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無

二入四行論

홀로산꾼 2019. 4. 3. 15:22

1.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달마어록 이입사행론』①∥깨달음에 이르는 방편, 이입(理入)과 행입(行入)강정중(시인)

 

 

출처 : http://blog.daum.net/hekong/12242790

 

 

이 글은 보리달마(菩提達摩)의 돈황본(敦煌本)이입사행론장권자(二入四行論長券子)의 전부를 강정중 시인이 작고 이전에 번역한 유고이다. 이입사행론장권자라는 명칭은 일본 선학자인 스즈끼 다이세츠(鈴木大拙)씨가 북경도서관에서 보리달마의 행적과 어록이 적힌 돈황본을 발견한 후 우리나라에 전래된 선 문촬요(禪門撮要)와 대조하여 교정을 하고 붙인 이름이다. 번역에 관해서 말해두자면 직역은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우니 의역하였다. 본지는 이입사행론전부를 연재한 뒤 한 권의 책으로 발간할 계획이다.

- 편집자 주

 

 

* 달마의 소전(小傳)

 

 

法師者 ,,,,, 법사는

 

西域南天竺國人 ,,,서역(西域) 사람이다. 남천축국(南天竺國) 출신으로,

 

是大婆羅門國王第三之子也.,,,위대한 파라몬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神惠朗 ,,,,,,,,,투철한 두뇌를 갖추고 있어서

 

聞皆曉晤. ,,,,무엇을 배우든 즉시 통효(通曉)하였다.

 

志存摩訶衍道 ,,, 열심히 대승(大乘)의 진리를 찾아,

 

故捨素從緇,,,,속복을 벗고 흑의(黑衣)의 교단에 들어가서

 

紹隆聖種. ,,, 성자의 혈통을 북돋우었다.

 

冥心虛寂, ,,,마음을 허적(虛寂)의 경지에 놓아두고,

 

通鑒世事,,,, 속세의 말로를 내다보고

 

內外俱明,,,, 내외의 학문을 밝혔기에

 

德超世表.,,, 그 덕망은 일세(一世)에 높아졌다.

 

悲悔邊隅正陵替, ,,,변경의 나라에서 불교가 쇠퇴해가는 것을 유감으로 여겨,

 

遂能遠涉山海,,,,,, 자발적으로 멀리 바다와 산을 넘어서

 

遊化漢魏. ,,,우리의 한위(漢魏)의 땅에 와서 살게 되었다.

 

亡心之士, ,,,마음이 솔직한 사람들은

 

莫不歸信,,,,, 누구나 다들 귀의를 하였지만

 

取相存見之流, ,,, 겉모습을 따지고 주의주장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乃生譏謗.,,,,,,,,,, 즉시 비방을 하고 박해를 하기 시작했다.

 

于時唯有道育惠可, ,,,처음에는 제자가 도육(道育)과 혜가(惠可) 뿐이었다.

 

此二沙門,,,, 이 두 수행자는

 

年雖後生, ,,, 젊은 나이였지만

 

俊志高遠,,,, 의지가 고매하고

 

幸逢法師,,,, 다행히 법사를 만나게 되어

 

事之數載,,,, 수년동안 제자로 배우면서

 

虔恭諮啓,,, 삼가 그 지도를 빌어

 

善蒙師意.,, 훌륭히 스승의 정신을 익힐 수 있었다.

 

法師感其精誠, ,,,법사는 그들의 성의에 감심을 하고

 

誨以眞道. ,,,진실의 오의(奧義)를 전했다.

 

如是安心,,,, 마음을 올바르게 가라 않치고

 

如是發行,,,, 올바르게 행동하고

 

如是順物,,,,올바르게 사람들고 사귀고

 

如是方便.,,,올바르게 사람들을돕는

 

此是大乘安心之法, 마음을 가라 않히는 방법이며

 

令無錯謬. ,,,사라들로 하여금 잘못을 없애주려는것이다

 

如是安心者壁觀,,,, 예를 들면 이와 같이 안심(安心)을 하여라는 것은 벽관(壁觀)이고,

 

如是發行者四行, ,,,“이와 같이 실행하여라는 것은 네 가지의 행()이고,

 

如是順物者,,,, “이와 같이 사람들을 대하여라는 것은

 

防護譏嫌,,,, 세간의 비방에서 몸을 지키는 것이고,

 

如是方便者,,,, “이와 같이 방편(方便)을 하여라는 것은

 

遣其不著.,,, 이상의 어느 것에도 고집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此略序所由,,,, 여기서는 간략하게 그 유래만을 적어두고

 

意在後文.,,,자세한 것은 본문에 돌리겠다.

 

 

[해설]

여기 번역하는 보리달마의 행록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자료이다. 최고라는 의미가 말해주듯이 가장 원시적이니 윤색이나 가필이나 변용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다.

저술자는 달마의 제자인 담림(曇林)’으로 알려지고 있으니 먼저 담림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두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담림이 도육(道育)과 혜가(惠可)뿐이었다. 이 두 수행자는 젊은 나이였지만 의지가 고매하고라고 자기보다도 나이가 낮은 제자의 수행에 관해서 이렇게 적어두고 있는 그 겸허한 태도를 보면 오히려 도육이나 혜가보다도 더 고매한 인품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담림은 필수(筆受)였다. 필수란 경론을 번역할 때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설하는 내용을 적합한 한문의 용어를 찾아내서 필기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전통사상뿐 아니라 토착신앙에까지도 조예가 깊고, 탁월한 지식이 없이는 필수의 역할을 담당할 수 없다. 담림은 보리유지(菩提流支)를 비롯해, 여러 법사들의 번역을 도우면서 북위(北魏)의 낙양을 중심으로 활약한 유능한 승려였다.

담림이 어떤 계기로 달마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등의 명저가 있고 승만경(勝經)의 연구자로서도 널리 명성을 떨친 사람이며, 길장(吉藏)승만보굴(勝寶窟)에도 임법사(林法師)의 소()”라는 내용이 인용될 정도로 당시의 불교학계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보리달마약변대승입도사행(菩提達摩略辯大乘入道四行)의 서()도 담림이 쓴 것이다. 이 책은 달마가 간결하게 가르친 사행(四行)을 적어놓은 것으로 수행자의 구체적인 생활태도에 관한 지침서이다.

이 책은 도선(道宣)속고승전(續高僧傳)에도 인용되고 있었으나 돈황본이 발견됨으로 해서 그 내용의 근거를 찾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도선의 손으로 엮어진 속고승전이라는 책이 우리나라의 고승들을 논할 때도 여기저기 전거로 인용되고 있기에 여기서 간략하게 그 내용을 적어두겠다.

속고승전은 양()의 혜교(惠皎)가 엮은 고승전(高僧傳)을 송대(宋代)에 이어받아서 붙여진 이름이고, ()()의 불교에 공헌을 한 사람들의 전기를 집대성한 것으로 중국불교통사의 제2집이다.

이 책에서 주목되는 것은 습선편(習禪篇)이며 여기에는 좌선 실천자들의 기록 뿐 아니라 불교가 중국에 정착된 경위와 초조(初祖)들의 행적 등을 망라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공인의 통사이기에 정치적으로 윤색이 된 점도 많고 사실과 다른 점도 많다고 알려지고 있으니, 도선의 글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하나의 참고자료로서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이다. 도선도 의학(義學) 출신인 담림에게 주목을 하고 특이한 위치에서 그의 공적을 기록하고 있다.

 

 

*두 가지의 입장, ()와 행()의 발견

 

 

夫入道多途,,, 본래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은 많다.

 

要而言之,,,, 간략하자면

 

不出二種.,,,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一是理入, ,,,첫째는 이입(理入)이고,

 

二是行入.,,, 둘째는 행입(行入)이다.

 

理入者, ,,,,이입이라는 것은

 

謂藉敎悟宗, ,,,경전에 의하여 대의(大意)를 아는 것이다.

 

深信含生凡聖同一眞性,,,, ()을 갖고 있는 사람은 범부이든 성인이든 똑같이 동일하고 진실한 심()을 갖고 있다고 깊이 믿는 것이다.

 

但爲客塵妄覆, ,,,다만 객진(客塵)으로 그저 덮여져 있기에

 

不能顯了. ,,,,,,,, 분명히 보이지 않을 따름인 것이다.

 

若也捨妄歸眞, ,,,만약 헛된 생각을 버리고 진실에 돌아가서

 

凝住壁觀, ,,,,,,, 올바르게 벽관(壁觀)을 지킨다면

 

自他凡聖等一, ,,, 자기나 타인이나, 범부나 성인이나 다 평등하고

 

堅住不移, ,,,,,,,,평정심으로 되어서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更不隨於文敎,,,,,이를테면 고전(古典)의 가르침만을 따르지 않고

 

此卽與理冥符,,,,,이미 이()와 명부(冥符)하여

 

無有分別,,,, 다시는 분별을 일으키지도 않고,

 

寂然無爲,,,, 고요히 무위(無爲)의 경지로 될 것이다.

 

名之理入.,,, 이것이 이입이다.

 

行入者, ,,,, 다음 행입(行入)이라는 것은

 

所謂四行,,, 네 가지의

 

其余諸行,,,,생활지침으로

 

悉入此行中.,,그밖의 것들은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何等爲四, ,,,네 가지란 무엇인가 하면

 

一者報怨行,,, 제 일은 보원행(報怨行)’이고,

 

二者隨緣行,,, 제 이는 수연행(隨緣行)’이고,

 

三者無所求行,,,제 삼은 무소구행(無所求行)’이고,

 

四者稱法行.,, 제 사는 칭법행(稱法行)’이다.

 

 

[해설]

이입(理入)’이란 원효의 해석에 의하면 환정(還淨)의 원리, 즉 시각(始覺)의 절차를 따라서 본각(本覺)에 합일되는 것이다. 본각이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두고 하는 말이니 그 의미에서 원효는 환정이라 해석했다고 보인다. ‘행입(行入)’이란 원효의 해석에 의하면 환정을 위한 실천이다. 그러나 달마의 행입은 구체적인 실천으로 수행자들의 일상적인 생활태도에 논점을 두고 있다.

대의(大意)는 불교의 대의(大義)’, ()대의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으나 달마선의 입장에서 볼 때 불()의 의()로 읽으면 좀 무리가 있다.

객진(客塵)은 심() 밖에서 들어오는 오염(汚染)을 말하며 명부(冥符)는 두 개가 딱 일치되는 것이다.

벽관(壁觀)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는 각관(覺觀)’으로 되어 있다. 각관은 벽관보다도 더 오래된 용어이다. 원효는 마명(馬鳴)보살의 기신론(起信論)금강삼매경을 소의(所依)로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고 금강삼매경에서 각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달마의 이입사행론금강삼매경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먼저인가는 아직 결론을 보지 못하고 있다. 달마의 이입사행론이 불()의 소설(所說)에 의한 것으로 권위를 갖추기 위해서 선술된 것이라는 학설도 있지만 그것도 하나의 학설에 불과하다. 그럼 담림의 글을 해설하겠다.

담림은 달마의 가르침을 이입(理入)’사행(四行)’으로 요약하고 있다. 이 요약은 거의 결정적으로 달마사상의 요체를 밝혀주는 것이 된다.

이입의 ()’는 도리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는 일반용어로 말하면 섭리(攝理)()’이고, 불교용어로 말하면 여리(如理)()’이다. 즉 본래부터 산천초목도 갖추고 있는 근본적인 성()의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입이란 그러한 삼라만상의 진리 속으로 들어간다는 해석이 된다.

필자가 여기서 산천초목, 삼라만상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화엄사상이나, 더 나아가서는 의상이 우리나라의 화엄사상을 이리무애(理理無碍)에 둔 것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무애를 떠나서는 우리나라 특유의 선사상에도 또한 도달할 수 없다.

달마선에서 세우고 있는 행입(行入)은 실천적인 지침으로 아주 소박하다. 이 행입은 별도로 소승(小乘)의 선()과 관련시켜서 논하기로 하고, 우선 용어에 대해서 적어두기로 하겠다.

이입이나 행입의 ()’이란 교학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용어이고, 우리말로는 들어간다라고 밖에는 해석이 안 되지만, 본래의 뜻은 관철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입열반(入涅槃)이란 열반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열반을 관철하는 것이니, 열반에도 머물러서 열반에 집착할 수도 없게 된다. 바로 이러한 입()인 것이다.

이입은 섭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섭리를 관철하는 것이니 섭리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행입은 행을 관철하는 것이니 행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순차적으로는 이입을 하여 행입에 들어가게 되지만, 이것은 용어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와 행()은 일관(一貫)으로 관철되어야만 한다.

 

 

 

 

 

 

 

 

 

 

 

 

 

 

 

 

 

 

 

 

 

2.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 네 가지의 실천

 

 

云何報怨行. 修道行人, 若受苦時, 當自念言, 我從往昔, 無數劫中, 棄本從末, 流浪諸有, 多起怨憎,

 

違害無限. 今雖無犯. 是我宿殃惡業果熟, 非天非人所能見與. 甘心忍受, 都無怨訴. 經云, 逢苦不憂,

 

何以故, 識達本故. 此心生時, 與理相應, 體怨進道, 是故說言報怨行. 第二隨緣行者, 衆生無我,

 

竝緣業所轉, 苦樂齊受, 皆從緣生. 若得勝報榮譽等事, 是我過去宿因所感, 今方得之, 緣盡還無, 何喜之有.

 

得失從緣, 心無增減, 喜風不動, 冥順於道, 是故說言隨緣行. 第三無所求行者, 世人長迷, 處處貪著,

 

明之爲求. 智者悟眞, 理將俗反, 安心無爲, 形隨運轉, 万有斯空, 無所願樂. 功德黑闇, 常相受逐,

 

三界久居, 猶如火宅. 有身皆苦, 誰得而安. 了達此處, 故於諸有, 息想無求. 經云, 有求皆苦, 無求則樂.

 

判知無求眞爲道行. 第四稱法行者, 性淨之理, 目之爲法. 此理衆相斯空, 無染無著, 無此無彼. 經云,

 

法無衆生, 離衆生垢故. 法無有我, 離我垢故. 法無有我, 離我垢故.智者若能信解此理, 應當稱法而行.

 

法體無£Q, 於身命財, 行檀捨施, 心無. 達解三空, 不倚不著, 但爲去垢, 攝化衆生, 而不取相.

 

此爲自利,復能利他, 譯能莊嚴菩提之道. 檀施旣爾, 余五亦然. 爲除妄想, 修行六度, 而無所行, 是爲稱法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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云何報怨行. ,,어떤 것이 보원행(報怨行)인가.

 

修道行人, ,,,너희들은

 

若受苦時,,,, 괴로움을 느끼면

 

當自念言,,,, 내심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我從往昔,,, 나는 전생부터

 

無數劫中,,, 무한한 겁을 되풀이 하면서

 

棄本從末,,, 근본을 잊고 말()만을 찾았고,

 

流浪諸有,,, ()의 세계에 방황하면서

 

多起怨憎,,, 항상 원한을 품고,

 

違害無限.,, 어디까지나 피해를 받지 않으려고 피해 다녔다.

 

今雖無犯.,, 금생에서 범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是我宿殃惡業果熟,,, 모든 것은 전생의 악업의 결과이다.

 

非天非人所能見與.,,천신(天神)이나 악마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甘心忍受,,, 마음에 달갑게 인수(忍受)하고,

 

都無怨訴.,, 원망하는 말같은 것은 입밖에 꺼내지 말아야 한다.

 

經云,,,,,,,, 경전에

 

逢苦不憂,,,“괴로움을 당하더라도 개의치지 말아라.

 

何以故,,, 왜냐하면

 

識達本故.,, 인내(忍耐)는 근본에 미치고 있다고 한다.

 

此心生時, ,,이러한 마음을 낼 때

 

與理相應,,, 이치와 하나 되고

 

體怨進道,,, 원망을 체득하여 도로 나갈수 있게된다

 

是故說言報怨行.,,그래서 보원행(報怨行)’이라고 부른다.

 

第二隨緣行者,,, 2의 수연행(隨緣行)은 중생1)에는

 

衆生無我, ,,,자아가 없고

 

竝緣業所轉,,, 어느 것이나 인연에 따른다.

 

苦樂齊受, ,,, 고락(苦樂)도 똑같이

 

皆從緣生. ,,, 항시 연()에 맡기고 산다.

 

若得勝報榮譽等事, ,, 설령 보람직한 결과나 영예를 얻었다 하더라도

 

是我過去宿因所感,,,모두 전생의 자기 자신의 응보인 것이며,

 

今方得之,,, 지금 바로 그것을 얻었다 하지만,

 

緣盡還無,,,()이 없어지면 무()인 것이다.

 

何喜之有.,,기뻐할 것도 없고,

 

得失從緣,,,좋든 나쁘든 인연의 차제(次第)

 

心無增減,,, ()에 증감이 있는 것이 아니다.

 

喜風不動,,, 기쁨의 바람에도 동하지 않고

 

冥順於道,,, 암묵으로 도()에 계당(契當)한다.

 

是故說言隨緣行.,,그래서 수연행(隨緣行)’이라 부른다.

 

第三無所求行者,,, 3의 무소구행(無所求行)

 

世人長迷,,, 세간의 사람은 언제나 자기자신을 잃고

 

處處貪著,,, 어디서나 욕심만 부리니

 

明之爲求.,,이것이 구()함이라는 것이다.

 

智者悟眞,,, 지자(智者)는 진리에 눈을 뜨고

 

理將俗反,,, 원리적으로 속()과 정반대이며

 

安心無爲,,, 마음을 무위(無爲)에 두고

 

形隨運轉,,, 몸은 운명대로 움직인다.

 

万有斯空,,, 이렇게 하여 만유(萬有)는 공()으로 되고,

 

無所願樂.,, 무언가 바랄 것도 없게 된다.

 

功德黑闇,,,아름다운 공덕천여(功德天女)와 미운 암흑여(暗黑女)

 

常相受逐,,, 항시 붙어다니며 헤어지지 않는다.

 

三界久居,,, 불편없이 살아온 삼계(三界)

 

猶如火宅.,, 마치 불붙은 가옥이다.

 

有身皆苦,,,몸을 지닌 자는 모두 괴로워하고

 

誰得而安.,, 어느 누구도 안심을 못한다.

 

了達此處,,, 여기까지 알게 되면

 

故於諸有,,,어떤 것에도 몽상은 그치고

 

息想無求.,, 구할 것도 없어진다.

 

經云, ,,,경전에

 

有求皆苦,, ,욕구가 있으면 누구든 괴로워하고,

 

無求則樂.,,욕구를 갖지 않을 때 사람은 즐기게 된다라고 적혀 있다.

 

判知無求眞爲道行.,, 확실히 알게 되니 욕구를 갖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도인의 삶인 것이다.

 

第四稱法行者,,, 4의 칭법행(稱法行)

 

性淨之理,,, 자기가 본래 청정하다는 도리,

 

目之爲法.,, 이것을 법()으로 하는 것이다.

 

此理衆相斯空,,,이 도리에 있어서는 어떠한 개별적인 입장도 모두 공하다.

 

無染無著,,, 어느 것에도 염착(染著)할 것도 없고

 

無此無彼.,, 피차(彼此)를 구별할 수도 없다.

 

經云, ,,,,,, 경전에

 

法無衆生,,, “()에는 중생이라는 것이 없다.

 

離衆生垢故.,, 중생이라는 오염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法無有我,,, ()에는 개별적인 아()라는 것이 없다.

 

離我垢故.,, 개별적인 아()라는

 

法無有我,,, 법이 없고 아가 있다는것은

 

離我垢故.,,오염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고 적혀 있다.

 

智者若能信解此理,,, 지자(智者)는 만약 이 도리를 체득할 수가 있다면

 

應當稱法而行.,,법의 진실에 합당하게 행동을 하게 된다.

 

法體無慳,,,법은 무엇이든 아끼지 않음으로

 

於身命財,,,신체와 생명 및 재산을 모아

 

行檀捨施,,,보시를 하여도

 

心無吝惜.,, 마음으로 그러한 것들을 아끼지도 않고 자기 자신과 상대자와 보시물,

 

達解三空,,, 이 세 가지가 본래 공함을 잘 이해하고

 

不倚不著,,, 무엇이든 부탁하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않고,

 

但爲去垢,,, 오직 오염을 씻기 위해서

 

攝化衆生,,, 중생을 구제하면서도

 

而不取相.,, 그러한 내색을 보이지도 않으니

 

此爲自利,,,이것이야말로 자리(自利)로써의

 

復能利他,,, 타리(他利)이며

 

譯能莊嚴菩提之道.,, 그렇게 하여 개오(開悟)의 도()를 성취하는 것이다.

 

檀施旣爾,,, 보시가 이러한 것이니

 

余五亦然.,, 다른 다섯 가지도 똑같다.

 

爲除妄想,,,번뇌의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서

 

修行六度,,, 육도(六度)2)를 행하면서

 

而無所行,,,또한 행할 것도 없다.

 

是爲稱法行.,, 이것을 칭법행(稱法行)이라 부른다.

 

 

[해설]

유마경(維摩經)제자품(弟子品)()에는 중생이라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중생은 번뇌가 무수히 생김을 의미한다.

달마의 사행(四行)과 소승에서 세운 사념처(四念處)와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두기로 한다. 여기에 밝혀지는 사행은 달마사상의 실천덕목을 잘 요약한 것으로, 그 내용에 있어서는 소승의 사념처와 대조되고 있다. 특히 사념처의 부정관(不淨觀)을 배제시키고 사행의 덕목 자체가 무엇인가를 수행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바꿔 말하면 즉 이입(理入)의 일상화라고 해석이 될 것이다.

후에 달마사상의 중추를 이어받게 되는 마조(馬祖)()는 수증(修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마조의 스승인 남악(南岳)의 회양(懷讓677~744)수증(修證)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개념은 벌써 초기의 이입사행(二入四行)의 구조 속에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마사상의 정법(正法)에 대한 자세를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서 나타나는 일상적인 실천덕목이다. 담림의 시대적인 배려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태도가 담림 자신의 선관(禪觀)에 입각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달마사상과 정법은 표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달마선은 초창기에 경가(經家)로부터 박해를 받았다고 보여진다. 이 점은 일상적인 실천덕목으로써의 사행의 내용에서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최대의 덕목으로 인욕(忍辱)을 먼저 내세워서 세간의 비방으로부터 심신을 보호하는 순물(順物)을 설하고, 사물에 전혀 집착을 하지 않는 방편(方便)은 달마선의 필수적이고 불가결한 생활태도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른바 신흥종교가 겪게 되는 고난을 달마선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 반야를 종()으로 하는 벽관(壁觀)은 잘못하면 스스로 구제될 수 없는 공견(空見)에 빠지게 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어록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는대로 공견을 엄하게 다스리고 있다. 달마선의 사행이 소승의 사념처와 다른 점은 앞에서 말한 순물(順物)과 방편으로 벽관 그 자체를 지켜나갔다는 일상적인 생활의 실천에서 나타나게 된다.

달마선은 바로 일상적인 생활 속에 도리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경가(經家)로부터 멸시와 박해를 받게 된 것도 정법을 실천에서 찾는 달마의 선관에 그 원인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1) 여기서 말하는 중생(衆生)은 덧없이 생멸하는 사물들을 가리킨다.

2)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知慧)

 

 

 

 

 

 

 

 

 

 

 

 

 

 

 

 

 

 

 

 

 

 

 

 

3.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달마어록 이입사행론』②∥무엇이 이고 무엇이 라고 말하는가 | 祖師語錄

 

 

*동료의 편지(1)

 

吾恒仰慕前哲,,,나는 지금까지 훌륭한 선배들을 따라서 널리

 

廣修諸行,,, 온갖 행()을 닦고,

 

常欽淨土,,, 불타(佛陀)가 남겨주신 가르침을

 

渴仰遺風.,, 항시 정토(淨土)를 바라면서 갈망해 왔습니다.

 

得逢釋迦,,, 다행히 살아계시는 불타1)를 만날 수 있게 되어서

 

大道者巨億,,, 머나먼 대도(大道)에 눈이 뜨이고,

 

獲四果者無數.,, 네 가지 깨달음의 성과를 조금은 획득할 수가 있었습니다.

 

實謂天堂別國,,, 나는 지금까지 천국이나

 

地獄他方,,, 지옥도 무관한 것으로 여기고

 

得道獲果,,, 성과도 사후에 신체가 바뀌어서

 

形殊體異.,, 체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披經求福,,, 경을 읽고 복을 찾아

 

潔淨行因.,, 그 인()이 되도록

 

紛紛繞繞,,, 청정한 수행을 쌓아왔습니다.

 

隨心作業,,, 그러면서도 마음이 가는대로 업()을 짓고,

 

向涉多載,,, 벌써 십여 년이나 되는 데도

 

未遑有息.,, 아직 마음이 편해지는 여유마저 없을 정도입니다.

 

始復端居幽寂,,, 처음에는 계속 깊고 조용한 장소에서

 

定境心王.,, 몸을 바로잡고 신체를 깨끗이 하려고 마음을 바로잡았으나,

 

但妄想久修,,,망상을 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隨情見相,,,()에 끌려

 

其中變化,,, 망념이 나타나는 변화를

 

略欲難窮.,, 좀처럼 제지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末乃洞鑒法性,,, 마침내 법성(法性)을 깨우치고,

 

粗練眞如,,, 겨우 진실이

 

深趣玄達.,, 무엇인지도 알게 되어

 

始知方寸之內,,, 비로소 제 마음 속에

 

無所不有,,,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明珠朗徹,,,구슬이 빛나고 오의(奧意)를 내다볼 수가 있게 되면서부터

 

上自諸佛,,, 위에는 제불(諸佛)에서

 

下及蠢動,,, 밑으로는 벌레 같은 자들에 이르기까지

 

莫非妄想別名,,,모두 망상의 가명(假名)에 지나지 않고,

 

隨心指計.,,()이 제멋대로 나누어서 보았던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故瀉幽懷,,, 그래서 숨겨둔 마음을 터놓고

 

聊顯入道方便偈等,,, 우선 입도(入道)하는 수단의 노래라는

 

用簡有緣同悟之徒.,, 이름을 붙여서 연()이 있어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바입니다.

 

有暇披攬,,,,,,,,,,,,,,, 틈이 있을 때 읽어 주시고

 

坐禪終須見本性.,, 좌선을 하신다면 반드시 자기의 본성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會也融心令使淨,,, 만약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면 마음은 청정하게 되지만

 

瞥起卽便是生滅,,, 일념(一念)이라도 분별을 한다면 마음은 벌써 생멸 속에 있네

 

於中憶想造邪命,,, 그런 마음 속에서 이렇다 저렇다 망상을 하는 것은 거짓된 삶을 꾸며두는 것

 

覓法計心業不遷.,,,방법을 찾아서 이것 저것 해본들 업()의 지배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네.

 

 

[해설]

이 글은 서간집의 서문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입도하는 수단의 노래는 편지의 끝에 적혀 있는 칠언사구의 게이다.

초기의 선사상을 철학적인 입장에서 집대성한 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는 게()의 제2구인 일념(一念)이라도 분별을 한다면 마음은 벌써 생멸 속에 있네에 의하여 별기(瞥起)는 병이니 불속(不續)이 약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별기란 분별을 일으키는 것으로 원문에는 별기(瞥起)’로 되어 있다.

 

 

살아계시는 불타(佛陀)란 물론 달마를 가리킨다. 법성(法性)에 대해서는 제73단의 글인 연선사(憐禪師)의 말인 법성무체직용막의(法性無體直用莫疑)”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으니 읽어주기 바란다. 우선 여기서는 법성이란 사물을 존재시키는 도리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즉 법성이란 삼라만상을 존재하게 하는 이법(理法)인 것이다.

 

 

()의 제1구에서 만약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면’2)이라고 말한 것은 후에 북종선(北宗禪)의 교의를 묶어 놓은 대도융심돈오진종론(大道融心頓悟眞宗論)의 제목에도 사용되고 있으며, 그 이전에도 달마와 같은 시대에 활약한 선성혜명(仙城惠命)융심론(融心論)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으니 참고로 인용해 둔다.

 

 

완전한 소질을 갖춘 사람이 가르침을 받을 때는 그 가르침은 완전한 것이 된다. 진실한 마음이 만상의 내부에 들어가면 만상은 진실이 된다. 만상이 진실하니 어떤 혼란도 수습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혼란이 수습이 되니 수습이나 혼란도 함께 없어진다. 만상은 진실이기 때문에 만상과 진실의 대립은 함께 초월된다. 그뿐 아니라 대립을 떠난다 하더라도 유()의 입장을 떠나버리는 것은 아니며 언어의 입장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정말은 거부될 언어도 없는 것이다. 이 점은 진()이 유현(幽玄)이니 마음을 부드럽게 하였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심()으로 심()을 융화시킨다면 심()은 융화한 것은 못 된다. 처음부터 심()은 여실(如實)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융화될 수가 있을 것인가. 실제로 심()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심()을 융화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글의 처음에 적혀 있는 완전한 소질을 갖춘 사람이 가르침을 받을 때는이라는 구는 중국 불교의 실천적인 입장에서의 고유한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 고유한 과제가 융화라는 용어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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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의 편지(2)

 

展轉增垢心難究竟. 智者暫聞八字, 卽便悟理, 始知六年徒勞苦行. 世間盡是魔人, 徒者喧喧,

 

空爲鬪靜. 虛妄作解, 敎化衆生, 口談藥方, 不除一病, 寂寂從來本無見相, 何有善惡及與邪正.

 

生亦不生, 滅亦不滅. 動則不動, 定則非定. 影由形起, 響逐聲來. 弄影勞形, 不知形之是影,

 

揚聲止響, 不知聲之是響根. 除煩惱而求涅槃者, 喩去刑而覓影. 離衆生而求佛者, 喩黙聲而尋響.

 

故知迷悟一途, 愚智非別. 無名處强爲立名, 因其名卽是非生矣. 無理處强爲作理, 因其理卽諍論興焉.

 

幻化非眞, 誰是誰非, 虛妄無實, 何有何無. 當知得無所得, 失無所失. 未及造談, 聊申此句, 論玄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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展轉增垢心難究竟.,,계속해서 마음은 더욱 더 오염을 증가시킬 뿐이지 끝내 해결되지 않는다.

 

智者暫聞八字,,,, 지혜가 있는 사람은 여덟 자의 구를

 

卽便悟理, ,,,,,,,,듣기만 해도 바로 이()를 깨닫고

 

始知六年徒勞苦行.,, 육 년이나 계속해 온 고행의 헛됨을 느끼게 된다.

 

世間盡是魔人,,, 세상은 어디에나 사기꾼들이 많고

 

徒者喧喧,,, 그저 시끄럽기만 하다.

 

空爲鬪靜.,, 헛된 다툼을 펼치고 있다.

 

虛妄作解,,, 있을 수도 없는 해석을 만들어 놓고

 

敎化衆生,,, 사람들을 가르쳐서 인도한다고 하며

 

口談藥方,,, 입끝으로만 약()의 조합을 말하고 있을 뿐

 

不除一病,,, 병 하나도 치유되지는 않는다.

 

寂寂從來本無見相,,, 진실은 어디까지나 고요하고 본래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何有善惡及與邪正.,, 어찌 선악이나 사정(邪正)이 있을 것인가.

 

生亦不生,,,()도 생()이 아니며

 

滅亦不滅.,, ()도 멸()이 아니고,

 

動則不動,,, 움직이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定則非定.,, 정해져도 정해지지 않는다.

 

影由形起,,, 실로 영()은 신체에서 나온 것이며

 

響逐聲來.,, 반향(反響)은 성()을 따라온다.

 

弄影勞形,,, ()을 붙잡으려고

 

不知形之是影,,, 신체를 괴롭히지만 신체가 영()의 주체라는 것도 모르고,

 

揚聲止響,,,,,,,,, ()을 외쳐서 반향을 제지하려 하지만

 

不知聲之是響根.,, ()이 반향의 주체라는 것도 모르고 있다.

 

除煩惱而求涅槃者,,, 번뇌를 제거하여서 열반을 구하는 것은

 

喩去刑而覓影.,, 신체를 버리고 영()을 찾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離衆生而求佛者,,, 중생을 떠나서 불()을 구하는 것은

 

喩黙聲而尋響.,, ()을 제지하고 반향을 찾으려 하는 것과 같다.

 

故知迷悟一途,,, 이렇게 보면 미()와 오()는 같은 길을 두고 하는 말이니

 

愚智非別.,,,,,,,, 우치(愚痴)와 지혜는 둘이 아님을 알게 된다.

 

無名處强爲立名,,,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일부러 이름을 붙여서

 

因其名卽是非生矣.,, 그 이름에 입각해서 시비가 일어난다.

 

無理處强爲作理,,, 이유도 없는 것에 일부러 이유를 붙여서

 

因其理卽諍論興焉.,, 그 이유에 입각해서 논쟁이 벌어진다.

 

幻化非眞,,, 환화(幻化)3)는 실()이 있는 것이 아닌데

 

誰是誰非,,, 무엇이 유()이고

 

虛妄無實,,, 무엇이 무()라고 말하는가.

 

何有何無.,, 응당 알아야 한다.

 

當知得無所得,,,얻어도 얻은 것이 없고

 

失無所失.,, 잃어도 잃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未及造談, 이러한 것은 말을 만드는 작 난 이라

 

聊申此句, 어찌이러한 글귀에 의하여

 

論玄旨.깊고 그윽한 종지를 논할 것이 리오

 

 

 

[해설]

이 단()의 후반부는 속고승전(續高僧傳)16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3의 혜가(惠可)의 장에 향거사(向居士)가 혜가에게 보낸 글이 인용되고 있다.

향거사는 산야에 은거하던 은사(隱士)로 독각(獨覺)이었다. 후에 향거사는 혜가에 의해 달마의 제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전반부도 같은 취지의 글이었다고 보여지나 탈락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할 수가 있다.

 

 

속고승전16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3에는 혜가가 향거사에 보낸 답서가 실려 있다. 그러므로 이 동료의 편지는 혜가와 향거사의 왕복서한(書翰)인 것으로 추정이 된다. 여기 혜가의 답서를 인용하겠다.

 

 

상세히 서한의 취지를 읽었습니다. 그 전부를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진유(眞幽)4)의 이()는 조금도 특별한 것이 아니지요. 애초에 마니보석을 잃었으니 돌멩이라고 생각하다가 홀연히 눈이 뜨여서 보면 그대로가 보석인 것입니다. 무명(無明)과 지혜(知慧)는 하나인 것이며 다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응당히 알아야 합니다. 만상은 전부가 진여입니다. 말씀하신 대립개념에 구애되어 있는 사람들이 가엾게 여겨지기 때문에 우견(愚見)을 적어 주의를 시키고 싶어서 이 편지를 씁니다. 자신의 몸이 불()과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되었는데 무엇때문에 일부러 무여열반(無余涅槃) 같은 것을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기 적힌 것은 전에 언급된 법시(法施)이다. 즉 동료를 넓혀가려는 혜가의 의도가 보인다. 그리고 대립관념에 구애되고 있는 사람들이 향거사의 주위에 있는 것도 알 수 있다. 혜가는 이렇게 하여 결국 향거사를 달마의 제자로 맞아들이고 대립관념에 얽매인 사람들을 섭복(攝伏)시킨다.

 

 

편지의 전반부에 나타나는 ()’()’의 용어는 중국철학의 전형적인 사유세계를 보여준다. 원효도 해동소(海東疏)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장자(莊子)재유편(在宥篇)대인(大人)의 가르침은 형()이 영()에 있어서와 같고, ()이 향()에 있어서와 같다. 물음이 있으면 이에 응하고, 그 생각한 바를 다해서 천하를 지배하게 된다는 글이 있다. 여기서 말한 형()과 성()()’이고, ()과 영()은 그 ()’이다. ()과 영()을 떠나서 형()도 성()도 있을 수 없다. 지금 이 관계를 번뇌와 열반의 관계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향거사는 이렇게 중국의 전통적인 사유를 통해서 불교교리를 이해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혜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번뇌와 열반은 일체불이(一體不二)의 관계에 있음을 향거사에게 밝히고 있다. 이 관계를 물과 얼음의 관계에 비유하기도 한다. 달마선의 초창기에 불설대변사정경(佛說大辯邪正經)이라는 중국찬술의 불전(佛典)이 있었다. 향거사가 이 불전을 읽고 있었는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형()과 영(), ()과 향()의 비유와는 달리 ()와 용()의 관계를 물과 얼음에서 찾고 있는 것은 매우 주목된다. 그 경설을 여기 인용한다.

 

 

다들 깨달음[]을 구하려 하는데 그것은 물을 버리고 얼음을 찾으려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얼음이 바로 물이고 물이 즉 얼음이다. 얼음이 아닌 물은 없고, 물이 아닌 얼음은 없다. 번뇌[]와 보리(菩提: )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왜냐하면 번뇌를 부정하고 보리(菩提)를 구하려고 한다면, ()을 버리고 영()을 구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형() 그 자체가 영()이며 영() 그 자체가 형()인 것이다. ()과는 달리 영()은 없고 영()과는 달리 형()은 없다. ()과 불()의 관계도 똑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심()을 부정하고 불()을 구하려 하는 것은 성() 그 자체가 향()이고, () 그 자체가 성()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향거사의 논리나 위에 인용한 경설의 사정(邪正)의 비유나 진리를 밝히려는 의도가 일관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서 혜가의 답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입장을 밝혀두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여기서 달마사상의 진수인 이입(理入)이 나타난다.

염불삼매보왕론(念佛三昧寶王論)에도 위에서 나온 향거사의 편지와 혜가의 답서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두 사람의 상사(上士)는 달마의 칭법행(稱法行)에 의하여 진리 그 자체의 입장에 내성(內省)을 부가한 것입니다. 함께 중도(中道) 제일주의이며, 법신불(法身佛)을 배후에 두고 있습니다. 완전히 염()을 떠나서 무념(無念)을 구한 것도 아니고, ()을 떠나서 무생(無生)을 세운 것도 아니지요. 만약 그러한 것들을 떠나서 다른 무엇인가를 세웠다 한다면 그것은 번뇌가 그대로 열반이며 중생이 바로 제불(諸佛)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찌 저 돌멩이가 진주와 같음을 깨달을 수가 있겠습니까.

 

 

염불삼매보왕론의 결론은 한 걸음 잘못 디디면 번뇌(煩惱)’, 보리(菩提)’라는 잘못된 공관(空觀)에 빠져 버린다. 혜가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혜가 있는 사람이란 석가이고 여덟 자란 제행무상시생멸법(諸行無常是生滅法)’이라는 성구(聖句)를 말한다.

 

 

 

 

 

 

 

 

 

 

 

 

 

 

 

 

 

 

 

 

4.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공견(空見)의 무서움

諸佛說空法, 제불(諸佛)이 사물은 공()하다고 설하는 것은

爲破諸見故. 사람들의 유견(有見)을 제거하려 하기 때문이다

 

而復著於空, 그 때문에 한 번 공()에 붙잡혀 버리면

諸佛所不化. 제불은 이제 더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게 된다

 

生時唯空生, 사물이 생기는 것은 공()이 생긴 것에 지나지 않고

滅時唯空滅, 사물이 멸하는 것은 공()이 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實無一法生, 정말은 한 개도 생긴 것이 없고

 

實無一法滅. 한 개도 멸한 것이 없다

一切法爲貪欲而起. 사물은 탐욕의 마음에 의해서 모습을 나타낸다

貪欲無內亦無外, 탐욕의 마음은 우리들의 안에도 밖에도 있지 않고

 

亦不在中間. 그 주변에도 무관한 것이다.

 

 

分別是空法, 분별은 헛된 것인데도

 

凡夫爲所燒. 범부는 분별에 불타서 죽는다

邪正無內外, 사물의 사정(邪正)은 우리들의 안에도 밖에도 있지 않고

 

亦不在諸方. 다른 어떤 곳에도 무관한 것이다.

 

 

分別是空法, 분별은 헛된 것인데도

 

凡夫爲所燒. 범부는 분별에 불타서 죽는다.

 

一節法亦如是.사물은 모두 다 이런 것이다.

 

 

[해설]

1(): 공견(空見)과 아견(我見)

1게는 중론2, 관행품(觀行品)의 제13()이다. 이 게는 길장의 삼론현의(三論玄義)현법정(顯法正)2, 징관(澄觀)화엄연의초(華嚴演義)1, 또는 마하지관(摩訶止觀)등에도 인용되고 있는 바와 같이 수당(隋唐) 불교가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공견(空見)이라는 것은 비판의 논리였다. 즉 일종의 형식논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견 그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로 정립되어 버리면 공견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대승불교는 이러한 자기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소승의 유견(有見)을 비판하고 일어난 것이기에 편파적으로 공견에만 빠지기 쉽다. 그래서 이러한 게가 하나의 자계(自戒)로 읽혀졌던 것이다.

 

 

공견에 빠지면 공견 그 자체가 절대적인 정언(定言)이 되어 버린다. 그 자체가 정언으로 유견(有見)이 된다. 따라서 유견이 되어 버리는 공견을 구할 길은 없는 것이다. 수당(隋唐)의 대승불교가 원돈(圓頓)을 존중하고, 중국 화엄종을 대성시킨 법장이 사사무애(事事無碍)를 설하게 되는 것도, 그러한 공견의 극단적인 편파를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원돈 등은 새로운 공관(空觀)의 논리를 구축하기 위한 기반이었다.

 

 

당대(當代)의 중기에 의정(義淨)이라는 승려가 대승의 공견을 비판하기 위해서 혼자 남해를 거쳐서 인도로 구도길을 떠났다. 그 구도의 길을 떠나게 된 동기를 남해기귀전(南海寄歸傳)이라는 책에 남겼는데 그 속의 수제궤칙편(受齊軌則篇)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공문(空門)을 직지(直指)하여 그로써 불의(佛意)로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제계(諸戒)는 불의에 있지 않다고 알아야 한다.

 

이렇게 공문의 편향을 심히 규탄하고 있다.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반야(般若)는 반야가 아니다. 이것을 반야라 이름한다라는 유명한 구가 있다.

공견이란 애초에 아견(我見)을 다스리기 위한 약이었다. 아견이란 자기자신에 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이다. 나의 아()가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그 결과로 나의 것이라는 소유욕,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하는 분별, 그 뿐만 아니라 항쟁(抗爭)마저 일어난다. 이러한 아견은 공견에 의해서 다스릴 수가 있다. 그러나 공을 다스릴 약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공견이 오히려 증상만(增上)[자기만족(自己滿足)]을 증가시키니 이러한 약을 치유시킬 약은 없는 것이다. 결국 일반적인 입장에서 해석하자면 선()이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증상만을 고치는 약이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2(): 유마경의 취지

이 게는 유마경문질품(問疾品)의 취지에 의한 것이다. 당초(唐初)에 나온 승조(僧肇)보장론(寶藏論)과 그 보장론에 입각한 마조(馬祖)시중(示衆)에도 이 게가 인용되고 있다.

 

 

유마경에서는 특히 사대(四大)5)의 무주(無主)와 신체의 무아(無我)를 설하고 있다. 이른바 아집(我執)이라는 병은 아()에 집착하기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의 원인을 알게 되면 자연히 아()라고 하는 망상, 중생이라고 하는 망상은 소멸될 것이다. 우리들은 중생(衆生)6)의 화합에 의하여 아()가 신체를 형성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실은 일어나는 것은 법() 그 자체일 따름이지 신체라는 실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멸하는 것도 실은 신체가 아니라 법()인 것이다. 더 말하면 이러한 온갖 법(), 즉 중법(衆法)은 화합을 하면서도 서로 모르는 관계에 있다. 생길 때도 서로 생긴다는 것을 알리지 않고 멸할 때도 서로 멸하는 것을 알리지 않는다.

 

 

달마는 이러한 법()을 공()으로 바꿔서 생각한다. ()이 생기고 공()이 멸한다는 이 공()은 전에 설명한 공()이라는 병을 배제시킨 본래의 건강한 것이다.

다음에 계속되는 제3, 4구는 당시 선가(禪家)에서 많이 읽히던 여래장엄지혜광명경(如來莊嚴智慧光明經)에 의하고 있다. 또한 제3구의 내용은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에도 언급되고 있다. 이렇게 특정 경전에 의존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경전들을 인용해서 자기들의 주장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해석이나 주장은 물론 벽관(壁觀)의 실천으로 통한다.

 

 

3(): 구마라집(鳩摩羅什)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의 인용

이 게는 분명히 구마라집이 번역한 제법무행경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 경전은 다음에도 두 번 인용되고 있다. 제법무행(諸法無行)이란 제행무상(諸行無常)과 같은 의미이며 일체의 존재는 실체가 없음을 설한 것이다.

 

 

음욕즉시도(»Z慾卽是道)라는 유명한 말도 이 경전에 실려 있는 구이다. 이 경전은 반야의 사상에 입각하고 있으며 안에도 밖에도 있지 않고라는 구는 어떤 사물을 완전히 부정할 때에 사용하던 정형구(定型句)이다.

반야는 반야가 아닌 것이 반야이다라고 하는 이 구는 음욕과 탐욕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되기 쉽고 사람들에게 이상한 감동을 주는 구이기에 하나의 위기적인 국면을 노정시키고 있다. 혜가가 위기를 느낀 것은 바로 이 점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1) 여기서의 불타는 달마(達摩)를 가리킨다.

2) 원문에는 융심(融心)으로 되어 있다.

3) 기술(奇術), 요술(妖術)을 의미한다.

4) 진유(眞幽)란 진실로 유현한 것

5)

6) 여기서 말하는 중생(衆生)이란 여러 가지로 생멸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5.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달마어록 이입사행론』③무엇을 불()이라 하는가 | 祖師語錄

 

 

 

 

* 반야의 논리

 

法身無形, 故不見以見之. 法無音聲, 故不聞以聞之. 波若無知, 故不知以知之. 若以見爲見,

 

有所不見. 若以無見爲見, 卽無所不見. 若以知爲知, 有所不知. 若以無知爲知, 無所不知.

 

不能自知非有知, 對物而知非無知. 若以得爲得, 有所不得. 若以無得爲得 無所不得.

 

若以是爲是, 有所不是. 若而無是爲是, 無所不是. 一智惠門入百千智惠門. 見柱作柱解,

 

是見柱相作柱解. 覩心是柱法無柱相. 是故見柱卽得柱法. 見一切刑色亦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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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身無形, ,,,, 법신(法身)은 신체를 갖지 않는다.

 

故不見以見之.,, 그러므로 보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법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法無音聲,,,,,,,,,,정법(正法)은 음성이 없다.

 

故不聞以聞之... 그러므로 듣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정법을 듣게 되는 것이다.

 

波若無知, ,,,,,,, 반야는 분별하는 지()가 없다.

 

故不知以知之.,, 그러므로 지()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반야를 알게 되는 것이다.

 

若以見爲見, ,,,, 만약 본 것만을 보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有所不見. ,,,,,,,우리들에게는 보지 않는 것이 남는다.

 

若以無見爲見,,, 만약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卽無所不見.,,,,, 우리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은 전부 없어지게 된다.

 

若以知爲知,,,, 만약 알고 있는 것만을 아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有所不知. ,,,,,, 우리들에게는 알지 못하는 것이 남는다.

 

若以無知爲知,,, 만약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無所不知. ,,,,,,, 알지 못하는 것은 전부 없어지게 된다.

 

不能自知非有知,,,반야의 지()는 스스로 아는 것을 모르기에 유지(有知)는 아니지만,

 

對物而知非無知... 사물에 대해서 알기에 무지(無知)도 아니다.

 

若以得爲得,,,,,,,,, 만약 얻은 것만을 얻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有所不得.,,,,,,,,,, 얻지 못한 것이 남는다.

 

若以無得爲得,,,,,, 만약 얻지 못한 것을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無所不得.,,,,,,,,,,, 얻지 못한 것은 전부 없어지게 된다.

 

若以是爲是,,,,,,,,, 만약 올바른 것만을 올바르다고 생각한다면

 

有所不是.,,,,,,,,,,,올바르지 못한 것이 남는다.

 

若而無是爲是,,,,,,만약 올바른 것이 없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면

 

無所不是.,,,,,,,,,,,, 올바르지 못한 것은 전부 없어지게 된다.

 

一智惠門入百千智惠門.,, 이렇게 하여 똑같은 논리가 백천 가지로 전개된다.

 

見柱作柱解, ,,,,,,,,,,기둥을 보고 기둥이라고 이해를 한다.

 

是見柱相作柱解.,,,,, 이것은 기둥의 모양을 보고 기둥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覩心是柱法無柱相..,,그렇게 이해하는 마음이 기둥이라고 이해한다면 기둥이라는 모양은 없는 것이 된다.

 

是故見柱卽得柱法.,, 그러므로 기둥을 보고 곧 기둥이라는 법()을 보게 되는 것이다.

 

見一切刑色亦如是.,, 온갖 모양을 갖춘 것을 보는 것도 이와 똑같다.

 

 

[해설]

이 일단은 승조의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을 이어받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초기의 선종은 삼론종(三論宗)과 관계가 깊다. 혜가도 삼론종의 경론가들과 친교가 깊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처음에 법신(法身)에 대한 기록은 승조의 열반무명론에 나오는 법신은 상()이 없음으로 사물에 응해서 형상을 취하고, 반야는 지()가 없음으로 연()에 따라서 모든 것을 비추어낸다고 하는 구절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 구는 당대(唐代)의 신회(神會), 대주(大洲) 등도 인용하고 있고 담영의 중론()에도 지인(至人)은 무심(無心)의 묘혜(妙慧)로써 저 무상(無相)의 허종(虛宗)1)에 계당(契當)하니 내외(內外)가 함께 깊고 연지(緣智)가 함께 고요한데, 어찌 명수(名數)를 그 사이에 둘 수 있겠는가라고 적어두고 있고, 이 내용은 길장의 이제의(二諦義)에도 이어받아져서 삼론종의 의지처가 된 것이다. 달마는 삼론종의 논자들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적어도 삼론종과 똑같은 세계에서 독자적인 사색을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허종(虛宗)이란 반야의 구역(舊譯)이다. 법신에 대해서 설하는 내용은 반야와 명합(冥合)하는 실천을 말하고 있다. 도선은 달마와 승조의 선()을 비교해서, 승조가 사념처(四念處)에 의하는 데 대해서 달마는 허종을 지()로 했다고 평한 것도 이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기둥()에 관한 설은 인도의 논리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내용이다.

금강반야경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가 있다.

 

 

만약 색()으로써 나를 보려 하고 음성으로써 나를 찾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벌써 사도(邪道)에 들어선 것이다. 여래(如來)를 받들 수 없을 것이다.”

 

 

불법(佛法)이 어떤 것인지를 아주 명료하게 밝히는 구이다. 물질적인 색()과 성()을 초월한 영원한 진리인 불()을 육신인 자기자신의 공무화(空無化)하는 실천과 분리시켜서 생각한다면 그저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환상의 위험성에 관해서는 제48단에서 다시 다루게 된다.

 

 

이 단에서 주목되는 점은 반야를 중국의 정신세계에 정착시킨 체()()의 논리이다. 무견(無見)과 무지(無知)에 대한 원문의 설명은 무견으로써 견()이라 한다면 보지 않는 바가 없고, 무지로써 지()라 한다면 알지 못하는 바가 없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역전의 발상이다.

 

 

이 역전의 발상은 노자(老子)에서 찾아지는 중국의 전통적인 사유세계의 대표적인 것의 하나이다. “무위(無爲)로 하여 하지 않는 것이 없다1구가 원형이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일체를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든 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하게 되면 하지 못한 것이 남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하지 못한 것이 없는 것이 근본적인 체()이고, 일체를 하는 것이 즉 자연의 용()인 것이다.

 

 

노장(老莊)의 자연주의 철학은 인위(人爲)를 배척하고 인간의 작위를 초월한 도리에 따라갔다. ‘무위(無爲)로 하여 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하는 원리는 온갖 인위적인 현상을 비판하고 적용하었던 것이다. 그것은 유교의 윤리와 도덕을 비판하고 인간성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윤리라는 것은 인위적인 인간의 질서인 것이다.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덕목을 유교는 인간의 자연성을 억지하는 데서 찾았고 구축하려고 하였다.

 

 

유교도 자연을 중요시 하기는 했지만 유교의 자연은 인간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자연 그 자체에 근거를 두었던 것은 아니다. 즉 작위를 자연으로 바꿔서 인간의 덕목에 대한 논리를 정립시키려 하였다. 유교의 절제에 관한 사상이 그렇다. “자기의 원하는 바에 따르면서 규칙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말이 유교의 대표적인 덕목일 것이다. 그러나 노장은 인간의 작위를 배척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체의 욕망을 해방시킨다. 노장사상에 있어서는 욕망 그 자체도 하나의 자연인 것이다.

 

 

수당(隋唐)의 불교가 노장사상을 도입시켜서 중국 불교의 기반으로 잡아가면서 가장 고심한 점은 바로 이러한 노장의 일체의 욕망 해방에 있었다. 그렇게 하여서 불교의 입문인 계율에 관한 문제를 극복하고 오히려 무위(無爲)로 하여 하지 않는 것이 없다를 중국 불교사상의 중심에 두었던 것이다.

무위로 하여 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은 그 용어 자체는 다르기는 하지만 불교의 근본사상인 체용(體用)의 논리와 합치되는 점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즉 무위는 체()이고, 무불위(無不爲)는 용()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위를 반야의 체()로 잡아둠으로써 비로소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라는 지평상의 모순을 초월하여서 전존재(全存在)의 진리를 새로운 인간관’, 인간의 자연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세워둘 수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 불교의 성공은 바로 여기에 그 사상적인 근원이 있다.

 

 

바로 이러한 중국 불교를 가능하게 한 사람이 승조였다. 승조를 중국 불교의 창시자라고 평하는 것은 특히 선사상에 있어서이고, 한편 승조의 사상은 구마라습이 번역한 유마경과 하나로 관철되고 있다. “만약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것으로 생각한다면이라는 구는 벌써 유마경보살품(菩薩品)에 나오는 불관시보리(不觀是菩提)’불행시보리(不行是菩提)’ 등에 보이고 있다. 이 뒤에도 승조와 유마경의 관계 및 달마선의 관계가 깊이 다루어지게 된다.

 

 

 

 

 

 

 

 

 

 

 

 

 

6.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 허무주의를 비판한다

 

 

有人言, ,,,, 어떤 사람은 말한다.

 

一切法不有.,, “사물은 모두 유()가 아니다라고.

 

難曰, ,,,,,,,, 비판을 해서 말한다.

 

汝見有不.,, 너에게는 유()가 보이는가.

 

不有於有,,,역시 유()를 유()라고는 하지 않지만

 

有於不有,,, ()가 아닌 것을 유()라고 하고 있다.

 

亦是汝有.,, 그것도 너의 유()이다.

 

有人言,,,,,, 어떤 사람이 말한다.

 

一切法不生.,, “사물은 모두 생()이 아니다라고.

 

難曰, ,,,,,,,,,, 비판을 해서 말한다.

 

汝見生不.,,너에게는 생()이 보이는가.

 

不生於生,,,역시 생()을 생()이라고는 하지 않지만

 

生於不生,,,()하지 않는 것을 생()이라고 하고 있다.

 

亦是汝生.,, 그것도 너의 생()이다.

 

復言,,,,,,,,,, 또 말한다.

 

我見一切無心.,, “나는 무엇을 보던 무심(無心)이다라고.

 

難曰, ,,,,,,,,,,,,, 비판을 해서 말한다.

 

汝見心不.,, 너에게는 심()이 보이는가.

 

無心於心,,, 역시 심()을 심()이라고는 하지 않지만

 

心於無心,,,무심(無心)을 심()이라고 하고 있다.

 

亦是汝心.,, 그것도 너의 심()이다.

 

 

[해설]

()과 유(), ()과 심()이라 하는 두 가지의 과제에 대한 대화이다.

()은 세 가지의 의미로 해석을 하고 있다. 하나는 존재(存在)이고, 두 번째는 이법(理法)이고, 세 번째는 교법(敎法)이다. 이렇게 세 가지의 의미로 나누어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 세 가지의 의미를 하나로 하는 곳에 법()이라는 하나의 개념이 그 특색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일체법이란 존재를 가리키는 말인데 불교가 문제로 하고 있는 이 일체법은 막연히 존재를 가리키는 뜻이 아니라 일정한 이법(理法)에 따라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것을 자각하고 확인을 하여서 문장으로 나타낸 것이 이른바 경전이라는 해석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의 개념은 소승에서 대승으로 발전함에 따라서 크게 변화되었다. 대승은 일체법을 실유(實有)로 해석하는 소승의 교학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시작되었다. 즉 그 입장이란 앞에서 취급한 반야의 공()을 기반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반야의 공()은 동시에 스스로 불공(不空)이라는 내부비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일단의 글은 바로 그러한 대승의 내부비판인 것이다.

 

 

()에 세 가지의 의미가 있듯이 심()에도 세 가지의 요소가 있다. 첫째는 존재로서의 심(), 둘째는 심()의 이(), 셋째는 분별이다. ()은 언제나 이 세 가지의 요소가 유기적으로 작용하여서 전체적인 양상을 띄고 있는 것이다.

혜가가 달마에게 나의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켜 달라고 말했을 때 달마는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라고 말한다. 달마가 혜가에게 안정시켜 준 마음을 이 글에서는 세 가지의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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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람을 좇는다

 

 

三藏法師言, 不解時人逐法, 解時法逐人. 解則識攝色, 迷則色攝識.不因色生識,

 

是名不見色. 不求於求, 求於無求, 亦是汝求. 不取於取, 取於無取, 亦是汝取. 心有所須,

 

名爲欲界. 心不自心, 由色生心, 名爲色界. 色不自色, 由心故色, 心色無色, 名無色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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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藏法師言, ,,,, 삼장법사(三藏法師)2)는 말씀하였다.

 

不解時人逐法,,,“깨닫지 못했을 때 사람은 법()을 좇는다라고.

 

解時法逐人.,,,,, 깨닫고 보니 법()이 사람을 좇아온다.

 

解則識攝色,,,,, 깨닫고 보니 의식이 대상을 취하고 있다.

 

迷則色攝識.,,,, 미망에 있을 때는 대상이 의식을 취하고 있다.

不因色生識,,,, ()에 의해서 식()을 생하지 않으면,

 

是名不見色.,,,‘()을 보지 않는 사람이라 불린다.

 

不求於求,,, 구할 것을 구하지 않는 것은

 

求於無求,,, 구하지 않는 것을 구하는 것임으로,

 

亦是汝求.,, 이것도 너의 구함이다.

 

不取於取,,,취할 것을 취하지 않는 것은

 

取於無取,,, 취하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임으로,

 

亦是汝取.,, 이것도 너의 취함이다.

 

心有所須,,, ()에 무엇인가 바라는 바가 있는 것을

 

名爲欲界.,, ‘욕계(欲界)’라고 부른다.

 

心不自心,,,()은 그 스스로 심()인 것은 아니다.

 

由色生心,,, ()에 의해서 심()이 생긴다.

 

名爲色界.,, 이것을 색계(色界)’라고 부른다.

 

色不自色,,, ()은 그 스스로 색()인 것은 아니다.

 

由心故色,,, ()에 의해서 비로소 색()이 된다.

 

心色無色,,, ()이나 색()이나 함께 색()이 없는 곳,

 

名無色界.,,이 곳을 무색계(無色界)’라고 부른다.

 

 

[해설]

여기서 말하는 삼장법사는 달마를 가리킨다. 이 글은 이후에도 종경록(宗鏡錄)등 여러 곳에서 달마의 어록으로 인용되고 있다.

미인(迷人)은 사물을 좇아다니지만 깨닫고 보면 사물이 사람을 좇고 있다. 이 발상은 달마의 어록에 보이기 전에 혜원(惠遠)형진신불멸론(形盡神不滅論)깊이 깨닫고 있는 사람은 근본으로 돌아가고, ()에 방황하는 사람은 사물을 추구한다는 글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발상은 지극히 중국적인 사유에서 나온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장()이 번역한 대반야경(大般若經)』 「법성품(法性品)개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그 개는 흙덩이를 좇아가지만, 사자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사자는 흙덩이는 보지도 않고, 흙덩이를 던진 사람에게 달려든다는 유명한 비유가 있다. 이 비유는 벌써 위진(魏晋)시대에도 있었고, 육조(六朝)의 위경(僞經)구경대비경(究竟大悲經)에도 거의 같은 내용의 구가 있다.

 

()에 무엇인가 바라는 바가 있는 것을 욕계(欲界)’라고 부른다이하는 이른바 삼계(三界)’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 설명은 일종의 관심석(觀心釋)이다. 즉 자기자신의 마음 속에 내성적으로 사물을 끌어들여서 불교의 근본사상과 그 용어의 의미를 풀어가는 것이다. 달마의 저술로 알려지고 있는 관심론(觀心論)오성론(悟性論), 그리고 임제의 시중(示衆)에도 보인다.

 

 

무소구행(無所求行)을 계승하는 마조의 설법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목된다.

 

거의, ()을 보는 것은 모두 심()을 보는 것이다. ()은 그 스스로 심()인 것이 아니고 색()에 의하기 때문에 심()인 것이다. ()은 그 스스로 색()인 것이 아니고 심()에 의하기 때문에 색()인 것이다. 그렇기에 경전에서 말한다. ()을 보는 것은 심()을 보는 것이다.”

 

 

똑같은 구가 종경록에도 보이는데, 이 구는 남악회양의 글이라고 적고 있지만 마조의 이 설법과 그가 법구경(法句經)에서 자주 인용하여 설했던 유명한 삼라만상은 일법(一法)의 소인(所印)이다라는 구는 마조 이후의 새로운 선()의 출발지가 되었다. 심지법문(心地法門)이란 바로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심지(心地)는 심()의 근()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와 같은 심()과 색()에 대한 달마의 해석은 이른바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의 교의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일상생활의 실천에 그 기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깨닫고 보니, 즉 구체적인 일상의 사물이 나를 추구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7.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불심(佛心)이란 무엇인가

 

, 何名佛心. : 무엇을 불심(佛心)이라 부르는가?

 

, 心無異相, : ()이 특별한 형상을 취하지 않는 상태를

 

名作眞如.,, ‘진여(眞如)’라고 부른다.

 

心不可改,,, ()이 변할 수가 없는 상태를

 

名爲法性.,, ‘법성(法性)’이라 부른다.

 

心無所屬,,, ()이 그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는 상태를

 

名爲解脫.,,‘해탈(解脫)’이라 부른다.

 

心性無碍,,, ()이 그 스스로 무애(無碍)하고 자유로운 상태를

 

名爲菩提.,, ‘보리(菩提)’라고 부른다.

 

心性寂滅,,, ()이 고요히 안정되어 있는 상태를

 

名爲涅槃.,,‘열반이라 부른다.

 

 

 

[해설]

여기서 말하는 불심(佛心)이란 불()의 심()이라는 뜻이 아니라 불()로서의 심()을 가리킨다. 즉 심()이 곧 불()이라는 의미이다.

이 일단은 이른바 시심시불(是心是佛)의 설명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진여(眞如)법성(法性)해탈(解脫)보리(菩提)열반(涅槃)이라는 다섯 가지의 심()에 대한 기본용어를 들어서 심()의 존재로써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 가지를 들었지만 모두 불()의 깨달음()의 심()이다. 이 해석은 앞에서 나온 관심석(觀心釋)의 응용이라 할 수 있다.

 

 

조당집(祖堂集)2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어떤 것을 불심(佛心)이라 부릅니까?”

너는 지금 어떤 마음인가?”

저는 지금 마음이 없습니다.”

너에게 지금 마음이 없는데 불()에게 어떤 마음이 있겠는가?”

 

이 대화는 제4조인 도신이 제3조 승찬을 처음으로 찾아갔을 때의 문답으로 알려진다. 여기에 언급되는 불심(佛心)은 고불심(古佛心), 즉 석가의 깨달음을 가리켜서 사용한 것이다.

()은 중생의 심()에 응해서 스스로 심()을 취한다. 도신이 저는 지금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것이 불심(佛心)이라는 사실을 벌써 밝히고 있는 것이다. 유명한 안심문답(安心問答)에서도 같은 취지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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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三寶)에 대해서

 

 

問曰, 何名如來. , 解如應物, 故名如來. , 何名佛. , 如法覺, 覺無所覺, 故名爲佛. , 何名爲法. , 心如法不生, 心如法不滅, 故名爲法. , 何名爲僧. , 如法和合, 故名爲僧.

 

--------------------

 

問曰, :

 

何名如來. ,,,무엇을 여래라 하는가?

 

, :

 

解如應物,,,()에 눈이 뜨여서 사물의 세계에 나가는 것을

 

故名如來.,, ‘여래라 한다.

 

, ,, :

 

何名佛.,, 무엇을 ()’이라 하는가?

 

,,, :

 

如法覺,,, ()가 이법(理法)으로 눈이 뜨여서

 

覺無所覺,,, 눈이 뜨인 것이 없음에 눈이 뜨이니

 

故名爲佛.,,이것을 ()’이라 한다.

 

, ,, :

 

何名爲法.,, 무엇을 이법(理法)’이라 하는가?

 

, ,, :

 

心如法不生,,, ()이 여()인 이법으로써 생기(生起)하지 않고,

 

心如法不滅,,,()이 여()인 이법으로써 멸()하지도 않는 것을

 

故名爲法.,,‘이법이라 한다.

 

, ,,, :

 

何名爲僧.,,무엇을 ()’이라 하는가?

 

,,, :

 

如法和合,,,, ()이 여()인 이법으로써 화합하고 있는 것을

 

故名爲僧.,,‘()’이라 한다.

 

 

[해설]

()라는 것은 본래의 자기자신이다. ()와 법성(法性)과 실제(實際), 이 셋은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가리키는 이명(異名)이다.3) 이러한 제법의 실상이 인격화된 것을 여래(如來)’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금강경에도 여래란 제법이 여()라는 뜻이다라고 적혀 있다.

사물의 세계에 나가는이란 말의 원문은 응물(應物)’이다. 그러므로 여래라는 이름은 특히 응물의 측면을 강조한다고 해석이 된다. ()의 십호(十號)응공(應供)’이라는 이름이 있다. 참고로 적어둔다.

 

 

()깨어난4) 사람이라는 뜻이다. 깨어난다는 것은 잠 속에서 깨어나는 것이고, 깨닫는다는 것은 미망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래 대각(大覺)()’이라 부른다. 이 대각은 본래의 자기자신을 가리킨다. 이렇게 깨어남이라는 그 자체마저 없는 것에 눈을 뜬 것이 대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과 법()과 승()의 삼보(三寶)()이 여()’라는 이법(理法) 위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이 심()이 본래의 자기자신인 것이다. 관심석(觀心釋)이라는 의미는 여기에 있다.

북종계(北宗系)대승무생방편문(大乘無生方便問)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이것은 기신론에 입각한 것으로 실천적인 불교개론으로 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라는 것은 자각이라는 뜻이다. 자각이란 심()이 본질적으로 염()을 떠나 있는 것을 말하니, ()이라는 상()을 떠난 심()은 허공처럼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모든 세계가 하나의 상()을 이루는 곳, 이것이 여래의 본체(本體)로서 법신(法身)인 것이며, 그러한 법신을 본각(本覺)’이라 부르는 것이다.

또 그러한 심()이 처음으로 움직일 때도 심()에는 처음이라 할 것이 없고, 그 어떤 미세한 염()에서도 떠나 있기에 환히 심()의 본질이 나타나 심()이 본래 영원한 것임을 알게 되니 이것을 구극(究極)()’이라 부른다. ()이란 깨달음이 아니라 눈뜸이다. 깨달음은 오()이다.

 

1) 반야(般若)를 가리킨다.

2) 달마를 가리킨다.

3) 대지도론(大智度論)32 참조.

4) (). 달마는 각()이 불()이라고 말했다

 

 

 

 

8.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달마어록 이입사행론』④무엇이 올바른 자각인가 | 祖師語錄

 

강정중(시인)

 

*.공허한 선()

 

 

, ,,,,:

 

何名爲空定.,,무엇을 공정(空定)이라 부르는가?

 

, ,,, :

 

看法住空,,, ()을 바라보면서 공()에 머무는 것을

 

名爲空定.,,공정이라 부른다.

 

,,,, :

 

何名爲住法.,, 무엇을 법()에 머무는 것이라 하는가?

 

, ,, :

 

不住住,,,머무는 곳에도 머물지 않고

 

不住於不住, ,,, 머물지 않는 곳에도 머물지 않는다.

 

如法住,,,, 마치 이법(理法)대로 머무는 것을

 

名爲住法.,, ()에 머문다고 말한다.

 

 

[해설]

 

공정(空定)이란, 좌선을 하고 명상을 하여 모든 법(), 즉 모든 존재가 공함을 관찰하는 것을 뜻한다. 고차적인 높은 선정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먼저 언급된 공견(空見)과 같이 공허함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대반열반경21선남자여, 너희들은 지금 심심(甚深)한 공정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대중은 둔()하기 때문이다라는 구가 있는 것도 같은 취지이고, 길장(吉藏)이제의(二諦義)를 비롯해, 신회(神會)단어(壇語)에도 똑같은 취지에서 이 구가 인용되고 있다.

이같이 공()에 머무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북종과 남종이 대립하던 시국에 이르러서 더욱 치열해져 갔다. 따라서 이 글은 역사적인 전개의 계기를 먼저 취한 것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견(空見)은 아견(我見)보다도 더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달마의 어록은 이 공견초극(空見超克)의 문제로 시종되고 있다.

 

 

신회는 단어에서 유마경』 「문질품(問疾品)의 구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새가 하늘을 날아가는 것과 같다. 만일 새가 공중에 머물게 되면 반드시 추락하는 위험성이 있다. 수행자가 무주(無住)의 심()을 배워, ()을 무주의 심()이라는 법에 머물게 하는 것은 물론 주착(住著)인 것이며 여기에서 해탈할 수는 없다.

경전1)에 말한다. 전혀 어떠한 병()의 영향이 없다 하더라도 아직 공()이라는 병이 남아 있다. ()이라는 병 또한 공()이며, ()하게 하는 것도 또한 공()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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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녀의 모습

 

 

, 云何卽男非男, 卽女非女. , 依法推求, 男女相不可得. 何以得知, 卽色非男女相故. 若色是男相, 一切草木應是男, 其女人亦如是. 惑人不解, 妄想見男女, 卽是幻化男幻化女, 畢竟無實. 諸法無行經云, 知諸法如幻, 速成人中上.

-----------------

 

, ,,,:

 

云何卽男非男, ,,,어떤 점이 남자이고 혹은 남자가 아닌지,

 

卽女非女.,,, 그리고 여자이고 혹은 여자가 아닌가?

 

, ,,, :

 

依法推求, ,,,()을 추구해 가면

 

男女相不可得.,, 남녀의 특수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

 

何以得知, ,,,,,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卽色非男女相故.,, () 그 자체가 남녀의 특수성에 관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若色是男相,,,, 만약 색()이 남자의 특수성이라 한다면

 

一切草木應是男,,, 일체의 초목은 남자여야만 한다.

 

其女人亦如是.,, 여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惑人不解,,,,,,,, 어떤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妄想見男女, ,,,,, 망상으로 남녀를 보는 것은

 

卽是幻化男幻化女,,,환화(幻化)의 남자, 환화의 여자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畢竟無實.,,,,,,,,,,,,, 내실(內實)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諸法無行經云,,,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

 

知諸法如幻, ,,,“제법(諸法)은 환()과 같은 것임을 알면

 

速成人中上.,,,즉시 윗사람이 된다고 적혀 있다.

 

 

[해설]

 

여기서 말하는 색()은 색정, 즉 색욕이다. 공사상(空思想)은 색욕에 대해서도 대담하게 그 근본을 밝혀낸다. 유마경관중생품(觀衆生品)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천녀(天女)가 유마(維摩)의 방에 꽃을 날린다. 사리불(舍利弗)은 자기의 몸에 붙은 꽃잎을 털어버리려고 한다. 천녀는 무엇 때문인지 묻는다. 사리불은 여법(如法)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대답을 하면서, 왜 여자의 몸으로 바꾸지 않는지 천녀에게 묻는다. 천녀는 나는 12년 전부터 지금까지 여인의 상()을 구하였지만, 불가득(不可得)”이라고 대답한다. 그런 후 천녀는 사리불을 여자의 모습으로 바꿔놓고 왜 여자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지 묻는다.”

 

마치, 환사(幻師)가 환녀(幻女)를 화작(化作)한 것과 같다. 누군가 무엇 때문에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는지 묻는다. 이 사람의 질문은 옳은 것일까. 여자가 아닌 사리불이 여자의 몸을 나타내고 있는 것과 같이, 일체의 여자의 몸도 이와 똑같다. 여자의 몸을 나타내고 있지만 여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불()은 일체의 제법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남성 본위인 불교교단은 옛부터 남녀의 문제에 머리를 앓고 있었다. ()()()를 떠나야 한다고 설한 것은 증상만(增上)의 사람을 두고 말하는 내용이고, 여기에 해방이 있다고 설하지만 사리불과 천녀의 대화를 듣고 보면 증상만 없는 사람에 있어서는 음()()()의 성() 그 자체에서 그대로 해방됨을 설하고 있다. ()()(), 색욕분노무지이다. 이것은 매우 주목되는 대화이다.

제법무행경의 설은 이전에 제6단의 해설에서 인용한 바가 있지만 그 부분을 포함해서 문제가 되는 구절을 다시 인용하겠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계(持戒)와 파계(破戒)를 분별한다면 그는 계()를 유지하지는 못한다. 만일 지계를 인정한다면, 그 때 그는 계()를 잃게 된다. 지계와 파계는 하나의 상대적인 것이다.

가령 꿈 속에서 오욕(五欲)을 느끼고, 남녀의 즐거움에 스스로 만족하고, 분별을 하여서 여색(女色)을 인정한다 해도 그 곳에 실제로는 여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를 지키는 것과 깨뜨리는 것은 꿈 속의 일과 같은 것인데 범인(凡人)은 별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다. 실제로는 지계도 파계도 없어야 비로소 그가 법()을 지도하는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9.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올바른 자각(自覺)

 

, 有余涅槃, 得羅漢果者, 此是覺不. , 此是夢. , 行六波羅蜜, 十地万行滿足, 覺一切法不生不滅, 非覺非知. 無心無解爲覺不. , 亦是夢. , 十力四無所畏, 十八不共法, 菩提樹下道成正覺, 能度衆生, 乃至入於涅槃, 豈非是覺. , 亦是夢. , 三世諸佛乎等敎化衆生, 得道者如恒沙, 此可非是覺. , 亦是夢. 但有心分別計, 自心現量者, 皆是夢. 覺時無覺. 此心意識妄想, 夢裏智惠, 無能覺所覺. 若如法覺, 眞實覺時, 都不自覺, 畢竟無有覺. 三世諸佛正覺者, 竝是衆生憶想分別. 以是故名爲夢. 若識心寂滅, 無一動念處, 是名正覺. 齊有心識不滅已來. 皆是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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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有余涅槃,,, 유여열반(有餘涅槃)이 보증되고

 

得羅漢果者,,, 나한(羅漢)의 과()를 얻은 사람,

 

此是覺不.,,,이것은 자각인가, 아닌가?

 

,,, :

 

此是夢.,, 그것은 보증의 꿈을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 ,,, :

 

行六波羅蜜, ,,,육바라밀(六波羅密)을 행하고,

 

十地万行滿足,,, 십지만행(十地萬行)2)을 완성하고

 

覺一切法不生不滅,,, 일체법이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것에 눈이 뜨이고 눈이 뜨였다고 하는

 

非覺非知.,,, 각지(覺知)에도 머물지 않고 분별도 하지 않고

 

無心無解爲覺不.,, 지해(知解)도 없는 이것은 자각인가, 아닌가?

 

, ,, , :

 

亦是夢.,, 그것도 꿈이다.

 

, ,,,,,, :

 

十力四無所畏,,, 십력(十力)과 사무소외(四無所畏)3),

 

十八不共法,,,,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4)을 만족하고

 

菩提樹下道成正覺,,, 보리수 밑에 앉아 수행을 마치고 정각(正覺)5)을 얻어

 

能度衆生, ,,, 중생을 제도함을 끝내고

 

乃至入於涅槃,,, 최후에 열반에 들어간 사람,

 

豈非是覺.,,,이것은 자각을 한 사람이겠지요?

 

, ,,,:

 

亦是夢.,,, 그것도 꿈이다.

 

, ,,,,:

 

三世諸佛乎等敎化衆生,,,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의 제불(諸佛)이 교화를 하시어서

 

得道者如恒沙,,, ()를 얻은 사람들은 갠지스강의 모래만큼 무량(無量)하다는,

 

此可非是覺.,, 이것이 자각이 아닌가?

 

, ,,,, :

 

亦是夢.,,,그것도 꿈이다.

 

但有心分別計,,, 마음으로 분별하고 다른 것과 비교하고

 

自心現量者,,, 스스로 제멋대로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는

 

皆是夢. ,,,,,, 이 모든 것은 꿈이다.

 

覺時無覺.,,,, 눈을 떴을 때 꿈은 소멸된다. 꿈꾸고 있을 때 자각은 없다.

 

此心意識妄想, ,,,마음에 의식된 것은 망상이고

 

夢裏智惠, ,,,,,,,, 꿈 속의 지혜나

 

無能覺所覺.,,,,,, 재각(才覺)에는 눈을 뜬 사람이나 눈에 뜨인 것이나 관계가 없는 것이다.

 

若如法覺,,,,,,,,, 만약 여법(如法)에 눈이 뜨여서

 

眞實覺時,,,,,,,, 진실로 눈이 뜨였을 때는

 

都不自覺, ,,,,,스스로는 눈을 뜨지는 못함으로

 

畢竟無有覺.,,,, 어디까지나 눈뜸이 있을 수는 없다.

 

三世諸佛正覺者,,,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정각(正覺)

 

竝是衆生憶想分別.,, 모두 사람들이 제멋대로 분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以是故名爲夢. ,,,그러므로 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若識心寂滅,,,, 만약 의식하는 마음이 정화되면

 

無一動念處,,,, 일념(一念)도 움직이지 않으니

 

是名正覺.,,,, 이것을 정각이라 부른다.

 

齊有心識不滅已來.,,분별의 심()이 소멸되지 않고 있는 한

 

皆是夢. ,,, 모든 것은 꿈이다.

 

 

[해설]

 

이것은 꿈에서 깨어남도 역시 꿈이라는 것을 밝히려는 일단(一段)이다.

중국 불교는 특히 자각의 문제를 처음부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자각이란 자각을 했다는 것마저 말할 수도 없는 대각(大覺)을 궁극적으로 의미한다.

불타는 대각이다. 그러므로 각()과 불각(佛覺)의 구별이 없다. 불타만이 갖추고 있는 십력(十力)과 사무소외(四無所畏),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등 중생교화를 위한 방편도 모두 꿈이라고 하는 점이 주목되고 여기에 달마선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는 점도 알게 된다.

마음으로 분별을 하고에서 이것을 정각(正覺)이라 부른다까지의 구는 안심법문에도 인용되고 있다.

스스로 제멋대로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는 이 모든 것은 꿈이다의 원문은 자심현량(自心現量)’이다. 이 자심현량이라는 구의(句意)능가경에 의한 것이지만, 달마의 어록을 일관하는 근본사상의 하나이다. 자심현량이라는 구의를 으로 표현하는 점에 감명을 크게 받게 된다.

 

 

* ()를 수행하는 방법

 

 

, 修道斷惑, 用何心智. , 用方便心智. , 云何方便心智. , 觀惑知惑本無起處, 以此方便, 得斷疑惑, 故言心智. , 如法心斷何惑. , 凡夫外道, 聲聞緣覺菩薩等解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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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修道斷惑,, ,수행을 하여 혹()을 잘라버리려면

 

用何心智.,,, 어떤 지혜가 필요한가?

 

,,,,:

 

用方便心智. ,,,수행의 수단이라는 지혜가 필요하다.

 

,,,:

 

云何方便心智.,,어떤 것이 수행의 수단이라는 지혜인가?

 

,,, :

 

觀惑知惑本無起處,,, ()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 혹()이 애초부터 일어날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以此方便,,,, 이러한 수단에 의하여서

 

得斷疑惑,,, 의혹을 끊을 수 있다.

 

故言心智.,, 그래서 지혜라고 말한다.

 

,,, :

 

如法心斷何惑.,, 본래 여법(如法)인 심()이 어떤 혹()을 자르는가?

 

, ,,,:

 

凡夫外道, ,,,범부(凡夫)외도(外道)

 

聲聞緣覺菩薩等解惑.,,,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 등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혹()이다.

 

 

 

[해설]

 

불도(佛道) 수행의 최대수단으로 범부에서 보살에 이르지만, 달마는 그러한 단계적인 깨달음()이라 하는 혹()을 잘라버리라고 가르친다. ()이란 본래의 자기자신을 잃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의 자기자신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수행의 수단이라는 지혜의 원문은 방편심지(方便心智)’이다. 승조의 열반무명론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경전에서 법신(法身)을 얻고 나면, 무위(無爲)의 경()에 들어간다. 그 심()은 지()에 의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신()은 형()에 의하여 가늠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들의 신체는 정신과 감각이라는 두 요소를 초월하고 심지(心智)는 적멸(寂滅) 그 자체가 된다.”

 

달마는 심지(心智)를 방편으로 한다. 심지는 본래 불생불멸인 것이다. 달마선의 특색은 그러한 교학을 전제로 하고 있다.

기신론에서 마명보살은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이라는 것은 다만 심()의 표면적인 작용이 멸하는 것이지, ()의 본체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바람은 물에 의해서 동()하는 모습을 취하지만 만약 물이 멸한다면 바람의 동()은 단절하고 의지할 데가 없어진다. 그런데 물은 멸하지 않기에 바람의 동()이 상속되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바람이 멸하는 것이고 따라서 바람의 동()이 멸하는 것이지 물이 멸하는 것은 아니다.

무명(無明)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의 본체에 의하여 동()하는 것이고 만약 심()의 본체가 멸한다면 살아 있는 것들은 단절하고 의지할 곳을 잃게 된다. 그러나 본체는 멸하지 않기에, ()은 상속할 수가 있다. 다만 무지(無知)의 심()이 멸하기 때문에 따라서 심()의 동()이 멸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심지가 멸하는 것이 아니다.”

 

 

 

 

 

 

 

 

 

 

 

 

 

 

 

 

 

 

 

 

 

 

10.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두 가지의 진리

 

 

, 云何二諦. , 譬如陽炎, 惑者見陽炎作水解, 實非不, 此是陽炎. 二諦義亦復如是.

 

凡夫見第一義諦爲世諦, 聖人見世諦爲第一義諦. 故經云, 諸佛說法, 常依二諦. 第一義諦卽世諦,

 

世諦卽第一義諦, 第一義諦卽是空. 若見有相, 卽須倂當却. 有我有心, 有生有滅, 亦卽倂當却.

 

, 云何倂當却. , 若依法看, 卽失諦視, 不見一箇. 故老經云, 建德若偸. 引入虛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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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云何二諦.,,어떤 것이 이제(二諦)인가.

 

,,,, :

 

譬如陽炎,,, 예를 들면 아지랑이와 같은 것이다.

 

惑者見陽炎作水解,,,미혹의 사람은 아지랑이를 보고 강물이라고 생각하지만

 

實非不,,,, 실은 강물이 아니라

 

此是陽炎.,,,아지랑이이다.

 

二諦義亦復如是.,, 이제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凡夫見第一義諦爲世諦,,, 범부는 제일의제(第一義諦)6)를 보고 세제(世諦)7)라고 생각한다.

 

聖人見世諦爲第一義諦.,, 성인은 세제를 보고 제일의제라고 생각한다.

 

故經云,,,,,,,,,경전에서 말한다.

 

諸佛說法,,,,, “제불(諸佛)의 설법은

 

常依二諦.,,,, 항상 이제에 의한다.

 

第一義諦卽世諦,,, 제일의제는 그대로 세제이고

 

世諦卽第一義諦,,, 세제가 그대로 제일의제이며

 

第一義諦卽是空.,, 제일의제는 그대로 공()이다.

 

若見有相,,,,,,,,,,,, 만약 개별적인 특징이 보이거든

 

卽須倂當却.,,,,,,, 당장 처치를 해 버릴 일이다.

 

有我有心,, ,,,,,,,, ()가 있고 심()이 있고

 

有生有滅, ,,,,,,,, ()이 있고 멸()이 있는 것도

 

亦卽倂當却. ,,,, 당장 처치해 버린다.

 

, ,,,,,,,,, :

 

云何倂當却.,,, 어떻게 처치해 버리는가.

 

, ,,,,,,,,,:

 

若依法看,,,이법(理法)의 입장에서 관찰한다면

 

卽失諦視,,,진리라는 견해도 사라지고

 

不見一箇.,, 그 어떠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故老經云,,, 그것은 노자(老子)에서

 

建德若偸.,, “똑바르게 세워진 덕()은 임시적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引入虛空,,, 허공으로 끌어들인다.

 

 

[해설]

 

이제(二諦)는 승조를 조()로 하는 삼론종의 근본적인 입장의 하나이다. 삼론종은 이제에 입각해서 전불교를 체계화시켰다. “제불(諸佛)의 설법은 항상 이제에 의한다라는 말의 뜻을 잘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이제란 설법의 논리라고 말할 수가 있다.

달마는 공()의 입장에서 이 이제를 해석한다. “처치를 해 버릴 일이다이라는 말은 본래의 상태에 되돌리라는 뜻이다.

노자의 인용은 제41장의 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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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법()

 

, 貪欲名何物心. , 凡夫心. , 作無生是何物心. , 是聲聞心. , 解法無自性是何物心.

 

, 是緣覺心. , 不作解不作惑, 是何物心. , 菩薩心. , 不覺不知是何物心. 卽不答.

 

所以不答者, 是法不可答, 法無心故, 答卽有心. 法無言說, 答卽有言說. 法無有解, 答卽有解.

 

法無知見, 答卽有知見. 法無彼此, 答卽有彼此. 如此心言, 俱是計著. 心非色故, 不屬色. 心非非色,

 

不屬非色. 心無所屬, 卽是解脫. 若犯禁戒時忙, 但知心不可得, 亦得解脫. 亦知生天不可得.

 

雖知空, 空亦不可得. 雖知不可得. 不可得亦不可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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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貪欲名何物心.,,,탐욕이란 어떤 사람의 마음을 말하는가?

 

,,,, :

 

凡夫心.,, 범부의 심()이다.

 

,,,, :

 

作無生是何物心.,,무생(無生)이라고 보는 것은 어떤 사람의 마음인가?

 

,,,, :

 

是聲聞心.,,,성문(聲聞)의 심()이다.

 

, ,,,:

 

解法無自性是何物心.,, ()은 고유의 체()를 갖고 있지 않다고 아는, 이것은 어떤 사람의 마음인가?

 

,,,, :

 

是緣覺心.,, 연각(緣覺)의 심()이다.

 

,,, :

 

不作解不作惑, ,,,()로 여기지도 않고 혹()으로 여기지도 않는,

 

是何物心.,,,,,,,이것은 어떤 사람의 마음인가?

 

, ,,,,,,,,,,,,:

 

菩薩心.,,,,, 보살의 심()이다.

 

, ,,,,:

 

不覺不知是何物心.,,어떤 것에도 각()하지 않고 무지(無知)인 것은 어떤 마음인가?

 

卽不答.,,,,,,, 그대로 대답이 없다.

 

所以不答者,,,,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은

 

是法不可答,,,,거의 법()이라는 것은 대답할 수가 없다.

 

法無心故,,,, ()은 무심(無心)이기에

 

答卽有心.,, 대답을 한다면 유심(有心)이 되어 버린다.

 

法無言說,,, ()에는 언설이 없다.

 

答卽有言說.,, 대답을 한다면 언설이 되어 버린다.

 

法無有解,,,,, ()에는 견해가 있을 수가 없다.

 

答卽有解.,,, 대답을 한다면 견해가 되어 버린다.

 

法無知見,,,, ()에는 지견(知見)이 없다.

 

答卽有知見.,, 대답을 한다면 지견이 되어 버린다.

 

法無彼此,,,,, ()에는 피차(彼此)의 상대가 없다.

 

答卽有彼此.,, 대답을 한다면 피차가 되어 버린다.

 

如此心言,,,,,이러한 심()과 그 말은

 

俱是計著.,,, 모두 견주어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心非色故,,,, ()은 색()이 아니기에,

 

不屬色.,,,,,, ()에는 속하지 않는다.

 

心非非色,,,,()은 색()이 아닌 것도 아니기에

 

不屬非色.,, ()이 아닌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心無所屬,,,, ()이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卽是解脫.,,, 그것이 해탈이지 않을 수 없다.

 

若犯禁戒時忙,,,만약 금계(禁戒)를 깨뜨릴 때

 

但知心不可得,,, 우리들은 당황하지만 그 당황하는 마음이 불가득(不可得)임을 알면

 

亦得解脫. ,,, 벌써 해탈을 얻게 된 것이며,

 

亦知生天不可得.,,()에 태어나는 것은 불가득임을 안다.

 

雖知空,,,,,,,,,,,,,,실은 공()임을 알지만

 

空亦不可得.,,,,, ()도 불가득이며,

 

雖知不可得.,,,, 불가득임을 알지만

 

不可得亦不可得.,, 불가득도 불가득인 것이다.

 

 

 

[해설]

 

이 글은 심()의 네 가지의 단계, 즉 범부(凡夫)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을 순차적으로 탐욕(貪慾), 무생(無生), 고유의 체()가 없음, ()나 혹()을 떠남, 이렇게 네 가지의 심경에 대치시켜서 설명하고, 최후로 어떤 것에도 각()하지 않고 무지인 것은 어떤 심()인가에서 불심(佛心)을 예상시킨다.

달마는 그것에 대해서 직접적으로는 대답을 하지 않고 대답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 그 자체가 일체의 비교를 초월해 있기에 법()에 대해서 언급한다면 일종의 추량에 지나지 않음을 밝힌다. ()은 언설을 초월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원효의 해동소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1) 유마경(維摩經)을 가리킨다.

2) 보살의 존건이 되는 열 가지의 단계적인 각 방면의 수행

3) ()만이 갖추고 있는 열 가지의 초능력과 네 가지의 위력(威力)

4) ()만이 지니는 18종의 공덕

5) 무상(無上)의 깨달음()

6) 근본지(根本智)

7) 세간지(世間智).

 

 

 

11.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달마어록 이입사행론』⑤삼보(三寶)에 의하여 도를 실현한다 | 祖師語錄

 

 

 

*만약 심() 안에 귀중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心若有所貴, 必有所賤. 心若有所是, 必有所非. 心若善一箇物, 一切物卽不善. 心親一箇物,

 

一切物作怨家. 心不住色, 不住非色. 不住住, 亦不住不住. 心若有住, 卽不免繩索. 心若有所作處,

 

卽是繫縛. 心若重法, 法留得. 心若尊一箇法, 心必有所卑. 若取經論意, 會不貴解. 但使有所解處,

 

卽心有所屬. 心有所屬, 卽是繫縛. 經云, 非不中上法得涅槃. 心雖卽惑入, 而不作無惑解. 心若起時.

 

卽依法看起處. 心若分別, 卽依法看分別處. 若貪若嗔若顚倒, 卽依法看起處. 不見起處, 卽是修道.

 

若對物不分別, 亦是修道. 但使有心起, 依法倂當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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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若有所貴, ,,, ()에 만약 귀중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必有所賤.,,,, 반드시 비천한 것이 있다.

 

心若有所是,,, ()에 좋다고 여기는 것이 있다면

 

必有所非.,,,, 반드시 좋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있다.

 

心若善一箇物,,, ()에 어느 하나를 좋다고 여긴다면

 

一切物卽不善.,, 일체의 것이 좋지 않게 된다.

 

心親一箇物,,,,, ()이 어느 하나에 친근감을 느낀다면

 

一切物作怨家.,, 일체의 것이 원망의 대상이 된다.

 

心不住色,,,, ()은 색()에 머물지 않고

 

不住非色.,,, ()이 아닌 것에도 머물지 않고

 

不住住,,,,, 어떤 것에 머무르는 것에도 머물지 않고

 

亦不住不住.,, 머물지 않는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

 

心若有住,,,,, ()에 머무르는 것이 있으면

 

卽不免繩索.,, 이젠 얽매어 있을 수밖에는 없다.

 

心若有所作處,,,()이 무엇인가 대상을 갖게 되면

 

卽是繫縛.,, 그건 계박(繫縛)이다.

 

心若重法,,,()이 이법(理法)을 소중히 여기면

 

法留得. ,,,이법이 너를 인계받는다.

 

心若尊一箇法,,, ()이 무엇인가 하나,

 

心必有所卑.,,, 사물을 존중하게 되면 심()은 반드시 비천하게 여기는 것을 지니게 된다.

 

若取經論意,,,,만일 경론의 뜻을 취한다면

 

會不貴解.,,,반드시 납득을 귀중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但使有所解處,,, 만약 납득을 하게 된다면

 

卽心有所屬.,,, ()은 이미 그것에 속해버린 것이다.

 

心有所屬,,,,,,,()에 속하는 것이 있다면

 

卽是繫縛.,,,,, 그건 계박일 따름이다.

 

經云, ,,,,,,,,,, 경전은 말한다.

 

非不中上法得涅槃.,, “밑에서 위로 단계적인 법()에 의해서 열반을 얻는 것은 아니다라고.

 

心雖卽惑入,,,,, ()이 무엇엔가 미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而不作無惑解.,, 미혹이 없는 것을 해방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

 

心若起時.,,, ()이 만약 일어난다면

 

卽依法看起處.,, 이법(理法)에 의하여 그 일어남을 관찰하여라.

 

心若分別,,,,,,,,,,()이 무엇인가 분별을 한다면

 

卽依法看分別處.,, 이법에 의하여 그 분별을 관찰하여라.

 

若貪若嗔若顚倒,,, ()이든 노()이든 역립(逆立)의 심()이든

 

卽依法看起處.,,, 이법에 의하여 그 일어남을 관찰하여라.

 

不見起處,,,,,,,,,,,,,그 일어남이 보이지 않는다면

 

卽是修道.,,,,,,,,,, 이제 도()를 닦은 것이 된다.

 

若對物不分別,,, 사물에 대해서 분별을 하지 않는다면

 

亦是修道. ,,,,,,,,, 이것도 도를 닦은 것이다.

 

但使有心起, ,,, 만약 심()이 일어나는 것이 있다면

 

依法倂當却.,,,잘 취하여서 이법에 의하여 처치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해설]

 

이 글은 일상생활의 가치의식에 관해서 설하고 있다. 즉 전체로써 귀천(貴賤), 시비(是非), ()불선(不善), 원친(怨親), ()과 색()이 아닌 것, 머무름과 머무르지 않음 등의 분별분열은 수행자의 고뇌와 심경을 여실히 밝혀주고 있다.

경전의 구는 승만경에 의한다. 담림이나 혜가를 비롯해 북위(北魏)의 초기 선종은 능가경뿐 아니라 승만경에도 의지하면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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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도의 빠름과 늦음

 

 

, 修道得道, 有遲疾不. , 百千万劫. 卽心是者疾, 發心行行者遲. 利根人知卽心是道, 鈍根人處處求道,

 

不知道處. 又不知卽心自是阿菩提. , 云何疾得道. , 心是道體, 故疾得道. 行者自知惑起時, 卽依法看使盡.

 

, 云何心是道體. , 心如木石. 譬如有人以手自畵作龍虎, 自見之還自恐. 惑人亦如是. 心識筆子畵作刀山劍樹,

 

還以心識畏之. 若能無心畏, 妄想悉除. 意識筆子分別畵作色聲香味, 還自見之, 起貪嗔痴, 或見或捨,

 

還以心意識分別, 起種種業. 若能知心識從本已來空寂, 不見處所, 卽是修道, 或以自心分別畵作處狼師子,

 

毒龍惡鬼, 五道將軍, 閻羅王, 牛頭阿婆, 以自心分別屬之, 卽受諸苦惱. 但知心所分別者, 皆是色.

 

若悟心從本已來空寂, 知心非色, 心卽不屬. 色非是色, 自心化作. 但知不實, 卽得解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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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修道得道,,,()를 닦아서 득도를 하는 데는

 

有遲疾不.,,,늦음과 빠름의 차가 있는가?

 

, ,,, :

 

百千万劫.,,,백천만겁()이라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卽心是者疾,,,,() 그 자체를 도()로 하는 입장에서 보면 빠르다.

 

發心行行者遲.,, 발심을 해서 행()을 쌓아가는 입장에서 보면 늦다.

 

利根人知卽心是道,,, 근성이 뛰어난 사람은 심() 그 자체가 도인 것이라고 알고 있다.

 

鈍根人處處求道,,,, 근성이 둔한 사람은 여기저기 도를 찾기만 하지

 

不知道處. ,,,,,,,,,,어떠한 곳에 도가 있는지를 모른다.

 

又不知卽心自是阿菩提.,, 또 심() 그 자체가 처음부터 무상(無上)의 도인 것을 모른다.

 

, ,,,,,,,,,:

 

云何疾得道.,,어떻게 하여 빨리 도를 얻는가?

 

,,, :

 

心是道體,,, ()은 도의 실체이다.

 

故疾得道.,, 그러므로 빨리 도를 얻는다.

 

行者自知惑起時,,,수행자는 스스로 미혹을 하게 된 것을 알면 즉시

 

卽依法看使盡.,,, 이법(理法)에 의하여 어디까지나 관찰을 해낸다.

 

, ,,,,,,,,,,:

 

云何心是道體.,, ()의 도란 그 실체가 어떤 것인가?

 

,,,,,,,,,,:

 

心如木石.,,()은 목석과 같이 무심(無心)인 것이다.

 

譬如有人以手自畵作龍虎,,,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손으로 용이나 호랑이의 그림을 그려놓고서

 

自見之還自恐.,,, 자기가 그것을 보고 오히려 무서워하는 것과 같다.

 

惑人亦如是.,, 미망에 있는 사람도 그와 똑같은 것이다.

 

心識筆子畵作刀山劍樹,,, ()이나 의식이라는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칼산이나 검의 숲을 만들어 내어서

 

還以心識畏之.,, 그 후에 심()이나 의식에서 공포를 느끼고 있다.

 

若能無心畏,,, ()이 무서워하지만 않는다면

 

妄想悉除.,,,,,,, 망상은 모두 제거된다.

 

意識筆子分別畵作色聲香味,,, 의식이라는 붓으로 색().().().().()이라는 다섯 가지의 대상을 그려서

 

還自見之,,,, 그 후에 자기가 그것을 보고,

 

起貪嗔痴,,,,욕심을 내고 화를 내고 푸념을 하는 삼독(三毒)의 심()을 일으키고,

 

或見或捨,,, 어떤 때는 홀리고, 어떤 때는 눈을 피하고,

 

還以心意識分別,,, 후에 심()이나 의식으로 분별하여

 

起種種業.,, 갖가지의 업()을 일으킨다.

 

若能知心識從本已來空寂,,, 만약 심()이나 의식이 처음부터 공적(空寂)하며

 

不見處所,,, 대상이 보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卽是修道,,, 그것이야말로 도를 닦은 것이다.

 

或以自心分別畵作處狼師子,,, 또는 자기의 심()으로 지옥의 호랑이나 늑대나 사자나

 

毒龍惡鬼,,,독용악귀

 

五道將軍,,, 오도장군

 

閻羅王, ,,,염라대왕

 

牛頭阿婆,,, 우두아파 등의 옥졸을 그려서

 

以自心分別屬之, ,, 자기의 마음으로 분별을 하고 그런 것들에게 영향을 받게 된다면

 

卽受諸苦惱.,,, 온갖 고뇌를 느낄 수밖에 없다.

 

但知心所分別者,,,만약 심()에 분별한 것이

 

皆是色. ,,,,,,,,,,,,모두 색()인 것을 알고,

 

若悟心從本已來空寂,,,혹은 심()이 처음부터 공적함을 깨닫고

 

知心非色,,, ()은 색()이 아님을 안다면

 

心卽不屬.,, ()은 그런 것들에게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色非是色,,, ()은 그 자체가 색()인 것이 아니라

 

自心化作.,, 자심(自心)이 변화시키는 것이다.

 

但知不實,,, 만약 실()이 아님을 안다면

 

卽得解脫.,,즉시 해탈이 된다.

 

 

[해설]

 

여기서는 행()과 증()의 궁극적인 모순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즉 본래 심()이 도()에 있다고 하는 입장과 도를 찾아서 닦는다는 행()의 입장, 이 두 입장의 모순을 문제로 하는 것이 주제이다.

마조는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닦는다라는 ()’는 무엇인가? 결함을 보수하는 것이니 그럴 필요가 없다면 수()는 무용(無用)인 것이다. 바꿔 말하면 무용의 수()에 의하여 비로소 본래의 심()이 도임을 터득하게 된다.

()은 목석과 같이 무심(無心)인 것이다라는 말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가 될 것이다. 이 말은 종경록등에서 초조인 달마의 구()로 확인을 하고 있다. 이 무심이란 즉 벽관(壁觀)’을 의미한다.

 

 

 

 

 

 

12.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이법(理法)이라는 삼보(三寶)에 의하여 도를 실현한다

 

 

 

今若依法佛法僧行道時, 不得有善惡好醜, 因果是非, 持戒破戒等見. 若人作如是計, 皆是迷惑,

 

自心現量, 不知境界從自心起. 若知一切法不有, 亦如是. 自心現量, 皆心惑心, 作是作非. 若人謂佛智惠勝,

 

亦如是. 自心化作有, 化作無, 還被惑. 經云, 若依法佛修道, 不作化衆生, 不作實衆生. 是故法界平等,

 

無有得失, 若依法佛修道, 不求涅槃. 何以故, 法是涅槃故, 云何以涅槃求涅槃. 亦不求法, 心是法界故.

 

云何以法界求法界. 若欲正心時, 不畏一切法, 不求一切法. 若用法佛修道者, 心如石頭, 冥冥不覺不知,

 

不分別, 一切騰騰如似痴人. 何以故, 法無覺知故. 法能施我無畏故, 是大安穩處. 譬如有人犯死罪,

 

必合斬首, 値王放赦, 卽無死憂. 衆生亦如是, 造作十惡五逆, 必墮地獄, 法王放大寂滅赦, 卽免一切罪.

 

若人與王善友, 因行在他處, 殺他男女, 爲他所執, 便欲報怨, 是人忙g無賴. 忽見大王, 卽得解脫.

 

若人破戒犯殺, »Z犯盜, 畏墮地獄, 自見己之法王, 卽得解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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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若依法佛法僧行道時,,, 지금 만약 너희들이 이법(理法)이라는 삼보(三寶)에 의하여 수행을 하려면

 

不得有善惡好醜,,,선악(善惡)호추(好醜)

 

因果是非,,,,,,,,,,,,인과(因果)시비(是非)

 

持戒破戒等見.,,,,지계(持戒)파계(破戒) 등의 척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

 

若人作如是計,.. 만약 그러한 비교를 하는 자는

 

皆是迷惑,,,모두 자기 자신이

 

自心現量,,,제멋대로 나타낸 척도에 의해

 

不知境界從自心起.,, 곤란을 당하고 있기에 대상이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를 못한다.

 

若知一切法不有,,, 일체의 법()이 실재가 아님을 아는

 

亦如是. ,,,,,,,경우에도 똑같다.

 

自心現量, ,,, 자기 멋대로 나타낸 바의 척도는

 

皆心惑心,,, 모두 자심(自心)을 잃었기 때문에

 

作是作非.,, ()’라고도 하고 ()’라고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若人謂佛智惠勝,,,사람이 불()의 지혜가 뛰어나 있음을

 

亦如是. ,,,,,생각할 때도 똑같다.

 

自心化作有,,, 자기가 제멋대로 환상으로 ()’로 하고

 

化作無,,, 환상으로 ()’로 하여서

 

還被惑.,, 그 후에 미혹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經云, ,,,,경전에서 말한다.

 

若依法佛修道,,, “만일 법불(法佛)에 의해서 도()를 수행하면

 

不作化衆生,,, 중생을 환화(幻化)로 보지도 않고

 

不作實衆生.,, 중생을 실유(實有)로도 여기지 않는다.

 

是故法界平等,,, 법계가 평등하므로 .

 

無有得失, ,,, 얻는것고 잃는것도 없다

 

若依法佛修道,,,만약 불법에 의하지 않수행을 한다면

 

不求涅槃. ,,,,,,열반은 구할수 없을것이다

 

何以故, ,,,왜냐하면

 

法是涅槃故,,,불법이 곧 열반으로 가는 것이때문이다

 

云何以涅槃求涅槃.,,,무엇 때문에 열반에서 열반을 찾을 것인가

 

亦不求法, ,,,또 법()을 구하지도 않는다.

 

心是法界故. ,,,()은 법계(法界)인데,

 

云何以法界求法界.,,무엇 때문에 법계에서 법계를 구할 것인가.

 

若欲正心時, ,,만일 심()을 바로잡으려 한다면

 

不畏一切法,,, 일체의 이법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不求一切法.,, 일체의 이법을 구해서는 안 된다.

 

若用法佛修道者,,, 만일 법불에 의하여 도()를 수행하려는 자는

 

心如石頭,,,,,,,, ()이 바위처럼 무심(無心)으로

 

冥冥不覺不知,,, 멍청하게 무엇 하나 각지(覺知)하지도 말고,

 

不分別, ,,, 분별도 하지 말고

 

一切騰騰如似痴人.,, , 매사에 바보처럼 지내는 것이 좋다.

 

何以故, ,,, 왜냐하면

 

法無覺知故.,,,이법에는 각지가 없기 때문이며,

 

法能施我無畏故,,, 능히 법은 나의 어렵지 않은

 

是大安穩處. ,,,크나큰 안온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譬如有人犯死罪,,, 가령 어떤 사람이 죽을 죄를 범한다면

 

必合斬首, ,,,반드시 목이 잘라지지만

 

値王放赦,,,, 국왕의 사면이 있다면

 

卽無死憂.,,, 이제 벌을 받아야 할 걱정도 없어지니

 

衆生亦如是,,, 중생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造作十惡五逆,,, 십악오역(十惡五逆)의 죄를 짖고

 

必墮地獄,,,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자도

 

法王放大寂滅赦,,, 법왕이 크나큰 적멸(寂滅)의 은사를 내리면

 

卽免一切罪.,, 즉시 일체의 죄에서 벗어난다.

 

若人與王善友,,, 만약 국왕과 친한 어떤 사내가

 

因行在他處,, 그 나라에 가게 되어

 

殺他男女,,,살인을 하고

 

爲他所執,,, 붙잡혔다고 하자. ,

 

便欲報怨,,, 필경 즉시 보복을 받게 될 것이지만

 

是人忙怕無賴.

 

忽見大王,,, 국왕을 만나게 된다면

 

卽得解脫.,, 자유롭게 되는 것과 같다.

 

若人破戒犯殺, 그와 같이 어떤 사내가 파계를 하고, 살생을 범하고

 

»Z犯盜, ..,, 음행을 하고,

 

若人破戒犯殺淫盜,,, 만약 어떤사람이 절도를 하여서

 

畏墮地獄, ,,,지옥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더라도

 

自見己之法王, ,,, 자기(自己)라는 법왕을 만나게 된다면

 

卽得解脫.,,이제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해설]

 

이법(理法)에 의한 수행이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달마가 제11단에서 마음의 의처로 삼던 불()()()을 떠나, ()을 이법으로 하여 자기의 밖에 있는 삼보(三寶)를 무용(無用)한 것으로 보고 있는 점이다. 마지막 구절에 자기라 하는 법왕을 만나는 것으로 그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임제의 무위(無位)의 진인(眞人)’으로 통하는 사상이다. 여기에 나오는 법불(法佛)능가경에 의한 것으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가리킨다. 여기서 달마는 성정(性淨)의 이법을 보는 칭법행(稱法行)의 입장에 있다고 말해도 된다.

그와 같이 어떤 사내가 파계를 하고, 살생을 범하고, 음행을 하고, 절도를 하여서, 지옥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더라도라는 구절은 안심법문에도 채택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열반에서 열반을 찾을 것인가. 또 법()을 구하지도 않는다. ()은 법계인데 무엇 때문에 법계에서 법계를 구할 것인가문주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 『마가지관(摩訶止觀)에도 보이며, 신회는 단어에서 이것을 증상만(增上)으로 해석을 한다. 이 증상만은 원효의 해동소에서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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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古典)에 의해서 깨달은 사람은 미약하다

 

()를 수행하는 방법으로써 고전의 글 속에서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기력이 부족하다. 만약 일상의 구체적인 사실들에 입각해서 깨달을 수가 있는 사람은 그 기력이 강하다. 사실에 입각해서 이법(理法)을 보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 있던간에 법()을 잃지 않는다. 글자 속에서 깨달은 사람은 구체적인 사실에 부딛치게 되면 당장 눈이 어두워져 버린다.

경론에 의해서 사실을 미루어 짐작하더라도 이법에서 벗어나게 된다. 입으로 사실을 겨냥하고, 눈으로 사실을 듣는 것보다는 스스로의 신심(身心)으로 사실을 경험할 수밖에는 없다. 사실이 그대로 법()이라는 그 깊은 뜻에 세상사람들의 생각은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를 수행하는 사람은 몇 번이든 도적을 당하더라도 애착심이 없고 오뇌를 겪지도 않는다. 몇 번이든 나쁜 말을 듣고 얻어맞는다 하더라도 오뇌를 겪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도심(道心)이 더욱 강해지고 햇수가 지나도 그치지 않고, 자연히 온갖 순역(順逆)의 경지에 처해 있더라도 무심(無心)으로 된다.

그리하여 사실에 입각해서 사물들에 끌려가지 않는 사람은 대력(大力)보살이라 할 수가 있다. 도를 닦는 마음을 장대하게 하려 한다면 반드시 마음을 상규(常規)의 밖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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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道法, 依文字中得解者, 氣力弱. 若從事上得解者, 氣力壯. 從事中見法者, 卽處處不失念. 從文字中解者, 逢事卽眼眼闇. 經論談事, 與法æS. 雖口談事耳聞事, 不如身心自經事. 若卽事卽法者深, 世人不可惻. 修道人數數被賊盜物奪剝, 無愛著心, 亦不懊惱, 數被人罵辱打謗, 亦不懊惱. 若如此者, 道心漸漸壯, 積年不已, 自然於一切違順都無心. 是故卽事不索者, 可謂大力菩薩. 修道心, 若欲壯大, 會寄心規域外.

 

 

[해설]

 

앞의 단에 계속되는 글로 일단 여기서 결론을 내린다.

일상의 구체적인 사실들에 입각해서이하는 안심법문에 채택되고 있다. 여기서는 고전에 의거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것과 일상생활 속에서 사실을 규명하면서 진리를 탐구하고 자기자신을 연마하는 것을 비교하면서 후자를 택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문자를 장식하는 법사들을 비판하는 내용이며, 관념을 물리치고 실천을 중요시하는 달마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기력(氣力)이라는 말은 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신체에서 발로되는 정신적인 기()이다.

이 글에 대력(大力)보살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명칭은 금강삼매경에도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고 이로 보면 달마선이 개종(開宗)되기 이전, 그 후라 하더라도 달마어록을 기록한 담림 이전에 금강삼매경이 존재했었다는 결론이 찾아질 것도 같다.

대력보살에 대해서는 원효도 금강삼매경론에 해석하고 있고, 홍인(弘忍)수심요론(修心要論)에도 설명이 적혀 있다.

마지막 구절의 상규(常規)의 밖이라는 것은 원문에는 규역외(規域外)’로 되어 있다. 22단에서 다시 자세히 밝힌다.

임제의 시중(示衆)에도 이와 같은 발상이 보인다. 모범적인 답안을 임제는 힐책하는데 이러한 정신태도는 불도(佛道)의 전반에 걸쳐 찾아볼 수 있다. ‘향상(向上)’이라는 의미는 이러한 점을 두고 사용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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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규(常規)를 초월한 세계

 

: 어떠한 것을 상규(常規)의 밖이라 하는가?

: 대승이나 소승의 깨달음을 증거로 하지 않고,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지 않고, 더 나아가서는 최고의 불심(佛心)을 바라지도 않고, 선정에 들어간 사람을 존경하지도 않고, 탐욕의 사람을 멸시하지도 않고, 끝내 불()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 마음이 자연히 안정되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의 깨달음을 옳다고 생각지도 않고 남의 지혜도 바라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람은 글에 의한 법사나 암암리에 증득하는 선사에 혹란(惑亂)을 당하지 않게 된다.

만일 마음으로 지()를 세워서 현성(賢聖)에 의존하지 않고 해방을 바라지도 않고 더 나아가 생사도 싫어하지 않고 지옥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심(無心)으로 그냥 매사에 처신한다면 그로써 비로소 한 사람의 걸출한 마음1)으로 된다. 비록 모든 현성이 백천겁()으로 신통한 변화를 보이더라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누구에게든 속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 어떠한 것을 상규의 밖이라 하는가?

: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은 상규의 심()이라 불려진다. 생사와 열반도 상규의 심()이라 불려진다. 만일 상규의 밖으로 나가려 한다면 범부나 성인이라는 명칭도 있는 것이 아니고, 있다[]는 존재마저 알 수 없게 되고, 없다[]라는 존재도 알 수 없게 되고, 유무(有無)라 하는 존재도 알 수 없게 된다. 거의 균형잡힌 지식의 대상이란 애초부터 상규 안에 있는 것이다.

범부의 마음도 일으키지 않고, 성문의 마음이나 보살의 마음도 일으키지 않고, ()이라는 마음도 일으키지 않고, 일체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비로소 상규의 밖으로 나갔다고 말할 수 있다. 일체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새로 깨우치지도 않고 미혹도 없어지면 비로소 일체를 초월한 사람이라고 불려진다.

세간의 어리석은 자들은 여우에 홀려 괴상한 말을 지껄이는 것을 보고 즉시 흥미를 갖고 그를 따르게 된다. 하지만 어찌 위인 같은 행위를 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는 누군가 백천만억이라는 제자가 모였다고 들으면 금방 마음이 끌려 버린다. 정신을 차려 자기의 마음이라는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과연 그 곳에 말이나 문자가 있는지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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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何等事名爲規域外. , ÷i大小乘解, 不發菩提心, 乃至不願一切種智, 不貴解定人, 不賤著貪欲人, 乃至不願佛智惠, 其心自然閑靜. 若人不取解, 不求智惠, 如此者, 欲免法師禪師等惑亂. 若能存心立志, 不願賢聖, 不求解脫, 復不畏生死, 亦不畏地獄, 無心直作任, 始成一箇規鈍心. 若能見一切賢聖, 百千劫作神通轉變, 不生願樂心者, 此人欲免他. 又問, 若爲生規域外. , 仁義禮智信者名規域心. 生死涅槃, 亦名規域心. 若欲出規域外, 乃至無有凡聖名字, 不可以有法知, 不可以無法知, 不可以有無法知. 齊知之所解處, 亦名規域內. 不發凡夫心, 聲聞菩薩心, 乃至不發佛心, 不發一切心, 始名出規域外. 若欲一切心不起, 不作解, 不起惑, 始名爲出一切. 世間痴人等, 逢一箇胡魅漢作鬼語, 卽作鬼解, 用爲指南, 不可論. 若爲得作大物用. 聞有人領百千万億衆, 卽心動. 好看自家心法, 爲有言說文字以不.

 

 

[해설]

 

앞에서 나온 상규의 밖으로 나간다2)는 명제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대승이나 소승의 해석을 물리치고 보리심(菩提心)과 불지(佛智), 선정(禪定) 등에 대한 사전적인 해석, 즉 온갖 언설적인 개념자체를 철저하게 물리친다.

제지(齊知)의 소해(所解)’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상규적으로 잡아낸 지식을 가리키는 뜻으로 이러한 소해를 철저하게 부정한다. 왜냐하면 이른바 법사나 선사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은 그러한 지적인 소해에 의존하고 있다고 달마가 비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당시의 선사들의 암증(暗證)이나 법사들의 언설 위주의 경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달마는 법사나 선사들의 혹란(惑亂)을 지적하여 새로운 선으로 이끌어 오히려 치둔인(痴鈍人)을 높히 평가한다.

달마의 이러한 태도를 이어받은 사람이 당대(唐代)의 약산(藥山)이나 남전(南泉)이며, 육조 혜능은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달마의 이러한 태도는 장자의 독유인(獨有人)’으로 저변에서 통하며, 유마(維摩)비도(非道)’에도 깊히 관련되어 있다.

 

13.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달마어록 이입사행론』⑥∥非道佛道를 깨닫는다 | 祖師語錄

 

 

 

*순박한 마음

 

: 어떤 것을 순박심(淳朴心)이라고 하는가. 어떤 것을 교위심(巧僞心)이라고 하는가.

: 문장에 의한 설명을 교위(巧僞)라고 한다. ()과 비색(非色)이 하나라면 행주좌와(行住坐臥)가 전부 순박(淳朴)이다. 아무리 험한 고난을 겪더라도 그의 마음은 동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순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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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何者名爲淳朴心, 何者名爲巧僞心. , 文字言說, 名巧僞. 色非色等, 行住坐臥, 施爲擧動, 皆是淳朴. 乃至逢一切苦樂等事, 其心不動, 始名淳朴心.

 

 

[해설]

순박(淳朴)과 교위(巧僞)라는 새로운 과제가 제기된다. 교위라는 말은 장자도 사용하고 있지만 당대(唐代)에 들어서서 현저하게 논의되고 있다.

()는 인간의 본래 갖추고 있는 성()에서 나온 것이라 자주 이를 사용하여서 교위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노장의 제자들은 본래 인간이 갖추고 있는 지()를 포기하려고 했지만, 여기에 대해서 맹자는 ()가 위태로운 것은 너무나 천착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음에 순박의 조건으로 색()과 비색(非色)을 들고 있는데, 이는 삼계(三界)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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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심(正心)과 사심(邪心)

 

: 무엇을 정()이라 하고 무엇을 사()라 하는가.

: ()에 분별함이 없는 것을 정(), ()이 분별하는 것을 사()라 한다. 또한 사()와 정()을 의식하지 않는 것을 정()이라 한다.

경전에서 정도(正道)에 사는 자는 사()와 정()을 분별하지 않는다고 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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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何名爲正, 何名爲邪. , 無心分別, 名爲正, 有心解法, 名爲邪. 乃至不覺邪正, 始名正. 經云, 住正道者, 不分別是邪是正.

 

 

[해설]

여기서 말하는 경전은 유마경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다. 그 취지는 지()의 천착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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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성의 이둔(利鈍)

 

 

: 어떤 것이 이근(利根)이고 둔근(鈍根)인가.

: 스승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사리의 법을 아는 사람은 이근이라 부른다. 스승의 가르침에 의존하여 뜻을 아는 사람은 둔근이라 한다. 스승의 가르침에 의존하여서 법()을 듣는 경우에도 이근과 둔근으로 나누어진다. 스승의 말을 듣고, 사물에 사로잡히지 않고, 상대적인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그 상대성이 없다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지 않고, 생기는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생기지 않는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을 이근이라 부른다. 그런데 깨닫는 것만을 좇으면서 의의만을 고집하고 이를 따지려하는 것은 둔근의 깨달음이다.

 

 

이근인 사람이 도에 대해서 들을 때는 범부의 마음을 일으키지도 않고, 현성(賢聖)의 마음도 일으키지 않고 범()과 성()을 구별해서 마음을 두지도 않는다. 바로 이것은 이근의 길을 걷는 사람의 태도이다. 그는 재물을 탐내지도 않고, 애초부터 불()이나 보리(菩提)를 바라지도 않는다. 만일 불()이나 보리(菩提)를 바란다면 즉시 난()을 제거하여 정()을 원하게 되고, 우치(愚痴)를 제거하여서 지혜를 원하게 되고, 유위(有爲)를 제거하여 무위(無爲)를 취하려 하니, 하여간에 무애(無碍)의 상태로는 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것은 둔근의 사람됨에 해당된다.

 

 

이렇게 되니 일체의 범성(凡聖)의 세계를 초월하고, 도를 듣더라도 탐욕심을 일으키지 않고, 더 나아가서는 올바른 의지나 사유도 일으키지 않는다. 도를 듣더라도 성문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애초부터 보살의 마음마저도 일으키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을 이근이라 한다.

보살은 법계(法界)를 지붕으로 삼고 사무량심(四無量心)1)을 수계의 장소로 한다. 무엇을 하든 법계심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법계를 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아무리 여러모로 언동을 하고 뛰어다니더라도 결코 법계를 벗어나지도 않고 새로 법계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만일 법계에서 법계에 들어간다 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이다. 보살은 분명히 눈으로 사물을 보기에 법안정(法眼淨)이라 불린다. ()에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다는 것도 생각지 않는 것을 법안정이라 부른다.

경전에 치애(痴愛)를 멸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은 애()란 본래 생기지 않는 것이기에 구태여 멸할 것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치애라는 것은 안팎이나 주위를 살펴보아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고 붙잡아낼 수 없는 것이다. 설사 시방에 찾아다닌다 해도 토끼털 한 개 만큼도 얻을 수 없다. 즉 그런 것을 멸하여서 해방되기를 바랄 필요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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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何者是利根鈍根. , 不由師敎, 從事見法者, 名爲利根. 從師言敎解者, 名爲鈍根. 從師言敎聞法, 亦有利根鈍根. 聞師言, 不著有, 卽不取不有. 不著相, 卽不取無相. 不著生, 卽不取無生. 此是利根人. 貪解取義, 是非等見, 此鈍根人解義. 利根人聞道, 不發凡夫心, 乃至賢聖心亦不發, 凡聖雙絶. 此是利根人聞道. 不愛財色, 乃至佛菩提, 亦不愛. 若愛佛菩提, 卽捨亂取靜, 捨愚痴取智惠, 捨有爲取無爲, 不能雙絶無碍, 此是鈍根人. 與沒卽去, 越過一切凡聖境界. 聞道不發貪欲心, 乃至正念正思惟, 亦不發. 聞道不發聲聞心, 乃至菩薩心, 亦不發. 是名利根人. 菩薩以法界爲舍宅, 四無量心爲戒場. 凡有施爲, 終不出法界心. 何以故, 體是法界故. 種種云爲, 蹄蹶, 悉不出法界, 亦不入法界. 若以法界入法界, 卽是痴人. 菩薩了了見法界故, 名法眼淨. 不見法惟生住滅, 亦名法眼淨. 經云不滅痴愛者, 愛本不生, 今無可滅. 痴愛者, 就內外中間求覓, 不可見, 乃至十方求之, 無豪釐相可得, 卽不須滅而求解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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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여기서는 전에 제19단에서 나온 수행자의 근성을 다시 다루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달마시대에 교학으로 전향하는 사람들을 의식하고, 스승의 가르침에 의존해서 도를 닦는 사람을 둔근(鈍根)이라고 규정하는 부분이다.

또한 법계에서 법계에 들어간다는 말은 제20단에서 밝힌 논리를 재확인하면서 법안정(法眼淨)을 복선으로 두고 있다. 법안정이란 법()에 생주이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 나아가서는 생로병사도 보지 않는 입장이며, 본래의 법계에 눈을 뜬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 인용된 경전은 유마경제자품2)이다. 치애(痴愛)는 욕()()무지(無知)를 가리킨다. 이 삼독(三毒)에 입각해서 삼취정계(三聚淨戒)가 세워졌다. 이 설은 뒤에 신수(神秀)관심론으로 계승되었다. 달마의 저서로 알려진 혈맥론(血脈論)에서도 백의(白衣)는 음()을 끊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음욕()은 삼독 중에서 가장 질긴 것이다.

번뇌에 대해서는 유마경도 잘 밝혀주고 있지만 대반열반경25번뇌를 끊는 것은 열반이라 부르지 않는다. 번뇌가 생기지 않는 곳을 열반이라 한다. 모든 불()여래(如來)는 번뇌가 생기지 않는 곳을 열반이라 불렀다. 온갖 지혜가 존재에 대해서 무애(無碍)인 것을 여래라고 불렀다라고 설하고 있다. 이 구도 당대(唐代)의 선종에서 크게 주목이 되어 신회 등의 선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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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으로써 도를 얻지 못하는 것은

 

 

: 세간의 사람들은 여러 가지 학문을 닦고 있지만 어찌 도를 얻지 못하는가.

: 자기에 얽매여 있기에 도를 얻지 못한다. 자기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즉시 도를 얻을 수 있다. 자기라는 것은 개체적인 자아이다. 성인이 고난을 겪을 때도 근심이 없고 즐거운 일을

만날 때도 기뻐하지 않는 것은 자기에 얽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락을 받지 않는 것은

자기를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로써의 자기3)에 이를 수가 있어서 자기마저 벌써 잊고 있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없어졌다고 하겠는가.

 

 

천하에 자기를 잃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만약 자기를 잃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처음부터 무()일 것이다. 스스로 비교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생로병사(生老病死)우비고뇌(憂悲苦惱)한열풍우(寒熱風雨)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기에 이러한 것은 모두 망상으로 생긴 것, 마치 환화(幻化)와 같고, 가는 것이나 오는 것이나 자기자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멋대로 상대를 거역하고 가는 것이나 머무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뇌가 있는 것은 자기에 얽매여서 가는 것이나 머무르는 것4)이 있는 것이지, 가는 것이나 머무르는 것은 자기에 의함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결국 개체적인 자아가 그렇게 여긴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환화의 존재를 끌어서 멈추게 하든가 스스로 머무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환화에 개의치 않는다면 어떤 일에도 구애됨이 없을 것이다. 만일 사물의 변화에 거역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에도 후회는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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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世間人種種學問, 云何不得道. , 由見己故, 不得道, 若能不見己, 卽得道. 己者我也. 聖人所以逢苦不憂, 遇樂不喜者, 由不見己故. 所以不苦樂者, 由亡己故. 得至虛無, 己尙自亡, 更有何物而不亡也. 天下亡己者有幾. 若能亡己時, 一切本無. 己者橫生計, 卽感生老病死憂悲苦惱寒熱風雨, 一切不如意事, 此竝妄想現. 由如幻化, 去住不由己. 何以故, 橫生拒逆, 不聽去住. 所以有煩惱, 由執己故, 卽有去住. 知去住不由己者, 卽我所是, 幻化法, 不可留停. 若不逆幻化者, 物無碍. 若能不逆變化者, 事不悔.

 

 

[해설]

전반은 안심법문에도 인용되고 있다. 또 그 답은 종경록78에 인용되어 달마의 말이라 전해지고 있다.

25단에서는 지()의 교위(巧僞)가 비판되고, 여기서는 학문과 자기를 문제로 하여서 비판하고 있다. 법화경에서 설하는 무사지(無師智)와 자연지(自然知)와도 관련되는 과제이며 특히 노자의 사상이 배후에 있음을 알 수가 있고 보원행에도 인용되고 있다.

환화(幻化)를 예로 드는 부분은 수당(隋唐)불교의 기본 테마로 되어 있는 촉사이진(觸事而眞)’에 입각한 것이며, 이는 승조의 반야무지론에서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무아(無我)라는 것은 즉물무아(卽物無我)를 가리킨다. 임제의 수소작주(隨所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은 바로 이 즉물무아를 결론으로 이어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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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진리와 수도의 주체

 

: 모든 법()5)은 처음부터 공()한데 과연 그 누가 도()를 닦는다고 하는가.

: 누군가 있다면 도를 닦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누군가 있지 않다면 벌써 도를 닦지 않아도 된다. 그 누군가라는 것은 자아를 가리키는 말이다. 만일 자아가 없다면 사물을 대할 때 시비(是非)는 생기지 않는다. ()라는 것은 자아가 그것을 시()라고 하는 것이기에 사물은 시()가 아니고, ()라고 하는 것도 자아가 그것을 비()라고 하는 것이기에 벌써 사물은 비()가 아닌 것이다. 풍우라는 것은 자연현상, 청황적백이라는 색깔을 예로 하여 알면 된다. 좋은 것은 자아가 그것을 좋다고 하는 것이기에 사물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령 눈혓바닥이라는 감각기관, 색깔이나 음성 등의 대상을 예로 들어서 알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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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製法旣空, 阿誰修道. , 有阿誰, 須修道. 若無阿誰, 卽不須修道, 阿誰者我也. 若無我, 逢物不生是非. 是者我自是之, 而物非是也. 非者我自非之, 而物非非也. 如風雨靑黃赤白等譬可知. 好者我自好之, 而物非好也. 何以故, 如眼耳鼻舌色聲等譬喩可知.

 

 

[해설]

앞에서는 자아를 버리라는 과제를 설하고 여기서도 다시금 대화로 다루고 있다. 시비(是非)의 문제에 대해서 대답하는 부분이 페리오의 사본에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것에 일부러 이름을 붙여서 그 이름으로 시비가 일어난다고 되어 있다. 즉 사물의 존재는 처음부터 공한 것이기에 그 존재를 시비로 따질 수 없는 것이고, (), ()다 하는 것은 자아에 의한 것일 따름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대해서 담천은 망시비론(亡是非論)에 상세하게 분석을 하고 있다.

 

 

 

 

 

 

 

 

 

 

 

 

 

 

 

 

 

14.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도가 아닌 곳으로 간다

 

 

 

 

: 경전에서 비도(非道)에 들어가면 불도(佛道)에 통달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 비도(非道)로 간다는 것은 명()을 버리지 않는 것 상()을 버리지 않는 것이고, 통달이란 명()에 즉각하는 무명(無名), ()에 즉각한 무상(無相)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비도로 간다는 것은 탐욕을 버리지 않는 것, ()를 버리지 않는 것이며, 통달이란 탐욕에 즉각하여 탐욕이 없고, ()에 즉각하여 애()가 없다는 것이다. 비도(非道)로 가는 사람이 고()에 즉각하여 고()가 없고, ()에 즉각하여 낙()이 없는 것을 통달이라 부른다. ()을 버리지 않고, ()를 버리지 않는 것을 통달이라 부른다. 비도(非道)로 간다는 것은 생에 즉각하여 생이 없지만 생이 없는 곳을 옳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에 즉각하여 아()가 없지만, ()가 없는 것을 옳다고 생각지 않는 것을 불도(佛道)에 통달했다고 말한다. 만일 비()에 즉각하여 비()가 없고 비()가 없는 것도 옳다고 생각지 않는다면 이것을 불도에 통달했다고 말한다. 결국 심()에 즉각하여 무심(無心)이라면 이는 심()이라는 도에 통달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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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云, 行於非道, 通達佛道. , 行非道者, 不捨名, 不捨相. 通達者, 卽名無名, 卽相無相. 又云, 行非道者, 不捨貪, 不捨愛. 通達者, 卽貪無貪, 卽愛無愛. 行非道者, 卽苦無苦, 卽樂無樂, 名爲通達. 不捨生, 不捨死, 名爲通達. 行非道者, 卽生無生. 不取無生, 卽我無我, 不取無我, 名爲通達佛道. 若能卽非無非, 不取無非, 是名通達佛道. 以要言之, 卽心無心, 名爲通達心道.

 

 

[해설]

인용하는 경전은 유마경불도품(佛道品)이다. 여기에 나오는 문수와 유마의 대화는 유명하다. “비도(非道)로 간다는 말은 유마의 구이다.

문수는 유마에 물었다. “보살은 어떻게 불도를 닦는가.”

유마는 대답한다. “보살은 도()가 아닌 곳으로 간다. 이것이 불도를 닦는 것이라고.

()에 즉각해서 명()을 공하게 한다는 것은 반야의 실천을 문제로 하기 때문이다. ()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명상(名相)의 문제는 능가경(楞伽經)』ㆍ『유가론(瑜伽論)에서 다루었던 것이며 미()와 오()의 체계를 명()()망상분별(妄想分別)진여(眞如)정지(正智)라는 오법(五法)에 의해서 설하고 있다.

길장은 정명현론(淨名玄論)에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경전에 설한다. 명상(名相)이 없는 곳에서 일부러 명상을 설하는 것은 이 명상에 의해서 명상이 없는 점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불()이 가르치신 바이며, 모든 성자들의 뜻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의 스승의 말을 전해주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를 행하는 사람이 비도(非道)를 떠나서 정도(正道)를 구하려고만 한다면 그는 도에 얽매이게 된다. 좌선을 하는 사람이 소란스러움을 피하고 한적한 곳만을 찾으려 한다면 그는 선에 얽매이게 된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 나는 지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지혜에 얽매이게 된다. 또 무생관(無生觀)을 행하면서 유소득(有所得)의 심()을 청산하려고 한다면 그는 무생(無生)에 얽매이게 된다. 그들은 모든 것이 계박(繫縛)을 하는데도 그 계박을 버리려 하고 있다. 전혀 모든 것이 계박인 것임을 그들은 깨우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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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의 존재를 깨닫는다

 

 

: 어떻게 하여 일체의 법()6)를 깨닫는가.

: 어떤 사물에 즉각하여 견()7)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어떤 사물에 즉각하여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어떤 사물에 즉각해서 탐욕을 이르키지 않고, 어떤 사물에 즉각하여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사물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어떤 색()에 즉각하여 색()이 없음을 알면, ()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특정된 유()에 즉각하여 유()라고 보지 않는 것을 유()를 깨달았다고 말한다. 특정된 생()에 즉각하여 생()이 없음을 알면 생()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어떤 법()에 즉각하여 법()이 없음을 알면 법()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어떤 일을 대하든 바로 그 일체를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지혜의 눈이 트여있는 것이다. 어떤 일을 대하든 그 상()의 다름을 분별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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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云何達一切法. , 卽物不起見, 名爲達. 卽物不起心, 卽物不起貪, 卽物不起惱, 悉名爲達. 卽色無色, 名達色. 卽有不有, 名達有. 卽生無生, 名爲達生. 卽法無法, 名達法. 逢物直達, 此人惠眼開, 亦可��物不見相異無異, 名爲達.

 

 

[해설]

이것은 앞에서 다룬 바의 비도(非道)로 불도(佛道)를 깨닫는다는 명제를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순물(順物), 즉 만물은 그 자체가 비어있는 것이고 그 자체가 공함에 순응한다는 원리로 일관된 해석이다. 이것은 승조의 반야무지론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즉색무색(卽色無色)’유마경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 나오는 희견(喜見)보살의 다음과 같은 말을 두고 밝히고 있다.

 

 

색은 색인 것이 바로 공이고, 색이 멸하여 공으로 된 것은 아니다(色卽是空非色滅空).

 

일반적으로는 색과 색의 공함을 구별해서 생각하지만, 색 그 자체가 바로 공한 것이지 색이 멸하여서 공함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반야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과 같이 수()()()()도 본래 공하다고 설한다. 따라서 의식된 것, 그 자체가 본래 공한 것이지 의식을 멸하여서 공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닫는 것을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부른다.

이것은 제7단에서 설한 보지 않는 것으로 본다는 명제로 통한다.

 

6) 여기서 말하는 법()은 존재.

7) 여기서 말하는 견()은 분별

 

 

 

 

 

 

 

 

 

 

 

 

15.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달마어록 이입사행론』⑦∥생사는 본래 열반의 체()로 있는 것이니| 祖師語錄

 

 

 

 

*사견(邪見)을 버리고 정견(正見)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 경전에 이렇게 설한다. 외도(外道)는 온갖 견해를 즐긴다. 그래서 보살은 온갖 견해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둔다. 악마는 생사를 즐긴다. 그래서 보살은 생사를 저버리지 않는다라고.

: 잘못된 견해를 올바른 견해와 똑같이 보기에 바꾸지 않는 것이다. 외도가 온갖 견해를 즐긴다는 것은 유()라고 주장하고 무()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에 즉각하여 유()로 하지 않고 무()에 즉각하여 무()로 하지 않는 것을 바꾸지 않는다고 말한다. 바꾸지 않는다는 것은 정()을 떠나지 않고 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즉 정()이라는 해답을 취한다면 벌써 사()가 아니기에 사()를 떠나서 정()을 구할 필요가 없어진다. ()에 즉각하여 유()가 아님으로 바꾸지 않고 유()라고 생각한다. ()에 즉각하여 무()가 아님으로 바꾸지 않고 무()라고 생각한다. 이법(理法)에 의하여 관찰한다면 사정(邪正)에는 무슨 다름이 없는 것이기에 그래서 바꾸지 않는다고 말하고, ()를 버리고 정()에 들어갈 필요가 없으니 그것으로 온갖 견해를 바꾸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경전에서 설한다. “()라는 입장 그대로 정법(正法)에 들어간다.

또 이렇게도 설한다. “팔사(八邪)를 버리지 않고 팔해탈(八解脫)에 들어간다.

생사를 열반과 똑같이 여김으로 버리지 않는 것이며, ()에 즉각하여 생()이 없고, ()에 즉각하여 사()가 없는 것이다. 즉 생()을 버리고 비로소 무생(無生)에 들어가고 사()를 버리고 비로소 무사(無死)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적멸하기에 열반인 것이다.

경전에서 설한다. “일체 중생은 본래 적멸하지 달리 적멸해진 것은 아니다라고.

또 이렇게도 설한다. “일체법은 모두 열반의 세계라고.

생사를 버리고 비로소 열반으로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얼어붙은 얼음을 버리고 비로소 물을 얻을 필요가 없듯이 그 자체가 본래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생사와 열반도 그 자체가 본래 똑같은 것이기에 버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생사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고 보살이 바꾸지 않는 곳에 머물고 있는 것은 머물지 않는 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며 이것을 머문다고 말하는 것이다.

 

 

외도는 온갖 견해를 즐기니 보살은 그 견해에 즉각해서 견해를 버리게 하지, 일부러 견해를 떠나게 하여서 비로소 그 견해를 버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악마는 생사를 즐기니 보살이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생에 즉각해서 생이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니 생을 버리고 비로소 생이 없는 곳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치 물을 버리고 물의 습기를 구하든가 불을 버리고 불의 열기를 나타내려고 할 필요가 없듯이 물은 젖어 있고 불은 뜨거우니 생사도 그대로 열반인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생사를 버리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생사는 본래 열반의 체()로 있는 것이니 생사를 버리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성문(聲聞)은 생사를 버리고 열반에 들어가려 한다. 보살은 그 체()가 평등을 본질로 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대비(大悲)에 의해서 사람들을 동화시키는 것을 자기자신의 용()으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과 사()는 그 뜻이 똑같은 것이며 명칭만이 다르다. 생사를 바꾸지 않는 것과 열반의 관계도 그 뜻은 똑같은 것이며 명칭만이 다른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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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云, 外道樂諸見, 菩薩於諸見而不動. 天魔樂生死, 菩薩於生死而不捨. , 邪見同正見故, 不動. 外道樂諸見者, 謂見有見無. 卽有不有, 卽無不無, 名爲不動. 不動者, 不離正不離邪. 卽是正解時, 卽無邪正, 不須離邪求正. 卽有不有, 不動時見有. 卽無不無, 不動時見無. 依法看邪正都不異, 故言不動. 亦不須捨邪入正, 故言於諸見而不動. 經云, 以邪相入正法. 又云, 不捨八邪入八解脫. 生死同涅槃故不捨, 卽生無生, 卽死無死, 不待捨生以入無生, 捨死入於無死, 寂滅故涅槃. 經云, 一切衆生本來寂滅, 不復更滅. 又云, 一切法皆是涅槃. 不須捨生死始是涅槃. 如人不須捨凍陵始是水, 性自同故, 生死涅槃, 亦性同故, 不須捨. 是故菩薩於生死而不捨. 菩薩住不動者, 住無住名爲住. 以外道樂諸見故, 菩薩敎令卽見無見, 不勞離見然後無見. 天魔樂生死, 菩薩不捨者, 欲令悟卽生無生, 不待捨生而入無生. 如似不須捨水而求濕, 捨火而就熱, 水卽濕, 火卽熱, 生死卽是涅槃. 是故菩薩不捨生死而入涅槃, 生死性卽涅槃故. 不待斷生死而入涅槃. 聲聞斷生死入涅槃, 菩薩體知性平等故, 能以大悲同物取用. 生死義一名異, 不動涅槃, 亦義一名異.

 

 

[해설]

이 단은 유마경문질품제자품에 의거하면서 성문을 비판하고 대승보살행의 실천덕목까지 언급하고 있기에 매우 주목된다.

유마경제자품에 나오는 번뇌를 끊지 않고서 열반에 들어간다[不斷煩惱而入涅槃]”는 말은 유명하며 고래로 선사상의 근본적인 명제로 되어 있다.

인도의 대승불교는 번뇌를 끊고서 열반에 들어간다는 관념, 즉 번뇌를 부정하고 열반을 긍정하는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번뇌를 끊고서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쳤다. 실은 번뇌나 열반이나 실유(實有)가 아닌 것이다. 색이 그대로 공이고 색이 멸하여 공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생사에 머물지도 않고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 참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반야의 사상이다.

 

 

그런데 중국 불교는 그 출발부터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라는 노장(老莊)의 논리를 기반으로 해서 실천적인 반야사상을 구축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모순된 어법은 바로 무위무불위를 응용하여 무위(無爲)를 체(), 무불위(無不爲)를 용()으로 하여서 현실에 입각한 실천적인 사고를 적극적으로 세워놓고 있다. 이것은 달마의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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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진리는 가까운가, 먼가

 

 

: 대도(大道)는 가까운가, 그렇지 않으면 먼가?

: 예를 들면 아지랑이와 같은 것이다.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도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다. 허공도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다. 만일 가깝다고 한다면 시방을 찾아다녀 얻을 것이 아니고 만일 멀다고 한다면 명료하게 눈 앞에 보이니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에 말한다. “가까이 있으면서 볼 수가 없는 것, 그것이 만물의 정체(正體)이다라고.

만일 사물의 정체를 본 사람은 도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사물의 핵심을 본 사람은 사물의 정체가 사물의 특징을 갖고 있지 않고 사물에 즉각하여 사물이 없음을 아니, 이것을 사물의 정체를 보았다고 말한다. 이른바 형상을 갖춘 사물은 모두 사물이다. 능히 사물의 정체를 보고 확실하게 틀림이 없게 보면 제()1)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을 보았다고 말할 수가 있다. 가까이 있어도 볼 수 없는 것이 법()의 특징이다.

 

 

지자(智者)는 사물에 맡기고 자기자신에 맡기지 않으니 그 곳에는 취사(取捨)가 없다. 위순(違順)도 없다. 우자(愚者)는 자기자신에 맡기고 사물에 맡기지 않으니 그 곳에 취사가 있고 위순이 있다. 만일 마음을 허공에 해방시켜서 온 천하를 잊어버릴 수 있다면 그야말로 사물에 맡기고 시간에 따르는 것이다. 사물에 맡기고 시간에 따르는 것을 역행(易行)’이라 하고, 저항하고 사물을 바꾸는 것은 난행(難行)’이다. 사물이 다가오면 그것에 맡기고 거역하지 말아라. 사물이 떠난다면 그것을 그냥 두고 쫓아가지를 말아라. 어떤 일이든 해버린 것은 지나친 것이니 후회하지 말아라.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은 그냥 그대로 두고 걱정하지 말아라. 그것이 행도(行道)의 사람인 것이다. 맡길 수가 있는 사람은 즉시 천하을 맡기고 좋든 나쁘든 관계를 하지 않는다. 맡기고 거역하지 않고 그냥 따르기만 하여 거역하지도 않는다면 어디든 어느 때든간에 태연히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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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道爲近爲遠. , 如似陽炎非近非遠. 鏡中面像, 亦非近非遠. 虛空浪宕針花等, 亦非近非遠. 若言是近, 十方求之不可等, 若言是遠, 了了眼前經. 論云, 近而不可見者, 万物之性也. 若見物性者, 名爲得道. 見物心者, 是物性無物相, 卽物無物, 是名見物性. 所謂有形相之物, 皆是物, 審見物性, 實而不謬者, 名爲見諦, 亦名見法. 近而不可見者, 法相也. 智者任物不任己, 卽無取捨, 亦無違順. 愚者任己不任物, 卽有取捨, 卽有違順. 若能虛心寬放, 大亡天下者, 卽是任物隨時. 任物隨時卽易, 違拒化物卽難. 物欲來任之莫逆, 若欲去放之勿追. 所作事, 過而勿悔. 事未至者, 放而勿思, 是行道人. 若能任者, 卽委任天下, 得失不由我. 若任而不拒, 縱而不逆者, 何處何時, 而不逍遙.

 

 

[해설]

여기서는 임운자재(任運自在)를 가르친다. ()이란 승조의 물불천론(物不遷論)을 가리킨다. 종경록에도 승조의 임운자재가 인용되고 있다. 달마는 승조의 촉사이진(觸事而眞)’이라는 중국적인 사유를 중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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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인 진리는 알기 쉽다

 

 

: 대도(大道)는 아주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운데, 천하의 사람들은 알 수 없고 행할 수도 없는 것은 왜 그런가.

: 고와방임(高臥放任)2)하면 행도(行道)의 사람이라 부른다. 무엇하나 눈에 들지 않는다면 도를 보았다고 말하고,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다면 도를 닦는다고 말한다. 무엇 하나 하지도 않는다면 도를 행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두고 알기 쉽다고 하고 행하기 쉽다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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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云何名爲大道甚易知易行, 而天下莫能知莫能行. 願開示之. , 此言實爾. 高臥放任, 不作一箇物, 名爲行道. 不見一箇物, 名爲見道, 不知一箇物, 名爲修道, 不行一箇物, 名爲行道, 亦名易知, 亦名易行.

 

 

[해석]

31단에서 취급한 설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무엇 하나 눈에 들지 않는다면이하는 안심법문에도 채택되고 있다. 페리오 사본에서는 이 제32단 이후를 한 권으로 엮어서 보리달마론(菩提達摩論)이라고 이름 붙였다.

고와방임(高臥放任)은 노장의 은둔생활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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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의 말

 

 

: 노자의 경에 끝을 소중히 여김은 시작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 이것은 믿음을 갖은 사내가 한 번 가슴 속에 결심을 하면 언제까지나 굽히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결심을 하는 것은 현재이다. 현재에서 과거를 보는 것은 과거이다. 과거에서 시작을 보는 것은 현재이다. 도심(道心)에 처음이 있고 끝이 있다면 불법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된다. 과거나 현재도 변함이 없는 것을 실()이라 한다. 변하면서 외면을 만들어내는 것을 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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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老經云, 愼終如始, 必無敗事, 此云何. , 此是懷信義人, 一發心時, 永無退沒, 有古有今. 初發心是今, 於今望昔是古, 於古望初是今. 若道心有始有終者, 名爲信佛法人, 古今不改者, 名爲實. 虛妄詐者, 名爲華.

 

 

[해설]

노자(老子)는 제64장에서 끝날 무렵에는 마음이 풀리기 쉬우니 끝까지 변함이 없을 것을 가리치고 있다.

()과 화()의 관계는 법화화엄의 교의를 연상시킨다.

 

 

 

 

 

 

 

 

 

 

 

 

 

 

16.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보살의 생활태도

 

 

: 보살의 생활태도는 어떤 것인가?

: 현성(賢聖)의 생활태도도 아니고, 범부의 생활태도도 아닌 것이 보살의 생활태도이다. 보살의 도()를 배우려면 세간의 가르침을 옳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세간의 가르침을 버리지도 않는다. ()과 의식을 갖은 채 도()에 들어간 사람은 범부나 불제자나 그 마음을 추량할 수 없다. 보살은 이른바 일체의 속사(俗事), 일체의 애욕(愛慾), 일체의 악업(惡業)이 있는 곳을 사용하여 불사(佛事)를 행하고 그들로 하여금 열반에 들어가도록 한다. 모두 대도(大道)인 것이다. 모든 곳은 그대로 무()의 장소이며, 이법(理法)의 장소이며, 도의 장소인 것이다. 보살은 일체의 장소를 이법의 장소라고 관()한다. 보살은 일체의 장소를 버리지 않고 일체의 장소를 취하지도 않는다. 일체의 장소를 가르지도 않고 함께 불사를 행한다. 생사대로 불사를 행하고, 미혹 그대로 불사를 행한다.

: 제법(諸法)은 무법(無法)3)인데 어떻게 불사를 행하는가?

: 행하는 그 장소 자체를 행의 장소로 하지 않고 행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좋은 일, 좋지 않은 일로 불()이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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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云何是菩薩行. , 非賢聖行, 非凡夫行, 是菩薩行. 若學菩薩時, 不取世法, 不捨世法. 若能卽心識入道者, 凡夫聲聞無能測量. 所謂一切事處, 一切色處, 一切惡業處, 菩薩用之, 皆作佛事, 皆作涅槃, 皆是大道. 卽一切處無處, 卽是法處, 卽是道處. 菩薩觀一切處, 卽是法處. 菩薩不捨一體處, 不取一切作處, 不簡擇一切處, 皆作佛事. 卽生死作佛事, 卽惑作佛事. , 諸法無法, 云何作佛事. , 卽作處非作處, 無作法, 卽善不善處見佛.

 

 

[해설]

유마경문질품에 의존하여 보살의 현실생활을 주제로 하면서 이입(理入)을 떠나지 않는 행입(行入)을 가르치고 있다.

현성(賢聖)은 청정한 생활에 몸을 두고 싶어하지만 그러한 태도를 버리는 곳에서 보살의 삶을 찾고 있다. ()과 의식은 범부를 가리키며 이러한 일상적인 범부의 생활을 버리지 않고서 도법(道法)을 찾는 것이 보살의 현실생활이다.

일체의 장소이하는 안심법문종경록에 인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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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귀()

 

 

: 어떻게 불()이 보이는가?

: 탐심대로 탐심의 특징을 보지 않으면 탐심이라는 이()가 보인다. ()라는 특징을 보지 않으면 고()라는 이()가 보인다. 꿈의 특징을 보지 않으면 꿈이라는 이()가 보인다. 이것을 일체의 장소에서 불()이 보인다고 말한다. 만일 특징4)을 본다면 일체의 장소에서 귀()를 보고 있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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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云何見佛. , 卽貪不見貪相, 見貪法. 不見苦相, 見苦法. 不見夢相, 見夢法.

 

是名一切處見佛. 若見相時, 卽一切處見鬼.

 

 

[해설]

앞에서 나온 ()이 보인다는 것을 더 상세하게 설명한다. 여기서 말한 특징은 상()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적인 모습이다. “만일 특징을 본다면이하는 안심법문에도 인용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귀()는 귀신이 아니라 요괴로 변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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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법(理法)의 세계

 

 

: 법계(法界)라는 그 실체는 어디에 있는가?

: 거의 모든 것이 법계의 장소인 것이다.

: 법계라는 실체에는 지계(持戒)와 파계(破戒)가 있는가?

: 법계라는 실체에는 범()과 성()의 구별이 없다. 천당과 지옥의 구별도 없다. 시비(是非)나 고락(苦樂)같은 것은 항시 허공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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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法界體性在何處. , 一切皆是法界處. , 法界體性中, 有持戒破戒不. , 法界體性中, 無有凡性, 天堂地獄亦無. 是非苦樂等, 常如虛空.

 

[해설]

20단에서는 법계로 법계를 찾는다고 하고, 25단에서는 법계로 법계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 법계를 다시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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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장소

 

 

: 어디가 깨달음의 장소인가?

: 네가 걸어다니는 곳이 깨달음의 장소인 것이다. 누워 있는 곳이 깨달음의 장소인 것이다. 앉아 있는 곳이 깨달음의 장소인 것이다. 서 있는 곳이 깨달음의 장소인 것이다.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깨달음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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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何處是菩提處. , 行處是菩提處, 臥處是菩提處, 坐處是菩提處, 立處是菩提處. 擧足下足, 一切皆是菩提處.

 

 

[해설]

유마경보살품에 다음과 같은 보리장소(菩提場所)에 관한 설명이 있다. 보리장소란 불타가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완성한 보리수 밑을 가리키는 말이다.

선남자여, 보살은 모든 바라밀을 갖추고 사람들을 가르친다. 거의 그들의 소작(所作)은 손발을 움직이는 것까지도 모두 깨달음의 장소에서 나타난 것이기에, 불법(佛法)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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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경지

 

 

: 제불(諸佛)의 경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기 바람니다.

: ()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비유(非有) 비무(非無)도 아님을 아는 것이 불()의 경지라 한다. 만일 심()이 목석과 같다면 유()라는 지혜로 알 수가 없고, ()라는 지혜로도 알 수가 없다. ()의 심()은 유()로써 알 수가 없고, ()의 법신은 형상으로도 볼 수 없다. 지식으로 이해되는 것은 망상분별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갖가지의 해석을 내린다 하더라도 모두 제멋대로 만들어낸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제불(諸佛)의 지혜는 사람들에게 풀어 알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감추어 둘 수도 없고, 선정(禪定)으로 추량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해를 끊고 지식을 끊어 버린 곳을 제불의 경지라고 부른다. 재어볼 수도 없는 곳을 불()의 심()이라고 부른다. ()의 심()이 이런 것이라고 믿었을 때, 비로소 갠지스강의 모래만큼이나 되는 무량의 번뇌도 멸진한다. 마음을 잘 가다듬고 불()의 지혜가 이런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 사람의 도심(道心)은 하루하루 장대하게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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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諸佛境界, 願爲說之. , 法非有非無, 不取非有非無解者, 名佛境界. 若心如木石, 不可以有智知, 不可以無智知. 佛心不可以有知, 法身不可以像見. 齊知之所解者, 是妄想分別. 作種種解, 皆是自心計, 自心妄想. 諸佛智惠, 不可說示人, 亦不可藏隱, 亦不可以禪定測量. 絶解絶知, 名爲諸佛境界. 不可量度, 是名佛心. 若能信佛心如是者, 亦卽滅無量恒沙煩惱. 若能存心, 念佛智惠如是者, 此人道心, 日日壯大.

 

 

[해설]

여기서부터 과제는 제불(諸佛)의 경지, 즉 깨달음으로 옮긴다. 내용은 공()의 세계, 반야에 있어서의 쌍비(雙非)의 논리를 전개한다.

 

1) 진리.

2) 마음을 높히 지니고 몸을 쉬고 자연에 맡기면서 무엇 하나 생각지도 않는다는 뜻.

3) 존재는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의미.

4) ()을 특징특색 등으로 번역했다.

 

 

 

 

 

 

 

 

 

 

 

 

 

 

 

17.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달마어록이입사행론』⑧너의 심체(心體)가 바로 법계(法界)의 주체이다 | 祖師語錄

 

 

*여래의 혜일(慧日)이 유지(有地)에 침몰한다

 

 

: 어떤 것을 가리켜 여래의 혜일(慧日)이 유지(有地)에 떨어진다고 하는가.

: ()가 아닌 것을 유()라고 생각하면 혜일은 유지에 떨어진다. 특징이 없는 것을 특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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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何名如來惠日潛沒於有地. , 非有見有, 惠日沒於有地. 無相見相亦然.

 

 

[해설]

임제의 스승인 황벽의 전심법요(傳心法要)법에 몰처(沒處)가 있다면 유지(有地)에 떨어진다는 구가 있다. 여래의 혜일(慧日)이란 담림이 만들어낸 말이다. 징관(澄觀)심요(心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 있고 지()가 있으면 지혜라는 해()가 유지(有地)에 침몰한다. 반대로 비추지도 않고 오()가 없다면 검은 구름이 하늘문을 덮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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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속인다

 

 

: 어떤 것을 두고, ()을 변동시키지 않는다고 하는가.

: ()를 고정시키지 않으니, ()로써 변동시킬 것이 없다. ()를 고정시키지 않으니 무()로써 변동시킬 것이 없다. ()에 즉각해서 심()이라 할 것이 없으니 심()으로써 변동시킬 것이 없다. 사물의 상()에 즉각해서 상()이라 할 것이 없으니 상()으로써 변동시킬 것이 없다. 그러므로 상()을 변동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만일 이러한 설명을 하는 자는 스스로 속이는 자라고 부른다. 위에 말한 사람은 아직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를 했다면 벌써 이해가 될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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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何名不動相. , 不得於有, 無有可動. 不得於無, 無無可動. 卽心無心, 無心可動. 卽相無相, 無相可動, 故名不動相. 若作如是, 是名自. 相來未解, 解是無法可解.

 

 

[해설]

여기에 설정된 질문은, 30단에서 외도(外道)가 온갖 견해를 즐기니 보살은 그 견해를 바꾸지 않는데 바꾸지 않는 그 이유에 대한 것이다.

지금은 그러한 태도 그 자체를 스스로 속인다는 가설적인 비판으로 부정을 하면서 설명을 하고 있다. 변동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실은 변동시킨다는 방편이고 한편 본래부터 변동시킬 수 없는 절대적인 이법(理法)을 전제로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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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멸(生滅)과 불생멸(不生滅)

 

: 우리들은 사실 그대로 생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생멸이 없다고 말하는가.

: ()으로 생긴 것은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으로 멸하는 것은 스스로 멸할 수는 없다. ()으로 멸하기 때문이다.

: 왜 연()으로 생기는 것을 생김이라 말하지 않는가.

: ()으로 생기는 것은 저 인()에 의해서 생긴 것이지 스스로 생기지는 못하고, 함께 생기지도 못하고, 또한 인()이 없이도 생기지를 못한다. 또한 연()으로 생긴 것은 생긴 법()도 없고 또 생기게 하는 것도 없고 생기는 장소도 없다. 그러므로 생기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생멸이라는 것은 환()이 생긴 것이니 정말로 생긴 것도 아니고 환()이 멸하는 것이니 멸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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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現見有生滅. 云何言無生滅. , 從緣生者, 不名爲生, 從緣生故. 從緣滅者, 不能自滅, 從緣滅故. , 云何緣生不名爲生. , 從緣生, 不從彼生, 亦不自生, 亦不共生, 亦不無因生. 又無生法, 復無生者, 亦無生處. 是故知不生. 所見生滅者, 幻生非生, 幻滅非滅.

 

 

[해설]

현상적으로 생멸하는 것을 과제로 한다. 우리들이 일상으로 경험하는 생멸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결국 문제는 인연에 의한 생멸 즉 연기(緣起)의 이()에 도달하게 되는데 여기서 다루는 특징은 철저하게 불생멸(不生滅)의 생멸(生滅)에 관한 시점을 과제로 하는 점이다. 이것은 뒤에 다루게 되는 대승의 성기설(性起說)에 관련되고 있다.

중론과 승조의 주유마경(註維摩經)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유마경』 「불국품(佛國品)()은 유()가 아니다. 또한 무()도 아니다. 인연이 있기 때문에 제법은 생()한다고 설한다는 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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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본질

 

: 범부는 왜 악도(惡道)에 빠지는가.

: 개별적인 아()가 있으니 우치(愚痴)로 된다. 그래서 나는 술을 마셨다고 생각한다. 현자는 가르친다. 너는 술이 없을 때 어찌 없는 술을 마시지 않는가라고. 나는 없는 술을 마셨다고 생각한다 해도 너는 말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우자는 이렇게도 생각한다. 나는 죄를 지었다. 현자가 말한다. 너의 죄는 가령 무엇인가. 어떠한 것도 연()이 생기게 한 것이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생겼다 해도 개별적인 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누가 죄를 짓고 누가 받는다 하는가.

경전에 범부는 무엇이든 분별을 하고, ()는 탐욕을 부린다고. 이러한 우자는 삼악도(三惡道)에 빠질 수 밖에는 없다고 설한다. 그런데 다른 경전에서는 죄라는 것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안팎의 변두리에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설한다. 이것은 죄에는 장소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장소가 없다는 것은 즉 적멸(寂滅)을 뜻한다. 사람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스스로 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분별을 하여서 나는 나쁜 짓을 저질렀다, 나는 죄를 받는다, 나는 좋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보답을 내가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악업이다. 애당초 아무것도 없는 것을 제멋대로 이것저것 분별을 하여서 있다고 생각을 한다. 이것이 악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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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凡夫何故墮惡道. , 有我故痴, 故言道我飮酒. 智者言, 無酒時, 何不飮無酒. 雖道我飮無酒, 我何處在. 痴人亦言, 我作罪. 智者言, 汝罪似何物者. 此皆是緣生無自性. 生時旣知無我, 誰作誰受. 經云, 凡夫强分別, 我貪我嗔. 如是愚痴人, 卽墮三惡道. 經云, 罪性非內非外, 非兩中間者, 此明罪無處所. 無處所者, 卽是寂滅處. 人墮地獄者, 由心計我, 憶想分別, 謂我作惡我受, 我作善亦我受. 此是惡業. 從本已來無, 橫憶想分別, 謂爲是有. 此是惡業.

 

 

[해설]

여기서 인용한 경전은 첫번째 것은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이고, 두번째 것은 유마경』 「제자품(弟子品)이다.

임제의 시중(示衆)에 다음과 같은 구가 있다.

 

무명(無明)에는 주처(住處)가 없고 무명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보리(菩提)에도 주처가 없다. 그러니 얻은 자도 없다

 

임제의 스승인 황벽도 이 문제를 두고 전심법요에서 자세히 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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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를 구제하는 것

 

: 누가 사람들을 자아의 미망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가.

: ()은 자아를 해방시킬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하면 아()의 특징에 얽매이므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고, ()을 관함으로 해방이 되는 것이다. 만약 특징에 홀려서 이것저것 분별을 한다면 즉시 용광로로 변해버린다. 우두(牛頭)아파(阿婆)등이라 불리는 지옥의 귀()들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온갖 생사의 특징이 일어난다. 만약 법계가 본질적으로 열반과 같음을 생각한다면 이것저것 분별하지는 않는다. 벌써 법계(法界)의 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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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誰能度我. , 法能度我. 何以得知, 取相故墮地獄, 觀法故解脫. 若見相憶想分別, 卽受湯爐炭, 牛頭阿婆等事, 卽現見生死相. 若見法界性卽涅槃性, 無憶想分別, 卽是法界體.

 

 

[해설]

이것은 앞에서 밝힌 죄업이 실()이 없다는 것에 대한 문답이다. 이법(理法)이 사람을 해방시킨다는 것은 자성이 청정하다는 이(), 즉 이입(理入)을 뜻한다. 법계에 대해서는 제20, 36단에서 설명이 있었고 제44단에서도 다루게 된다.

()의 특징에 얽매이므로이하는 안심법문에도 인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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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法界)의 주체

 

 

: 어떤 것이 법계(法界)의 주체인가.

: 너의 심체(心體)가 바로 법계의 주체인 것이다. 본래 법계에는 주체도 없고 한계도 없다. 그 광대함은 허공과 같고 볼 수도 없다. 이것을 법계의 주체라고 한다.

 

, 云何法界體. , 心體是法界體. 此法界無體, 亦無畔齊, 廣大如虛空不可見, 是名法界體.

 

 

[해설]

 

법계에 대한 해석은 기신론에 입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담림은 달마어록을 작성하기 전에 벌써 기신론을 읽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원효의 해석에 의하면 기신론금강삼매경을 소의(所依)로 하였으니 달마어록이 작성되기 전에 벌써 금강삼매경이 저술되어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필자의 추량에 의한 것이지만 금강삼매경은 삼론종에서 저술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더욱 더 굳어진다.

금강삼매경과 달마의 이입사행론의 관계는 필자의 큰 과제로 되어있다. 이 과제가 규명이 되면 원효의 공적도 다시금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49단에서는 ()의 본체는 그 기체(基體)가 없는 것으로 법()의 본체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법계를 대상화하면 광대함이 허공과 같고 주체화해서 보면 이보다 더 확연한 실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심체(心體)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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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법(理法)을 안다

 

 

: 어떻게 이법(理法)을 아는가.

: 이법이란 사람의 각지(覺知)를 초월한 것이니 이를 가리켜서 부르는 이름이다. 네가 만일 각지를 초월한 것을 알 수 있다면 너는 벌써 이()를 아는 것이다. 이법은 마음의 분별로 아는 것이 아니며 보이지도 않는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네가 만일 분별을 하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것을 안다면 너는 법()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일체의 법을 모르는 것을 법을 안다고 하는 것이며 일체의 법을 터득하지 않음을 법을 터득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일체의 법을 보지 않는 것을 법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일체의 법을 분별하지 않음을 법을 분별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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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云何知法. , 法名無覺無知. 心若無覺無知, 此人知法. 法名不識不見. 心若不識不見, 名爲見法. 不知一切法, 名爲知法, 不得一切法, 名爲得法. 不見一切法, 名爲見法, 不分別一切法, 名爲分別法.

 

[해설]

이것은 제3단에서 가르친 칭법행(稱法行)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각지(覺知)란 견문각지(見聞覺知)를 가리킨다. 분별은 견()과 같은 의미, 대상을 두고 일어나는 작용이다. 이법(理法)을 아는 것은 그러한 대상을 두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그렇다고 해서 각지를 떠나서 알게 되는 것도 아니다. 견문각지에 대해서는 전심법요에 자세한 해설이 나온다.

본다라는 말은 견()이지만 이 견()안다라는 의미이다.

 

 

 

 

 

 

 

 

 

 

 

 

 

 

 

18.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을 초월한 이법(理法)과 각자(覺者)

 

 

: 이법(理法)은 무견(無見)이라고 불리는데, 어떤 것이 무애(無碍)의 지견(知見)인가.

: 무지(無知)가 바로 무애의 지()이고, 무견(無見)이 바로 무애의 견()이다.

: 이법(理法)은 무각(無覺)이라 불리는데 불()을 각자(覺者)라고 하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 이법은 무각이라 불린다. ()을 각자라 부르는 것은 무각을 각()이라 하는 것이고, 이법과 함께 깨닫는 것이 불()의 각()인 것이다. 만일 되풀이하여 심을 관찰하고 분석한다면 이법의 특징이 보인다. 되풀이하여 심의 활동을 관찰하면서 적멸한 곳이며, 무생(無生)하는 곳이며, 해방되는 곳이며, 공한 곳이며,보리(菩提)의 장소라고 생각하고, 심에는 활동하는 장소가 없고, 법계의 장소이며, 도장(道場)이며, 법문(法門)의 장소이며, 지혜의 장소이며, 선정이라는 무애(無碍)의 장소라고 생각을 한다. 만일 이렇게 이해하는 자는 구제도 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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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法名無見, 云何無碍知見. , 無知是無碍知, 無見是無碍見. . 法名無覺, 佛名覺者云何. , 法名無覺, 佛名覺者, 無覺爲覺, 與法同覺, 是佛覺. 若勤看心相, 見法相, 勤看心處, 是寂滅處, 是無生處, 解脫處, 是空處, 菩提處. 心處無處處, 是法界處, 道場處, 法門處, 智惠處, 禪定無碍處. 若作如此解者, 是墮坑落人.

 

 

[해설]

불법(佛法)은 심()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좌선에 의해서 심을 해방시키는 것도 아니고 무애(無碍)를 깨닫고 그것을 종()으로 삼는 것도 아니다. ()은 본래 청정한 것이고 일체의 상()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반야의 지()는 무지(無知)의 지()이고, 무견(無見)의 견()인 것이다. ()은 대각(大覺)이며, 흔히 불려지는 각자(覺者)가 아니다.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의 서()대각(大覺)은 명명(冥冥)하여 무언무설(無言無說)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또 말한다. “성심(聖心)은 미은(微隱)하여 해()를 절()하고 지()를 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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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가지의 바라밀

 

: 여섯 가지의 바라밀의 실천이 능히 일체지(一切智)를 낳는다고 하는데 무슨 의미인가.

: 바라밀에는 자()도 없고 타()도 없다. 누군가 받고 누군가 얻는다는 것도 없다. 중생이라는 생물은 업()을 공통적으로 전생의 보()로 이어받고 있는 것이며 여래의 복()과 그 특징을 구별할 수도 없는 것이다. 경전에 말하고 있다. 난승여래(難勝如來)와 그 무리 중의 가장 비천한 거지에 대해서도 평등하게 대비(大悲)의 마음을 두고, 법시(法施)를 베푸는 것을 시() 바라밀의 실천이라 부른다.

사태도 없고 그 근거도 없고 애증의 마음도 없다. 신체가 여여(如如)로 되어 전혀 비()라는 것이 없으니 어느 누구도 시()도 구하지를 못한다. 시비(是非)의 분별이 일어나지 않음으로, 정신적으로 지계(持戒)의 몸이 청정하다. 이를 절제의 바라밀이라 부른다.

()은 안팎을 초월해 있고 피차(彼此)를 나눌 수도 없다. 음성도 그 본성으로 오염될 수가 없으니, 허공처럼 평등한 것을 인수(忍受) 바라밀의 실천이라 부른다.

온갖 감각기관이 활동하는 작용의 영역을 벗어나 철저하게 개발되어 있고, 어떠한 특징에도 머물지 않는 것을 노력 바라밀의 실천이라 부른다.

삼세(三世)는 그 상()이 있느 것이 아니니 일념(一念)도 머물지 않고, 현재의 사실에도 머물지 않으니 정적(靜寂)과 행동이 본래 일여(一如)인 것을 선정 바라밀의 실천이라 부른다.

열반도 진여도 그 본성은 알 수 없다. 무의미한 의론을 일으키지 않고, 심의 분별을 떠나 방편에도 머물지 않은 것을 여여(如如)라 한다. 실천으로 새삼스럽게 할 것도 없고 한다 해도 그냥 하는 것도 아니다. 경전에 지혜로 뒷바침이 되어있는 방편(方便)은 해방이라고 설하기에 이를 반야 바리밀의 실천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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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六波羅蜜能生一切智. , 波羅蜜者, 無自無他, 誰受誰得. 衆生之類, 共業果報, 無有分別福之與相. 經云, 難勝如來, 及會中最下乞人, 等於大悲, 具足法施, 名爲檀波羅蜜. 無事無人, 無有樂厭, 體性如如, 究竟無非, 其誰求是. 是非不起, 卽戒體淸淨, 名爲尸波羅蜜. 心無內外, 彼此焉寄. 音聲之性, 無所染者, 平等如虛空, 名爲�●提波羅蜜. 離諸根量, 究竟開發, 不住諸相, 名爲毗梨耶波羅蜜. 三世無相, 刹那無住處, 事法不居, 靜亂性如, 名禪波羅蜜. 涅槃眞如, 體不可見, 不起戱論, 離心意識, 不住方便, 名爲如如, 無可用, 用而非用. 經云, 有惠方便解. 是故名爲波若波羅蜜.

 

 

[해설]

여섯 가지의 바라밀에 대해서 실천을 새롭게 해석하여 가르치고 있다. 보시에 관해서는 전에 칭법행(稱法行)에서 설명한 적이 있다. 일체지(一切智)를 든 것은 칭법행으로써의 바라밀임을 밝힌 것이다.

경전이란 유마경보살품을 가리킨다.

여여(如如)는 진여와 그 뜻이 같다. 금강경의 여여부동(如如不動)과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19.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달마어록 이입사행론』⑨의 본성은 도 아니고 도 아니다 | 祖師語錄

 

 

*해방된 심()

 

 

: 어떤 것을 해방된 심()이라 부르는가?

: ()은 색()이 아님으로 색에 속하지 않는다. ()은 색()이 아닌 것도 아니니 색()이 아닌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은 색()을 비추지만 색()에 속하지 않는다. ()은 색()이 아닌 것을 비추지만 색()이 아닌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즉 심()은 색()이라는 눈에 보이는 그 특징을 초월해 있다. ()은 색()이 아니지만 색()이 아닌 것이 공()이 될 수도 없다. ()은 색()으로써의 심()도 아니고 태허(太虛)와 같은 것도 아니다. 보살은 명료하게 공()과 불공(不空)을 비춘다. 소승은 공()을 비추지만 불공(不空)은 비추지 못한다. 성문은 공()을 터득하고 있지만 불공(不空)은 터득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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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何名解脫心. , 心非色故, 不屬色, 心非非色, 不屬非色. 心雖照色不屬色.

 

心雖照非色不屬非色. 心非色相可見. 心雖非色, 非色非是空. 心非色心,

 

不同太虛. 菩薩了了照空不空. 小乘雖照空, 不照不空. 聲聞雖得空, 不得不空.

 

 

[해설]

10단과 제17단에서 다룬 과제를 재론하고 있다.

()은 대상을 비추지만 그 대상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심은 대상이 아닌 것, 즉 공()도 비추지만 그 공()에 속해서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이러함을 심의 해방이라 부른다. 이러한 심의 해방에 관해서 신회(神會)는 거울에 비유하여 그 역할을 지()라고 했다.

불공(不空)에 관해서는 제6단에서 다룬 공견(空見)을 깨트리기 위해서 삼론종이 특히 강조를 한 개념이다.

삼론현의(三論玄義)에 다음과 같은 논설이 있다.

 

소승은 다만 공()을 규명한데서 머물고, 아직 불공(不空)에 대해서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대승은 공()을 규명하면서 그와 함께 불공(不空)을 논한다. 그러므로 열반경에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불제자는 다단 공()을 일고 불공(不空)을 모른다. 지자(智者)는 공()과 불공(不空)을 함께 깨닫는다. ()이란 모든 생사를 가리키고, 불공(不空)은 열반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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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망집(妄執)

 

 

: 어떠한 점을 두고, 일체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고 말하는가?

: 심의 본체는 기체(基體)가 없는 것을43) ()의 본체인 것이다. 심은 색()44)이 아니므로 유()가 아니지만, 활동을 하고 활동하는 것을 그치지 않음으로 무()가 아니다. 또한 활동을 하지만 항시 공함으로 유()가 아니며 공이지만 항시 활동하므로 무()도 아니다.

또 심은 자성(自性)을 갖고 있지 않기에 유()가 아니지만 연()에 의해서 일어남으로 무()도 아니다. 범부는 유()에 멈추고 소승은 무()에 머문다. 보살은 유()에도 무()에도 멈추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심을 제멋대로 생각한 망상이라 부른다.

()은 색이 아니므로 색에 물들지 않는다. 색이 아닌 것은 색이 아니므로, 색이 아닌 것에 물들지 않는다. 또한 본 것을 보려하지 않고 보지 않은 것을 보지도 않는다. 이것을 법을 본다고 말한다. 안 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모른 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것을 법을 안다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을 망상이라 부른다.

() 그 자체가 무심(無心)인 것이다. ()은 무심이므로 법심(法心)이라 불린다. 오늘 수행자는 이 생각에 의하여 일체의 미혹을 끊는다. 심은 허공처럼 파괴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금강심(金剛心)이라 불린다.

()은 주()에 머물지 않고 부주(不住)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반야심(般若心)이라 불린다. 심의 본체는 넓고 크며, 그 운동에는 방향이 없다. 그래서 마가연(摩訶衍)의 심()이라 불린다. 심은 해방을 본래 본질로 하고 있고 지금도 무슨 장애를 할 것이 없다. 그래서 보리심(菩提心)이라 불린다.

()에는 한계라는 것이 없고 방각도 없다. 심은 개체적인 것을 초월하기에 주변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활동하고 활동을 그치지 않으니 주변이 없는 것도 아니다. ()45)가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제()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실제심(實際心)이라 부른다.

()에는 변이도 없고 불변이(不變異)도 없다. 심 그 자체는 실체가 없으나 불변이기에 실체를 이루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여심(如心)46)이라 부른다. 즉 심 그 자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변이라 부르고, 대상에 응해서 움직이는 것을 무변이(無變異)라 부르며, 진여심(眞如心)이라고도 부른다.

()은 안팎이나 그 주변에 있지도 않고 모든 방소에 있는 것도 아니다. 심은 머무를 처소를 갖지 않고 이것이 법이 머무는 처소, 법계가 머무는 처소이니 법계심(法界心)이라고도 불린다.

()의 본성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고, 옛이나 지금이나 변화하지 않으니, 법성심(法性心)이라 불린다.

()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니 열반심(涅槃心)이라 불린다.

만일 이러한 생각을 한다면 망상에 의한 역립(逆立)이니 자신의 심()이 허망한 대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 파랑심(波浪心)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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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何名一切法非有非無. , 心體無體, 是法體. 心非色故非有, 用而不廢故非無. 復次用而常空故非有, 空而常用故非無. 復次無自性故非有, 從緣起故非無. 凡夫住有, 小乘住無, 菩薩不住有無, 是自心計妄想. 色非色不染色, 非色非色不染非色. 復次不見見, 不見不見, 是名見法. 不知知, 不知不知, 是名知法. 如是解者, 亦名爲妄想. 卽心無心, 心無心故名爲法心. 今時行者, 以此破一切惑, 心如虛空, 不可破壞, 故名爲 金剛心. 心不住住, 不住不住, 故名爲波若心. 心性廣大, 運用無方, 故名爲摩訶衍心. 心體開通, 無障無碍, 故名爲菩提心. 心無崖畔, 亦無方所. 心無相故非有邊, 用而不廢故非無邊. 非有際非無際, 故名爲實際心. 心無異無不異, 卽心無體. 不異而無不體, 非不異無異不異, 故名爲如心. 卽心無變名異, 隨物而變名無異, 亦名眞如心. 心非內外中間, 亦不在諸方, 心無住處, 是法住處, 法界住處, 亦名法界心. 心性非有非無, 古今不改, 若名爲法性心. 心無生無滅, 故名爲涅槃心. 若作如此解者, 是妄想顚倒, 不了自心現境界, 名爲波浪心.

 

 

[해설]

자신의 마음이 나타내는 갖가지의 망상분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능가경에서 설하는 오법(五法명상(名相망상(妄想정지(正知진여(眞如)의 하나이다.

자기의 마음이 대상을 나타낸다는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은 대승불교의 통설인데 특히 능가경에서 철저하게 설하고 있지만, 여기에 나오는 망상비판은 기신론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하지만 기신론역시 능가경에 입각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심·반야심·마가연심·실제심·여심·진여심·파랑심 등의 심의 명상(名相)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것은 망상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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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마음이 멋대로 나타낸 것

 

 

: 어떻게 자기의 마음이 제멋대로 나타내는가.

: 일체의 법은 유()라고 생각한다. ()는 그 스스로 유()가 아니고 자기의 마음이 유()라고 독단을 하기 때문이다. 일체의 법은 무()라고 생각한다. ()는 그 스스로 무()가 아니다. 자기의 마음이 무()라고 독단하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일체법에 대해서도 똑같다. 모두 자기의 마음이 유()라고 독단하고 무()라고 독단하는 것이다.

탐욕은 무엇에 대해서 탐욕을 내는가. 모두 자기의 마음이 제멋대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자기자신의 마음으로 단정을 하는 것이지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것을 망상이라 부른다. 자기가 일체의 외도(外道)의 독단이 틀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망상이다. 자기가 무념(無念)이고 무분별(無分別)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망상이다. 걸어갈 때는 법이 걸어간다. 내가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걸어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앉아있을 때도 법이 앉아있다. 내가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앉아있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생각도 망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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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云何自心現. , 見一切法有, 有自不有, 自心計作有. 見一切法無, 無自不無, 自心計作無. 乃至一切法, 亦復如是, 竝自心計作有, 計作無. 貪似何物作貪解. 此皆自心起見故, 自心計無處所, 是名妄想. 自謂出一切外道計見, 亦是妄想. 自謂無念無分別, 亦是妄想, 行時法行, 非我行非我不行. 坐時法坐, 非我坐, 非我不坐. 作此解者, 亦是妄想.

 

 

[해설]

앞에서 설명한 파랑심(波浪心)을 분석한다.

"걸어갈 때는 법이 걸어간다"는 칭법행(稱法行)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니 여기서 비판을 하고 있다. 6단에서도 유마경을 인용하면서 언급하고 있는데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된다. 임운등등(任運謄謄), 고와방임(高臥放任)이라는 보살의 생활태도와 어떻게 다른지 어려운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상 제50단까지 우리나라에 전해진 선문촬요(禪門撮要)와 대조를 하여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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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선사(緣禪師)의 말

 

 

연선사(緣禪師)가 말을 했다. "너희들이 큰 의사(意思)를 일으킬려면 전생의 결습(結習)이 반듯이 함께 멸진해야 한다."

"무엇을 정결(正結)47)이라 하고 무엇을 여습(餘習)이라 하는가."

"생멸은 정결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우치(愚痴)의 여습이다. 사용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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緣法師曰, 若欲取遠意時, 會是結習俱盡. , 何謂正結, 何謂余習. , 生滅是正結, 不生不滅是愚痴家余習, 不可用.

 

 

[해설]

51단은 돈황본에 의거한다. 스타인본(Stein)연선사(緣禪師)의 말이 결락되어 있다. 여기서부터는 달마의 제자들이 등장한다.

연선사가 어떠한 인물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달마의 법을 이어받은 직계의 제자로 보인다. 이하 제57단까지 연선사와 다른 제자들과의 문답으로 되어 있다. 이 대화의 특색은 속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습(結習)이란 결사(結使)의 습기를, 정결(正結)은 결사 그 자체이다. 여습(餘習)이란 습기와 같은 의미이다.

 

 

 

20.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법과 사람과

 

 

: 결국 법에 의지할 것인가, 사람에 의지할 것인가?

: 내가 깨달았을 때는 사람도 법도 의지하지 않았다. 네가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 것은 역시 편견이다. 사람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지 않는 것도 편견이다.

더 말하면 만일 할 체기(體氣)48)가 있다면 사람에도 법에도 속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근성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를 제일로 하기에 사람이나 법에 속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세워서 옳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 휩쓸리게 되고 만다. 결국 불()을 승리자로 생각하는 것도 휩쓸리지 않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자기의 입장을 잃고서 그 사람에게 의지만 하는 신앙심이 먼저 생기기 때문이다.

더 말하면 어리석은 자는 불()을 승리자로 생각하고 열반을 법의 성과로 생각한다. 벌써 사람과 법에 휩쓸려 버린 것이다. 만일 법성과 실제는 우리들의 지()와 불지(不知)에 관계하지 않는다는 진리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성은 생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것도 또한 스스로 휩쓸려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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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爲依法, 爲依人. , 如我解時, 人法都不依. 依法不依人者, 還是一箱見, 依人不依法者亦爾. 又曰, 若有體氣時, 免人法, 精神亦可. 何以故, 貴智故, 被人法. 若重一人爲是者, 卽不免此人惑亂, 乃至謂佛爲勝人者, 亦不免. 何以故, 迷境界故, 依此人信心重故. 又曰, 愚人謂佛人中勝, 謂涅槃法中勝者, 卽被人法之所惑亂. 若謂法性實際, 不問知與不知, 謂自性不生滅, 亦自.

 

 

[해설]

9단에서 삼장법사(三藏法師)의 말을 인용하면서 깨달을 때는 법이 사람을 뒤좇고, 미혹에 있을 때는 사람이 법을 뒤좇는다고 했다. 지금 여기서는 그러한 사람과 법과의 관계를 새로 비판하고 있다. 9단에서는 법을 배우려는 사람에게 설명을 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임제가 인()과 법()과 경()에 대해서 설하면서 탈()과 불탈(不奪)을 설하는 것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질문자의 취지를 어느 쪽이든 물리치고 의존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에 주안을 두고 있다. 자기자신의 체험에만 의존한다는 달마선의 종지(宗旨)를 밝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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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법사(志法師)의 질문

 

지법사(志法師)가 식육(食肉) 처리업자들이 모여있는 길거리에서 연법사(緣禪師)를 만났다.

(): 저 사람들이 양()을 죽이는 것을 당신은 보았군요.

(): 나의 눈은 맹목(盲目)이 아닐세. 어찌 보이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 연공(緣公)은 말하자면 그것을 보았겠군요.

(): 당신은 또 하나, 그것을 보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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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法師屠兒行上見緣法師問, 見屠兒殺羊不. 緣法師曰, 我眼不盲,

 

何以不見. 志法師曰, 緣公乃言見之. 緣師曰, 更乃見之.

 

 

[해설]

지법사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탁발을 하다가 연법사와 만나게 되어 살생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장면을 다룬 글이다.

출가를 해서 수행을 하는 자는 먼저 지계(持戒)가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이러한 문제는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기에 유마경보살품이나 제자품에서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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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망상

 

 

()법사가 또 물었다.

"만일 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범부의 견해입니다. 사물의 성()은 공하다고 생각한다면 이승(二乘)의 견해입니다. ()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연각(緣覺)입니다. 자비심으로 사람을 대한다면 애견(愛見)의 비()입니다. 감성으로 사물을 본다면 외도의 견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색()과 비색(非色)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벌써 견해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어떻게 생각을 하면 이상과 같은 과실을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법사가 대답했다.

"나는 전혀 그러한 번거로운 생각을 하지 않지. 그것이 올바른 나의 견해라오. 당신은 이것저것 그러한 망상을 일으키니 스스로 혹란을 당하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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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師復問, 若作有相見, 卽是凡夫見, 若作性空見卽二乘見. 若作非有非無見, 卽是緣覺. 若怜愍見則是愛悲見. 若用心見, 卽是外道見. 若以識見, 卽是天魔見. 若不見色與非色, 復不應有見. 若爲見得, 遠離諸過. 緣師曰, 我都不作爾許種見, 正名作見. 爲作如許種種妄想, 自惑自亂.

 

 

[해설]

연법사와 지법사와의 대화이다. 연법사는 일체의 학문적인 견해를 물리친다. 학설이란 애당초 고정된 입장을 취하여 세워진 것이니 결국에는 물리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연법사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응답을 하면서도 결국에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이 입장임을 상대방에게 알려준다.

()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도 주목이 간다. 유마경』 「문질품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 즉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상대만을 고정시키게 되니 사랑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내용이다. 무연(無緣)의 대비(大悲)란 바로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의 논리 위에서 대비로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을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연법사에게 물었다.

"왜 당신의 법()을 나에게 가르쳐주시지 않습니까?"

"내가 만일 내 법을 내세워서 너에게 가르치면 이건 벌써 너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된다. 내가 만일 법을 내세운다면 이건 벌써 너를 속이고, 너를 배신하게 된다. 내게는 법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있겠느냐. 필경 명칭이 있고 문자가 있는 것은 모두 너를 속이는 것이 된다. 대도(大道)의 큰 뜻을 어떻게 너에게 조금이라도 대답할 수가 있겠느냐. 대답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벌써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그 사람이 아무리 물어도 연법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다시 "어떻게 하면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대도(大道)라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내 생각으로는 마음 그 자체는 알 길이 없다. 그 속이 컴컴하여서 깨우쳐 알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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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人問緣師, 何以不敎我法. , 我若立法敎, 卽是不作接. 若我立法, ??é, 卽負失. 我有法, 何以得說示人. 我那得向. 乃至有名有字, . 大道意那芥子許得向. 若得道, 卽作何物用. 更問卽不答. 後時復問, 若爲安心. , 不得發大道心. 如我意者, 卽心無可知, 冥然亦不覺.

 

 

[해설]

결국 희론(戱論)을 물리치는 대화이다. 이법(理法)을 타인에게 가르칠 수는 없다. 배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법이 아니라 문자에 지나지 않고 명칭에 지니지 않는다.

대도(大道)의 큰 뜻이란, 대도 그 자체의 뜻이 된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것은 그 뜻에 어긋나는 것이 되고 만다. 그 속이 "컴컴하다"는 말의 원문은 "명연(冥然)"으로 되어 있다. 선가(禪家)에는 예부터 "대각명명(大覺冥冥) 불각불지(不覺不知)"라는 말이 있다. 대도는 일으키지 않는 것이 대도일 것이다.

 

43) ()이라 불리는.

44) 물질.

45) 경계(境界).

46) 있는 그대로라는 뜻.

 

 

21.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달마어록 이입사행론』⑩네 마음을 꺼내 보여라 | 祖師語錄

 

 

 

*()란 무엇인가

 

 

또 물었다.

어떤 것이 대도(大道)입니까?”

너는 마음을 일으켜서, 그 도()에 두려고 하니, 호묘(好妙)한 마음이 생긴 것이다. 사물이 있는 것처럼 도가 있다고 하는 분별심이 생긴 것이다. 만일 도를 일으키려고 하면 교위(巧僞)가 생긴다. 분별심을 일으켜서 수단을 생각하면 모든 게 호위(好僞)가 되어 버린다

또 물었다.

무엇을 호위(好僞)라 합니까?”

지식이나 분별에 의해서 명칭을 붙이면 기교가 수없이 생긴다. 호위를 끊으려면 보리심을 일으키지 말고, 경론에서 얻은 지혜를 꺼내서는 안된다. 거기서 비로소 체기(體氣)가 생기는 것이다.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법을 구하지 않고 지()를 즐기지도 않는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다른 답이 있다.

깨달음을 구하지도 않고, 타인의 스승이 되려고 하지 말고, 법을 스승으로 하지도 않는다면 자연히 독보(獨步)를 할 수 있다.”

또 다른 답이 있다.

너는 귀매(鬼魅)의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내가 보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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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問, 何者是道. , 欲發心向道, 巧起, 墮在有心中. 若欲起道, 巧僞生. 有心方便者, 皆僞生. 又問, 何謂僞. , 用知解邀名, 百巧起. 若欲斷僞時, 不發菩提心, 不用經論智. 若能爾者, 始欲有人身體氣. 若有精神, 不貴解, 不求法, 不好智, 少得閑靜. 又曰, 若不求妙解, 不與人爲師, 亦不師於法, 自然獨步. 又曰, 不起鬼魅心, 我亦可將接.

 

 

[해설]

보리심은 결국 경론에서 터득했다는 지혜를 무()로 돌린다. 당시 북위의 선승들은 교학보다도 체기(體氣)를 구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연법사는 그러한 선승들의 지도자였던 모양이다. 체기는 기()를 의미하고 귀매(鬼魅)는 헛개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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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개비(鬼魅)

 

 

: 무엇을 귀매(鬼魅)의 기()라 합니까?

: 눈을 감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이다.

: 나는 마음을 통일시키고 선정에 들어가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 그건 선박(禪縛)이니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 결국 사선(四禪)에 들어가도 모두 단계적인 정적(靜寂)에 지나지 않는다. 또다시 산란해져서 헛짓이 되고 만다. 이것은 만들어낸 이법(理法)이다. 오히려 이법을 파괴하는 것이고 이법을 터득한 것은 못된다. 만일 인간의 성()이 정란(靜亂)이 없는 것임을 알기만 하면 되고, 그렇게 되면 정란에 지배되지도 않는다. 근성이 있는 사내라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다른 답: 스스로 해방을 바라지도 않고 혹심(惑心)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즉 심지(深智)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건 그것으로써 안온한 사람이다. 법 하나라도 바라고 내세우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벌써 그 법이 너를 옭아매어 유심(有心) 속에 떨어뜨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의지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범부가 명칭과 문자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 무수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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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何謂鬼魅心. , 閉眼入定. , 某甲斂心禪定, 卽不動. , 此是縛定, 不中用. 乃至四禪定, 皆是一段靜, 而復亂, 不可貴. 此是作法, 還是破壞法, 非究竟法. 若能解性無靜亂, 卽得自在. 不爲靜亂所攝, 此是有精神人. 又曰, 若能不取解, 不作惑心, 卽不貴深智者, 此是安穩人. 若有一法可貴可重者, 此法最能繫殺, 墮在有心中. 此是不可賴物. 世間凡人, 被名字繫者, 天下無數.

 

 

[해설]

귀매(鬼魅)는 일종의 종교적인 올가미이다. 그러기에 연법사는 눈을 감고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지적을 한다. 당시에는 눈을 감고 습선(習禪)을 한 예가 속고승전에도 나오고 있다.

사선(四禪)의 단계적인 절차가 언급되고, 연법사가 이를 부정하는 태도는 달마의 계승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 부분은 금강삼매경과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금강삼매경에서는 이와 달리 전통적인 사선에 입각해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금강삼매경이 달마의 이입사행론을 불설(佛說)로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저술되었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무너지게 된다.

선박(禪縛)유마경문질품의 의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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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법사(可法師)의 말

 

어느 사람이 가사(可師)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습니까?”

범성(凡聖)이란 모두 제멋대로 망상을 해서 만들어낸 생각에 불과하다

또 묻는다.

모든 것이 망상인 이상, 어떻게 도를 수행하겠습니까?”

너는 도를 무엇에 비교를 해서 수행을 하겠다고 하는가. 법에는 높고 낮은 특징도 없거니와, 법에는 간다든가 온다든가 하는 특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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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人問可師, 若爲得作聖人. , 一切凡聖, 皆爲妄想計作是. 又問, 旣是妄想, 若爲修道. , 道似何物, 而欲修之. 法無高下相, 法無去來相.

 

 

[해설]

가사(可師)란 혜가를 가리킨다. 혜가는 다음에 나오는 안심문답으로 잘 알려진 달마의 직계, 제일의 제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수행의 단계적인 사고를 비판하고 있는 점은 마조 이후의 선()의 특색이 벌써 나타나고 있었던 사실을 시사해 준다.

혜가 뿐 아니라 달마의 제자로 주목되는 낭법사(朗法師)도 똑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낭법사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볼 낭선사의 말에서 다루게 된다.

혜가의 답에 나오는 법에는 높고 낮은 특징도 없다는 말은 금강경, 그리고 법에는 간다든가 온다든가 하는 특징도 없다유마경』 「제자품에 나오는 말이다.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에도 같은 뜻의 구문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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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을 꺼내 보여라

 

또 묻는다.

제 마음을 안정시켜 주십시오.”

네 마음을 꺼내 보여라. 안정시켜 주겠으니.”

또 묻는다.

부디 제자에게 마음을 안정시켜 주십시오.”

예를 들면 재봉사에게 옷을 지어받는 것과 같다. 재봉사는 너의 명주천을 손에 들고 비로소 재단을 할 수 있다. 처음부터 명주천을 보지도 않고 어찌 옷을 만들 수 있겠는가. 너에게 허공을 재단해서 주라고 하는 것인가. 네가 마음을 꺼내보일 수 없는 한 나는 너에게 어떤 마음을 안정시켜 줄 수 있겠는가. 나는 허공을 안정시켜 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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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問, 敎弟子安心. , 將汝心來. 與汝安. 又言, 但與弟子安心. , 譬如請巧人裁衣, 巧人得汝絹帛, 始得下力. 本不見絹帛, 寧得與汝裁割虛空. 汝旣不能將心與我, 我知爲汝安何物心. 我實不能安虛空.

 

 

[해설]

달마어록 중에 가장 유명한 일단이다. 59단에서 제64단까지가 혜가의 어록이며, 달마어록이 관심을 갖고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기 대답이 둘이 제시되고 있지만, 첫 번째의 답인 네 마음을 꺼내보여라. 안정시켜 주겠으니.”로 충분하고, 두 번째의 답은 그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 두 번째의 답은 후세의 어느 사람이 삽입한 것이 아닌가라고 해석하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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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懺悔)의 가르침

 

 

또 묻는다.

저에게 참회를 하게 하여 주십시오.”

너의 죄를 꺼내 보여라. 너를 참회시켜 줄 것이니.”

또 묻는다.

죄는 붙잡을 수 있는 형상이 아닙니다. 무엇을 꺼내 보이라고 하시는지요.”

나는 너를 참회시켜 주었다. 벌써 죄는 사라졌다.”

그 의미를 말하자면 죄가 있다면 참회를 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그러나 죄가 보이지 않는 이상 참회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묻는다.

저에게 번뇌를 끊게 하여 주십시오.”

번뇌가 어디에 있기에 그것을 끊겠다고 하는가.”

또 묻는다.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다면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무엇으로 알고 끊겠다고 하는가.”

또 묻는다.

경전에 일체의 악을 끊고 일체의 선을 수행하여 불()이 될 수 있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것은 망상이 제멋대로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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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焉, 與弟子懺悔, , 罪來, 與汝懺悔. 又言, 罪無形相可得, 知將何物來. , 我與汝懺悔竟, 向舍去. 意謂有罪須懺悔. 旣不見罪, 不須懺悔. 又言, 敎我斷煩惱. , 煩惱在何處, 而敎斷之. 又言, 實不知處. , 若不知處, 譬如虛空. 知似何物, 而言斷虛空. (), 經云, 斷一切惡, 修一切善, 得成佛. , 此是妄想自心現.

 

 

[해설]

이것은 안심문답의 응용이다.

달마에서 시작된 선종이 어떤 수계를 의식에 적용시켰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대중은 각각 먼저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죄를 참회하였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신구의업(身口意業)의 십악죄(十惡罪)에 대해서 나는 지금 마음을 다해 참회를 하오니 부디 죄를 제멸하시고, 영구히 오역죄(五逆罪)와 장중죄(障重罪)를 일으키지 말게 하옵소서.”

 

하지만 혜가는 그것은 망상이 제멋대로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라고 죄의 존재나 형식적인 참회를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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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佛道)의 완성

 

또 묻는다.

방의 제불(諸佛)은 반드시 번뇌를 끊고, 불도를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네가 멋대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지.”

또 묻는다.

()은 어떤 방법으로 중생을 구제합니까?”

거울 속에 비치는 중생의 상()을 구제할 수가 있다면, ()은 올바르게 중생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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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問, 十方諸佛, 皆斷煩惱, 得成佛道. () 汝浪作此計, 無一箇底莫.

 

又問, 佛何以度衆生. , 鏡中像度衆生時, 佛卽度衆生.

 

 

[해설]

번뇌를 끊고 불()이 된다는 관념은 불교의 역사와 함께 오랫동안 정착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서 혜가는 그러한 관념을 부정하고 비판한다.

30단에서도 생사를 버리지 않고 열반을 얻는다.”는 유마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사십이장경(四十二藏經)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젊은 비구가 애욕에 사로잡혀 고민하면서 자기의 그림자를 끊으려고 하자 불타는 이렇게 타이른다.

너의 그림자를 끊는 것보다는 마음을 끊어라.”

 

육조(六朝)시대의 위경인 구경대비경(究竟大悲經)에도 만일 인간이 번뇌를 끊는다면 불()을 죽이는 것이 된다.”고 설하고 있다.

 

 

 

 

 

 

 

 

22.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지옥에 떨어지는 자

 

또 묻는다.

저는 지옥이 무서워서 죄를 뉘우치고 도를 닦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는 저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저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

또 묻는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나도 그 장소를 모른다. 누가 지옥에 떨어지는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면 그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망상이 그렇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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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問, 我畏地獄, 懺悔修道, , 我在何處, 我復似何物. 又言, 不知處. , 我尙自不知處, 阿誰墮地獄. 旣不知如似何物者, 此竝妄想計有, 正由妄想計有故, 卽有地獄.

 

 

[해설]

앞에서 불도(佛道)의 완성 자체를 부정했다. 여기서는 지옥이 있다는 망상을 부정한다. 원시불교 이래 근본문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업()이다. 그러나 달마선에서는 이 업()이라는 관념을 무아(無我)의 입장에서 해결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무아 역시 일종의 관념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개체가 있는 이상, ()는 그 개체를 성립시키는 조건으로써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마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두고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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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깎아서 불()을 만들면

 

또 묻는다.

()라는 것이 모두 망상의 소산이라 한다면 과연 망상은 무엇의 소산입니까?”

법은 크고 작은 것도 없고, 형상도 없고, 높고 낮은 것도 없다. 가령 건물 안에 거석(巨石)이 있고 뜰 앞에 앉아 있다고 하자. 가령 그 거석 위에서 잠을 자든 앉아 있든, 놀랄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지. 그러다가 어느날 불상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어 석공에게 부탁을 하여 불()의 형상을 조각한다. 마음 속에 불()이라는 생각이 떠올라 이젠 죄가 두려워져서 그 거석 위에 앉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은 그 전의 돌임에는 틀림없지만 네가 마음을 일으켜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모든 것은 너의 의식이라는 붓끝이 그려낸 것을 그것이라고 생각하고 제 자신이 당황하고 놀래는 것에 불과하다. 돌 속에는 실은 아무런 죄도, 복도 없는데 네 마음이 멋대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령 화가가 야차(夜叉)나 귀인(鬼人)의 그림을 그린다고 하자. 또는 용이나 호랑이를 그린다고 하자. 자기가 그리고 자기가 보고 곧 자기자신에 공포심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화구(畵具) 속에는 결국 두려워할 것도 없다. 모두 너의 의식이라는 붓이 분별하여 그것이라고 생각한 것에 불과하다. 어찌 무언가 하나라도 있을 것인가. 애당초 너의 망상이 그렇다고 생각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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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問, 其道皆妄想作者, 何者是妄想作. , 法無大小形相高下. 譬如家內有大石, 在庭前. 從汝眼上坐上, 不驚不懼. 忽然發心作像, 雇人畵作佛形像. 心作佛解, 卽畏罪, 不敢坐上. 此是本時石, 心作是. 心復似何物. 皆是意識筆子頭畵作是, 自忙自. 石中實無罪福, 家心者作是. 如人畵作夜叉鬼形, 又作龍虎形, 自畵還自見, 卽自恐懼, 彩色中畢竟無可畏處. 皆是家意識筆子分別作是. 阿寧有一箇物, 悉是妄想作是.

 

 

[해설]

의식이라는 붓이 여러 가지의 형상을 그려낸다는 뜻은 득도의 빠름과 늦음에도 적혀 있다. 이것은 유견(有見)의 비판이며 항시 공견(空見)의 비판과 함께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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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의 설법

 

: ()의 설법에는 어떤 구분이 있는가?

: 능가경에서는 네 가지의 설법을 든다. 즉 법불(法佛)의 설법은 시체허통(是體虛通), 보불(報佛)의 설법은 망상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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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妄想不實), 지혜불(智慧佛)의 설법은 이각(離覺), 응화불(應化佛)의 설법은 여섯 가지의 바라밀이다.

 

, 有幾種佛說法. , 楞伽經有四種佛說. 所謂法佛說是體虛通法, 報佛說妄想不實法, 智惠佛說離覺法, 應化佛說六波羅蜜法.

 

 

[해설]

시체허통(是體虛通)이란 무언(無言)의 설법이다. 망상불실(妄想不實)이란 망념은 본래 공하다는 뜻이다. 이각(離覺)이란 염()을 떠난 자각을 뜻한다.

혜가가 사불(四佛)에 각각 특이한 설법을 해당시킨 점은 매우 주목된다.

종경록에는 능가경의 사불을 들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능가경에서는 사불을 설한다. 1은 화불(化佛), 2는 보생불(報生佛), 3은 여여불(如如佛), 4는 지혜불(知慧佛)이다. 상대방의 기()에 따라 감화로 나아가는 것을 화()라 부른다. 그 나아감에 보답하는 것을 보()라 부른다. 본각(本覺)이 나타내서 비추는 것을 지혜라 부른다. 이체(理體)는 무이(無二)임으로 여여(如如)라고 부른다.

 

 

 

 

 

 

 

 

 

 

 

 

 

 

 

 

 

 

 

 

 

 

 

 

 

23.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달마어록 이입사행론』⑪너의 눈에 보이는 것, 그것이 실제이다 | 祖師語錄

 

 

*능선사(楞禪師)의 말

 

 

어떤 사람이 능선사에게 물었다.

저는 과거나 미래의 일을 연()으로 하여 항시 계박(繫縛)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멈추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으로 생긴다면 벌써 멸진했다고 생각하라. 결국 두 번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심()은 자성(自性)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전에도 일체의 법은 무성(無性)이라고 설했다. 즉 염()이 생겼을 때는 벌써 불생불멸인 것이다. 왜냐하면 심이 생겼을 때 동쪽에서도 오지 않고 남쪽, 서쪽, 북쪽에서도 오지 않는 것이다. 본래부터 오지도 않는 것, 그것이 불생(不生)이다. 불생임을 안다면 벌써 불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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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人問楞禪師, 心緣過去未來事, 卽被繫縛. 若爲可止. , 若緣生時, 卽知滅盡相, 畢竟更不起. 何以故, 心無自性故. 是以經云, 一切法無性. 故一念起時, 卽不生不滅. 何以故, 心生時不從東方來, 亦不從南西北方來. 本無來處, 卽是不生. 若知不生, 卽是不滅.

 

 

[해설]

삼세(三世)의 심()은 불가득(不可得)인 것이다. 멸진(滅盡)했다는 것은 본래 불가득이라는 뜻이다.

능선사는 어떤 사람인가. 찾아볼 자료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연법사나 혜가의 도우(道友), 금강경이나 능가경에서 설하는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능가경불생불멸이란 여래의 이명(異名)이다는 구가 있다. 그리고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에도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제법(諸法)은 본래 무생(無生)이다. ()이며 무자성(無自性)이다. 그런데 방황하는 사람은 갖가지의 인연에 의하여 생기고 멸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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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끊을 수 없다

 

 

또 묻는다.

()이 계박되어서 업()을 만들 때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을까요.”

()은 본래 무()임으로 끊을 필요가 없다. 우리들의 심()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란 망상이 일으킨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경전에 업장(業障)의 죄는 남서북방 사유(四維) 상하(上下)에서 온 것이 아니다라고 설하였다.

모두 네가 물구나무 서듯이 일으킨 것은 생각할 필요마저 없는 것이다. 보살은 과거의 제불(諸佛)의 가르침을 관찰하고, 시방에 죄를 찾아본다 해도 불가득(不可得)임을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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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問, 若繫心成業, 若爲可斷. , 無心故不須斷. 此心無生處, 亦無滅處, 妄想生法故. 經云, 業障罪不從南西北方四維上下來, 皆因顚倒起, 不須疑. 菩薩察過去諸佛法, 十方求之, 悉不可得.

 

 

[해설]

질문을 한 사람은 업()이라는 문제에 고민을 하고 있지만 능선사는 심()이 본래부터 무자성(無自性)임을 알리고, 이로써 해결시키려고 한다. 무자성의 심()이 업()을 만들어낼 리가 없는 것이다. 질문자는 보살인 것 같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경전은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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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선사(顯禪師)의 말

 

 

어떤 사람이 현선사(顯禪師)에게 물었다.

무엇을 약()이라고 부릅니까?”

일체의 대승은 병에 대한 말이다. 만일 마음이 병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어찌 병에 대한 약이 필요할 것인가. ()라는 병에 대해서, 공무(空無)라는 약을 주었다. 유아(有我)에 대해서 무아(無我)라는 약을 주었다. 생멸(生滅)에 대해서 무생멸(無生滅)을 주었다. 아끼는 마음에는 보시를 주었다. 우치(愚痴)에 대해서는 지혜를 주었다. 그리고 사견(邪見)에 대해서는 정견(正見)을 주었다. 미혹에 대해서는 해()를 주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대병(對病)의 말이다. 만일 무병(無病)이라면 어찌 이러한 약이 필요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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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人問顯禪師, 何謂藥. , 一切大乘是對病語. 若能卽心不起病時, 何須對病藥. 對有病故, 說空無藥. 對有我故, 說無我藥. 對生滅故, 說無生滅. 故說布施. 對痴故說智惠, 乃至對邪見故, 說正見, 對惑說解. 此皆是對病語. 若無病時, 何須此藥.

 

 

[해설]

현선사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 사람에 대해서도 알려진 자료가 없다.

달마의 문하에서는 대병(對病)을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대기(對機)의 태도를 끌어내고 있는 것을 현선사의 말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길장의 삼론현의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교학을 순서적으로 살펴보면 소승의 삼장(三藏)은 흔히 유()의 교학을 설하여 이교(異敎)의 학설을 깨트렸다. 그후에 삼장이 유()에 집착하는 것을 제어하기 위하여 반야의 공()을 설하였다. 그후 미혹의 사람들이 공에 집착하기에 방편을 설하여서 공에 대한 집착을 배제시켰다.

 

이 내용은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서()에도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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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선사(瑄禪師)의 말

 

 

어떤 사람이 선선사(瑄禪師: 원문에는 으로 되어 있음. 확인바람)에게 물었다.

무엇을 도의 주체라 합니까?”

()이 도의 주체이다. 그것은 주체가 없는 것을 주체로 한다는 의미이다. 불가사의한 법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심()은 자성(自性)을 갖고있지 않기에, ()가 아니지만 연()에 의하여 생김으로 무()도 아니다. ()은 형상이 없음으로 유()가 아니지만, 움직이며 활동을 함으로 무()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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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人問暄禪師, 何謂是道體. , 心是道體. 此是體無體, 是不可思議法, 非有非無. 何以故, 心無性故, 非是有. 從緣生故, 非是無. 心無形相故非有, 用而不廢故非無.

 

 

[해설]

선선사에 대해서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도의 주체에 관한 내용은 제44단의 심체(心體), 49단의 심()의 본체와 다름이 없고, ()의 자성에 관한 내용도 제49단에서 보인다. 모두 대기(對機)에 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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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선사(淵禪師)의 말

 

 

연선사(淵禪師)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일체법이 필경 공()이라는 것을 안다면 아는 것도 알려지는 것도 공이다. 아는 자의 지혜도 공, 알려지는 것으로서의 법도 공이다. 그 때문에 법()도 지()도 다 공()임으로 공()도 공()이라 한다.

그래서 불장경(佛藏經)과거의 불()도 일체법은 필경 공()이라고 설하고, 미래의 불도 일체법은 필경 공()”이라고 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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淵禪師曰, 若知一切法畢竟空, 能知所知亦空. 能知之智亦空, 所知之法亦空. 故曰, 法智俱空, 是名空空. 故佛藏經云, 過法佛說一切法畢竟空, 未來佛說一切法亦畢竟空.

 

 

[해설]

연법사도 어떤 사람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필경공(畢竟空)은 필경정(畢竟淨)이라고도 한다. ()도 또한 공()이라는 뜻이며 일체가 실상으로써 새로 긍정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것은 중국 불교의 초기에 대승의 교의를 세울 때에 가장 고심한 명제로 알려지고 있고, 역시 노장사상의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에 입각하여서 해결을 보았던 것이다.

한편 공()도 또한 공()이라는 것은 공()에 집착함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6단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이 공공(空空)은 삼론(三論)의 중심교의이다. 길장의 인왕경소(仁王經疏)에 나오는 해석을 읽기로 하겠다.

 

()은 인식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요소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공공(空空)은 그 공이라는 것 자체를 실체화시키는 것을 공하게 한다. 예를 들면, 약을 먹고 병을 고치는데 병이 사라지면 약도 무용하게 된다. 만일 대병(對病)의 약에 집착을 하면 그것이 또다시 병이 되는 것처럼, 공에 의하여 온갖 번뇌의 병을 고쳤다 하더라도 공 그 자체가 오히려 병이 되는 것을 비판하고, 공으로 공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공공(空空)이라 부른다.

 

불장경(佛藏經)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반야계의 대승경전의 하나이다. 그 내용은 일체법은 불생불멸, 무상무위이며, 궁극적으로는 공인 것이지, 그러한 명상(名相)이 없는 존재를 여래가 명상에 의하여 설하고 언어를 초월한 존재를 언어에 의하여 설하는 그 도리를 전개시킨다. 여기에 인용된 것은 정법품(淨法品)6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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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법사(藏法師)의 말

 

 

장법사(藏法師)는 말했다.

일체법에 대하여 어떠한 것도 얻지 않는 사람을 수도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눈으로 일체의 색()을 보는 사람은 눈으로 일체의 색()을 얻지 않는다. 귀로 일체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귀로 일체의 소리를 얻지 않는다. 내지 마음은 작용하는 대상의 세계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마음에 얻는 것이 없는 것, ()은 불()로서 수기(受記)된다.”, “일체의 법은 불가득이며 불가득이라는 것도 불가득이다.”고 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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藏法師曰, 於一切法, 無所得者, 是名修道人. 何而故, 眼見一切色者, 眼不得一切色. 耳聞一切聲者, 耳不得一切聲. 乃至意所緣境界亦如是. 故經云, 心無所得, 佛卽受記. 經云, 一切法不可得, 不可得亦不可得.

 

 

[해설]

종경록97에서도 이 일단을 인용하고 있다. 장법사라는 사람도 달마의 제자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다.

일체법에 대한 해석은 역시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의 논법에 의존하고 있다. 뒤에 나오는 현선사(賢禪師), 각선사(覺禪師)의 해석도 같은 입장에서 논설되고 있다.

장법사가 인용하는 첫 번째의 경전은 금강경이고, 두 번째의 경전은 알 수 없으나 법고경(法鼓經)에서도 같은 내용을 설하고 있다.

 

 

 

 

 

 

 

24. 달마어록 이입사행론

 

*현선사(賢禪師)의 말

 

현선사(賢禪師)는 말했다.

너의 눈에 보이는 것, 그것이 실제이다. 일체법은 모두 실제인 것이다. 과연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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賢禪師曰, 眼見處卽實際, 一切法皆是實際, 更覓何物.

 

 

[해설]

현선사도 누구인지 모르지만 이 설도 장법사의 실천사상과 같은 입장에 서 있다. 임제의 태도와도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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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선사(安禪師)의 말

 

 

안선사(安禪師)는 말했다.

직심(直心)1)이 도()이다. 왜냐하면 바로 생각하고 바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을 관하지 않고, 방편을 구하지도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오랜 경험을 쌓은 수도자이다.

경전에는 설한다.

바로 보면서도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바로 들으면서도 아무 것도 듣지를 않는다. 바로 생각하면서도 아무 것도 생각지를 않는다. 바로 느끼면서 자세를 취하지도 않고 바로 말하면서 번거로워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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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禪師曰, 直心是道. 何以故, 直念直用, 更不觀空, 亦不求方便, 此是久行道人. 經云, 直視不見, 直聞不聽, 直念不思, 直受不行, 直說不煩.

 

 

[해설]

안선사도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는다. 직심(直心)이 바로 도장(道場)이라는 것은 유마경』 「보살품에 나오는 구이다. 안선사는 이것을 실천적인 입장에서 붙잡아 설명하고 있다. 직심이란 결국 인간이 본래 구비하고 있는 자성청정심을 가리킨다.

()을 관하지 않는다는 것은 유마경에는 ()으로써 증()을 삼지 않고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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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선사(憐禪師)의 말

 

연선사(憐禪師)는 말하였다.

법성(法性)은 실체가 없고 바로 작용하니 믿지 않아서는 안된다. 경전에 일체법은 본무(本無)”라고 설하고 있고, 만일 제법(諸法)이 본래 먼저 있고 지금 비로소 무()라면 일체의 제불(諸佛)은 죄과(罪過)를 짓는 것이 된다.”고 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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憐禪師曰, 法性無體, 直用莫疑. 經云, 一切法本無. 經云, 本無心故,

 

如心故本無. 經云, 諸法若本先有, 今始無者, 一切諸佛, 則爲罪過.

 

 

[해설]

연선사에 대한 기록도 없다. 법성에 대해서는 제49단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심체(心體)는 체()가 없다는 뜻이다. 법성이란 여(), 실제와 함께 실상의 이명(異名)인 것이다.

예를 들면 색()은 그대로가 공한 것이지, ()이 멸하여서 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연선사는 바로 이 점을 실천적인 입장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법은 본무(本無)이다의 본무는 즉 반야의 뜻이다.

저 고명한 승조는 심무(心無)’즉색(卽色)’본무(本無)’라는 세 가지의 뜻을 삼의(三義)의 이()라 해석하고 있다. 심무라는 것은 사물에 대해서 무심(無心)이라는 뜻이고, 즉색이란 색을 비워서 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색 그대로가 공하다는 뜻이며, 본무란 일체법을 본무의 소생으로 하는 본체론적인 발상이다.

길장은 승조를 이어받고 여기 나오는 연선사는 길장을 이어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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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선사(洪禪師)의 말

 

 

홍선사(洪禪師)는 말했다.

거의 우리들의 행동은 모두 여()가 아닌 것이 없다. ()을 보고 성()을 듣는 것도 여()이다. 내지 일체법도 또한 여()이다. 왜냐하면 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눈으로 색을 볼 때, 눈에 변함이 없는 것을 눈의 여()라 한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 귀에 변함이 없는 것을 귀의 여()라 한다. ()에 변함이 없는 것은 의()의 여()이다. 이렇게 일체법이 여()임을 느끼면 그것이 바로 여래인 것이다.

경전에 중생도 여()라면 현성(賢聖)도 여()이다. 일체법도 여()”라고 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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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禪師曰, 凡是施爲擧動皆如. 是色聞聲亦如, 乃至一切法亦如. 何以故, 無變異故,

 

眼見色時, 眼無異處, 卽是眼如. 耳聞聲時, 耳無異處, 卽是耳如. 意無異處,

 

卽是意如. 若解一切法如, 卽是如來. 經云, 衆生如, 賢聖亦如, 一節法亦如.

 

 

[해설]

홍선사에 대해서도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티베트에 전해진 선정등명론(禪定燈明論)에도 이 부분이 수록되고 있다. 홍선사는 법의 실상에 통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와 법성(法性)과 실제는 제법의 실상의 이명(異名)인 것이다. ()란 즉 무이(無異)이며 여기에 대해서는 제49단에서도 설명하고 있다.

인용된 경전은 유마경』 「보살품이다.

승조는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을 하고 있다.

 

()라는 것은 시비(是非)를 똑같이 하고, 우지(愚知)를 같게 하고, 수기(授記)를 얻을 것도 없고, 무상도(無上道)를 얻을 것도 없다는 입장을 성취하는 것이다.

 

한편 여래라는 것은 제법이 여()인 뜻이라고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으니 어쩌면 홍선사는 여기에 입각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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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선사(覺禪師)의 말

 

 

각선사(覺禪師)는 말했다.

만일 심이 어떠한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너는 벌써 도적(道迹)을 붙잡았다. 왜냐하면 눈이 일체의 색()에 속하지 않기에 눈은 그 자체가 해방되어 있는 것이다. 귀가 일체의 소리를 들어도 귀는 일체의 소리에 속하지 않기에 귀는 그 자체가 해방되어 있는 것이다. 내지 의()가 일체의 법을 경험하더라도 의()는 일체의 법에 속하지 않기에 의()는 그 자체가 해방되어 있는 것이다.

경전에 설한다. “모든 법은 서로 속하지 않기에 심()과 모든 법은 어느 것이나 서로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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覺禪師曰, 若悟心無所屬, 卽得道迹. 何以故, 眼見一切色, 眼不屬一切色,

 

是自性解脫. 耳聞一切聲, 耳不屬一切聲, 是自性解脫.

 

 

 

[해설]

각선사도 전기가 없다. 이 부분은 종경록97에도 수록되어 있다.

도적(道迹)장자』 「천운편에 나오는 말로 족적(足跡)이라 이해하여도 된다. 71단의 현선사의 말인일체법은 모두 실제이다.”와 제74의 홍선사의 일체법은 모두 여()이다.”에 내용이 통한다.

 

1) 바로 아는 것.

 

이입사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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