可不可也니라 今達眞心하면 契無生滅之覺性하여 起無生滅之妙用하나니 妙體는 眞常이라 本無生滅하며 妙用은 隨緣이라 似有生滅이니라 然이나 從體生用이니 用卽是體라 何生滅之可有리오  達人은 卽證眞體이나 其生滅이 何干涉耶리오 如水以濕性 爲體 波浪爲用이니라 濕性은 元無生滅故로 波中濕性이 何生滅耶리오 然이나 波離濕性別無故 波亦無生滅한 所以로 古人云하되 盡大地是沙門一隻正眼이요 盡大地是箇伽籃이니 是悟理人의 安身立命處니라 旣達眞心이면 四生六道가 一時消殞하여 山河大地가 悉是眞心이니 不可離此眞心之外여 別有依託處也니라 旣無三界妄因이니 必無六趣妄果이며 妄果旣無거늘 說甚依託인가 別無彼此이니 旣無彼此則인데 何可不可也리오 卽十方世界가 唯一眞心이라 全身受用하니 無別依託이니라 又於示現門中에는 隨意往生而 無障礙니라 故傳燈云하되 溫操尙書가 問圭峰曰하되 悟理之人이 一期壽終하면 何所依託하니 圭峰曰하되 一切衆生이 無不具有靈明覺性하여 與佛無殊이니 若能悟此性하면 卽是法身이 本自無生인데 何有依託이리오 靈明不昧하며 了了常知하니 無所從來이며 亦無所去이니 但以空寂으로 爲自體 勿認色身하며 以靈知爲自心하여 勿認妄念하라 妄念若起라도 都不隨之則하면 臨命終時에 自然業不能繫하리라 雖有中陰이나 所向自由하여 天上人間에 隨意寄託하시니 此卽眞心이 身後所往者也니라
묻기를“참마음을 통달치 못한 사람은 참마음에 미혹하므로 선 악의 인을 짓나니, 선한 인을 지음으로 말미암아 좋은 길가운데 태어나고, 악한 인을 지음으로 말미암아 나쁜 길 가운데로 들어가나니, 업에 따라 태어남은 그 이치는 의심치 않겠으나 참마음을 통달한 사람은 망령된 정(妄情)이 쉬어다하여 참마음에 계합하여 증득하면 선악의 인이 없다면 하나의 영혼이 몸이 죽은 뒤에 어디에 의탁하나이까?”
답하기를“의탁할 곳 있는 것이 의탁할 곳 없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지 말며, 또 의탁할 곳 없는 인간의 방탕한자와 같다고 여기지도 말고, 귀신으로써 머물곳이 없는(無住) 외로운 혼령으로 여기지도 말라. 특별히 이렇게 물음은 의탁할 곳이 있기를 바라는 것인가?” 물으니 “그렇사옵니다.”
답하기를 “성품을 통달하면 그렇지 않나니, 모든 중생은 각성(覺性)에 미혹하므로 망정으로 사랑하는 생각(집착)을 하여 업의 因을 맺어 여섯 갈래(六趣) 가운데 태어나서 선과 악의 과보를 받느니라.
가령 하늘의 업으로 인을 지으면 다만 하늘의 과보를 받나니, 태어날 곳을 제하고 딴 곳에서는 태어나지(受用) 않느니라. 모든 갈래가 모두 이러하니라.
이미 그 업을 따르므로 태어나야 할 곳은 즐겨하고, 태어나지 않을 곳을 즐겨하지 않으며, 태어나야 할 곳을 자기가 의지할 곳이 맞다 하고, 태어나지 않을 곳은 다른 사람의 의지할 곳으로 삼나니, 그러한 까닭으로 망정(妄情)이 있으면 망정의 인이 있고, 妄의 因이 있은즉 허망한 과보가 있고, 허망한 과보가 있은즉 의탁할 곳이 있고, 의탁 할 곳이 있은즉 너와 내를 나뉘고, 너와 나를 나뉜즉 옳고 옳지 못함이 있게 되나니라.
지금 참마음을 통달하면 생멸없는 깨달음의 성품(覺性)에 계합하여 생멸없는 묘한 작용(妙用)을 일으키나니, 묘한 바탕(體는)은 참되고 항상 한지라 본래 생멸이 없으며, 묘한 작용은 인연을 따르는지라 생멸이 있는 듯 하나니라.
그러나 바탕(體)으로부터 작용이 나니 작용이 곧 體인지라 어찌 생멸이 있으리요? 통달한 사람은 곧 참바탕(眞體)을 증득하였거늘 생멸이 어찌 간섭(干涉) 하랴. 마치 물이 습성(濕性)으로써 본체를 삼고, 파도로써 작용을 삼는 것 같으니라. 습성은 원래 생멸이 없으므로 파도 가운데 습성인들 무슨 생멸이 있으리요? 그러나 파도가 습한 성품을 여의고 따로이 없으므로 파도 또한 생멸이 없는 까닭으로 옛사람이 이르기를‘온 땅덩이가 곧 사문의 한쪽 바른 눈이요, 온 땅덩이가 곧 하나의 가람(伽籃:사찰)이라’하였으니 이것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편안한 마음으로 생명을 세울 곳(安心立命處)이라’하였느니라.
이미 참마음을 통달했다면 四생(生)·六도(道)가 일시에 사라지고(消殞) 산·강·땅덩이가 모두가 참마음이니, 이 참마음을 여읜 밖에 따로 의탁할 곳이 없느니라. 이미 三계의 망령된 因이 없으니 반드시 六취의 허망한 과보도 없으며, 허망한 결과가 없거늘 무슨 의탁할 곳을 말하리요? 너와 내가 따로이 없으니,   이미 너와 나가 없은즉 무슨 옳고 그름이 있으리요? 곧 시방세계가 오직 하나의 참마음이라 온몸으로 수용(受用)하리니 따로이 의탁할 곳이 없느니라.
 또 시현(示現=방편으로 나타나 보이심)하는 문 가운데는  뜻에 따라(마음대로) 가고 태어나되 장애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전등록(傳燈錄)에 이르기를‘온조 상서(溫操尙書)가 규봉(圭峰)선사에게 묻기를‘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한번 수명이 다하면 어디에 의탁하오?’하니, 규봉선가 답하기를‘온갖 중생이 신령하고 밝은 각성(覺性)을 갖추지 않음이 없어서 부처와 더불어 다름이 없나니, 만약 이 성품을 능히 깨달으면 곧 이 법신이 본래부터 태어남이 없거늘 어찌 의탁함이 있으리요?
신령하게 밝아서 어둡지 않으며, 밝게 깨달아 항상 아나니 온 곳도 없으며, 또한 갈 곳도 없으니, 다만 비고 고요함으로써 자기의 몸(體)으로 삼되 색신(色身)을 인정하지 말며, 다만 신령스럽게 앎(靈知)을 자기의 마음을 삼고 망념을 인정하지 말지니라.
망념이 만일 일어나더라도 도무지 따르지 않으면 목숨이 마칠 때에도 자연히 업에 얽매이지 않으리라.
비록 중음(中陰)의 세계에 있으나 향하는 곳마다 자유로워 하늘과 인간에 뜻대로 의탁(寄託)하리라’하셨으니, 이것이 곧 참마음이 육신을 떠난 뒤에 가는 곳이니라.”
**** 삼보에 보내 책을 엮은 2권분.****












3권째 만들어야 할 분.
선문촬요(禪門撮要)

五. 선문의 경책 (禪警語)

一. 博山無二禪師說 (박산 무이선사의 말씀)
做功夫 最初 要箇破生死心 堅硬看破世界身心 悉是假緣 無實主宰 若不發明本具底大理則生死心 不破 生死心 旣不破 無常殺鬼 念念不停 却如何排遣 將此一念 作箇敲門瓦子 如坐在烈火㷔中求出相似 亂行一步不得 停止一步不得 別生一念不得 望別人救不得 當恁麽時 只須不顧猛火 不顧身命 不望人救 不生別念 不肯暫止 徃前直奔 奔得出 是好手
공부를 하되 첫째는 생사의 마음을 깨뜨려야 하나니, 세계와 몸과 마음이 모두가 거짓 인연이라 실다운 주장이 없는 줄로 굳이 간파(看破)하라.
만일 본래 갖추어진 큰 진리를 밝히지 못하면 생사의 마음을 깨뜨리지 못하고 생사의 마음을 깨뜨리지 못했으면 무상한 살귀(殺鬼)가 생각생각에 멈추지 못하나니, 어떻게 물리치려는가?
이 한 생각으로 문 두드리는 기왓쪽을 삼되 훨훨 타는 불구덩이 속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 같이 한 걸음 어지러이 나아갈 수도 없고, 한 걸음 멈출 수도 없으며, 다르게 한 생각 낼 수도 없으며, 딴 사람의 구제를 바랄 수도 없나니, 이럴 때를 당하여는 오직 사나운 불길을 돌아보지 않으며, 목숨도 돌아보지 않으며, 남의 구제를 바라지 않으며, 딴 생각을 내지도 않으며, 잠깐 그치려고도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앞을 향해 곧장 달려 나아가되 달려서 벗어나야만 능숙한 솜씨니라.
262
做功夫 貴在起疑情 何謂疑情 如 生不知何來 不得不疑來處 死不知何去 不得不疑去處 生死關竅 不破則 疑情 頓發 結在眉睫上 放赤不下 趂亦不去 忽然一朝 撲破疑團 生死二字 是甚麽閑家 噁 
공부를 하되 의정(疑情=의문)을 일으키는 일이 귀중하니, 무엇을 의정이라 하는가? 태어나되 어디서 온 줄을 모르면 온 곳을 의심치 않을 수 없고, 죽되 어디로 가는 줄을 모르면 가는 곳을의심치 않을 수 없느니라. 생사의 관문(關竅)을 때뜨리지 못하면 의정이 몰록 일어나니니, 눈썹 위에 두고 놓아도 내리지 못하며, 쫓아도 가지 않아서 갑자기 하루 아침에 의문덩어리를 두드려 깨뜨리면 생사(生死) 두글자가 무슨 부질없는 물건이겠는가? 악(噁)!

做功夫 最怕耽着靜境 使人 因于枯寂 不覺不知 動境 人多厭 靜境 人多不厭 良以行人 一向 處乎喧呼之場 一與靜境相應 如食飴密 如人 倦久喜睡 安得自知耶 
공부를 하되 고요한 경계를 탐내는 일을 가장 두려워할지니, 사람으로 하여금 메마른 적멸에 시달리게 하거늘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도다.
시끄러운 경계는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고요한 경계는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지 않는 것은, 수행하는 사람들이 항상 떠드는 마당에 있다가 한번 고요한 경계와 마주하면 엿이나 꿀을 먹는 것 같은지라, 마치 오랜 피로 끝에 잠 자기를 좋아하는 것 같거니 어찌 스스로 깨달을 수 있으랴?

做功夫 要中正勁挺 不近人情 苟循情應對則功夫不上 不但功夫做不上 日久月深 必隨流俗阿師 無疑也 
공부를 하되 반드시 중심을 바르게 하고, 굳거나 우뚝하여 인정에 가까이 하지 말지어다.
인정을 따르면 공부가 늘지 못하리라. 공부가 늘지 못할 뿐 아니라 날이 오래고 달이 깊으면 반드시 속된 중의 축에 들 것이 의심없느니라.
265
做功夫人 擡頭不見天 低頭不見地 看山 不是山 見水 不是水 行不知行 坐不知坐 千人萬人之中 不見有一人 通身內外 只是一箇疑團 疑團 不破 誓不休 此爲 功夫緊要也
공부를 하는 사람은 고개를 들어도 하늘이 보이지 않고, 고개를 숙여도 땅이 보이지 않으며, 산을 보아도 산이 보이지 않고, 물을 보아도 물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다녀도 다니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은 줄 모르며, 천 만명 청중에 있더라도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온몸 안팎이 오직 하나의 의단(疑團)뿐이어야 하나니, 의단을 깨뜨리지 못하면 맹세코 쉬지 말라. 이것이 공부하는데 가장 긴요한 법이다.
做功夫 不怕死不得活 只怕活不得死 果與疑情 厮結在一處乎
動境 不待遣而自遣 妄心 不待淨而自淨 六根門頭 自然虛豁豁地 點着卽到 呼着卽應 何愁不活也
공부를 하되 죽었다가 깨어나지 못할까를 걱정하지 말고, 다만 살았다가 죽지 못할까를 걱정할지니, 과연 의정(疑情)과 더불어 한 곳에 묶어 두었는가를 살피라.
시끄러운 경계는 버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버려지고 허망한 마음은 맑히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맑아지리라.
六근(根)의 문턱에 원래부터 텅 빈 자리에 손짓하면 곧 오고, 부르면 곧 대꾸하거늘 어찌 살지 못할까를 근심하리요?
266
做功夫 擧起話頭時 要歷歷明明 如猫捕鼠相似 古所謂不斬薰奴 誓不休 不然則坐在鬼窟裡 昏昏沈沈 過了一生 有何所益
공부를 하되 화두(話頭)를 들 때에 또렷또렷 분명히 하되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하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살괭이(薰奴)를 베지 못하면 맹세코 시지 않으리라]하였느니라.
그렇지 못하면 귀신굴 속에 우두커니 앉아서 어두컴컴하게 한 평생을 보내리니,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267
猫捕鼠 睜開兩眼 四脚撑撑 只要拿鼠到口 始得 縱有鷄犬 在傍 亦不暇顧 叅禪者 亦復如是 只是憤然了明此理 縱八境 交錯于前 亦不暇顧 纔有別念 非但鼠 兼走却猫兒也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에 두 눈을 부릅뜨고, 네다리를 팽팽히 버티고, 오직 쥐를 잡아 입에 넣고야 말려 한다. 닭이나 개가 곁에 있더라도 돌아보지 않나니 참선하는 이도 그러하여서 오직 분연히 이 일을 밝히고야 말려 하나니, 설사 여덟 가지 경계가 눈앞에 엇갈리더라도 돌아보지 말아야 하느니라. 자칫 딴 생각이 일어나면 쥐뿐이 아니라 고양이까지도 달아나야 하리라.
268
做功夫 不可在古人公案上 妄加解釋 縱一一領畧得過 與自己 沒交涉 殊不知古人 一語一言 如大火聚 近之不得 觸之不得 何况坐臥其中耶 更于其中 分大分小 論上論下 不喪身命者 幾希
공부를 하되 옛사람의 공안(公案)에 대하여 망녕되이 해석을 붙이려 하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풀이해 안다 하여도 자기의 분상(分上)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리라. 옛사람의 한 마디,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이와 같아서 가까이 할수도 없고 건드릴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거나 누울 수 있으랴. 다시 거기에서 크고 작음을 나누거나 높고 낮음을 따진다며 생명을 다치지 않을 자 매우 드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도다.
269
做功夫 不可尋文逐句 記言記語 不但無益 與功夫 作障碍 眞實功夫 返成緣慮 浴得心行處 絕 豈可得乎
공부를 하되 문구(文句)를 찾아 쫓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도 말지니,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분별을 이루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이기를 바란들 될 수 있겠는가.
做功夫 最怕比量 將心湊泊 與道轉遠 做到 阿逸多下生去 管取沒交涉 若是疑情 頓發之漢子 如坐在鐵壁銀山之中 只要得箇活路 若不得活路 如何得安檼去 但恁麽做去 時節 到來 自有箇倒斷
공부를 하되 추측해서 헤아리는 일이 가장 두려우니, 마음을 가지고 범접하려 하면 도와는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이 탄생할 때까지 공부를 하여도 전혀 관계가 없으리라.
만일 의문이 활짝 일어난 이라면 마치 철벽운산(鐵壁銀山) 속에 앉은 이가 오직 살길(活路)을 찾으려 하는 것 같이 할지니, 만일 살길을 찾지 못했다면 어찌 편안할 수가 있으리요? 다만 이렇게 철저히 하여 시절이 오기만 하면 자연히 거꾸로 끊어지는 소식이 있으리라.
270
黃蘗禪師云 塵勞逈脫事非常 緊把繩頭走一場 不是一翻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 此語 最親切 若將此偈 時時警策 功夫 自然得上
황벽(黃蘗) 선사가 말하기를 [티끌 번뇌를 활짝 벗어나는 일은 예사롭지 않으니, 노끈을 꼭 잡고 한바탕 겨룰지어다. 한차례 추위가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 어찌 얻으랴]하였으니, 이 말씀이 가장 친절하니라. 만일 이 게송을 들어 때때로 경책하면 공부가 자연히 늘어나리라.
做功夫 最要緊 是箇切字 切字 最有力 不切則懈怠 生 懈怠 生則放逸縱意 靡所不至 若用心親切 放逸懈怠 何由得生 當知 切之一字 不愁不到古人田地 不愁生死不破
공부를 하되 가장 긴요한 것은 간절 절(切)자이니, 절 자가 가장 힘이 있느니라. 간절하지 않으면 게으름이 생기고 게으름이 생기면 방종(방종)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리라. 만일 마음을 쓰되 참되고 간절하면 방종이 어찌 생길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알라. 절자 하나는 옛사람의 경지에 으르지 못할가 근심치 않으며 생사를 깨뜨리지 못할까도 근심치 않느니라.
切之一字 當下 超善惡無記三性 用心 甚切則不思善 用心 甚切則不思惡 不落無氾 話頭切 無掉擧 話頭切 無昏沈
절(切)자, 하나는 당장에 선과 악과 무기(無記), 세가지 성품을 초월 하나니, 마음 쓰기를 간절히 하면 선을 생각지 않고 마음 쓰기를 간절히 하면 악을 생각지 않으며 무기에 떨어지지도 않나니, 화두가 간절하면 도거(掉擧=들뜸)가 없고 화두가 간절하면 혼침(昏沈=침체)도 없느니라.
272
切之一字 是最親切句 用心 親切則無間隙故 魔不能入 用心 親切則不生計度有無等故 不落外道
절(切)자 하나는 가장 친절한 구절이니 마음 쓰기를 간절히 하면 틈이 없으므로 마(魔)가 침노하지 못하고 마음 쓰기를 간절히 하면 있음과 없음 등을 계교하여 헤아리지 않으므로 외도(外道)에 떨어지지도 않느니라.
做功夫 最怕思惟 做詩做偈做文賦等 詩偈成則名詩僧 文賦工則稱文字僧 與心功 總沒交涉 凡遇逆順境緣 動人心念處 便當覺破 提起話頭 不隨境緣轉 始得 或云不打緊 只這三介字 最是悟人 學者 不可不愼
공부를 하되 생각을 기울여서 시나 게송이나 문장을 지으려는 일이 두려우니, 시나 게송을 이루면 시승(詩僧)이라 하고, 문장에 공교로우면 문자승(文字僧)이라 하여 마음 공부와는 모두가 아무런 관계도 없느니라.
무릇 거슬리거나 순응하는 경계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곳을 만나거든 얼른 깨닫고서 화두를 들되 경계의 반연을 따라 움직이지 않아야 비로소 옳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바쁠 것이 없다]하나니, 이 한마디가 가장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라 학자들은 살피지 않을 수 없느니라.
273
做功夫 不得將心待悟 如人 行路 主在路上 待到家 終不到家 只須行到家 若將心待悟 終不悟 只須逼逕令悟 非待悟也
공부를 하되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어떤 사람이 이 길을 가매 길 위에 머물러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끝내 집에 이를 수 없으므로 오직 집에 이르기를 바라야 되는 것 같이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달을 수 없으므로 오직 애서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달음을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274
做功夫 着不得一絲毫別念 行往坐臥 單單只提起本參話頭 發起疑情 憤然要討箇下落 若有絲毫別念 古所謂雜毒 入心 傷乎慧命 學者 不可不謹
공부를 하되 실 한 올만치의 딴 생각도 붙이지 말지니, 다니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만 본래부터참구하던 화두만을 들어서 의문을 일으켜서 분연히 그 해답(下落)을 찾으려 해야 하느니라.
만일 한 올만치라도 딴 생각이 있으면 옛사람이 말한 [잡된 독이 심장에 들어가니 지혜의 생명이 위태롭다]한 격이 되리라. 학자는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 非但世間法 除究心之外 佛法中一切好事 悉名別念 又豈但佛法中事 於心體上 取之捨之 執之化之 悉名別念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이라 함은 세간의법 뿐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이외에는 불법 안의 온갖 좋은 일까지라도 모두가 딴 생각이니라.
또 어찌 불법 안의 일 뿐이리요, 마음바탕 위에서 취하거나 버리거나 집착하거나 교화한다는 것 모두가 딴 생각이니라.
275
做功夫 最怕一箇怜悧心 怜利心 爲之藥忌 犯着些毫 雖眞藥 現前 不能救耳 若眞是箇參禪漢 眼如盲耳如聾 心念纔起時 如撞着銀山鐵壁相似 如此則功夫始得相應
공부를 하되 영리한 마음 하나가 가장 두려우니, 영리한 마음은 독약과 같아서 한 번 중독되면 비록 진짜 약이 나타나더라도 구제하지 못하느니라.
만약 진정한 참선객이라면 눈은 소경 같고 귀는 귀머거리 같으며, 생각이 일어났다면 마치 은산(銀山)·철벽(鐵壁)에 부딪치는 것 같으리니, 이와 같이 하면 공부가 비로소 서로 응하게 되리라. 276
做功夫 不可僻喧向寂 瞑目合眼 坐在鬼窟裡作活計 古所謂 黑山下 死水浸 濟得甚麽邊事 只要在境緣上做得去 始是得力處 一句話頭 頓起在眉睫上 行裡坐裡 着衣吃飯裏 迎賓送客裏 只要明這一句話頭落處 一朝洗面時 撲着鼻孔 原來太近

공부를 하되 시끄러움을 피해 고요함을 향하려 하지 말지니, 두 눈을 감고 귀신굴(鬼窟)속에 앉아서 살 계교를 꾸미지 말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검은 산(黑山=지옥)의 밑에서 썩은 물에 잠겼다]하였으니, 어찌 구제할 수 있으리요. 다만 경계와 반연 위에서 공부를 지어나가야 비로소 힘을 얻게 되리라.
한 귀절의 화두를 몰록 일으켜서 눈썹 위에 모으고, 다닐 때외 앉을 때와 옷입고 밥먹을 때와 손님을 맞고 보낼 때에 오직 이 한 귀절 화두의 해답을 밝히려 할지니, 하루 아침 세수하다가 콧구멍을 만지면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었음을 알리라.
功夫 不怕做不上 做不上 要做上 便是功夫 做不上 便打退기 縱百劫千生 其柰爾何
공부를 하되 늘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지니, 공부가 늘지 않거든 늘기를 바라면 그것이 공부니라. 공부가 늘지 않는다 하여 후퇴하는 북을 친다면 비록 백 겁, 천 생을 지낸다 하여도 어찌할 수 없으리라.
277
疑情 發得起 放不下 便是上路 將生死二字 貼在額頭上 如猛虎趕來 若不直走到家 必喪身命 豈可住脚耶
의정(疑情)이 일어나 놓아버릴 수 없는 곳이 바로 느는 길이니 생사(生死)라는 한 마디를 이마 위에 붙여 두되 마치 사나운 호랑이에게 쫓기는 것 같이 할지니, 만일 집에 이르지 못하면 생명을 잃는 것이라 어찌 잠시인들 멈출 수 있으리요.
278
做功夫 只在一則公案上用心 不可一切公案上 解會 縱能解得 終是解 非悟也 法華經 云 是法 非思量分別之所能解 圓覺經 云 以思惟心 測度如來圓覺境界 如取螢火 燒須彌山 終不能得 洞山 云 擬將心意學玄宗 大似西行却向東 大凡아금公案者 皮下 有血 須識懺愧 始得
공부를 하되 한 화두만으로 마음을 쓸지언정 여러 공안을 풀어 알려고 하지 말지니, 설사 풀이해 안다 하여도 끝내 지식이요 깨달음은 아니니라.
법화경(法華經)에 말씀하시기를 [이 버븐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하시고, 원각경(圓覺經)에 말씀하시기를 [생각해 따지는 마음으로 여래의 원각의 경계를 헤아릴진대 마치 반딧불(螢火)을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는 것 같아서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하셨고, 동산(洞山)이 말씀하시기를 [마음과 뜻을 가지고 현묘한 종지를 배우려 하면 마치 서쪽으로 가려는 이가 동쪽을 향한 것 같다]하시니, 무릇 공안을 따져 알려는 사람들이여, 가죽 밑에 피가 있거든 부끄러움을 알아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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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不可須臾離 可離 非道也 功夫 不可須臾間斷 可間斷 非功夫也 眞正參究人 如火燒眉毛上 又如救頭燃 何假爲他事動念耶 古德 云 一人 與萬人敵 覿面 那容眨眼看 此語 最要 不可不知
도는 잠시도 여의지 말지니, 여의면 도가 아니요, 공부는 잠시도 끊이지 말지니, 끊이면 공부가 아니니라. 진정한 납자라면 마치 눈썹에 붙은 불을 끄듯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하나니, 어찌 딴 일을 할 겨를이 있으리요. 옛어른이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만 사람의 적을 만났을 때, 어찌 얼굴을 대해 눈알을 멀뚱거리며 바라볼 겨를이 있으리요]하니, 이 말씀이 가장 요긴하니, 몰라서는 안 되느니라.
280
做功夫 曉夕 不敢自怠 如慈明大師 夜欲將睡 用引錐刺之 又云 古人 爲道 不食不寢 予 何人耶
공부를 하되 아침저녁으로 게으르지 말지니, 자명(慈明) 대사는 밤에 잠이 오면 송곳을 들어 찌르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옛사름은 도를 위하여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셨거늘 나는 어떤 사람인고]하셨느니라.
280
做功夫 不得向擧起處 承當 若承當 正所謂만頇儱侗 與參究 不相應 只須發起疑情 打敎徹無承當處 亦無承當者 如空中樓閣 七通八達 不然 認賊爲子 認奴作郞 古德 云 莫將驢鞍橋 喚作阿爺下頷 斯之爲也
공부를 하되 들어 제창하는 자리에서 아는 체(承當)하지 말지니, 아는체 하면 진짜 어리석은 바보인지라 참구하지 않는 자와 꼭 같으리라. 다만 의정을 일으켜서 아는 체 할이도 없게 한다면 마치 허공의 누각(樓閣)이 七면·八방으로 뚫린 것 같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도적을 잘못 알아 자식으로 여기며, 하인을 잘못 알아 상전으로 여기는 짓이 되리라. 옛어른이 말씀하시기를 [나귀의 안장을 보고 아버지의 턱이라 하지 말라]하시니, 이를 이르는 말인가 한다.
281
做功夫 不得求人說破 若說破 終是別人底 與自己 沒相干 如人 問路到長安 但可要其指路 不可更問長安事 彼一一說明長安事 終是披見底 非問路者 親見也 若不力行 使求人說破 亦復如是
공부를 하되 남의 설명을 들으려하지 말지니, 끝내 딴 사람의 것이라 자기와는 관계가 없느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長安)으로 가는 길을 물을 때, 다만 길 가르쳐 주기만을 청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문지 말지니 그가 낱낱이 장안의 일을 설명할지라도 끝내 그가 본 일이요 길 물은 이가 직접 본 것은 아니니라. 만일 힘써 길을 수행치 않고 남의 설명을 구하는 것도 이와 같으니라.
282
做功夫 不可須臾失正念 若失了參究一念 必流入異端 茫茫不返 如有人 靜坐 只喜澄澄湛湛 純淸絶點 爲佛法 此 喚作失正念 墮在澄湛中 或認箇能講能譚能動能靜 爲佛法 此喚作失正念 認識神 或將妄心遏捺 令妄心不起 爲佛法 此喚作失正念 如石壓草 又如剝芭椒葉子 或觀想身 如虛空 不起念 如牆壁 此 喚作失正念人 落空亡之外道 魂不散之死人 總而言之 皆失正念
공부를 하되 잠깐이라도 바른 생각을 잃지 말지니, 만일 참구한다는 한 생각을 잊으면 반드시 이단(異端=바른 도가 아닌 길)에 빠져서 끝없이 헤매다가 돌아오지 못하리라.
만일 어떤 사람이 조용히 앉았을 때 오직 맑고 고요함을 좋아하여 순수하게 밝고 티가 끊인 것으로 불법이라 여기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고서 맑고 고요함에 빠졌다 하느니라.
혹 강설하는 것, 말하는 것, 움직이는 것, 고요한 것을 잘못 알아 불법이라 여기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고서 인식하는 정신을 잘못 안다 하느니라.
혹 허망한 마음을 가지고 억눌러서 허망한 마음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불법이라 여기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고서 돌로 풀을 누르듯 한다 하느니라.
또 좌초잎을 까버리듯 하거나 혹은 이 몸이 허공 같다고 생각하여 딴 생각 일으키지 않기를 담(墻)과 같이 하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고서 공망(空亡=아무 것도 없음)에 떨어진 외도라 하며, 혼이 흩어지지 않은 시체라고도 부르나니, 통털어 말하건대 모두가 바른 생각을 잃은 것이니라.
283
做功夫 疑情 發得起 更要撲得破 若撲不破時 當確實正念 發大勇猛 切中 更加切字 始得 徑山 云 大丈夫漢 決欲究竟此一段大事因緣 一等打破面皮 性燥 竪起脊梁骨 莫順人情 把自己平昔所疑處 貼在額頭上 常時 一似欠人百萬貫錢 被人追案 無物可償 怕被人恥辱 無急得急 無忙得忙 無大得大底一件事 方有趣向分
공부를 하되 의정을 일으켰거든 다시 그 의정을 쳐부수려 할지니, 만일 쳐부수지 못할 때엔 확실하고 바르게 생각하되 큰 용맹을 일으켜서 간절한 위에 더 간절하여야 된다.
경산(經山)이 말씀하시기를 [대장부가 이 하나의 큰 일과 인연을 결단코 궁구하고자 한다면 한꺼번에 안면을 바꾸고 성급히 척추뼈를 곤두세우고는 인정을 돌보지 말고 평소에 자기가 의심하던 것을 머리 위에 붙여 두되 항상 남의 돈 백 만관을 흠포낸 사람이 빚쟁이의 추심을 받으면서도 갚을 길이 없고, 남에게 창피 당할 것은 두렵고 하여, 급할 일 없어도 급해지고 바쁠 일 없어도 바빠지고 큰일 없어도 큰 사건을 만난 것 같이 여겨야 비로소 공부를 해 나아갈 분수가 있다]하셨느니라.

二. 蒙山和尙示聰上人 (몽산화상이 총상인에게 보이심)
285
黃蘗 見白丈 擧再叅機緣 便吐舌 是 得百丈力耶 得馬祖力耶 岩頭 見德山一喝 便禮拜 是 知恩耶 報恩耶
황벽(黃蘗)이 백장(百丈)께서 두 번째 참문(再參)했던 기연(機緣=동기와 사연)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자 문득 혀(舌)를 토하시니 이는 백잔의 힘을 얻은 것인가, 마조(馬祖)의 힘을 얻은 것인가?
암두(岩頭)가 덕산(德山)의 외마디 할(喝)을 당하여 문득 절을 했으니 이는 은혜를 아는 일이가, 은혜에 보답하는 일인가?
286
又答洞山云 我當時 一手擡一手搦 那裡 是他擡搦處 見徹二老 骨髓者 便好着一轉語 截斷諸方舌頭 許汝得入門 其或未然 悉宜叅究
또 동산(洞山)의 말씀에 답하시기를 [내가 그때 이 한 손은 들어올리고, 한 손은 내렸었느니라]하셨으니 어느쪽이 올린 것이고 어느 쪽이 내렸던가? 두 노숙(老宿)의 속마음(骨髓)을 꿰뚫어보았다면 얼른 한마디 던져서 제방(諸方=여러 곳)의 시비(舌頭=분분한 설명)를 끊어버리는 것이 a방하리니, 그대 비로소 문(門)안에 들어왔음을 허락하겠거니와 만일 그렇지 모하거든 서둘러서 참구(參究=참선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287
若涉 叅究 便論功夫 直須依本分如法 始得 當於本叅公案上 有疑 大疑之下 必有大悟 千疑萬疑 倂作一疑 於本叅公案上 取辨 若不疑言句 是爲大病
만일 참구하는 길에 들었다면 문득 공부하는 법을 의논해야겠으니 반드시 본분(本分=근본 법칙)에 의하여 법다이 하여야 비로소 옳다.
그리고, 본래부터 참구하던 공안 위에 의정을 일으킬지니, 큰 의정이 있는 곳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느니라.
천가지 만가지 의정을 모두 한 의정으로 만들어 본래 참구하던 공안 위에서 끝장을 내도록 할지니, 만일 화두에 대하여 의정을 일으키지 않으면 이것은 큰 병통이니라.
288
仍要盡捨諸緣 於四威儀內 二六時中 單單提箇話頭 廻光自看 若於坐中 得力 最多 坐宜得法 不要瞠看 노目 遏捺身心 若用氣力 則招病苦 但端身正坐 平常開眼 身心境界 不必顧着
그대로 계속해서 모든 반연을 버리려고 네 가지 위의(威儀=행동)와 열두 시각(十二時=하루 종일) 사이에 그저 화두만을 들어서 광채를 돌리어 스스로 살필지어다. 만일 앉았는 동안에 힘 얻어진 것이 가장 많거든 앉아서 법을 얻을지언정 눈알을 굴리거나 부릅떠서 몸과 마음을 억누르지 말지어다. 만일 기운을 쓰면 벼고를 일으키게 되리라. 다만 단정히 바르게 앉아 보통 때와 같이 눈을 뜨고 몸과 마음과 경계를 돌보지 말지어다.
288
或有昏沈掉擧 着些精彩 提擧一二聲話頭 自然諸魔 消滅
혹 혼침(昏沈)과 도거(掉擧)가 생기거든 정신을 차려서 한 두 번 화두를 챙기면 자연히 모든 마가 물러나리라. 눈이 안정되면 마음도 안정되고 마음이 안정되면 몸도 안정되나니, 만일 선정이 이루어지더라도 자랑으로 여기지는 말지니라.
혹 화두를 잊어서 공과 고요함에 막히면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큰 병이 되리라.
우리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셔서 홑으로 드시고 곧장 보이심은 큰 깨달음으로써 문호를 삼으시고 선정이나 신통은 말씀하시지 않았나니, 이는 끝부분의 일이기 때문이니라.
만일 선정 가운데서 깨달음이 밝아진 이는 지혜가 광대해져서 물과 육지를 마음대로 다니게 되리라.
288
或有昏沈掉擧 着些精彩 提擧一二聲話頭 自然諸魔 消滅

眼定而心定 心定而身定 若得定時 不可以爲能事 或忘話頭 沉空滯寂 不得大悟 反爲大病 五祖西來 單提直指 以大悟 爲 入門 不論禪定神通 此是末邊事 若於定中 得悟明者 智慧 却能廣大 水陸幷進也

290

功夫 若到濃一相淡一上 無滋味時 正好進步 漸入程節 切不可放捨 惺惺 編入靜 靜而後 定 定各有名 有邪有正 宜知之 起定之後 身心 輕淸 一切處 省力 於動中 打成一片 却當仔細用心

趁逐功夫始終 不離靜淨二字 靜極 便覺 淨極 光通達 氣肅風淸 動靜境界 如秋天相似時 是 第一箇程節

便宜乘時進步 如澄秋野水 如古廟裡香炉相似 寂寂惺惺 心路不行時 亦不知有幻身 在人間 但見箇話頭綿綿不絕 到這裡 塵將息而光將發 是 第二箇程節

於斯 若生知覺心 則斷純一之妙 大害也 無此過者 動靜 一如 寤寐惺惺 話頭現前 如透水月華 在灘浪中活潑潑 觸不散蕩不失時 中寂不搖 外撼不動矣 是 第三箇程節

疑團 破 正眼開 近矣 忽然築着磕着 碎地絕爆地斷 洞明自己 捉破佛祖得人憎處 又宜見宗匠 求鍜鍊成法器 不可得少爲足 悟後 若不見人 未免不了後事 其害 非一
공부가 늘었다 줄었다 하여 재미가 없거든 더욱 전진해서 차츰차츰 과정(程節)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니, 절대로 놓아버리지 말지니라.
성성(惺惺)하면 곧 고요함에 들어가리니 고요해진 뒤에야 선정(定)을 이루리라. 선정에는 각각 이름이 있어서 사(邪)와 정(正)이 있으니 알아두어야 하느니라. 선정에서 일어난 뒤에 몸과 마음이 가볍고 밝아서 모든 곳에서 힘이 덜리리니 활동하는 동안에 화두가 한 조각이 되더라도 더욱 조심스럽게 마음을 쓸지니라.
공부를 하는데 처음과 마지막이 모두 고요함(靜)과 맑음(淨)의 두가지를 여의지 않나니, 고요함이 극(極)하면 깨닫게 되고, 맑음이 극하면 광명이 통달하리니, 기상(氣)이 엄숙하고 풍채(風)가 맑아서 움직이고 고요한 두 경계가 마치 가을 하늘 같이 되는 것이 첫째 과정이니라.
이때 얼른 시기를 맞추어 전진하면 마치 가을 들판의 맑은 물같으며, 옛사당(古廟)안의 향로와 같으리니,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하여 마음의 움직임이 멈출 때엔 허환한 이 몸이 인간 속에 살아있다는 사실마저 잊고 오직 면면(綿綿)히 이어지는 화두만이 보이리니, 이런 경지에 이르르면 번뇌는 쉬려하고 광채는 생기려 하나니, 이것이 둘째 과정이니라.
여기에서 만일 알거나 느끼는 마음을 내면 순일(純一)해진 묘(妙)가 끊어지리니 큰 손해로다. 이런 허물이 없는 이는 움직이나 고요함에 일여(一如=한결같음)하고 자나 깨나에 성성해서 화두가 앞에 나타남에 마치 물에 비친 달그림자가 파도 속에서 펄펄 살아서 건드려도 흩어지지 않고 버려도 잃어지지 않을 때에 속의 고요함에도 흔들리지 않고 겉의 흔들음에도 움직이지 않으리니 이것이 셋째 과정이니라.
의문덩어리가 깨어지면 바른 안목 열릴 때가 가까워졌나니, 갑자기 척척 들어맞아서 쫓듯이 끊어지고 튀듯이 깨지면 자기를 훤하게 밝혀서 불조(佛祖)가 사람들의 미움을 받던 경지를 포착하게 되리라.
또 큰 종장(宗匠)을 찾아뵙고서 연마해 주기를 청하여 법기(法器)를 이루려 할지언정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하게 여기지 말지니 깨달은 디에 스승을 찾아뵙지 않으면 뒷일(後事)을 모르는 사람을 면하지 못하리니, 그 해독이 매우 크니라.
293.
或於佛祖機緣上 有礙處 是 悟淺 未盡玄妙 旣盡玄妙 又要退步 韜晦保養 力量 全備 看過藏敎儒道諸書 消磨多生習氣 淸淨無際 圓滿無碍 始可高飛遠擧 庶得光明 盛大 不辱先宗 其或換舊時行履處 未盡 便墮常流 說時 似悟 對境 還迷 出語 如醉人 作爲俗子 機不識隱現 語不知正邪 撥無因果 極爲大害
혹 불조(佛祖)의 기연(機緣)에 대하여 걸리는 곳이 있거든 이는 깨달음이 얕으니, 현묘(玄妙)함으 로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니라.
이미 현묘함을 다했거든 또 다시 물러서서 자취를 감추고 보존 양성하되 역량(力量)을 완전히 갖출지니 장경과 유교 도교의 서적들을 통독하여 여러 생의 습기를 녹일지어다.
청정하여 끝이 없고, 뚜렷이 밝아 걸림이 없어야 비로소 높이 날고 멀리 가게 되며 광명이 성대해져서 옛 종풍을 욕되지 않게 하리라.
기지(機智)가 숨고 나타남을 알지 못하고 말이 바르고 사뙴을 알지 못해서 인과가 없다고 무시한다면 극히 큰 손해가 되느니라.
295.
先輩 正之與邪 大有樣子 了事者 生死岸頭 能易 추 爲細 能易短爲長 以智光明解脫 得出一切法三昧王 以此三昧故 得意生身 向後 得妙應信身 道如大海 轉入轉深 達磨有頌云 悟佛心宗 等無差互 解行 相應 名之曰 祖 更莫說宗門中 有超佛越祖之作略 聰上人 信麽 信與不信 向後自知
선배(先輩)들의 바름과 사뙴(正邪)이 뚜렷한 모습이 있으니, 일을 마친 이는 생사의 언덕에서 거칠은 것을 바꾸어 곱게 하고, 짧은 것을 바꾸어 길게 하되 지혜의 광명과 해탈로써 온갖 법의 삼매를 얻느니라.  이 삼매 때문에 의생신(意生身)을 얻으며, 나중에는 묘응신신(妙應信身)을 얻게 되나니, 도는 큰 바다와같아서 들어갈수록 깊어지리라.
달마(達磨)께서 게송을 보이시기를 [마음 바탕(心宗)을 깨닫는데는 아무런 차별이 없으나 행과 견해가 서로 응하여야 조사라 한다]하니, 더 이상 종문(宗門)안에는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는 방략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총상인(聰上人)아, 믿어지는가? 믿고 안 믿는 것은 뒷날 스스로 알게 되리라.
三. 皖山正凝禪師示蒙山法語
(환산정응선사가 몽산(蒙山)에게 주신 법어)
師見 蒙山 來禮 先自問云 爾還信得及麽 山 云 若信不及 不到這裡 師云 十分信得 更要持戒 持戒 易得靈驗 若無戒行 如 空中樓閣 還持戒麽 山 云 見持五戒 師云 此後 只着箇無字 不要思量卜度 不得有無會 且莫看經敎語錄之類 只單單提箇無字 於十二時中 四威儀內 須要惺惺 如猫捕鼠 如鷄抱卵 無斷續 未得透徹時 當如老鼠 咬棺材相似 不可改移
선사께서 몽산(蒙山)이 와서 절하는 것을 보시자 먼저 물으셨다.
“너는 믿음이 미쳤느냐?”
몽산이 대답했다.
“만일 믿음이 미치지 못했다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충분히 믿었더라도 계행은 꼭 지켜야 하나니, 계행을 지켜야 쉽게 영험을 얻으리라. 만일 계행이 없으면 공중의 누각과 같나니, 계행을 지키느냐?”
몽산이 대답했다.
“현재 五계를 지키고있습니다.”
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이 뒤에는 오직 무자(無字)만을 들되 생각으로 헤아리지도 말고, 있다 없다는 생각으로 따지지도 말고, 경전이나 어록(語錄)의 종류를 보지도 말고, 다만 외곬으로 무자만을 들어 하루 동안 네가지 위의 안에 모름지기 성성(惺惺)하게 고양이가 쥐를 잡듯 닭이 알을 품듯하여 끊이지 말지어다. 터득하기 전에는 마치늙은 쥐가 관재목(棺材)을 씹는 것 같을 것이나 옳기지 말지니라.
298.
時復鞭起疑云 一切含靈 皆有佛性 趙州 因甚道無 意 作麽生 旣有疑時 黙黙提箇無字 廻光自看 只這箇無字 要識自己 要識得趙州 要捉敗佛祖得人憎處 但信我如此說話 驀直做將去 決定有發明之時節 斷不誤爾云
때때로 의정을 일으키되,
“모든 중생이 모두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데 조주(趙州)는 무슨 일로 없다고 하였는가, 그 뜻이 무엇일까]하라.
이미 의정이 생겼거든 묵묵히 무자(無字)화두만을 들고서 정신을 모아 스스로를 찾으라. 오직 이 무자화두로써 자기를 알고자 하며, 조주를 알고자 하며 불조가 사람들의 미움을 받던 경지를 붙들고자 하라. 다만 나의 이런 말을 믿고 곧장 닦아 나아가면 결정코 깨달을 시기가 있으리니, 결단코 그르쳐 주지는 않을 것이니라.”

四. 古潭和尙法語 (고담화상의 법어)
299
古潭和尙法語
若欲叅禪 不用多言 趙州無字 念念相連 行住坐臥 相對目前 奮金剛志 一念萬年 廻光返照 察而復觀 昏沈散亂 盡力加鞭
千磨萬鍊 轉轉新鮮 日久月深 密密綿綿 不擧自擧 亦如流泉 心空境寂 快樂安然 善惡魔來 莫懼莫歡 心生憎愛 失正成顚 立志如山 安心似海 大智如日 普照三千
迷雲 散盡 萬里靑天 中秋寶月 湛徹澄源 虛空 發㷔 海底 生烟 驀然築着磕着 打破重玄 祖師公案 一串都穿 諸佛妙理 無不周圓
到伊麽時 早訪高玄 機味完轉 無正無偏 明師 許儞 再入林巒 茅菴土洞 苦樂 隨緣 無爲蕩蕩 性若白蓮
時至出山 駕無底船 隋流得妙 廣度人天 俱登覺岸 同證金仙
만일 참선을 하려면 여러 말이 필요치 않으니, 조주(趙州)의 무자(無字)를 생각마다 이어서 다니고 머무고 앉고 누울 때 눈앞에 마주할지어다.
금강(金剛) 같이 굳은 뜻을 세워 한 생각이 만년 가게 하라. 광채를 돌이켜 스스로를 반성해서 살피고는 다시 관찰하다가 혼침이나 산란이 생기거든 힘을 다해 채찍질을 할지어다.
천 번 갈고 만 번 단련하면 더욱더욱 새로워질 것이요,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지면 밀밀(密密=비밀 함)하고도 면면(綿綿=계속 됨)하게 되리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지는 것이 마치 흐르는 물같을 것이며 마음과 경계가 고요해서 쾌락하고도 편안하리라.
선과 악의 마가 오거든 두려워하지도 말고 기뻐하지도 말라. 마음에 미움과 사랑을 일으키면 바른 생각을 잃고 미치광이가 되리라.
뜻 세우기를 산 같이 하고, 마음 안정하기를 바다 같이 하면 큰 지혜가 해와 같이 삼천세계를 두루 비칠 것이요, 미혹의 구름이 다 흩어지면 만리의 푸른 하늘에 가을달이 휘청밝으리라.
허공에서 불꽃이 일고, 바다 밑에서 연기가 나면 갑자기 척척 드러맞아서 겹겹의 현관을 타파하리니, 조사의 공안(公案)을 한 꼬챙이에 몽땅 꿰며, 부처님들의 묘한 진리를 두루 원만치 않음이 없으리라.
이런 경지에 이르러서는 일찌감치 덕 높은 선지식을 찾아서 기미(機味=소질)를 충분히 움직여서 바름(正)도 치우침(偏)도 없게 하고, 스승이 허용하거든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서 띄집과 동굴에서 고락을 인연에 따르되, 하염없이 탕탕(蕩蕩=자유로움)하여 성품이 마치 백련(白蓮) 같게 할지니라.
때가 되거든 산에서 나와서 밑없는 배를 타고 흐름을 따라 묘한 법을 얻어서 널리 인간과 하늘에 제도하여 다 같이 깨달음의 기슭에 올라 부처의 경지를 증득할지어다.

五. 普濟尊者示覺悟禪人 (보제존자가 각오납자에게 보이심)
302
念起念滅 謂之生死 當生死之際 須盡力提起話頭 話頭純一 起滅卽盡 起滅 卽盡處 謂之寂 寂中 無話頭 謂之無記 寂中 不昧話頭 謂之靈 卽此空寂靈知 無壞無雜 如是用功 不日成之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생사(生死)라 하나니, 생사하는 사이에 처해서는 모름지기 힘을 다하여 화두를 들지어다. 화두가 순일(純一)하여지면 일어나고 사라짐이 곧 다하리니, 일어나고 사라짐이 다하는 곳을 고요함(寂)이라 하느니라. 고요함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라 하고, 고요한 가운데 화두를 어둡히지 않으면 신령함(靈)이라 하나니, 이 비고 고요하고 신령한 알음(空寂靈知)가 무너짐도 잡됨도 없게 하여 이렇게 공부를 쌓으면 하루가 다하기 전에 성취하리라.

발문(跋文)

湖西 德崇山에서 近代의 大善知識이신 鏡虛 大宗師에 이어서 滿空 大禪師로부터

雲山無同別        구름과 산은 같고 다름이 없고
亦無大家風        또한 대가풍도 없구나.
如是無文印        이와같이 글자없는 인(印)을
分付慧庵(惠庵)汝  혜암 네게 나누어 부촉하노라.

라는 傳法偈로 印可 傳法을 받으셔 法統과 衣鉢을 傳受하신 惠庵 老禪師께선 歲壽九十七星霜에 達하신 高齡이심에도 精進不退하시며 財物과 名利를 멀리하신체 모든 相을 떠나계시며 오로지 正法 正見의 衆生濟度에만 온 精誠을 기우려 納子를 提接하시며 몸 벗으실날 멀지 않으신 오늘도 法供養에 惱心憔思하시며
當身의 慾心이 있으시다면 正法에 굶주리고 功夫의 힘이 不足한 佛子들의 迷와 悟를 바로잡아 바르게 믿고 바르게 닦으며 바르게 찾도록 해줘야겠다는 것이며 佛敎의 오랜 역사에 이루지 못한 佛敎病院의 이룩됨을 간절히 念願하신다.
老禪師께선 쉬임없이 작고 큰 구슬을 쏟아 놓건만 그것을 가려볼줄 모르는 無明의 衆生들을 안타깝게 生覺하신다.
우리 韓國佛敎가 요즈음 國內外에서 새롭게 照明되고 있거니와 때를 같이하여 긴 年輪 頭陀行을 쌓아오신 善知識 惠庵 老德께서 우리 佛子들의 길잡이가 될 이 冊字를 發行하여 커다란 法供養을 마련하여 주시었다.
禪은 公衆을 親히 밟아 깨달아 얻어야 함이 最上의 大道이다.
達磨禪師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모든 緣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에 걸림이 없다면 可히 道에 이르리라.
「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牆壁可以入道」
煩惱妄想을 시고 眞如의 面目을 밝혀 大悟 成佛濟衆하심에 이 法供養은 밝은 거울이 되고, 또한 큰 지릿대가 될줄 確言한다.
이 冊이 나오기까지 많은 애를 써주신 여러분과 시봉스님들께 그리고 特히 法布施를 위해 物心兩面으로 헌신하신 千益花(翼瑩) 居士님의 功德에 佛恩이 充滿하시기를 祈願하며 아울러 感謝의 念을 감출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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