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無

頓悟入道要門論

홀로산꾼 2019. 3. 31. 09:43

 

1.돈오입도요문론 [頓悟入道要門論] 頓悟入道要門論 / 선어록

 

돈오입도요문론강론 / 성철스님 법어집/장경각

 

1. 序 說

 

이 논을 지은 이는 마조 도일스님의 제자인 대주 혜해스님입니다. 스님의 전기는 명확하게 기록된 것이 없고 다만 조당집14, 경덕전등록6등에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종합해 보면 마조스님을 6년간 모시고 살았다는 사실만이 스님의 생존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입니다.

 

혜해스님은 건주 사람으로 성은 주씨이며 월주의 대운사 도지화상에게 출가, 득도하였습니다.

 

그 후 스님은 강서에 있는 마조스님을 찾아가 뵈오니, 마조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디서 오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가?”

 

불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의 보배창고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떠나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떤 불법을 구하려 하는가?”

 

그러자 혜해스님이 절을 하고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혜해 자신의 보배창고입니까?”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 것이 너의 보배창고이다. 일체가 구족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고 사용이

 

자재한데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이 말 끝에 혜해스님은 크게 깨쳐서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았는데 그것은 지적인

 

이해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님이 뛸듯이 기뻐서 절을 올려 감사를 드리고 6년 동안 마조스님을 시봉하였습니다.

 

그 후 도지화상이 연로하시므로 대운사로 다시 돌아와서 도지화상을 봉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취와 활동을 감춘 채 겉으로는 어리석게 살면서 돈오입도요문론한 권을 저술하였습니다.

 

이 책을 조카 상좌인 현안이 훔쳐서 마조스님에게 보이니 마조스님이 이것을 보시고 대중들에게,

 

월주에 큰 구슬이 있으니 둥글고 밝은 광명이 비치어 자유자재로와 걸림이 없구나!” 하고

 

감탄하시니 대중 가운데 혜해스님의 성이 주씨임을 알고 있던 자가 있어서 큰 구슬은 바로 혜해스님을 크게 칭찬하는 말임을 알아차리고, “옛날 같이 살았을 때는 그렇게 훌륭한 스님인줄 몰랐는데 이제 보니

 

큰 도인임에 틀림없구나하고 다시 스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도반을 이루어 앞을 다투어 월주의 스님 문하에 들어와서 공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혜해스님을 대주스님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마조스님의 문하에서 대주스님의 위치를 본다면 마조스님 비문에서나 경덕전등록, 조당집에서나 모두 스님을 마조스님의 수제자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덕전등록17백여명의 큰스님 법문이 실려 있지만, 그 중에서도 대주스님의 법문이 가장 많이 실려 있고 제 28권에도 다시 스님의 긴 법어가 따로 실려 있습니다.

 

마조스님의 정맥은 백장스님에게로 내려갔다고 하는 가 이 선가의 정설로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백장스님, 남전스님, 법상스님들 보다 대주스님이 더 유명하였으며 천하에 이름을 더 날렸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돈오입도오문론은 당대에 명성을 떨친 대주스님의 저술이고,

 

또 선가의 대조사이신 마조스님이 극찬한 책이므로 선종의 정통사상을 아는 데 있어서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육조단경이라든가, 전심법요라든가,

 

백장광록이라든가 하는 선종의 어록들이 많이 있지만, 이러한 어록들은 당시 사람들이나 후세 사람들이 그 스님이 입적하신 뒤에 그 법문을 기록하거나 수집한 것이지 본인들이 직접 편찬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돈오입도요문론은 대주스님이 직접 저술하였으므로 거기에 가필이나 착오가 없다고 보며 다른 어떠한 어록보다도 완전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마조스님이 인가하신 논이니 만큼 부처님의 정법을 정확하게 기술한 것으로 선종 초기의 근본사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증도가와 함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돈오란 구경각을 말합니다. 즉 제8아뢰야 근본무명이 완전히 끊어져서 중도를 정등각하여 진여본성을 깨친 증오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도를 증등각한 구경각을 돈오라고 하는 만큼 입도하고 하는 것도 결국은 성불과 같은 뜻으로서 증도라는 말과 뜻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돈오입도요문론은 영가스님의 증도가와 그 사상과 내용이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점을 잘 이해하고 법문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

 

1.불보살[佛菩薩]께 헌사[獻辭] /대주혜회의 [돈오입도요문론]

 

稽首和南十方諸佛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諸大菩薩衆 ,, 대보살님들께 머리 숙여 예배를 올립니다.

 

弟子今作此論,, 부처님의 제자인 제가 이 논을 지었으나

 

恐不會聖心 ,, 부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을까 두려우니

 

願賜懺悔 ,, 부디 참회를 받아 주십시오.

 

若會聖理 ,, 만약 부처님의 이치를 알았거든

 

盡將廻施一切有情 ,, 일체 유정의 중생에게 모두 회향하여

 

願於來世 ,,원하옵건대 내세에

 

盡得成佛,, 다 함께 성불하기를 바라옵니다.

 

********************

 

돈오입도요문론 [頓悟入道要門論]

 

당나라 선승 대주 혜해의 어록집은 이 책 외에 몇가지가 더 있다. 명나라초인 1374년 묘십이 편집한 어록집은 이 책에 제방문인참문어록(諸方門人參問語錄)1권을 추가한 것이고, 나중에 부록으로 초조보리달마대사안심법문을 추가해 책명을 돈오요문(頓悟要門)으로 바꾸었다. 1917년 장사각경처(長沙刻經處)에서 간행한 대주혜해선사어록은 상하 2권이며, 2권은 참문어록이다. 초조보리달마대사안심법문은 혜해의 어록으로 보기 어렵고, 제방문인참문어록은 후대에 경덕전등록등을 참조하여만든것이다

저자는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하에서 6년간 수행하며 깨달음을 얻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돈오입도(頓悟入道)의 요지를 서술하였다. 그에 따르면 해탈은 오로지 돈오에만 있다. 여기서 은 일시에 망념을 없애는 것이며, ‘는 무소득(無所得)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돈오를 이루려면 좌선(座禪)이 가장 중요하다. 문장은 대부분 평이하며, 기발한 표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깊은 선체험이 담겨 있어 주목된다.

내용 중에 여러 경전이 나오는데, 유마경금강경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대반열반경》 《화엄경》 《묘법연화경》 《대승기신론등도 자주 언급된다. 이는 저자가 반야사상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하택신회(荷澤神會:670762)의 어록을 담은 신회어록神會語錄)의 영향을 받아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2. 頓悟

 

欲修何法 어떤 법을 닦아야

 

卽得解脫 해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唯有頓悟一門 오직 돈오의 한 문만이

 

卽得解脫 .곧 해탈을 얻을 수 있느니라.”

 

 

<강설>

 

불법의 근본목표가 바로 생사해탈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해탈에 이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범부중생에게는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84천 법문으로 시설되어 있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이 문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저 문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근본적으로 어떤 법을 닦아야만 곧바로 쉽게 해탈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뜻에서 이 물음을 끌어온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진정한 해탈을 얻으려면 돈오라는 한 문에 의지해서 진여자성을 바로 깨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해탈이란 일체 번뇌망상을 다 여읜 가운데서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구경각을 성취하기 전에는 실질적인 해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실질적인 해탈을 얻는다는 것은 즉 증오가 되어야지 해오가 되어서는 해탈을 얻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십지보살이 설법을 구름 일 듯하고 비 오듯이 잘하더라도 근본무명을 완전히 끊은 해탈이 아니니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진정한 해탈이 되는 것입니다. 또 돈오하면 해탈한다고 했으므로 돈오의 내용과 해탈의 내용은 똑같아서 돈오가 증오이며 바로 구경각인 것입니다.

 

--------------------------

 

云何爲頓悟 어떤 것을 돈오라고 합니까?”

 

頓者除妄念 이란 단박에 망념을 없앰이요

 

悟者悟無所得 悟란 얻은 바 없음[無所得]을 깨치는 것이니라.

 

 

<강설>

 

이것은 돈오의 근본내용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망념을 없앤다는 것은 제8 아뢰야식의 미세망념까지 포함해서 모든 망념을 다 없앤다는 뜻입니다. 보통 우리가 생멸적인 무심을 말해서 망념을 없앤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체적으로 망념을 다 없앤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돈이라 하는가 하면 돈이란 시간적으로 일 찰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망념을 없애는 데 있어서 점차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단계적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바른 법을 알아서 시간적으로 일 찰나간에 근본무명을 완전히 끊고 구경각을 성취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적으로 여유를 두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전체망념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얻은 바 없다고 하는 것은 교가에 있어서는 십지등각보살이라도 아직까지 공부의 자취가 남아 있어서 어느 경에서도 십지등각보살을 무소득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참으로 구경각을 이룬 것을 무소득이라고 하였습니다.

 

8 아뢰야 근본무명을 끊고 십지등각을 넘어서 구경각을 성취한 것이 돈오이니, 삽삼조사로부터 시작하여 천하 선종의 정맥은 구경각을 돈오라 했지 그 중간의 해오를 돈오라고 한 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이 간단한 문구에서 다 표현하고 있습니다.

 

----------------------

 

從何而修 무엇부터 닦아야 합니까?”

 

從根本修 근본부터 닦아야 하느니라.”

 

云何從根本修 어떻게 하는 것이 근본부터 닦는 것입니까?”

 

心爲根本 마음이 근본이니라.”

 

 

<강설>

 

마음을 바로 닦고 마음을 깨치면 돈오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진여자성을 말하는 것이며 중생의 생멸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근본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능가경에 이르기를 마음이 생하면 일체만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면 일체만법이 멸한다고 하였고, 유마경에 이르기를 정토를 얻을려고 하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하나니 그 마음의 깨끗함을 따라 불국토가 깨끗해진다하였고, 유교경에 이르기를 마음을 한 곳으로 통일하여 제어하면 성취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고 어떤 경에서는 성인은 마음을 구하나 부처를 구하지 아니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를 구하면서 마음을 구하지 아니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다스리나 몸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몸은 다스리나 마음을 다스리지 아니한다고 하였고,불명경에 이르기를 죄는 마음에서 났다가 다시 마음을 좇아서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악과 일체의 모든 것은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그런 까닭에 마음이 근본이다. 만약 해탈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모름지기 근본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런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노력을 허비하여 밖으로 나타난 모양에서 구한다면 옳지 않느니라. 선문경에 이르기를 바깥 모양에서 구한다면 비록 몇 겁을 지난다 해도 마침내 이루지 못할 것이요, 안으로 마음을 관조하여 깨치면 한 생각 사이에 보리를 증한다고 하였느니라.”

 

 

<강설>

 

능가경의 말씀은 일체유심조, 즉 일체만법은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이어서 마음 밖에는 법이 없으니 마음이 일체만법의 근본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마경의 말씀은 불국토란 본래 청정함과 더러움이 없지만 중생의 업견으로 보기 때문에 깨끗하다 더럽다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중생쪽에서 중생을 상대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중생들의 더러운 땅[穢土]을 보고 더러움과 깨끗함을 보는 것이고, 또 생멸을 보는 것은 본래 생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러움과 생멸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을 청정하게 닦아서 일체의 망념이 다 떨어질 것 같으면 본래 청정한 불국토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닦아서 마음을 청정히 해야 불국토를 보고 부처를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일체만법의 근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유교경의 말씀은 누구든지 마음을 한 곳에 모아서 잘 닦을 것 같으면 무엇 하나 성취하지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일체만법의 근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잘 제어하여 닦으면 부처도 될 수 있고 조사도 될 수 있고, 마구니도 될 수 있으니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지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에서 하신 말씀은 마음이 부처이지 마음 밖에는 부처가 없으므로 밖으로 무엇이 있는가 하고 구할 것 같으면 영원히 부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처 다르고 마음 다른 것이 아닌데 밖으로 모양과 형상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마음을 바로 깨칠 것 같으면 거기에 부처도 있고 법도 있고 승도 있고 삼신사지가 원만구족하지만, 만약 마음 밖에 달리 부처를 구하려 한다면 부처는 영원히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근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병에도 여러 가지 병이 있는데 병이란 마음에서 나기 때문에 마음을 고치면 병을 고칠 수 있고 몸의 병만 고치려 해서는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의학론이 현재 강력히 대두되고 있으니, 모든 것이 마음의 병에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佛名經의 말씀은 죄와 복이 모두 마음에서 일어났다가 마음에서 없어지니, 어떤 죄와 복을 따지려 하지 말고 마음을 잘 닦을 것 같으면 죄니 복이니 하는 차별은 자연히 해결될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공부를 해서 해탈을 얻으려고 하면 근본 되는 마음을 닦아야지 공연히 지엽적인 것에 쓸데없는 시간과 노력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처인줄 알고 마음을 닦는 것이 바른 믿음이며 밖으로 무엇을 구하면 삿된 믿음입니다. 그래서 禪門經에서는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 알고 마음을 바로 닦을 것 같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니 이것이 돈오하는 비결이며 해탈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닦는 방법 외에는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외우고 옆으로 외워도 소용이 없으니 만큼 누구든지 마음을 깨치고 바로 닦아 돈오하여 해탈하여야 합니다.

 

3. 禪 定

:

夫修根本 근본을 닦으려면

以下法修 어떤 법으로 닦아야 합니까?”

:

惟坐禪禪定 오직 좌선하여 선정을 하면

卽得 얻을 수 있느니라.

禪門經云 선문경에서 이르기를

求佛聖智 부처님의 성스러운 지혜인 일체종지를 구하려고 하면

卽要禪定 선정이 요긴한 것이니

若無禪定 만약 선정이 없으면

念想 망상이

喧動 시끄럽게 일어나서

壞其善根 그 선근을 무너뜨린다고 하였느니라.”

<강설>

우리가 진실로 마음을 잘 닦으려면 마음이 선정에 들어 고요하게 하여야 하며 요동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번뇌망상이 자꾸 일어날 것 같으면 구름이 해를 가리듯이 진여자성을 번뇌가 가려서, 근본은 어둡지 않지만 진여자성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부를 성취하려고 하면 참선을 해야 하고, 참선을 하지 않으면 망상이 일어나서 우리의 마음을 박힐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해탈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

:

云何爲禪 어떤 것이 선이라 하며

云何爲定 어떤 것을 정이라 합니까?”

:

妄念不生爲禪 망념이 일어나지 않음이 선이요,

坐見本性 앉아서 본성을 보는 것이

爲定 정이니라.

本性者 본성이란

是汝無生心 너의 무생심이요

定者 . 정이란

對境無心 경계를 대함에 무심하여

八風不能動 팔풍에 움직이지 아니함이다.

八風者 팔풍이란

利衰毁譽稱譏苦樂 이로움과 손실, 헐뜯음과 높이 기림, 칭찬함과 비웃음, 괴로움과 즐거움을 말한다.

是名八風 팔풍이란

若得如是定者 만약 이와 같이 을 얻은 사람은

雖是凡夫 비록 범부라고 하더라도

卽入佛位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

何以故 왜냐하면

菩薩戒經云 보살계경에 이르기를

衆生 중생이

受佛戒 부처님계를 받으면

卽入諸佛位 곧 모든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고 하셨으니

得如是者 이와 같이 얻은 사람을

卽名解脫 해탈했다고 하며

亦名達彼岸 또 피안에 이르렀다고 한다.

超六度越三界 이는 육도를 뛰어넘고 삼계를 벗어난

大力菩薩 대력보살이며

無量力尊 무량력존이니

是大丈夫 대장부인 것이니라.”

<강설>

망념이 일어나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분별육식 뿐만 아니라

8 아뢰야식의 미세망념까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6식이 끊어졌으나 제8 아뢰야식이 남아있으면 선이 아닙니다.

미세망념이 모두 끊어지면 망념의 구름이 걷히고 진여자성인 지혜의 해가 드러나서

 

자기 본성을 보지 않을래야

보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돈오이며 해탈이며 성불입니다.

본성이란 제8 아뢰야식의 무기심의 무생심이 아니고 제8 아뢰야식의 무기심의 무명까지 완전히 끊어진 진여본성이 본래의 구경 무생심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보는 것이 본성을 보는 것이며 불성을 보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지 아니한 것이 무생심이며 본성이므로 표현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은 똑 같습니다.

정이란 모든 경계를 대할 때 무심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망념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진여본성이 드러나서 대무심지가 현전하여

 

행주좌와와 어묵동정뿐만 아니라,

자나깨나 미래겁이 다하도록 경계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를 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거나 헐뜯거나

기리거나 칭찬하거나 비웃거나 괴롭거나 즐겁거나 하는 팔풍이 거세게 불어닥친다 해도

 

여기에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본성을 바로 깨쳐서 망념이 다 떨어지고 무생법인을 증득해서 일체처에 무심이 되는 것이니, 이런 사람은 설사 겉보기에는 범부같이 보이지만 구경각을 성취한 부처님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범부라고 하는 것은 꼭 사람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팔세용녀가 성불하듯이 남자든 여자든 축생이든 무엇이든지간에 무생법인을 증득하면 모든 부처인 것입니다. 그 이유로서 보살계경

 

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보살계경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계라고 하는 것은 고기를 먹지 말라, 술을 먹지 말라, 하지 말라는 등의 名相에 의지해서 계첩을 받거나 말 몇마디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자성계를 받아서 자성을 바로 깨칠 것 같으면 이것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마음 닦는 법을 바로 알아서 일체망념을 다 여의고 자성을 바로 깨쳐서 무생법인을 증득하여 일체경계에 무심이 되면 아무리 범부라고 하더라도 이 사람이 바로 부처인 것이고, 이것을 해탈이라 하고, 피안 즉 구경상적광토라 하고, 대력 보살이라 하고, 한량없는 힘을 가진 세존인 것이니, 이것을 대장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논의 앞부분에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부처님이 가섭에게 전하고 가섭이 아난에게 전하여 삽삼조사가 계계승승하여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 것은 진여본성 즉 무심을 전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또 육조스님 이후에 오가칠종이 벌어져 천하에 선종이 풍미하게 되었지만 실제 선종정맥으로 바로 내려온 큰스님네가 모두 해탈하여 무생심을 전하였지 다른 것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중간의 해오라든가 다른 점차를 밟아서 본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 깜짝할 사이에 본성을 바로 보아 성불하는 것이 선종의 비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중들은 이런 법문을 많이 듣고 바로 실천하여서 공부를 성취해야지 만약 그렇지 않고 말로만 듣고 귓전으로 흘려보내 버린다면 도리어 듣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니 화두를 부지런히 하여 하루빨리 대장부가 됩시다

 

4. 無住處無住心

 

1.

 

心住何處卽住 마음이 어느 곳에 머물러야 바로 머무르는 것입니까?”

 

住無住處卽住 머무는 곳이 없는데 머무는 것이 바로 머무는 것이니라.”

 

 

<강설>

 

머무는 곳이 있을 것 같으면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망상이 다 끊어졌으니 어떻게 머물 수 있겠습니까? 허공에다 나무를 심었으면 심었지 일체 망상이 다 끊어진 여기에는 부처도 설 수 없고 조사도 설 수 없고 마구니도 설 수 없고, 외도도 설 수 없고 일체가 모두 머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조금이라도 부처를 세울 수 있고 조사를 세울 수 있고 마구니를 세울 수 있고 중생을 세울 수 있다면 이것은 머무는 곳이 있게 되므로 전체가 모두 망념이 되어 名相이 있기 때문입니다.

 

 

2.

 

云何是無住處 어떤 것이 머무는 곳이 없는 것입니까?”

 

不住一切處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함이

 

卽是住無住處 곧 머무는 곳이 없는 데 머무는 것이니라.”

 

 

<강설>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일체처에 무심이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으면 유심이 되고 맙니다. 머물지 아니함이 곧 무심이니, 앞에서 무심이라고 한 것이나 여기에서 무주라고 한 것이나 표현이 다를 뿐 그 내용은 같습니다. 다만 마음이 조금이라도 머물 것 같으면 머무는 곳이 생겨서 머무는 곳이 없음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무심이 무주이고 무주가 무심인줄 알면 여기서 말하는 내용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

 

云何是不住一切處 어떤 것이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不住一切處者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한다 함은

 

不住善惡有無內外中間 선악유무내외중간에 머물지 아니하며,

 

不住空 공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亦不住不空 공 아님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不住定亦不住不定 선정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선정 아님에도 머물지 아니함이

 

卽是不住一切處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함이니,

 

只箇住一切處也 다만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하는 것이 머무는 곳이니라.

 

得如是者 이와 같이 얻은 것을

 

卽名無住心也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無住心者 무주심이

 

是佛心 부처님의 마음이니라.”

 

 

<강설>

 

변견을 떠나서 중도를 정등각하지 않을 것 같으면 무심을 얻을 수 없고, ‘머무름 없음이 될 수 없으며 구경해탈을 할 수 없습니다.

 

선악이나 유무나 내외나 중간이나 공과 공 아님이나 선정과 선정 아님이나 모두가 양변이므로 여기에 머물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일체 양변에 머물지 아니할 것 같으면 이것이 무주처이며 중도며 진여입니다. 그래서 머무는 곳이 없다는 내용은 실제로 중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 양변에 머물지 아니할 것 같으면 이것이 무주처이며 중도며 진여입니다. 그래서 머무는 곳이 없다는 내용은 실제로 중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 양변에 머물지 아니한다는 것이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한다는 것이며 이것을 곧 바로 머무는 곳이라고 말하였는데, 이렇게 표현한 것은 언어의 한계에 부딪혀 할 수 없이 그렇게 말한 것이지 머무는 곳이 있는 머무는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머무는 곳이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난다고 하니까 머무는 곳이 있어서 나는 줄 알면 그 사람은 근본적으로 돈오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머문다는 것은 머무름이 없이 머문다는 것이니 진공묘유입니다.

 

결국 이 말을 종합해 보면 앞에서 양변의 전체를 부정하고 뒤에서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함이 곧 머무는 것이라 하여 양변을 긍정하여 일체가 걸림이 없는 세계가 되어 서로서로 원융자재한 것을 머무는 것이 없다라고 하고 무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체를 이렇게 마음에 잘 이해함을 머무름이 없는 마음[無住心]이라고 하고, 또 부처님 마음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돈오입도요문론에서 주장하는 돈오의 내용은 부처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부처의 지위를 말하는 것이지, 절대로 중간의 해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4.

 

基心似何物 그 마음은 어떤 물건과 같습니까?”

 

基心 그 마음은

 

不靑不黃不赤不白 푸른 것도 아니며 누런 것도 아니며, 붉은 것도 아니며 흰 것도 아니며,

 

不長不短不去不來 긴 것도 아니며 짧은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며,

 

非垢非淨 더러운 것도 아니며 깨끗한 것도 아니며,

 

不生不滅 나는 것도 아니며 없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湛然常寂 담연하고 항상 고요한 이것이

 

此是本心形相也 본래 마음의 형상이며,

 

亦是本身 또 본래 몸이니

 

本身者 본래의 몸이란

 

卽佛身也 곧 부처님의 몸이니라.”

 

 

<강설>

 

담연상적이란 일체 명상을 다 떠나고 생멸을 벗어나서 제8 아뢰야식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라는 표현을 불교 진리의 대명사처럼 흔히 쓰는데, 이것은 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의 양변을 떠난 중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도를 정등각할 것 같으면 이것이 돈오이며 구경각이며, ‘부처님의 마음이며 우리의 본래의 몸이며 부처님의 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돈오의 내용이 중도를 정등각하여 일체의 양변에 머물지 아니하고 구경각을 성취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5. 自性見

 

1.

 

身心 몸과 마음은

 

似何爲見 무엇으로 보는 것입니까?

 

是眼見 눈으로 봅니까.

 

耳見 귀로 봅니까.

 

鼻見 코로 봅니까.

 

及身心等見 몸과 마음 등으로 봅니까? ”

 

見無如許種見 보는 것은 여러 가지로 보는 것이 없느니라.”

 

 

<강설>

 

여러 가지로 본다는 것은 모두가 다 분별망상으로 하는 말로서, 분별이 끊어진 여기에서는 일체가 적멸하고, 모든 명상이 다 떨어진 무심지이므로 여러 가지로 보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2.

 

旣無如許種見 이미 여러 가지로 보는 것이 없을진댄

 

復何見 다시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是自性見 이것은 자성으로 보는 것이다.

 

何以故 왜냐하면

 

爲自性 자성이

 

本來靑淨 본래 청정하여

 

湛然空寂 담연히 비고 고요하므로,

 

卽於空寂體中 비고 고요한 본체 가운데서

 

能生此見 보는 것이 능히 나느니라.”

 

 

<강설>

 

자성이 본래 청정하여 비고 고요한 본체 가운데일체가 원만구족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쓸래야 다 쓸 수 없는 항사묘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진공묘유에서 보는 것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3.

 

只如淨體 , “다만 청정의 본체조차도

 

尙不可得 .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此見從何而有 ,이 보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喩如明鑑中 , “비유하면 밝은 거울 가운데

 

雖無像 , 비록 모양은 없으나

 

能見一體像 , 일체 모양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으니

 

何以故 , 왜냐하면

 

爲明鑑無心故 , 밝은 거울이 무심이기 때문이다.

 

學人 , 배우는 사람이

 

若心無所染 , 만약 마음에 물든 바 없어

 

忘心 不生 , 망심이 나지 아니하고

 

我所心 滅 주관과 객관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自然淸淨 , 자연히 청정이 되니

 

以淸淨故 , 청정한 까닭에

 

能生此見 , 능히 이 보는 것이 생겨난다.

 

法句經云 , 법구경에서 이르기를

 

於畢經空中 , ‘필경의 공 가운데서

 

熾然建立 , 불꽃 일어나듯 건립함이

 

是善知識也 , 선지식이다라고 하였느니라.”

 

 

<강설>

 

청정한 본체에 보는 것이 있다 하면 이것은 청정이 아니며 생멸이 아닌가, 청정한 본체라고 하면 그러한 보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보는 것이 있다고 하니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무심이 아니고 조금이라도 인위적인 조작이 있을 것 같으면 일체 만물을 있는 그대로 비치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이리저리 변동시켜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자성 가운데는 모든 것이 청정해서 한 물건도 찾아볼 수 없고 아무것도 얻어 볼 수 없지만, 또 청정하기 때문에 일체가 거기에 비치고 거기에서 나는 것입니다. 쌍차가 되면 쌍조가 안 될 수 없다는 논리와 같은 것입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마음에 물든 바가 없어 무심이 되고 망념이 일어나지 아니하여 주관과 객관의 마음이 없어지면, 일체가 다 때[]가 없어져서 청정무구한 까닭에 능히 자성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생멸견해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구경말씀에 필경공이란 절대공으로서 전체가 다 공해버렸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부처도 공했고 중생도 공했고 외도도 공했고 마구니도 공하여 아무 것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지만, 그 가운데 일체만법이 불꽃처럼 건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주 전체가 허공 가운데 건립되어 있듯이 청정하여 일체가 설 수 없는 진공 가운데서 묘유의 항사묘용이 거기서 나옴을 熾然建立이라 하고 그것을 선지식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앞에서 말한 무생심이나 무심이 아무 것도 없는 단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청정한 본체 가운데 항사묘용이 있음을 밝히기 위해 이 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6. 涅槃經二句

 

.

 

1.

 

涅槃經 .“열반경

 

金剛身品 .금강신품에 이르기를

 

不可見 . '볼 수 없되

 

了了見 .분명하고 밝게 볼 수 있어

 

無有知者 .아는 것도 없고

 

無不知者 .알지 못하는 것도 없다' 하니

 

云何 . 무슨 뜻입니까?”

 

不可見者 “'볼 수 없다'는 것은

 

爲自性體 . 자성의 본체가

 

無形 . 모양이 없어서

 

不可得故 .얻을 수 없는 까닭에

 

是名不可見也 . 볼 수 없다고 하느니라

 

그러나

 

見不可得者 얻을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體寂湛然 .. 자성의 본체가 공적하고 담연하여

 

無有去來 . 가고 옴이 없으나

 

不離世流 . 세상의 흐름을 여의지 않으니

 

世流不能流 .세상의 흐름이 능히 흐르지도 아니하여

 

坦然自在 . 탄연히 자재함이

 

卽是了了見也 . 분명하고 밝게 보는 것이니라.

 

無有知者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爲自性 . 자성의 모양이

 

無形 . 없어서

 

本無分別 . 본래 분별이 없음을

 

是名無有知者 .이름하여 아는 것이 없다고 하느니라.

 

無不知者 . ‘알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은

 

於無分別體中 .분별이 없는 본체 가운데

 

具有恒沙之用 .항사 묘용을 갖추어서

 

若能分別一切 .능히 일체를 분별하여

 

卽無事不知 . 알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是名無不知者 .이를 이름하여 알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하느니라.

 

般若偈云 .반야의 게송에 이르기를

 

般若 無知 .‘반야는 아는 것이 없으나

 

無事不知 .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般若 無見 . 반야는 보지 못하나

 

無事不見 . 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하였느니라.”

 

 

<강설>

 

볼 수 없다고 하니 모든 형상을 떠나 청정하여 공공적적뿐인가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거기서는 산을 보면 산 그대로 산이고 물을 보면 물 그대로 물로서 천차만별이 완연히 다 드러납니다. 드러난다고 하여 조금이라도 차별적인 견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원이 바뀐, 차별을 떠난 곳에서 하는 말입니다.

 

옛 조사스님들이 산과 산, 물과 물이 각각 뚜렷하다는 말을 가지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그대로라고 한다면 누가 보더라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어서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은 아니므로 깨친 사람이나 깨치지 못한 자기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할는지 모르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산과 물과 물이 각각 뚜렷하다는 것은, 깨끗한 거울 가운데 붉은 것이 있으면 붉은 것이 그대로 비치고 푸른 것이 있으면 푸른 것이 그대로 비치고 산을 비추면 산이 그대로 비치고 물을 비추면 물이 그대로 비치어서 조금도 착오 없이 바로 비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마음 가운데 일체 망념을 떠난 경지에서 하는 말일 뿐, 조금이라도 망념이 남아 있으면 실제로 그 자체를 그대로 비치지 못합니다. 곧 한 번 크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바로 비치는 것을 분명하고 분명하게 본다고 한 것이니 일체가 원융무애한 무장애법계를 나타냅니다.

 

체에서 볼 때는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이며 용에서 볼 때는 분명하고 밝게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니, 전자는 을 말하며 쌍차를 가리킨 것이고, 후자는 를 말하며 쌍조를 가리킨 것입니다. 자성의 체가 형상이 없고 분별이 없어서 하나도 알 수 없으나, 그 가운데 항하의 모래알 같은 무수한 묘용이 갖추어져 있어 미래겁이 다하도록 사용해도 다 쓸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며 붉은 것은 붉고 흰 것은 흰 것인 줄 알아 일체를 분별하여 무슨 일이든지 모르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진공묘유인 것입니다.

 

일체가 끊어져서 하나도 알 수 없지만 동시에 일체가 거기에 원만히 구족되어 있음을 불교에서는 묘유 또는 묘법이라 합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말하는데 세상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은 듯합니다. 없다면 없는 그대로이지 어떻게 하여 없는 것과 있는 것이 통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하고 서로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변견에 있어서는 있음과 없음이 통할 수 없지만, 쌍차하여 있음과 없음을 완전히 여읜 중도를 정등각하여 쌍조를 완전히 이루면 있음과 없음이 완전히 융통자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 물건도 없는 가운데 일체가 구족하고, 일체가 구족하지만 한 물건도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완전히 알아야만 실제로 무심이라든가 무생이라든가 선정이라든가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이지, 이것을 모를 것 같으면 결국 변견에 떨어져서 중도를 영원히 모르고 불법을 꿈에도 못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7. 不見有無眞解脫

 

1.

 

經云 ,“경에서 이르기를

 

不見有無眞解脫 ,‘있음과 없음을 보지 않는 것이 참다운 해탈이다라고 하시니

 

何者是不見有無 ,어떤 것이 있음과 없음을 보지 않는 것입니까?”

 

證得淨心時 ,“깨끗한 마음을 증득하였을 때를

 

卽名有 , 곧 있음이라 하고,

 

於中 , 그 가운데서

 

不生得淨心想 , 깨끗한 마음을 얻었다는 생각이 나지 않음이

 

卽名不見有也 , 곧 있음을 보지 못한다고 하느니라.

 

得想無生無住 ,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는

 

不得作無生無住想 , 생각을 짓지 않는 것이

 

卽是不見無也 , 곧 없음을 보지 못함이니

 

故 云不見有無也 ,그런 까닭에 있음과 없음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愣嚴經云 ,능엄경에 이르기를

 

知見 立知 , 지견에 앎을 세우면

 

卽無明本 , 무명의 근본이 되고,

 

知見 無見 , 지견에 보는 것이 없으면

 

斯卽涅槃 , 이것이 곧 열반이며

 

亦名解脫 , 또한 해탈이라 한다고 하였느니라.”

 

 

<강설>

 

깨끗한 마음이란 일체망념의 객진번뇌가 완전히 떨어져 없음을 말하니 곧 자성청정심을 말합니다. 자성청정심을 증득한 있음과 자성청정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나지 않는 있음을 보지 못함과의 관계는 단계적이고 차제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성청정심을 철저하게 증득할 것 같으면 그 가운데에서 자성청정심을 증득했다는 그 생각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성청정심을 얻은 연후에 얻었다는 생각도 없다는 단계적인 것이 아니라, 청정한 마음을 확실히 증득할 때 이미 청정한 마음을 증득하였다는 그 생각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성청정심을 확실히 증득할 것 같으면 여기서는 일체망념이 다 떨어져서 증득했다는 생각도 없으니, 그것을 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머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지 않음과 머물지 않음을 증득해도 증득했다는 그런 생각까지도 다 떨어진 것을 있음과 없음을 보지 못한다고 말씀한 것이니 있음과 없음의 양변을 떠난 이것이 중도입니다.

 

능엄경말씀과 같이 철두철미하게 바른 지견을 증득하면 지견을 증득했다는 지견이 서지 못한다는 것이니 이것을 열반이라 하고 해탈이라고 했습니다.

 

열반에는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유여열반은 멸진정을 얻은 아라한과를 말하나 아직까지 없다는 견해를 떠나지 못하였으며, 무여열반은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를 완전히 떠났으므로 구경각인 묘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성청정심을 증득하여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를 완전히 여의어 무생심과 무주심을 성취하되 성취하였다는 생각도 없음이 곧 열반이고 해탈이며 돈오이며 견성이며 성불이라는 것입니다.

 

8. 無所見

 

.

 

1.

 

云何是無所見 , “어떤 것이 보는 바가 없는 것입니까?”

 

若見男子女人及一切色像 ,“만약 남자가 여자 및 일체 색상을 보되

 

於中 ,,그 가운데

 

不起愛憎 ,,사랑함과 미워함을 일으키지 아니하여

 

與不見 等 ,,보지 못함과 같은 것이

 

卽是無所見也,, 곧 보는 바가 없는 것이니라.”

 

 

<강설>

 

누구나 중도를 정등각하지 못하면 자연히 모든 생각이 양변에 떨어지게 되어, 무엇을 볼 때 사랑하는 생각이 나지 않으면 미운 생각이 나고 미운 생각이 나지 않으면 사랑하는 생각이 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그 생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보는 바가 있게 되고 여러 가지 소견이 붙게 되는 것이니, 소견이 붙게 되면 바로 보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체 경계를 대할 때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다 떨어져서 중도의 마음이 나타나면 이것을 보는 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보지 못함과 같다고 하는 말을 듣고 붉은 것이든지 푸른 것이든지 검은 것이든지 흰 것이든지 이런 것들을 분별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단견입니다.

 

일체 만상을 분명히 분별하지만 분별한다는 생각이 절대로 없다는 것이니 중생의 경계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중생은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보는 생각이 있고 보는 물건이 있고 상대가 있어서, 사랑하고 미워함이 생기지 않을래야 생기지 않을 수 없으므로,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변견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성청정심을 증득하여 일체망념이 다 없어지면 중도의 정견이 나타나는 것이니, 모든 것을 분명히 보지만 실제로 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기에 조금도 마음의 동요나 분별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야만이 참으로 무생법인이며 머무름이 없는 마음을 증한 것이지, 그렇지 아니하고 다만 조금이라도 분별이 따라 가게 되면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 아니며 진여심이 아니며 진여대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업식망상일 따름이니 열반이 될 수 없고 해탈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對一切色像時 ,,“일체 색상을 대할 때는

 

卽名爲見 ,,곧 본다고 하니

 

不對色像時 ,, 일체 색상을 대하지 않을 때도

 

亦名見否 ,,또한 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 보느니라.”

 

 

<강설>

 

일반적으로 무엇을 볼 때는 분명히 본다 하고 보지 않을 때는 안 본다고 하는데, 그러면 볼 때나 안 볼 때나 모두 본다라고 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본다고 답을 하니 모순같이 들릴지 모르나, ‘본다는 것 자체의 자성은 보거나 안 보거나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본다거나 안 본다거나 하는 것은 변견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본다라고 하는 것은 중도 정견을 말함이니, 보고 안 보고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보지 아니할 때도 분명히 보고 있고 볼 때도 분명히 보지 않으니, 보는 것과 보지 않음이 둘이 아닌 동시에 서로 무재자재합니다. 이것을 본다고 하기 때문에 보지 않을 때도 보는 것이 되고 볼 때도 보지 않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3.

 

對物時 ,,“물건을 대할 때는

 

從有見 ,,설령 보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不對物時 ,,물건을 대하지 않을 때는

 

云何有見 ,, 어떻게 해서 보는 것입니까?”

 

今言見者 ,,“지금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不論對物與不對物 ,, 물건을 대하거나 물건을 대하지 않거나를 논하지 않는다.

 

何以故 ,, 왜냐하면

 

爲見性 ,, 본다고 하는 그 성품은

 

常故 ,, 영원한 까닭에

 

有物之時卽見 ,, 물건이 있을 때도 보고

 

無物之時 ,, 물건이 없을 때도

 

亦見也 ,, 또한 보는 것이다.

 

故知物 ,, 그런 까닭에 물건에는

 

自有去來 ,, 본래 스스로 가고 옴이 있으나

 

見性 ,,본다는 성품에는

 

無來去也 ,,가고 옴이 없음을 알지니,

 

諸根 亦爾,, 다른 모든 감각기관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강설>

 

본다는 그 자성은 간단이 없고 생멸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생멸의 無常을 떠난 중도의 이므로 상주불멸입니다. 따라서 본다는 그 자성은 변견이 아니고 중도이므로 물건을 볼 때도 보지 않을 때도 항상 보는것이니 거기에는 물건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이 서지 못하는 동시에 또한 있음과 없음이 서로 융통자재합니다.

 

물건에는 가고 오는 생멸이 있지만 보는성품은 가고 옴이 없으니 생멸이 없는 중도입니다. 그것은 보는성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안의 등의 육근 전체가 모두 그 자성에는 가고 옴이 없어서 생멸을 여읜 중도라는 것입니다. 즉 육근의 모든 활동이 진여대용이며 망상을 근본으로 삼는 생멸의 활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주스님 자신이 직접 진여본성을 깨쳐서 중도를 체득한 체험을 말씀한 것이니 중도를 정등각하기 전에는 실천이 못되는 것입니다.

 

 

4.

 

正見物時 ,, “바로 물건을 볼 때에

 

見中有物否,,보는 가운데 물건이 있습니까?”

 

見中不立物 ,, “보는 가운데 물건이 서지 못하느니라.”

 

 

<강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자성청정심이 보는 것으로서 한 물건이라도 자성청정심을 가릴 것 같으면 물건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진여대용이 되어서 일체가 끊어진 것을 말함이니 부처도 설 수 없고 조사도 설 수 없는 동시에 한 물건도 설 수 없다는 그 생각까지도 설 수 없는 것임을 대주스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5. ,

 

 

正見無物時 ,, “바로 물건이 없음을 볼 때

 

見中 有無物否 ,,보는 가운데 물건 없음이 있습니까?”

 

見中 不立無物 ,,“보는 가운데는 물건 없는 것도 서지 못하느니라.”

 

 

<강설>

 

앞에서는 물건을 볼 때에 물건이 있느냐 하는 것이고, 지금은 물건을 보지 않는데 보지 아니할 때는 보지 아니하는 그런 물건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으로서, 이것도 망견이지 중도의 바른 견해는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보는 것을 성취하면 물건이 있는 것도 서지 못하고 물건이 없는 것도 서지 못하여 있음과 없음을 여의니 그것이 중도의 바른 견해입니다.

 

 

6.

 

有聲時卽有聞 ,,“소리가 있을 때는 곧 들을 수 있거니와

 

無聲時 ,, 소리가 없을 때에도

 

還得聞否 ,, 들을 수 있습니까?”

 

亦聞 ,, “역시 듣느니라.”

 

有聲時從有聞 ,,“소리가 있을 때엔 설령 들을 수 있다고 하지만

 

無聲時 ,, 소리가 없을 때는

 

云何得聞,, 어떻게 듣습니까?”

 

今言聞者 ,,“지금 듣는다고 하는 것은

 

不論有聲無聲 ,, 소리가 있거나 없거나를 논하지 않는다.

 

何以故 , , 왜냐하면

 

爲聞性 常故 ,, 듣는다는 자성은 영원한 까닭에

 

有聲時卽聞 ,, 소리가 있을 때도 듣고

 

無聲時亦聞 ,, 소리가 없을 때도 또한 듣느니라.”

 

 

<강설>

 

여기서 듣는다고 하는 것은 앞에서의 본다는 것과 같이 중도의 자성을 말한 것입니다. 듣는 가운데 들음이 없고 듣지 않는 가운데 들음이 있으니 들음듣지 않음이 융통자재하여 단견과 상견을 여읜 상주불멸하는 진여대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7.

 

如是聞者是誰 ,,“이렇게 듣는 자는 누굽니까?”

 

是自性聞 ,, “이는 자기의 성품이 듣는 것이며

 

亦名知者聞 ,,또한 아는 이가 듣는다고 하느니라.”

 

<강설>

 

이것은 진여자성이 듣는 것이고 아는 사람즉 일체종지를 성취한 사람, 중도를 정등각한 사람, 바른 지견이 개척된 사람이 듣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보는 것듣는 것을 가지고 말씀했는데 그것뿐만 아니라 육근의 일체 작용이 진여대용입니다. 진여대용에 있어서는 생멸변견이 설래야 설 수 없으며 여기서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아니하는 동시에 어느 곳 어느 때에 있어서도 융통자재합니다.

 

9. 頓悟門宗旨體用

 

.

 

1. 宗旨體用

 

 

1.

 

此頓悟門 ,,“이 돈오문은

 

以何爲宗 ,,, 무엇으로 종취를 삼고

 

以何爲旨 ,,,무엇으로써 참 뜻을 삼고

 

以何爲體 ,,, 무엇으로써 본체를 삼으며

 

以何爲用,,,,무엇으로써 활용을 삼는 것입니까?”

 

無念 爲宗 ,,,“무념을 종취로 삼고

 

妄心不起 爲旨 ,,,망심이 일어나지 않음을 참 뜻으로 삼으며

 

以淸淨爲體 ,,, 청정을 본체로 삼고 지혜로서 활용을 삼느니라.”

 

以智爲用 ,,, 지혜로서 활용을 삼느니라.”

 

 

<강설>

 

일체망념이 다 떨어져서 떨어졌다는 그 생각까지도 떨어진 것이 무념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멸심의 분별망념만 떨어진 것이 아니라 생멸이 아닌 제8 아뢰야식의 미세망념까지 완전히 떨어진 것을 말합니다. 또 망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제8 아뢰야식의 미세망념까지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하니 무념과 그 내용이 똑같습니다. 일체망념이 다 떨어져서 무념이 되면 자연히 청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므로 청정을 본체로 삼는다는 것이 되지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지혜를 활용으로 한다는 것은 자성이 청정해서 일체가 모두 서지 못하면 아무 것도 없는 단멸뿐인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일체 만법의 항사묘용이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청정은 으로서 쌍차를 말하고 지혜는 로서 쌍조를 말함이니, 본체의 활용이 원융무애하여 차조동시하니 이것을 중도라 하고 돈오라 하고 무념이라 하고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종 정통에서 주장하는 돈오라는 것은 철두철미하게 제8아뢰야 근본 무명까지 완전히 끊어진 무념무심을 말하는 것이지 객진번뇌가 여전무수한 해오를 돈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주스님만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종 정맥의 조사들이 구경무심을 깨친 구경각을 돈오라고 하였지 중간의 해오를 가지고 돈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해오를 돈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선종의 정통 사상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

 

2.

 

旣言無念爲宗 ,,,“이미 무념으로 종취를 삼는다고

 

未審 , ,, 말씀할진댄

 

無念者 ,,, 무념이란

 

無何念, ,, 어떤 생각이 없는 것입니까?”

 

無念者 ,,,“무념이란

 

無邪念 ,,, 삿된 생각이 없음이요

 

非無正念,,, 바른 생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니라.

 

云何爲邪念 ,,,어떤 것이 삿된 생각이며

 

云何名正念 ,,, 어떤 것이 바른 생각입니까?

 

念有念無 ,,,있음을 생각하고 없음을 생각하는 것이

 

卽名邪念 ,,, 삿된 생각이요,

 

不念有無 ,,, 있음과 없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卽名正念 ,,, 바른 생각이니라.

 

念善念惡 ,,,선과 악을 생각하는 것이

 

名爲邪念 ,,, ,삿된 생각이요

 

不念善惡 ,,,,선과 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名爲正念 ,,,바른 생각이리라

 

乃至苦樂生滅取捨怨親憎愛 괴로움,즐거움,나는 것과 없어짐, 취함과 버림,원망과 친함,미워함과 사랑함을 생각하는 것이

 

並名邪念 ,,,삿된 생각이요,

 

不念苦樂等,,, 괴로움과 즐거움 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卽名正念 ,,,바른 생각이니라.“”

 

 

<강설>

 

있음과 없음을 생각하지 않음이 중도인 만큼 중도가 바른 생각이라는 것을 자세히 설명한 것입니다.

 

----------------

 

3.

 

云何是正念,,,“어떤 것이 바른 생각입니까?”

 

正念者 ,,,“바른 생각이란

 

誰念菩提 ,,,오직 보리만을 생각하는 것이니라.”

 

 

<강설>

 

보리란 자성청정심을 말하며 망념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대용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

 

4.

 

菩提 可得否 ,,,“보리는 얻을 수 있습니까?”

 

菩提 不可得 ,,,“보리는 얻을 수 없느니라.”

 

旣不可得 ,,,“이미 얻을 수 없을진댄

 

云何誰念菩提,,, 어떻게 오직 보리만 생각합니까?”

 

只如菩提 ,,,“보리는 다만

 

假立名者 ,,,거짓으로 이름을 세운 것이라

 

實不可得 ,,,실제로 얻을 수 없으며,

 

亦無前後得者,,,또한 과거에도 미래에도 얻을 수 없느니

 

爲不可得故 ,,,얻을 수 없는 까닭에

 

卽無有念 ,,,곧 생각 있음이 없느니라.

 

只箇無念 ,,,오직 이 무념을

 

時名眞念菩提 ,,, 진실한 생각이라 하는 것이니 보리는

 

無所念 ,,, 생각할 바가 없는 것이니라.

 

無所念者 ,,, 생각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卽一切處無心 ,,,곧 일체처에 무심함이

 

是無所念 , ,, 생각하는 바가 없음이니,

 

只如上說如許種無念者 ,,, 다만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무념이란

 

皆是隨事方便 ,,, 모두가 일에 따라 방편으로

 

假立名者 ,,, 거짓이름을 세운 것인지라

 

皆同一切 ,,, 모두가 하나의 본체로서 같음이요

 

無二無別 ,,, 둘도 없고 다름도 없는 것이니라.

 

但知一切處 ,,,다만 일체처에

 

無心 ,,,무심함을 알면

 

卽是無念也 ,,, 곧 이것이 무념이니

 

得無念時 , ,, 무념을 얻을 때에

 

自然解脫,, , 자연해탈이니라.“”

 

----------------

 

 

5.

 

云何行佛行,,,“어떻게 하여야 부처님의 행을 행할 수 있습니까?”

 

不行一切行 ,,,“일체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卽名佛行 ,,, 부처님 행동이라 하며

 

亦名正行 ,,,또 바른 행동이라 하며

 

亦名聖行,,,또 성스런 행동이라 함이니,

 

如前所說 ,,,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不行有無憎愛等 ,,, 있음과 없음 미워함과 사랑함 등을

 

是也 ,,,행하지 않는 것이니라

 

大律卷五 ,,, 대율5

 

菩薩品云 ,,,보살품에서 이르기를

 

一切聖人 ,,,일체 성인들은

 

不行於衆生行,,, 중생의 행동을 하지 않고

 

衆生 ,,,중생들은

 

不行如是聖行,,,이와 같은 성인의 행동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강설>

 

일체 행동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체 생멸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일체 변견을 다 버려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있고 없음과 미워하고 사랑함에 머물러 있는 것이 중생이고 그것을 떠난 것이 성인이며, 변견을 행함이 중생의 행동이고 중도를 행함이 성인의 행동입니다.

 

--------------

 

6.

 

云何是正見,,,“어떤 것이 바로 보는 것입니까?”

 

見無所見 ,,,“보는 바 없음을 보는 것이

 

卽名正見 ,,, 바로 보는 것이니라.”

 

云何名見無所見,,,“어떤 것이 보는 바 없음을 보는 것이라 합니까?”

 

見一切色時 ,,,“일체 색을 볼 때에

 

不起染著 ,,,물들거나 집착함을 일으키지 아니함이니

 

不染著者 ,,, , 물들거나 집착하지 아니한다 함은

 

不起愛憎心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므로

 

卽名見無所見也 ,, 곧 보는 바 없음을 본다고 하는 것이니라.

 

若得見無所見時 ,,,만약 보는 바 없음을 보는 것을 얻었을 때

 

卽名不眼 ,,,곧 부처님의 눈이라 하나니

 

更無別眼,,, 다시 별다른 눈이란 없느니라.

 

若見一切色時 ,,,만약 일체 색을 볼 때에

 

起愛憎者 ,,,사랑하고 미워하는

 

卽名有所見 ,,,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보는 바가 있다고 하는 것이니

 

有所見者 ,,, , 보는 바가 있음이

 

卽是衆生眼 ,,, 곧 중생의 눈이라

 

更無別眼作衆生眼 ,,, 다시 별다른 눈을 가지고 중생의 눈이라 할 것이 없으니,

 

乃至 ,,, 내지

 

諸根 ,,, 다른 오근도

 

亦復如是,,, 또한 이와 같으니라.”

 

 

<강설>

 

참으로 자성을 바로 깨친 사람은 밝은 거울이 모든 물건을 비칠 때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흰 것을 분명히 비추듯이 그렇게 사물을 대합니다. 그리고 비치기는 비치되 비춘다는 생각이 없어서 사랑하는 생각 미워하는 생각 등 모든 생각이 다 떨어진 것이니 이것을 보는 바 없다고 합니다. ‘보는 바 없다고 하여 눈감은 봉사가 앞이 캄캄하여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물건을 천자만별로 분별하더라도 거기에 조금도 마음의 동요가 없어서 일체처에 무심이 됨을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보면 그것은 생멸변견인 중생의 눈이며, 그런 생각을 떠나서 보면 그것이 중도정견의 부처님 눈입니다.

 

---------------------

 

2. 二性空

 

 

1.

 

旣言以智爲用者 ,,,“이미 지혜로써 활용을 삼는다고 말씀하셨는데

 

云何爲智,,, 어떤 것이 지혜입니까?”

 

知二性空 ,,,“두 가지 성품이 공 한 줄 아는 것이

 

卽是解脫 ,,, 곧 해탈이며

 

知二性不空 ,,,두 가지 성품이 공하지 않은 줄 알면

 

不得解脫,,, 해탈을 얻지 못하나니

 

是名爲智 ,,, 이것을 지혜라 하며

 

亦名了邪正 ,,, 또 삿됨과 바름을 안다 하며

 

亦名識體用 ,,, 또 본체와 활용을 안다고 하느니라.

 

二性空 ,,,두 가지 성품이 공 한 것이

 

卽是體,,, 본체이고

 

知二性空 ,,, 두 가지 성품이 공 한 것을 아는 것이

 

卽是解脫 ,,,해탈이니,

 

更不生疑 ,,, 다시 의심하지 않음을

 

卽名爲用,,,곧 활용이라고 하느니라.

 

言二性空者 ,,,두 가지 성품이 공 했다고 하는 것은

 

不生有無 ,,, 있음과 없음,

 

善惡愛憎 ,,, 선과 악, 사랑함과 미워함이 나지 아니하는 것을

 

名二性公,,, 이름하여 두 가지 성품이 공 하다고 하느니라.”

 

 

<강설>

 

두 가지 성품에 공하다함은 두 가지에 치우침을 떠나서 두 가지를 함께 부정함을 말하는 것이니 곧 중도를 정등각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본체는 으로서 쌍차이며 활용은 로서 쌍조입니다. 이 둘을 함께 거두어 쌍차쌍조라 하기도 하고 라 하기도 하며, 이라 하기도 하고 이라고 하기도 하는 것이니, 표현은 다르지만 전체가 두 가지 치우침을 떠나서 두 가지 성품에 공한 중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성품이 공해버리면 일체의 치우친 견해가 떨어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며 견성하지 않을래야 견성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곧 돈오입니다.

 

10.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

 

10. 頓悟檀波羅蜜로부터

 

.

 

1.

 

此門 從何而入,,, “이 돈오의 문은 어디로부터 들어갑니까?”

 

從檀波羅蜜入 ,,,“단바라밀로부터 들어가느니라.”

 

2.

 

佛說六波羅蜜 ,,,“부처님께서는 육바라밀이

 

是菩薩行 ,,,보살의 행이라고 말씀하셨는데

 

何故 ,,, 어떤 까닭으로

 

獨說檀波羅蜜 ,,, 단바라밀 하나만을 말씀하시며,

 

云何具足而得入也,,, 어떻게 구족하여야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迷人 ,,,“미혹한 사람은

 

不解五度皆因檀度生 ,,,다섯 바라밀이 모두 단바라밀에서 말미암은 줄 알지 못함이니

 

檀修檀度 ,,, 오직 단바라밀을 수행하면

 

卽六度悉皆具足,,,곧 육바라밀은 모두 구족한 것이니라.”

 

 

3. “

 

何因緣故 ,,,어떤 인연으로

 

名爲檀度,,, 단바라밀이라고 합니까?”

 

檀者 ,,,“단이란

 

名爲布施,,, 보시를 말하느니라.”

 

4.

 

布施何物 ,,,“어떤 물건을 보시하는 것입니까?”

 

布施却二性,,,“보시는 두 가지 성품을 버리는 것이니라.”

 

5.

 

云何是二性 ,,,“어떤 것이 두 가지 성품입니까?”

 

布施却善惡性 ,,,“선과 악의 성품을 버리는 것이며

 

布施却有無性 ,,,있음과 없음의 성품,

 

愛憎性 ,,,사랑함과 미워함의 성품,

 

空不空性 ,,, 공과 공 아님의 성품,

 

定不定性 ,,, 정과 정 아님의 성품과

 

淨不淨性 ,,, 깨끗함과 깨끗하지 아니함의 성품을 버려서

 

一切 ,,, 일체

 

悉皆施却 ,,,모든 것을 전부 보시하면

 

卽得二性空,,,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얻느니라.

 

若得二性空時 ,,,만약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얻을 때에

 

亦不得作二性空想 ,,, 또한 두 가지 성품이 공 하다는 생각을 짓지 아니하며,

 

亦不得作 ,,, 또 보시한다는

 

念有施想 ,,, 생각도 짓지 아니함이

 

卽是眞行檀波羅蜜 ,,, 곧 진실로 보시바라밀을 실행하는 것이니

 

名萬緣 ,,, 만 가지 인연이

 

俱絶,,,함께 끊어진다고 하느니라.

 

萬緣 ,,, 만 가지 인연이

 

俱絶者 ,,, 함께 끊어진다 함은

 

卽一切法性空 ,,, 곧 일체 법의 성품이 공하다는

 

是也 ,,,것이니

 

法性空者 ,,, 법의 성품이 공하다 함은

 

卽一切處無心是 ,,, 곧 일체처에 무심함이니라.

 

 

 

若得一切處無心時 ,,,만약 일체처에 무심함을 얻었을 때에는

 

卽無有一相可得 ,,, 한 모양도 얻을 수 없으니,

 

何以故 ,,, 왜냐하면

 

爲自性 ,,,자성이

 

空故 ,,, 공 한 까닭에

 

無一相可得,,, 한 모양도 얻을 수 없느니라.

 

無一相可得者 ,,,한 모양도 얻을 수 없다 함은

 

卽是實相 ,,,곧 진여의 실상이니

 

實相者 ,,,진여의 실상이란

 

卽是如來妙色身相也 ,,,여래의 묘한 색신의 모양이니라.

 

金剛經云 ,,,금강경에 이르기를

 

離一切諸相 ,,,일체의 모든 모양을 떠나는 것이

 

則名諸佛,,, 곧 모든 부처님이라 한다고 하였느니라.”

 

 

<강설>

 

일체를 모두 보시한다는 것은 일체의 변견을 버려서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안다는 것이니 곧 중도를 정등각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결국 자성청정이 보시입니다.

 

금강경말씀에 일체의 모든 모양을 떠난다 함은 쌍차를 말하며 모든 부처님이라 함은 쌍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보시하니 일체가 다 떨어져서 만 가지 인연이 끊어지고 일체가 설래야 설 수 없어서 적나라적쇄쇄한 자성청정심 진여뿐입니다. 여기에 일체 만법이 모두 건립되어서 항사묘용이 원만구족합니다. 그래서 진공편에서 볼 때는 만 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짐이며 묘유편에서 볼 때는 묘용이 함께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말씀에 일체의 모든 모양을 떠난다 함은 쌍차를 말하며 모든 부처님이라 함은 쌍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6.

 

佛說六波羅蜜 ,,,“부처님은 육바라밀을 말씀하셨는데

 

今云何設一 ,,,지금 어떻게 하나를 말하여

 

卽能具足 ,,,능히 구족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願說一具六法之因,,,바라건대 하나가 여섯 가지 법을 구족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思益經 云 ,,,“사익경에 이르기를

 

綱明尊 ,,,망명존이

 

謂梵天言 ,,,범천에게 말하되

 

若菩薩 ,,,만약 보살이

 

捨一切煩惱 ,,,일체의 번뇌를 버리면

 

名檀波羅蜜 ,,,단바라밀이라고 하니

 

卽是布施,,,곧 보시요.

 

於諸法 ,,, 모든 법에 대하여

 

無所起 ,,, 일어나는 바가 없음이

 

名尸羅波羅蜜 ,,,시바라밀이라고 하니

 

卽是持戒 ,,,곧 지계요.

 

於諸法 ,,,모든 법에 대해서

 

無所傷 ,,, 손상하는 바가 없음이

 

名 羼提波羅蜜 ,,,찬제바라밀이니

 

卽是忍辱 ,,, 곧 인욕이요.

 

於諸法離相 ,,,모든 법에 대해서 모양을 떠남이

 

名毘離耶波羅蜜 ,,,비리야바라밀이라고 하니

 

卽是精進,,,곧 정진이요,

 

於諸法無所住 ,,, 모든 법에 대해서 머무는 바가 없음이

 

名禪波羅蜜 ,,, 선바라밀이니

 

卽是禪定 ,,, 곧 선정이요,

 

於諸法無戱論 ,,,모든 법에 대해서 희론이 없음이

 

名般若波羅蜜 ,,, 반야바라밀이니

 

卽是智慧 ,,, 곧 지혜니라.

 

是名六法,,,이것을 이름하여 여섯 가지 법이라 한다 하였느니라.

 

今更名六法 ,,,지금 다시 여섯 가지 법에 이름을 붙이면

 

不異一捨 ,,,첫째는 버림과

 

二無起 ,,,둘째는 일어나지 아니함과

 

三法傷 ,,,셋째는 손상하지 않음과

 

四離相 ,,,넷째는 모양을 떠남과

 

五無住 ,,,다섯째는 머물지 않음과

 

六無戱論,,,여섯째는 희론이 없음과 다르지 않느니라.

 

如是六法,,,,이와 같은 여섯 가지 법은

 

隨事方便 ,,, 일에 따라 방편으로

 

假立名字,,,거짓 이름을 세움이요,

 

至於妙理 ,,,묘한 이치에 이르러서는

 

無二無別 ,,, 둘도 없고 다름도 없느니라.

 

但知一捨 ,,,다만 하나를 버릴 줄 알면

 

卽一切捨 ,,,곧 일체를 버림이요,

 

無起卽一切無起 ,,,하나가 일어나지 않으면 일체가 일어나지 않거늘

 

迷途不契 ,,,미혹한 사람은 알지 못하고

 

悉謂有差 ,,, 차이가 있다고 모두 말한다.

 

愚者 ,,,어리석은 사람은

 

滯基法數之中 ,,,여섯 가지 법의 숫자에 머물러서

 

卽長輪生死,,,오래도록 생사에 윤회하는 것이니라.

 

告汝學人 ,,,너희들 도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但修檀之法 ,,,다만 보시의 법만을 닦으면

 

卽萬法 ,,,만법이

 

周圓 ,,,두루 원만해지거늘

 

况於五法豈不具耶,,,하물며 다섯 가지 법이 어찌 구족하지 않겠는가 라고

 

 

<강설>

 

유와 무, 선과 악, 고와 낙 등 일체 변견을 모두 버릴 것 같으면 일체 번뇌를 모두 버린 것이니 이것이 단바라밀 즉 보시입니다. 일체를 보시하면 일체 만법이 움직이지 아니하여 일체처에 무심무념이 되나니 이것을 계행이 청정하다고 합니다. ‘중도를 정등각해서 자성청정심을 완전히 깨치기 전에는 참된 지계가 아니며 모두가 파계입니다. 살생을 한다는 것도 짐승이나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8 아뢰야식의 미세망념의 업식이 홀연히 일어날 때 일체 계행을 부숴버린 것이니 이것이 근본파계입니다. 그러므로 지계라고 하는 것은 근본 무명업상이 완전히 끊어져서 자성청정심을 증할 때, 즉 일체번뇌를 모두 보시하여 중도를 정등각할 때 비로소 지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체 만법에 손상이 있을 수가 없고 전체가 진여대용이 되어 모든 것에 증감이 없고 손익이 없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인욕바라밀이라 합니다.

 

일체를 보시하면 일체 만상을 떠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을 정진이라 하며, 일체를 보시하면 양변을 버려서 상대가 없으니 머물래야 머물 곳이 없음을 선정이라 하며, 일체를 보시하면 무명이 근원적으로 모두 끊어지고 모든 희론이 함께 떨어져서 구경각을 성취하는 때이니 지혜가 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섯 가지 법인데 모두가 무엇을 근본으로 삼느냐 하면 양변을 버려서 자성청정심을 깨친 것, 중도를 정등각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도를 정등각함을 내놓고는 육바라밀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법이 여섯 가지 법이요 여섯 가지 법이 한 가지 법이 됩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여섯 가지 법 모두가 각각 중도에 서 있기 때문에 서로서로 융통무애하며, 여섯 가지 법 모두가 중도 정각을 내용으로 한 진여대용이어서 전체가 모두 통해 있고 각각 따로 법이 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보시라고 하는 것은 양변을 여읜 중도를 말함인데 양변을 여읜 중도라는 것은 일체 만법이 모두 원만구족하여 있으므로 다시 여섯 가지 법이니 몇 가지 법이니 하고 구별하여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누구든지 참으로 이 돈오문을 성취하려면 일체를 보시하여 양변을 버리고 중도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범부중생은 모두 변견에 묶여 머물러 있으므로 이 중도행을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 방법으로서는 화두를 부지런히 해서 오매일여의 경지에서도 화두를 버리지 않고 확철히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확철히 깨치면 실제로 모든 것을 보시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일체 망념과 일체 사견을 모두 보시하여 양변을 여의면 두 가지 성품이 공한 중도를 깨쳐서 일체가 원만구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말로만 따라가지 말고 부지런히 화두공부를 해서 바로 깨쳐야 합니다. 밥 얘기를 천날만날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1. 三學을함께 쓰다.

 

.

 

1.

 

三學等用 ,,,“삼학을 함께 쓴다 하니

 

何者是三學 ,,,어떤 것이 삼학이며

 

云何是等用,,, 어떤 것이 함께 쓰는 것입니까?”

 

三學者 ,,,“삼학이란

 

戒定慧是也,,,혜이니라.”

 

 

2.

 

云何是戒定慧,,,“어떤 것을 계 혜라 합니까?”

 

淸淨無染是戒 ,,,“청정하여 물들지 아니함이 계요,

 

知心不動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함을 알아

 

對境寂緣 ,,,경계를 대하여 고요함이

 

是定,,, 정이요,

 

知心不動時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함을 알 때에

 

不生不動想 ,,,움직이지 아니한다는 생각도 나지 아니하며

 

知心淸淨時 ,,,마음이 청정함을 알 때에

 

不生淸淨想 ,,,청정하다는 생각도 나지 아니하여

 

乃至善惡 ,,, 내지 선, 악을 모두

 

皆能分別 ,,,능히 분별하되

 

於中 無染 ,,,그 가운데에 물들지 아니하여

 

得自在者是名爲 ,,,자재를 얻음을

 

慧也 ,,,혜라고 하느니라.

 

若知戒定慧體俱不可得時 ,,,만약 계혜의 본체가 모두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알 때에

 

卽無分別者 ,,,곧 분별함이 없어서

 

卽同一體 ,,,곧 동일의 본체이니

 

是名三學等用,,,이것이 삼학을 함께 쓴다고 하는 것이니라.

 

 

<강설>

 

계가 곧 정이며 정이 곧 혜로서, 삼학을 함께 쓰면 생사에 해탈하여 열반로에서 영원토록 자유자재할 것이니 이것을 중도정각이라 하고 견성이라 하며 돈오라 한다는 것입니다.

 

12. 無生心

 

1.

 

若心住淨時 ,,,“만약 마음이 청정함에 머물 때에는

 

不是着淨否 ,,, 청정함에 집착하는 것이 아닙니까?”

 

得住淨時 ,,,“청정함에 머무름을 얻었을 때에

 

不作住淨想 ,,,청정함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짓지 않는 것이

 

是不着淨 ,,, 청정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라.”

 

 

<강설>

 

이 물음은 일체 망상을 모두 쉬어버리고 자성청정심, 즉 진여자성을 확철히 깨친 뒤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진여자성인 자성청정심을 완전히 깨쳐서 체득한 다음에 그 자성청정심에 집착하는 일이 없는가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머문다고 해서 머무는 곳이 있다고 생각하여 거기서 앉고 서고 하는 것으로 알면 이것은 청정함에 집착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청정함을 확철히 알게 되면 거기에서 모든 것을 수용한다 하여도 청정한 생각도 없고 머물래야 머물 수 없는 무주심을 성취한 때문입니다.

 

 

2.

 

心住空時 ,,, “마음이 공에 머물 때에는

 

不是着空否,,, 공에 집착한 것이 아닙니까?”

 

若作空想 ,,,“만약 공하다는 생각을 짓는다면

 

卽名着空 ,,, 곧 공에 집착한 것이니라.”

 

 

<강설>

 

공을 완전히 깨치면 공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공과 청정함이라고 하는 것은 표현은 다르지만 똑같은 말입니다. 청정을 확실히 알면 일체가 모두 공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8 아뢰야 근본 무명까지 완전히 공한 구경각을 성취해서 진공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절대로 청정을 알 수 없는 것이며, 청정을 확실히 알면 진공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청정을 알 때가 곧 진공인 것이니, 진공이 되면 공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청정에도 집착하지 아니하며 거기에 머물지도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이 망상분별의 업이 많기 때문에 어떤 때는 청정이라 하고 어떤 때는 공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이름들을 쓰지만 그것들은 중생의 업에 따라 방편으로 달리 말한 것이지 그 내용이 다른 데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공이라는 것은 공이라는 생각도 없는 것을 공이라 하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공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이것은 망이지 진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공이라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지게 되면 공에 집착한 것이 되고 공에 집착하면 진공이 아닙니다.

 

 

3.

 

若心得住無處時 ,,,“만약 마음이 머무름이 없는 곳에 머물 때에

 

不是着無住處否,,, 머무름이 없는 곳에 집착한 것이 아닙니까?”

 

但作空想 ,, ,“다만 공한 생각을 지으면

 

卽無有着處 ,,, 곧 집착할 곳이 없으니

 

汝若欲了了識無所住心時,,,네가 만약 머문 바 없는 마음을 분명하고 밝게 알고자 할진댄

 

正坐之時 ,,,바로 좌선할 때에는

 

但知心 ,,, 다만 마음만 알고,

 

莫思量一切物 ,,,모든 사물을 생각하여 헤아리지 말며

 

一切善惡 ,,, 모든 선악을

 

都莫思量 ,,,모두 생각하여 헤아리지 말라

 

過去事 ,,,과거의 일은

 

己過去而莫思量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생각하여 헤아리지 아니하면

 

過去心 ,,,과거의 마음이

 

自絶 , ,,스스로 끊어지나니

 

卽名無過去事 ,,, 곧 과거의 일이 없다고 함이요,

 

未來事未至 ,,, 미래의 일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으니

 

莫願莫求 ,,, 원하지도 아니하고 구하지도 아니하면

 

未來心 ,,, 미래의 마음이

 

自絶,, ,,,스스로 끊어지니

 

卽名無未來事 ,,, 곧 미래의 일이 없다고 함이요,

 

現在事 ,,, 현재의 일은

 

己現在 ,,, 이미 현재라

 

於一切事 ,,,일체의 일에

 

但知無著 ,,, 집착함이 없음을 알 뿐이니,

 

無著者 ,,,집착함이 없다고 함은

 

不起憎愛心 ,,,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이

 

卽是無著 ,,, 곧 집착함이 없음인지라

 

現在心 ,,,현재의 마음이

 

自絶 ,,, 스스로 끊어져서

 

卽名無現在事 ,,, 곧 현재의 일이 없다고 함이다.

 

三世不攝 ,,,삼세를 거두어 모을 수 없음이

 

亦名無三世也,,,또한 삼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心若起去時 ,,,마음이 만약 일어날 때에

 

卽莫隨去 ,,,따라 가지 아니하면

 

去心 ,,, 가는 마음이

 

自絶 ,,,스스로 끊어져 없어짐이요,

 

若住時 ,,,만약 마음이 머물 때에

 

亦莫隨住 ,,, 또한 머무름이 따르지 아니하면

 

住心 ,,,머무는 마음이

 

自絶 ,,,스스로 끊어져서

 

卽無住心 ,, , 머무는 마음이 없음이니

 

卽是住無住處也,,,이것을 머무는 곳이 없는 곳에 머문다고 하느니라.

 

若了了自知 ,,,만약 밝고 밝게 스스로 알아

 

住在主時 ,,,머무름이 머무름에 있을 때에는

 

只物住 ,,,다만 사물이 머물 뿐이요,

 

亦無住處 ,,, 또한 머무는 곳이 없으면

 

亦無無住處也,,,머무는 곳 없음도 없는 것이니라.

 

若自了了知 ,,,만약 밝고 밝게 스스로 알아

 

心不住一切處 ,,,마음이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하면

 

卽名了了見本心也 ,,,곧 본래 마음을 밝고 밝게 본다고 하는 것이며,

 

亦名了了見性也 ,,,또한 성품을 밝고 밝게 본다고 하는 것이니라.

 

只箇不住一切處心者 ,,,다만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하는 마음이란

 

卽是佛心 ,,,곧 부처님 마음이며,

 

亦名解脫心 ,,, 또한 해탈심이며,

 

亦名菩提心,,, 또한 보리심이며,

 

亦名無生心,,, 또한 무생심이며,

 

亦名色性空 ,,, 또한 색의 성품이 공 함이라 이름하나니,

 

經云憎無生法忍是也,,, 경에 이르기를 무생법인을 증득했다고 함이 이것이니라

 

汝若未得如是之時 ,,,너희들이 만약에 이와 같이 아직 체득하지 못하였을 때는

 

努力努力 ,,,노력하고 노력하여

 

勤加用功 ,,, 부지런히 공력을 더하여

 

功成自會 ,,, 공부를 성취하면 스스로 알 수 있으니,

 

所以會者 ,,, 그러므로 안다고 하는 것은

 

一切處 ,,, 일체처에

 

無心 ,,, 무심함이

 

卽是會 ,,, 곧 아는 것이니라.

 

言無心者 ,,,무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無假不眞也 ,,, 거짓되어 참되지 않음이 없음이니

 

假者 ,,,거짓됨이란

 

愛憎心 ,,,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인

 

是也 ,,, 것이며,

 

眞者 ,,, 참됨이란

 

無愛憎心 ,,,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는

 

是也 ,,, 것이니라.

 

但無憎愛心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卽是二性空 ,,,곧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니

 

二性空者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란

 

自然解脫也,,,자연해탈이니라.”

 

 

<강설>

 

머무름이 없는 곳에 머문다고 하는 것은 언어로써 표현하려고 하니까 머문다고 하는 것이지 실제로 머문는 곳이 있어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진공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머무름이 없는 곳에 분명히 모든 것을 자재하게 수용하는 것이니 이것은 진여대용인 진공묘유의 머무름이지 결코 생멸과 집착이 있는 머무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머무름에 처소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기서 공한 생각[]을 짓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공에 집착한 생각[]과는 다른 공한 생각입[空想]니다. 앞에서 말한 공한 생각[空想]은 공에 집착한 분별을 가지고 하는 말이요,

 

여기서의 공한 생각[空想]이란 분별과 머무름이 없는 진공묘유의 생각[]임을 우리가 구분해야 합니다.

 

다같이 있다라고 하여도 생멸의 있다와 묘유의 있다가 근본적으로 다르듯이 여기서 공한 생각[空想]이라 함은 집착이 완전히 떨어진 것을 말하고 앞의 공한 생각은 집착함이 있음을 말하는 것인 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란 진여본심 즉 무념심 진여자성을 말함이니, 누구든지 머무름이 없는 마음 즉 진여본심진공을 확실히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바로 앉았을 때 다만 마음만 알고 모든 물건을 생각하여 헤아리지 말며 모든 선악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대주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앉는다고 하는 것이 행주좌와에서 몸의 자세를 바로 하여 앉음이 아니라 양변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중도를 깨쳐서 양변을 여의고 정견정념을 성취함을 바로 앉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양변을 여윈 중도에 바로 앉을 것 같으면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구할래야 구할 수 없고, 삼세가 다 끊어져서 절대적인 진여자성중도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참된 무심이며 자유며 열반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자성청정인 진공을 완전히 깨칠 것 같으면 항사묘용이 원만구족한 무한한 활동이 나는데 이것을 묘유라 합니다. 그러나 그 묘유가 아무리 활동한다 하여도 거기에 어떤 생멸이 있고 오고 감이 있고 삼세가 있고 육추가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진공에서 나는 묘유는 생멸의 있음이 아니어서 호호탕탕 무애자재하여 아무리 하여도 머무는 곳을 찾아볼 수 없는 진여묘용뿐이니 이것을 머무는 곳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머무름이 머무름에 있을 때라고 하는 이 머무름이란 머무는 곳이 머무름이 아니어서 다만 다만 물건이 머물기만 했지 머무는 곳이 없으며 또 머무는 곳이 없다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을 비유할 것 같으면 밝은 거울에 물건을 비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시 거울에는 머무는 곳이 없고 색신도 없고 일체분별이 다 떨어져서 천차만별한 물건이 거기에 머물러 있으나 거기에는 분별도 없고 집착함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면 머무는 곳이 없다는 그것까지도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진공묘유를 말함이며 분별차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한다함은 머무름이 없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니 일체 집착을 떠난 것이며 일체에 무심이 되어서 팔풍에 움직이지 아니하는 선정을 성취한 것입니다.

 

따라서 정과 혜가 함께 갖추어져서 고요하되 항상 비치고, 비치되 항상 고요하여, 고요함과 비침이 둘이 아니니, 이것을 자성을 본다하고 마음을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하는 마음이 곧 부처님 마음이라고 하였는데 자성을 본다든지 마음을 본다고 하는 것은 머무름이 없는 마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부처님 마음을 떠나서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중생은 반드시 제8 아뢰야의 근본무명 업식을 끊고 자성을 확철히 깨치기 전에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머무는 곳이 생기게 되는 것이니, 그래서 십지보살도 공에 빠지고 고요한 데 머물게 되어서 머무는 곳이 있게 되고, ‘머무는 곳이 있게 되면 자성은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자성을 보려면 언제든지 머무는 곳이 없다는 그것까지도 완전히 소멸되어야만 참으로 청정자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을 자성을 본다하고, ‘자심을 본다하며, ‘구경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돈오라는 것은 견성을 말하는 것이며 무심을 말하는 것이며, 무념을 말하는 것이며, 머무름이 없음을 말함인데, 이것이 즉 부처님 마음이며 구경각이니 구경각 내놓고 견성이 따로 없고 돈오가 따로 없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체처에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며 해탈심이며 보리심이며 무생심이며 색의 성품이 공함이니 이것을 경에서 무생법인을 증했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머무는 곳이 다 떨어지지 못하고 집착이 다 떨어지지 못하여 확철히 무생법인을 증득하지 못하였을 때는 힘쓰고 힘써서 부지런히 하여 공부를 성취하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니, 봉사가 눈을 떠야 광명을 볼 수 있는 것이지 눈을 뜨기 전에는 광명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체 망상의 구름이 다 걷혀서 청천백일을 보게 되면 그때에 진여자성을 확철히 깨치게 되는 것이며 비로소 이 근본 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다고 하는 것은 일체처에 무심함이 곧 아는 것이니 다만 조금이라도 사량분별이 붙어 있을 것 같으면 이 도리는 모르고 마는 것입니다. 무심을 우리가 완전히 체득할 것 같으면 이것이 견성이고 성불이며 부처님 마음입니다.

 

무심이란 거짓되어 참되지 않음이 없다고 하는 구절의 직역적 해설이 좀 어렵습니다. 거짓[]과 참되지 않음[不眞]은 같은 말이니 잘못이 없다고 하거나 참되지 않음이 없다고 하여도 괜찮은데 이것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니 잘못이란 하나도 없다. 전체가 다 참이라는 뜻입니다.

 

거짓됨[]이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니 분별심, 변견이며 참됨이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 결국 참됨이란 중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됨인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도 아니되고, 참됨이 아니라 함도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니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을 것 같으면 두 가지 성품이 공해버리니 양변을 다 버려 버리는 것입니다. 두 가지 성품이 공하여 양변을 다 버릴 것 같으면 자연히 해탈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성불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중도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표현을 써왔지만 결국 총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양변을 여의고 두 가지 성품이 공한 중도에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참으로 공부를 완전히 성취하려면 양변을 여읜 두 가지 성품이 공한 중도를 성취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불법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13. 常 住

 

只坐爲用 ,,,“앉아서만 쓸 수 있는 것입니까?

 

行時 ,,,다닐 때도

 

亦得爲用否,,,또한 쓸 수 있는 것입니까?”

 

今言用功者,,, “지금 공을 쓴다고 말함은

 

不獨言坐 ,,,단지 앉아 있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乃至 ,,,내지

 

行住坐臥所造運爲,,,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하는 짓는 바 움직이는

 

一切時中 ,,,모든 때 가운데

 

 

常用無間 ,,,항상 써서사이가 끊어짐이 없음이

 

 

卽名常住也,,, 항상 머문다고 하느니라.”

 

 

<강설>

 

그러면 우리가 양변을 여읜 두 가지 성품이 공한 중도를 성취했다고 한다면 앉아서 쓸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니면서도 쓸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여 중도를 한 번 성취하면 참으로 사이가 끊어짐이 없어서 항상 머무는 것이니 상주불멸입니다. 상주불멸이기 때문에 공부를 성취하면 가나오나 앉으나 누우나 언제든지 이 가운데에서 작용하여 언제나 한결같으며 여기를 떠나서는 살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을 여여의 경계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나오나 앉으나 누우나 하는 말 속에 오매일여가지 표현되어 있습니다. ‘눕는다란 누워 잠잘 때도 완전히 통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구경각을 성취하면 상주법계 그대로이니 상주법계에 있어서는 행주좌와라는 구별이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앉아 있을 때나 섰을 때나 갈 때나 누웠을 때나 언제든지 한결같아서 아무리 잠이 들었다 해도 한결같은 것이니 조금이라도 간격이 있으면 두 가지 성품이 공하거나 중도를 성취하거나 견성을 성취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번 되풀이하여 행주좌와에 한결같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제8 아뢰야식의 무기심의 멸진정에 들 것 같으면 오매에 일여한 경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얼핏보면 상주라고 볼 수 있지만 아직까지도 공에 빠지고 고요함에 머물러 얻는 바가 있고 머무는 곳이 있어서 미세한 생멸의 상주입니다. 참다운 진여상주가 아닙니다.

 

참다운 상주란 오매일여를 완전히 넘어서 저 진여에서 한결같음을 말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변견에 떨어진 단상의 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주는 진여자성을 말하는 것이지 어떤 머무는 곳이 있는 그런 상주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14. 五種法身

 

 

方廣經云 ,,,“방광경에 이르기를

 

五種法身 ,,,다섯 가지의 법신은

 

一實相法身 ,,, 첫째는 실상법신이요,

 

二功德法身 ,,, 둘째는 공덕법신이요,

 

三法性法身,,, 셋째는 법성법신이요,

 

四應化法身 ,,, 넷째는 응화법신이요,

 

五虛空法身 ,,, 다섯째는 허공법신이다.라고 하였는데

 

於自己身 ,,,자기의 몸에는

 

何者是 ,,,어떤 것이 이것입니까?”

 

知心不壞 ,,,“마음이 무너지지 아니함을 아는 것이

 

是實相法身 ,,,실상법신이며,

 

知心含萬像 ,,,마음이 만상을 포함하여 아는 것이

 

是功德法身,,, 공덕법신이며,

 

知心無心 ,,,마음이 무심임을 아는 것이

 

是法性法身 ,,,법성법신이며,

 

隨根應說 ,,,근기 따라 응하여 설법함이

 

是應化法身,,, 응화법신이며,

 

知心無形 ,,,마음이 형상이 없어

 

不可得 ,,,얻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

 

是虛空法身,,,허공법신이니

 

若了此義者,,, 만약 이 뜻을 확실히 아는 이는

 

卽知無證也 ,,,곧 증득할 것이 없음을 아느니라.

 

無得無證者 ,,,얻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음이

 

卽是證佛法 ,,, 곧 불법을 증득한 것이요,

 

法身 若有證有得 ,,, 만약 법신을 증득함이 있고 얻음이 있음을

 

以爲證者 ,,, 증득으로 삼는 이는

 

卽邪見增上慢人也 ,,,곧 삿된 견해의 증상 만인이며

 

名爲外道 ,,,외도라고 하느니라.

 

何以故 ,,, 왜 그러냐 하면

 

維摩經云 ,,, 유마경에서 이르기를

 

舍利弗 ,,,사리불이

 

問天女曰 ,,, 천녀에게 묻되

 

汝何所得 ,,, 그대는 얻은 바가 무엇이며

 

何所證 ,,, 증한 바가 무엇이기에

 

辯乃得如是 ,,, 말재주가 이와 같으냐하고 물으니,

 

天女答曰 ,,,천녀가 대답하기를

 

我無得無證 ,,,’나는 얻음도 없고 증함도 없이

 

乃得如是 ,,, 이와 같음을 얻었오.

 

若有得有證 ,,,만약 얻음이 있고 증함이 있으면

 

卽於佛法中 ,,, 불법 가운데에

 

爲增上慢人也,,, 증상만인이 되는 것이오.‘라고 하였느니라.“

 

 

<강설>

 

중생들이 볼 때는 다섯 가지 법신이 모두 다르므로 우리는 그 어느 법신에 해당하느냐는 의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마음이 무너지지 아니함이란 절대적인 불변을 말함이니 곧 금강불괴심입니다. 금강같이 단단하여 삼천대천세계가 천 번 무너지고 만 번 무너져도 동요가 없고 손실이 없어서 무너지지 않고 상주하는 진여본성을 깨쳐버리면 영원토록 증감이 없는 금강불괴신을 증하게 됩니다. 이것이 금강불괴심입니다. 이 금강불괴심을 확실히 아는 것을 실상법인이라고 합니다.

 

금강불괴심을 실상법신이라고 하니 아주 돌덩어리쇠덩어리같이 단단해서 부서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아서 아무 활동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으나 금강불괴심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금강불괴심은 상주불멸해서 천 부처 만 부처가 이것을 깰래야 깰 수 없고 빛을 더할래야 더할 수 없지만 그 가운데 삼라만상이 건립되어 있어서 항사묘용이 구족해 있습니다. 만상이란 항사묘용의 공덕을 말하는 것이니 실상법신에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함을 표현하여 공덕법신이라 합니다.

 

그러면 생멸심분별심이 있어도 금강불괴심인 실상법신을 알 수 있고 일체 만상이 원만구족한 진공묘유의 공덕심을 알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못합니다. 참으로 모든 차별 망상을 다 쉬어버려야만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구경무심함을 성취하면 이것을 법성번신이라고 합니다.

 

무심이라고 하니까 고정되어 있어서 변화하는 활동이 없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만상이 원만구족하므로 근기 따라서 혹은 이렇게도 나투고 저렇게도 나투며 혹은 이렇게도 설하고 저렇게도 설하여, 천차만별 천백억화신으로 나투어서 중생을 위해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설법을 하니 이것을 응화법신이라고 합니다.

 

무심이라고 하니까 고정되어 있어서 변화하는 활동이 없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 만상이 원만구족하므로 근기 따라서 혹은 이렇게도 나투고 저렇게도 나투며 혹은 이렇게도 설하고 저렇게도 설하며, 천차만별 천백억화신으로 나투어서 중생을 위해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설법을 하니 이것을 응화법신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법신을 설명해 왔는데 그렇다면 무슨 모양이 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만약 모양이 있을 것 같으면 실상법신도 될 수 없고 공덕법신도 될 수 없고 법성법신도 될 수 없고 응화법신도 될 수 없는 것이니, 법신은 일체 명상이 다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일체명상이 모두 떨어진 동시에 일체명상이 완전히 원만구족해 있으니 이것을 허공법신이라고 합니다.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함을 공덕법신이라고 했는데 허공법이라고 하여 텅비어서 아무 것도 없는 줄 알면 큰일납니다. 형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일체가 모두 원만구족함과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만상이 거기에 모두 건립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한 형상도 볼래야 볼 수 없는 것이니, 거울 가운데 모든 것이 다 비치고 있지만 거기에 한 형상도 볼래야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체 만상이 구족하면서 일체의 상을 볼 수 없는 것을 허공법신이라 합니다. 허공이라고 해서 단공인 허무의 공이 아니라 만법이 갖추어진 실상의 허공이니 실상공입니다.

 

만약 이 뜻을 분명히 알면 증할 것이 없음을 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증한다고 하니 손을 잡거나 돌덩어리를 쥐듯이 잡을 것이 있는 줄 알면 참된 이 아닙니다. 지금 말하는 증득이란 증할 것이 없는 증득입니다. 아무리 증할래야 증할 수 없고 깨칠래야 깨칠 수 없고 볼래야 볼 수 없는데, 여기서 분명히 증하고 분명히 깨치고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또 증할 것이 없다고 하니까 아무 것도 없이 텅비어서 증할래야 증살 수 없는 것뿐이 아니냐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구경각을 성취해서 깨치면 진여법신을 증합니다. 증하기는 분명히 증했지만 거기에는 모든 명상이 다 끊어졌기 때문에 증한 자취를 볼래야 볼 수 없고 증한 것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증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지 단멸적인 뜻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부처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고 조사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으며 무엇 하나라도 구할래야 구할 수 없고 볼래야 볼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을 얻음이 없다하고, ‘증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며 이것을 불법을 증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증함이 있고 얻음이 있음을 증이라고 하는 이는 곧 삿된 견해이며 증상만인이며 외도라고 한다고 함은 생멸에 떨어진 중생이기 때문입니다. 증상만인이란 공연히 알지도 못하면서 알았다고 하는 병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유마경에서 인용한 말과 같이 만약 누구든지 얻은 것이 있고 증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불법 가운데서는 외도이며 증상만인이어서 불법을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천녀와 같이 걸림이 없는 변설을 얻으려면 얻음도 없고 증함도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는 주먹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지만 모든 물건이 가득 채워져 거리낌이 있을 때는 주먹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우리가 한 물건이라도 얻을 수 있고 증할 수 있고 집착이 있을 것 같으면 걸림이 없는 변설이 되지 않습니다.

 

대주스님은 지금 강의하고 있는 돈오요문이외에도 많은 법문이 있는데 누가 무엇을 묻든지간에 조금도 거리낌 없이 관운장이 청룡도 쓰듯이 모든 법문에 응대해서 누구든지 대주스님을 한 번 대하면 스님은 참으로 희유한 걸림없는 변설을 얻으셨습니다하고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걸림없는 변설을 얻으려면 머무름이 없는 마음 곧 진정한 무심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얻음이 있거나 증함이 있으면 걸림없는 변설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걸림없는 변설을 성취하지 못하고서 자기가 법을 성취했다고 하는 사람은 증상만이 가득찬 외도이지 불법을 얻은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15. 等覺妙覺

 

.

 

1.

 

經云 ,,, “경에 이르되

 

等覺妙覺 ,,, 등각 묘각이라 하니

 

云何是等覺 ,,, 무엇이 등각이며

 

云何是妙覺,,, 무엇이 묘각입니까?”

 

卽色卽空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함이

 

名爲等覺 ,,, 등각이요

 

二性空故 ,,,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까닭에

 

名爲妙覺 ,,,묘각이라 하며,

 

又云 ,,,또 이르되

 

無覺無無覺 ,,, 깨달음이 없음과 깨달음이 없음도 깨달음을

 

名爲妙覺,,, 일컬어 묘각이라 하느니라.”

 

 

<강설>

 

색이 즉하고 공에 즉한다함은 공이 곧 색이고 색이 곧 공으로서 서로서로 무애자재한 것을 등각이라 하니 이것은 쌍조를 말하는 것이며, 두 가지 성품이 공하다 함은 쌍차를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는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함이라는 말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서 쌍차하고 쌍조한 차조동시한 뜻으로 말하였는데, 여기서는 왜 이것을 등각이라 하고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묘각이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표현하는 등각묘각이라는 것은 우리가 불법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십지등각이라고 말하는 그 등각이 아니고 공부를 완전히 성취해서 중도를 정등각한 등각을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혼돈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중도를 정등각한 등각을 말하는 것이므로 양변을 완전히 여의어서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하지 않을 수 없고,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하면 이것이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것입니다.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한 면을 등각이라 하고 두 가지 성품이 공한 면을 묘각이라고 표현하였지만 등각이 즉 묘각이고 묘각이 즉 등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하는 차제향상에서 말하는 십지등각의 등각이 아닌 줄 바로 알아 혼동해서은 안 되며, 그 뜻이 중도를 등각했다, 중도를 묘각했다는 뜻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음에는 누구든지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함이 되고, 두 가지 성품이 공할 것 같으면 깨달음이 없음과 깨달음 없음이 없음도 자연히 되는 것이지, 깨달음 없음이 되어서 깨달음 없음이 없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슨 깨친 것이 있다고 하니까 깨친 것이 있는 것으로 집착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두 가지 성품이 공한 사람도 아니고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한 사람도 아니며 깨친 사람도 아닙니다. 실제로 깨친다 함은 깨침도 없고 깨침이 없다는 그것까지도 없다는 말이니 그것을 자성청정심이라 하고 구경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

 

等覺與妙覺 ...“등각과 묘각이

 

爲別 ,,,다릅니까?

 

爲不別 ,,, 다르지 않습니까?

 

爲隨事方便 ,,,“일에 따라 방편으로

 

假立二名 ,,, 거짓 두 가지 이름을 세운 것이니

 

本體是一 ,,,본체는 하나요,

 

無二無別 ,,,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乃至一體法 ,,,내지 일체법이

 

皆然也 ,,, 모두 그러하느니라.”

 

 

<강설>

 

본체는 하나란 진여자성 중도를 말하는 것이니 이것 내놓고 등각이 따로 없고 묘각이 따로 없습니다.

 

일체법이 그렇다고 한 것은 깨친 데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진여를 확철히 깨쳐서 진공을 얻으면 항사묘용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팔만사천뿐만 아니라 여러 천만의 차별로써 표현한다 하여도 본체는 진여자성 하나뿐으로서 딴 것이 없습니다. 등각묘각만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일체법이 다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16. 說法

 

.

 

金剛云 ,,,“금강경에 이르기를

 

無法可說 ,,,설할 법이 없음이

 

是名說法 ,,,법을 설함이라 아니

 

其義云何 ,,, 그 뜻이 무엇입니까?”

 

般若體畢竟淸淨 ,,,“반야의 체는 필경 청정하여

 

無有一物可得 ,,, 한 물건도 얻을 수 없음이

 

是名無法可說,,, 설할 법이 없다고 함이요,

 

卽於般若空寂體中 ,,,반야의 공적한 본체 가운데에

 

具恒沙之用 ,,,항사의 묘용을 갖추어서

 

卽無事不知是名說法 ,,,알지 못할 일이 없음이 법을 설한다고 함이니,

 

故云無法可說 ,,,그러므로 설할 법이 없음이

 

是名說法 ,,,법을 설함이라고 하느니라.“

 

 

<강설>

 

반야의 본체가 청정하여 한 물건도 없다고 함은 심청정을 말하며, 반야의 공적한 본체 가운데 삼신사지가 원만히 구족하고 팔해육통이 원만구족하며 육도만행이 구족할 뿐 아니라 항사묘용을 구족하지 않음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 없는 것을 법을 설한다고 하는 것이며, 이는 심광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불법만 구족하고 외도법을 구족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 중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는 외도법이고 불법이고 할 것 없이 전체가 원융무애해서 중도로 회향하는 것입니다. 전체가 모두 진여묘용이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세법도 나누지 않고 불법도 나누지 아니하고 마구니도 세우지 아니하며 부처도 세우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불법 아님이 없고 모든 것이 진여묘용 아님이 하나도 없으니 이것을 항사묘용이라고 합니다. 거듭 강조하면 일체 분별이 모두 떨어진 필경청정한 진공을 말하여 설할 것이 없다 하고, 일체가 원만구족해서 무애자재한 묘유를 말하여 법을 설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17. 金剛經輕賤

 

.

 

若有善男子善女人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受持讀 此經,,,이 경을 주지 독송하여

 

若爲人輕賤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게 되면

 

是人先世罪業 ,,, 이 사람은 전세의 죄업으로

 

應墮惡道 ,,, 마땅히 악도에 떨어질 것이지만,

 

以今世人輕淺故 ,,,금세의 사람들의 경멸과 천대를 받음으로 해서

 

先世罪業 ,,,전세의 죄업이

 

卽爲消滅 ,,,곧 소멸하여

 

當得阿耨多羅三邈三菩諸 ,,,마침내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데

 

基義云何 ,,, 그 뜻이 무엇입니까?”

 

只如有人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未遇大善知識 ,,, 대선지식을 아직 만나지 못하여

 

唯造惡業 ,,, 오직 악업만 짓고

 

淸淨本心 ,,, 청정한 본래 마음이

 

被三毒無明所覆 ,,, 삼독의 무명에 덮어서

 

不能顯了故 ,,, 능히 나타나지 못하므로

 

云爲人輕踐也 ,,,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는다고 말한 것이니라.

 

以今世人輕賤者 ,,, 금세의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는 것은,

 

卽是今日 ,,, 곧 오늘

 

發心求佛道 ,,,발심하여 불도를 구함으로

 

爲無明 ,,, 무명이

 

滅盡 ,,, 다 없어지고

 

三毒 ,,,삼독이

 

不生 ,,,나지 아니해서

 

卽本心 ,,, 곧 본래 마음이

 

明朗 ,,, 명랑하고

 

更無亂念 ,,, 다시 어지러운 생각이 없으며,

 

諸惡 ,,,모든 악이

 

永滅故 ,,, 영원히 없어져 버림으로써

 

以今世人輕賤也 ,,, 금세 사람의 경멸과 천대를 받는다고 하느니라.

 

無明 ,,,무명이

 

滅盡 ,,,모두 없어져서

 

亂念 ,,, 어지러운 생각이

 

不生 ,,, 나지 아니하면

 

自然解脫故,,,자연히 해탈한 것이므로

 

云當得菩提 ,,, 마땅히 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니,

 

卽發心時名爲今世 ,,, 곧 발심할 때가 금세요,

 

非隔生也 ,,, 격생이 아니니라.”

 

 

<강설>

 

이 경문을 생멸 견해로써 피상적으로 해석하면 부처님의 근본 뜻을 모르고 맙니다. 경멸과 천대의 내용이 다른 것임을 지적하기 위하여 대주스님이 이렇게 인용하신 것입니다.

 

위의 내용 가운데에서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는다는 것과 금세 사람의 경멸과 천대라고 하는 것은 해석이 정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는다고 함은 자기의 진여본성이 무명업식에 가려서 진여본성이 나타나지 않음을 말함이지 실제로 어떤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고 구박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경멸과 천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무명이 진여를 덮어서 진여를 보지 못함을 말합니다.

 

금세 사람의 경멸과 천대라 하는 것은 발심 구도하여 무명을 경멸하고 천대하여 진여가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앞에서는 진여자성을 무명이 경멸하고 천대하였으며, 뒤에서는 무명을 경멸하고 천대하여 진여본성이 드러난 것이니

 

이것을 금세 사람의 경멸과 천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선가에서는 글을 이상하게 해석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렇게 해석하여야만 경멸과 천대의 뜻을 바르게 아는 것이지 문자대로 해석하면 부처님 뜻은 모르고 맙니다. 우리가 참으로 공부를 부지런히 해서 불법을 바로 알면 이렇게 해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은 항상 글자를 의지해서 해석하면 삼세 부처님들의 원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피상적인 글자에 구애되지 말고 법문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글자는 볼 것도 없이 뜻만 알아야 하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선가에서는 경을 떠나서 해석하면 곧 마설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만 부처님의 뜻을 바로 알 수 있느냐 하는 것도 참 곤란한 일입니다. 문자에 집착하면 삼세 부처님의 원수가 되고 문자를 떠날 것 같으면 마설이라고 했으니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는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지 않았습니까?

 

마설이 되어도 안 될 것이고 삼세 부처님의 원수가 되어도 안 될 것이니 여기서는 이것이 모두 양변입니다. 마설도 버리고 부처님 원수도 버릴 것 같으면 중도 정견이 나옵니다. 분명히 문자에 의지해서 설명하는데 문자를 떠나고 문자를 떠나서 설명하는데 분명히 문자에 의지해 있어서, 아무리 문자에 설명하지만 조금도 문자에 구애되지 않고, 아무리 문자를 떠나서 설명한다고 해도 문자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참으로 무애자재하게 바른 견해를 가지고 부처님 뜻이나 조사들의 뜻을 옳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이런 자유자재한 해석을 가지지 못하면 영원토록 불법을 매몰해버리고 그 뜻을 모르고 맙니다. 여기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경멸과 천대의 해석을 두고서 사람들의 생각과 대주스님이 생각하는 바가 틀리기 때문에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내가 이런 예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18. 如來五眼

 

.

 

如來五眼者何,,,“또 여래의 다섯 가지 눈이란 어떤 것입니까?”

 

見色淸淨 ,,,“색의 청정함을 보는 것이

 

名爲肉眼 ,,,육안이요,

 

見體淸淨 ,,,색의 본체가 청정함을 보는 것이

 

名爲天眼 ,,,천안이요,

 

於諸色境乃至善惡 ,,, 모든 색의 경계와 내지 선악에 대해서

 

悉能薇細分別 ,,,모두 미세하게 분별하여

 

無所染著 ,,, 물들음이 없고

 

於中 ,,, 그 가운데

 

自在名爲慧眼 ,,, 자재함이 혜안이요

 

見無所見 ,,,보아도 보는 바가 없음이

 

名爲法眼 ,,,법안이요,

 

無見無無見 ,,,보는 것이 없고 보는 것이 없음도 없는 것이

 

名爲佛眼 ,,,불안이라고 하느니라.”

 

 

<강설>

 

색이란 피상적으로 나타난 외부적 형상을 말하고 체란 색을 구성하는 내부적인 본체를 말하는 것이니, 색이 청정함을 볼 때는 체가 청정하고 체가 청정함을 볼 때는 색이 청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색이 즉 체이고 체가 즉 색이어서 육안이 곧 천안이고 천안이 곧 육안이어서 서로 융통무애하게 통하는 데에서 하는 표현이지, 절대로 육안 따로 있고 천안 따로 있어서 서로 막힌 데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법안은 보아도 보는 바가 없음이니 그것은 보는 것이 없음인데 반하여, 불안은 보는 것이 없고 보는 것이 없음도 없다는 것이니 법안보다는 불안이 한 단계 더 높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석하면 법안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보아도 보는 바가 없으면 보는 것이 없음도 없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없다하면 보는 것이 없음도 볼 수 없는 것을 말한 것이지 거기에 보는 것이 없다는 견해가 남아 있다면 보는 바가 없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법안과 불안을 어떤 단계적인 관계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는지 모르겠으나 내용은 법안이 즉 불안이고 불안이 즉 법안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보는 것이 없음을 법안이라고 하고, ‘보는 것이 없음뿐만 아니라 보는 것이 없음그것도 없는 것을 불안이라고 한다고 하여 거기서 불안은 법안보다 높다고 한다면, ‘앞의 보는 것이 없다는 뜻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실제에 있어서 그 보는 것이 없는 것의 내용을 보다 더 확실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보는 것이 없는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실제로 보는 것이 없다고 하면 보는 것이 없음도 없는 것이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니, 법안이 즉 불안이고 불안이 즉 법안이며 다시 육안천안혜안모두 다 완전히 서로 통해 있습니다. 색의 청정함을 보는 것이 완전히 되면 보는 것이 없음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고, 색의 청정함을 보려면 보는 것이 없음도 없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불안이 즉 천안이고 천안이 즉 법안이며 천안이 즉 육안이어서 여기서 오안이 서로 융통해 있는 것이지 오안이 따로따로 하나하나 독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색의 청정을 보는 것이 완전히 되면 오안이 구족하고 보는 것이 없음이 완전히 되면 오안이 구족해서 하나가 곧 다섯이며 다섯이 곧 하나인 것이니 하나와 다섯이 따로 서 있지 않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19.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

 

19. 大乘最上乘

 

.

 

又云 ,,,“또 말하기를,

 

大乘最上乘 ,,,대승과 최상승의

 

其義云何 ,,,뜻은 어떠합니까?”

 

大乘者 ,,,“대승이란

 

是菩薩乘 ,,, 보살승이요,

 

最上乘者 ,,,최상승이란

 

是佛乘 ,,, 불승이라.”

 

--------------------------

 

又問 : 또 물었다

 

云何修而得此乘 ,,,어떻게 닦아야 이 승을 얻습니까?

 

: 답하였다

 

修菩薩乘者 ,,,“보살승을 닦음이

 

卽時大乘 ,,,대승이니

 

證菩薩乘 ,,, 보살승을 증득하여

 

更不起觀 ,,, 다시 관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至無修處 ,,,닦을 곳이 없음에 이르러

 

湛然常寂 ,,, 담연히 항상 고요하여

 

不增不減 ,,,늘지도 아니하고 줄지도 아니함이

 

名最上乘 ,,, 최상승이니,

 

卽時佛乘也,,,곧 이것이 불승이니라.”

 

 

<강설>

 

늘지도 아니하고 줄지도 아니함이 되면 나지도 아니하고 죽지도 아니함이 안 될 수 없으며, ‘나지도 아니하고 죽지도 아니함이 되면 중도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최상승이나 불승은 머무름이 없는 청정심을 얻어 담연히 항상 고요하여 늘거나 줄지도 않고 생멸도 없어 항사묘용이 원만구족하여 무애자재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0. 定慧를 함께 씀

 

.

 

涅槃經云 ,,,“열반경에 이르기를

 

定多慧少 ,,,‘선정은 많고 지혜가 적으면

 

不離無明 ,,, 무명을 떠나지 못하며,

 

定少慧多 ,,,선정은 적고 지혜가 많으면

 

增長邪見,,,삿된 견해를 증장하며

 

定慧等故,,, 선정과 지혜를 함께 하는 까닭에

 

卽名解脫 ,,,해탈이다라고 하니

 

其義云何,,,그 뜻이 무엇입니까?”

 

對一切善惡 ,,,“일체 선악에 대하여

 

悉能分別 ,,, 모든 것을 분별함이

 

是慧 ,,, 지혜요

 

於所分別之處 ,,,분별하는 곳에

 

不起愛憎 ,,,애증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不隨所染 ,,, 물드는 바에 따라가지 아니함이

 

是定 ,,, 선정이니,

 

卽是定慧等用也 ,,,곧 선정과 지혜를 함께 쓰는 것이니라.”

 

 

<강설>

 

중도를 정등각하면 양변을 모두 여의어 쌍차가 되는 동시에 양변이 쌍조가 되어 선정과 지혜를 함께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정은 많고 지혜가 적다든지 지혜는 많은데 선정이 적다고 하는 것은 생멸변견으로서 양변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 양변을 떠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무명이고 사견이며 불법이 아니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으니 무슨 뜻이냐는 물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일체 만물을 분별하고 모든 것을 다 차별하는 이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하고 차별하되 그 가운데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도 없고 물드는 마음도 없다면 이것이 선정입니다. 증애심과 물드는 마음이 없는 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분별하고 모든 것을 분별, 차별하는 가운데에서 증애심과 물드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곧 선정이 지혜이며 지혜가 곧 선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정과 지혜가 함께 한 것[等持]입니다. 만약 선정과 지혜가 두 쪽이 나서 선정이 많고 지혜가 적든지 지혜가 많고 선정이 적다든지 하면 이것은 실제로 변견의 생멸이지 중도정각이 아닌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선정과 지혜를 함께 쓰려면 누구든지 일체만물을 분명히 분별하는 동시에 분별심이 완전히 떨어져 무심이 되고 무심이 된 동시에 일체만법을 모두 분명히 분별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선정 가운데 지혜가 있고, 지혜 가운데 선정이 있으니 이것을 선정과 지혜를 함께 쓴다고 하는 것입니다.

 

21. 鏡像定慧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

 

又問 : 또 물었다

 

無言無說 ,,,“말이 없고 설함이 없음이

 

卽名爲定 ,,, 곧 선정이라 하니,

 

正言說之時 ,,,바로 말하고 설할 때도

 

得名定否,,,선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今言定者 ,,,“지금 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不論說與不說常定 ,,, 말함과 말하지 않음을 논하지 않고 항상 선정인 것이니라.

 

何以故 ,,, 왜냐하면

 

爲用定性 ,,,선정의 본성을 쓰기 때문에

 

言說分別時 ,,,말하거나 분별할 때에

 

卽言說分別 ,,, 곧 말하거나 분별함도

 

亦定 ,,, 선정인 것이기 때문이다.

 

若以空心 ,,, 만약 공한 마음으로

 

觀色時 ,,,색을 볼 때에는

 

卽觀色時 ,,, 색을 볼 때도

 

亦空 ,,, 또한 공이며,

 

若不觀色不說不分別時 ,,, 만약 색을 보지 아니하고 말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을 때도

 

亦空 ,,,또한 공이며,

 

乃至見聞覺知 ,,, 내지 보고 듣고 깨닫고 알 때에도

 

亦復如時 ,,,역시 이와 같느니라

 

何以故 ,,, 왜냐하면

 

爲自性空 ,,, 자성이 공하기 때문에

 

卽於一切處悉空 ,,,곧 일체처에 있어서 모두 공한 것이니,

 

空卽無著 ,,, 공이란 곧 집착이 없음이며

 

無著 ,,,집착이 없음이

 

卽是等用,,, 곧 선정과 지혜를 함께 쓰는 것이니라.

 

爲菩薩 ,,, 보살이

 

常用如是等空之法 ,,, 항상 이와 같이 공 그대로의 법을 써서

 

得之究竟故,,, . 구경에 이르는 까닭에

 

云定慧等者,,,선정과 지혜가 함께 함을

 

卽名解脫也,,, 곧 해탈이라고 하느니라.”

 

 

<강설>

 

언설로써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생멸이 아닌가, 그리고 생멸이 완전히 떨어진 곳을 선정이라 하고 생멸이 그대로 붙어 있으면 이를 선정이라고 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해석해야 되겠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여기서 선정이라고 하면 따로 떨어진 선정이 아니라 지혜도 항상 따라가는 선정입니다. 그것은 마치 빛이라고 하면 언제든지 불이 따라오고 불이라고 하면 빛이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불이라고 하면 빛이 있는 줄 알고 빛이라고 하면 불이 있는 줄 알아야지, 선정이라고 한다고 지혜는 내버리고 선정 한 가지인 줄만 알면 이는 불도 모르고 빛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중도를 정등각하면 항사묘용이 나타나서 일체에 자유자재하게 활동합니다. 아무리 활동한다 해도 분명히 모든 분별을 떠나 있습니다. 아무리 언설을 하고 건립하여 활동한다고 해도 이것은 실제로 모든 분별이 떨어진 선정이며 중도의 선정이지 생멸의 분별이나 외도의 사견은 아닙니다.

 

만약 공한 마음으로 색을 볼 때에는 색을 볼 때도 또한 공하다고 하는 것은 내 마음이 공하기 때문에 일체가 공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의 보는 자체가 보는 놈이 없고, 보는 놈이 없으므로 상대가 생길 수 없습니다. 즉 주관이 완전히 공하니 보는 놈이 없으며 보는 놈이 없으면 볼 놈이 자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는 놈이 공해서 일체가 다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볼 놈, 곧 색을 볼 때도 일체가 모두 공입니다. 여기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전체가 모두 원융무애한 것이지, 거기서 내 마음은 공했는데 색은 그대로 있고 색은 그대로 있는데 내 마음은 공했다 하면 틀린 말입니다. 색이 공할 때는 반드시 마음이 공하고 마음이 공할 때는 반드시 색이 공해서 선정이면 지혜이고 지혜이면 선정인 것과 마찬가지로 주관이 완전히 공하면 일체 객관도 공하고 일체 객관이 공하면 주관이 공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살은 중도를 정등각해서 모든 것에 선정과 지혜를 함께 가져서 공 그대로[等空]를 쓰므로 부처라고 해야 되는데 왜 보살이라고 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기서는 보살뿐만 아니라 마구니라 해도 괜찮습니다. 그 이유는 보살이라고 이름한다고 해서 아직까지 중도를 몰라서 구경에 이르지 못한 중간에 있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공 그대로[等空]의 법을 써서 거기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가서 공 그대로 씀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경에 이르름을 얻는다는 것은 공 그대로의 법을 완전히 성취하면 이것이 곧 구경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지 절대로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정과 지혜를 함께 하는 것을 해탈이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앞에서 말한 집착이 없음이 선정과 지혜를 함께 쓰는 것이니, 보살이 항상 공 그대로의 법을 써서 구경을 성취하면 선정과 지혜를 함께 쓰게 되어 해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 그대로가 곧 구경, 구경이 곧 공 그대로인 동시에 보살이 곧 구경 성불이고 성불이 곧 보살이라는 표현인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

 

今更爲汝譬有顯示 ,,,지금 다시 그대들을 위하여 비유로써 나타내 보여

 

令汝惺惺解斷疑,,,그대들로 하여금 분명하게 알아서 의심을 끊게 하리라.

 

譬如明鑑 ,,,“비유컨대 밝은 거울이

 

照像之時 ,,, 모습을 비출 때에

 

其明 ,,,그 밝음이

 

動否 ,,,움직이느냐?”

 

不也,,,“움직이지 않습니다.”

 

不照時 ,,,비추지 아니 할때

 

亦動否 ,,,역시 움직이지 않느냐

 

不也 ,,,움직이지 않습니다.”

 

何以故 ,,,“왜냐하면

 

爲明鑑用 ,,,밝은 거울의 작용에는

 

無情明照,,, 밝게 비친다는 정도 없으므로

 

所以照時 ,,, 비출 때도

 

不動 ,,,움직이지 않고

 

不照 ,,,비추지 아니할 때도

 

亦不動,,,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라.

 

何以故,,, 어떻게 해서 그러냐 하면

 

爲無情之中 ,,, 분별의 정이 없는 가운데에는

 

無有動者 ,,, 움직이는 것도 없고

 

亦無不動者 ...움직이지 않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又如日光 ,,,또 햇빛이

 

照世之時 ,,,세상을 비출 때

 

其光 ,,, 그 빛이 움직이느냐?”

 

動否 ,,,“움직이지

 

不也 ,,,않습니다.”

 

若不照時 ,,,“만약 비추지 아니할 때도

 

動否 ,,,움직이느냐?”

 

不也 ,,,“움직이지 않습니다.”

 

何以故 ,,,“왜냐하면

 

爲光無情故 ,,,빛은 분별의 정이 없기 때문이니

 

用無情光照 ,,, 정이 없음을 써서 빛이 비추므로

 

所以不動 ,,,움직이지 아니하며

 

不照亦不動,,, 비추지 않을 때도 또한 움직이지 아니 하느니라.

 

照者 ,,, 비춘다 함은

 

是慧 ,,,지혜요

 

不動者 ,,,움직이지 아니한다 함은

 

是定 ,,,선정이니

 

菩薩 ,,,보살이

 

用是定慧等法 ,,,선정과 지혜를 함께 한 법을 써서

 

得三菩薩 ,,,삼막삼보리를 얻는 까닭에

 

云定慧等用 ,,,선정과 지혜를 함께 씀이

 

卽是解脫也 ,,,곧 해탈이라고 하느니라.

 

今言無情者 ,,,지금 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無凡情 ,,,범부의 정이 없음이요

 

非無聖情也,,, 성인의 정이 없는 것이 아니니라.”

 

 

<강설>

 

밝은 거울에 만상이 비칠 때도 밝음이 움직이지 아니하고 비치지 아니할 때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밝은 거울이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떠나고 비춤과 비추지 않음의 양변을 완전히 떠난 것을 말합니다. 자성이 언제든지 항상하고 여여해서 거기에는 간격이 없습니다. 이것을 상주법계라 하니 밝은 거울이란 이 상주법계를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성이 상주법계이고 자성 내놓고 상주법계가 따로 없습니다.

 

이란 헤아림, 즉 분별을 말합니다. ‘정이 없음이란 생멸과 분별이 완전히 떨어졌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밝은 거울이든지 모든 것을 비출 때 천차만별로 비추더라도 거기에는 헤아림이 붙을래야 붙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밝게 비춰도 거기에는 사량분별 등이 다 떨어져서 완전한 무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출 때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비추지 아니할 때도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정량이 없다는 것은 무심을 말하는 것이니 무심 가운데 항사묘용이 나타나 일체를 비추고 무애자재한 용을 쓰되 그 용 가운데 조금도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의 분별이 붙어 있지 아니하고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완전히 떠났으니 움직이더라도 움직이지 않음 그대로이고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움직임 그대로입니다. 결국은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무애자재한 것을 말합니다.

 

빛이 정이 없음은 분별을 떠난 무심의 빛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움직임도 움직이지 않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빛은 비출 때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비추지 아니할 때도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이니 여기서 움직이지 아니한다는 것은 무념을 말한 것입니다. 일체 만물을 비출 때도 무념이고 비추지 않을 때도 무념이며, 움직일 때도 무념이고 움직이지 아니할 때도 무념입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서로 원융무애하여 차조동시가 되는 것입니다.

 

비춤이 지혜라고 하는 것은 묘용이라는 뜻이며 움직이지 않음이 선정이라 하는 것은 진공을 말합니다.

 

정혜등법이란 선정과 지혜가 같은 법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선정과 지혜의 두 가지가 있어서 같은 법이라는 뜻이 아니고 선정과 지혜를 함께 가진다[等持]라는 뜻입니다. 선정과 지혜가 같은 법이라고 하면 선정과 지혜가 둘이 있음을 표현하는 말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선정 즉 지혜이고 지혜가 즉 선정인 정견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선정이 즉 지혜이고 지혜가 즉 선정인 정혜등지법을 써서 삼막삼보리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앞에서 말한 선정과 지혜를 함께 씀을 해탈이라 한다함과 선정과 지혜를 함께 한 법을 써서 삼막삼보리를 얻는다함과 같은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삼막삼보리와 해탈이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똑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무념으로서 일체 망념 즉 생멸의 차별이 없다는 것이지 진여의 진념 곧 무분별인 묘용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

 

3.

 

云何是凡情 ,,,“어떤 것이 범부의 정이며

 

云何是聖情,,,어떤 것이 성인의 정입니까?”

 

若起二性 ,,,“만약 두 가지 성품을 일으키면

 

卽是凡情 ,,,곧 범부의 정이요

 

二性空故 ,,,두 가지 성품이 공하기 때문에

 

卽是聖情,,, 곧 성인의 정이니라.”

 

 

<강설>

 

있음과 없음선과 악고와 낙 등 일체 변견에 머물러 있으면 범인의 정이 되어서 공도 모르고 색도 모르게 됩니다. 그리고 두 가지 성품이 공해서 양변을 떠난 중도를 정등각한 것이 성인의 정이 됩니다.

 

불교 교리의 천마디 만마디 말 전체가 모두 중도에 입각하였음을 내가 많이 설명했는데, 돈오요문의 근본도 전체가 두 가지 성품이 공한 중도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결론은 항상 두 가지 성품이 공하다는 것으로 내려지는 것입니다.

 

 

22. 言語道斷心行處滅/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經云 ,,,“경에 이르기를

 

言語道斷心行處滅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없어진다고 하니

 

基義如何,,, 그 뜻이 무엇입니까?”

 

以言顯義,,, “말로써 뜻을 나타냄에

 

得義言絶,,, 뜻을 얻으면 말이 끊어지니

 

義卽是空,,, 뜻이 곧 공함이요

 

空卽是道,,,공함이 곧 도인지라,

 

道卽是絶言故,,, 도는 곧 말이 끊어진 까닭에

 

云言語道斷,,,언어의 길이 끊어졌다고 하느니라.

 

心行處滅 ,,,마음 가는 곳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謂得義實際更不起觀 ,,, 중도실제의 뜻을 얻어서 다시 관을 일으키지 아니함을 말함이니

 

不起觀故 ,,, 관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卽是無生 ,,,곧 나는 것이 없음이니라.

 

以無生故 ,,, 나는 것이 없는 까닭에

 

卽一切色性空 ,,, 곧 모든 색의 성품이 공한 것이니

 

色性空故 ,,, 색의 성품이 공한 까닭에

 

卽萬緣 ,,, 곧 만 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짐이요,

 

俱絶萬緣俱絶者 ,,, 만 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짐이

 

卽是 心行處滅,,, 곧 마음 가는 곳이 없어진 것이니라.”

 

 

<강설>

 

깨달음에는 모든 설명하는 말 길이 전부 끊어져 버리고 사량하는 분별심이 전부 없어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근본진리인 두 가지 성품이 공한 중도의 자성이라는 것은 언어로써 표현할래야 할 수 없고 보통 분별로써 생각할래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 자체는 언어의 길이 다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 뜻이 어떠한가 하는 물음입니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이르시기를 일체 만법의 적멸한 모양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으니 방편의 힘으로써 다섯 비구를 위해 설하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이 불교에서 언어의 길이 발단된 근본시초입니다. 그러므로 일체 언어란 방편인 줄 알아야지 이것이 실다운 것인 줄 알면 달은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만 보게 되고 맙니다. 본래 진여자성 그 자체는 언설이 다 끊어진 것이지만 방편의 힘으로써 모든 것을 설명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대법을 깨치고 그것을 실행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이란 최상승인 불공의 공인 중도의 공이지 소승의 견해인 편공이나 외도의 견해인 단공의 공이 아닙니다. 중도의 공이란 자성 진여의 진공입니다. 진공이란 일체 언설을 가지고 공을 설명하고 공을 깨치게 한 것입니다. 공을 깨치고 나면 언설이 모두 끊어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도이며 진여이며 돈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성을 돈오할 것 같으면 모든 언설이 다 끊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심행 곧 마음 가는 것이란 모든 사량이든지 사량이 아니든지, 분별이든지 무분별이든지 전체가 심행입니다. 분별하는 것만을 심행이라 한다면 곤란합니다. 여기서 마음 가는 곳이 없어진다는 것은 제6식의 분별심행도 다 끊어지고 제8 아뢰야식의 무분별심행도 다 끊어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진여본성을 깨치는 것이지 제 8 아뢰야식의 무분별심행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 같으면 진여본성은 영원히 깨치지 못하게 되고 도는 성취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제란 중도실제진여실제보리열반깨침부처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실제인 진여자성을 확철히 깨칠 것 같으면 다시 관을 일으키지 아니하니 이것이 남이 없음이며 만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언어의 길이 끊어진 곳이 바로 마음 가는 곳이 없어진 곳이며, 마음 가는 곳이 없어진 곳이 바로 언어의 길이 끊어진 곳이지, 두 가지로 표현했다고 해서 따로따로 있는 줄 알면 안 됩니다. 마음 가는 곳이 없음을 확철히 깨치면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언어의 길이 끊어지면 마음 가는 곳이 없어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여본성이란 언어의 길이 끊어진 동시에 마음 가는 곳이 없고 마음 가는 곳이 없는 동시에 언어의 길이 끊어진 것이니, 이것을 진여본성 중도자성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23. 如如/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如如者 ,,,“여여란

 

云何 ,,,어떤 것입니까?”

 

如如 ,,,“여여란

 

是不動義 ,,,움직이지 아니한다는 뜻이니

 

心眞如故名如如也,,, 마음이 진여인 까닭에 여여라고 하느니라.

 

是知過去諸佛 ,,,과거 모든 부처님들도

 

行此行 ,,,이 여여행을 행해서

 

亦得成道 ,,,성도하셨고

 

現在佛 ,,, 현재의 부처님도

 

行此行 ,,, 이 여여행을 행해서

 

亦得成道,,, 성도하시고

 

未來佛 ,,, 미래의 부처님도

 

行此行 ,,, 이 여여행을 행해서

 

亦得成道 ,,, 또한 성도하실 것이니

 

三世所修證道 ,,, 삼세에 닦아 증한 바의 도가

 

無異故 ,,, 다름이 없으므로

 

名如如也,,,여여라 함을 알지니라.

 

維摩經云 ,,, 유마경에 이르기를

 

諸佛 ,,, ‘모든 부처님들도

 

亦如也 ,,,또한 같으며

 

至於彌勒 ,,, 미륵에 이르러도

 

亦如也 ,,, 또한 같으며

 

乃至一體衆生 ,,, 내지 일체 중생에 이르러도

 

悉皆如也 ,,, 모두 같다.

 

何以故 ,,,왜냐하면

 

爲佛性 ,,, 불성이란

 

不斷有性故也,,,끊어지지 아니하고 있는 성품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느니라.”

 

 

<강설>

 

여여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가는 곳이 없어진 그것을 여여라 하니 여여란 진여입니다.

 

움직이지 아니한다는 것은 절대로 변동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니 설사 자성 가운데 항사묘용이 원만구족하여 천차만별의 모든 분별을 내며 천 번 만 번 움직이는 대활동을 한다 하여도 실제로는 자성에 아무런 동요가 없습니다. 다만 조금이라도 변천이 있고 동요가 있으면 참으로 대법을 깨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바위덩어리나 쇳덩이 같이 꼼짝않고 죽은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무한한 활동을 하지만 아무리 활동하여도 생멸이 아닌 진여묘용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가운데 움직이지 않음이 있고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움직임이 있어서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서로 둘이 아니고 무애자재합니다. 왜냐하면 자성이란 진여이므로 일체 명상이 다 끊어진 동시에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해서 무애자재하므로 여여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님들도 모두 이 마음이 진여인 행을 행해서 성도하는 것이니 이것을 여여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유마경에 말씀한 바와 같이 모든 부처님의 자성이나 미륵보살의 자성이나 중생의 자성이 조금도 차이가 없어 그 진여자성은 불생불멸이며, 모든 부처님에 있어서도 증감이 없고 중생에 있어서도 증감이 없는 여여한 그대로이어서 무애자재한 진여묘용은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불성이란 끊어지지 아니하고 있는 성품이기 때문인 것이니 끊어지지 아니하고 있는 성품이란 삼세를 통하여 변하고 바뀜이 없는 것이니 상주법계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있는 성품이란 생멸인 유무의 있음이 아니고 중도의 있음, 곧 제법실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변견에 떨어진 상대 대립으로서의 유무의 있음이 아니며 단멸의 있음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불성이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동시에, 또한 있음이며 또한 없음이어서 있음과 없음이 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있는 성품이란 또한 있고 또한 없음의 있는 성품이지 절대로 생멸적인 유무의 있는 성품이 아니며, 있음과 없음이 서로 원융무애한 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애진여를 불성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을 여여라 하기도 하고 부처라 하기도 하고 열반이라 하기도 하고 도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가는 곳이 없어졌다는 것이 곧 진여인 것이니, 진여는 여여해서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가 이것을 깨치고 이것을 성취하였지 이것 내놓고 절대로 다른 것은 없으므로 여여라고 표현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24. 卽色卽空/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

 

卽色卽空,,,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하며

 

卽凡卽聖,,, 범에 즉하고 성에 즉함이

 

是頓悟否,,, 돈오입니까?”

 

,,, “그러하느니라.”

 

 

<강설>

 

여기서는 긍정적인 면에서만 하는 말입니다. 즉색즉공이란 색이 즉 공이고 공이 즉 색이라는 색과 공이 원융무애한 것을 말한 것이고, 즉범즉성이라는 것은 범부가 즉 성인이고 성인이 즉 범부라는 것으로서, 이는 범부와 성인이 무애자재함을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며 범즉시성 성즉시범이니 돈오할 것 같으면 쌍차가 곧 쌍조가 되어서 원융무애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2.

 

云何是卽色卽空 ,,,“어떤 것이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함이며

 

云何是卽凡卽聖,,,,,어떤 것이 범부에 즉하고 성인에 즉한 것입니까?”

 

心有染 ,,,“마음에 물듬이 있음이

 

卽色 ,,,곧 색이요

 

心無染 ,,,마음에 물듦이 없음이

 

卽空 ,,, 곧 공이며,

 

心有染 ,,, 마음에 물듬이 있음이

 

卽凡 ,,,곧 범부요

 

心無染 ,,,마음에 물듬이 없음이

 

卽聖 ,,, 곧 성인이니라.

 

又云 ,,, 또한

 

眞空妙有故 ,,,진공묘유이므로

 

卽色 ,,, 곧 색이요

 

色不可得故,,, 색을 얻을 수 없으므로

 

卽空 ,,, 곧 공이니,

 

今言空者 ,,, 지금 공이라고 말한 것은

 

是色性 ,,, 이 색의 성품이

 

自空 ,,, 스스로 공함이요

 

非色滅空,,, 색이 없어져서 공한 것은 아니니라.

 

今言色者,,, 지금 색이라고 하는 것은

 

是空性自色,,, 이 공의 성품이 스스로 색이요,

 

非色能色也,,,색이 능히 색인 것은 아니니라.”

 

 

<강설>

 

마음에 물듬이 있다하니 이것은 생멸의 물듬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할지 모르나 이것은 생멸의 물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 단에서 말한 끊어지지 아니하고 있는 성품이란 변견에 떨어져 있는 성품이 아니며 유무의 있는 성품이 아니고 양변이 완전히 통한 중도의 있는 성품이라고 하였듯이, 이 단에서는 돈오를 분명히 말하고 있으므로 생멸의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중도의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물듬이 있다는 것은 변견적인 생멸의 물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여묘용의 활동을 가지고 말하는 것으로서 묘유의 있음입니다. 이렇게 묘유의 있음이 줄 알아야지 생멸의 있음인 줄 알면 이 뜻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물듬이 있음이란 묘유의 있음인데 이것을 색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 색은 묘색입니다. 앞에서도 여래묘색신이라는 말을 했는데 여기서의 이 색도 묘색을 말하는 것으로서 있음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있음인 중도의 색인 것입니다. 이것을 즉색즉공이라 한 것이니 차별적인 생멸의 있음을 가지고 말하게 되면 색과 공이 둘이 되어 버리고 돈오라고 할 수 없고 깨달음이 아니며 중도가 아닙니다.

 

물듬이 있음과 물듬이 없음이 생멸의 있고 없음이 아니고 중도의 무애자재한 있고 없음인 줄 알면 범부와 성인이 서로 통하고 있음과 없음이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진공묘유이기 때문에 색이라는 것은 묘색이며 묘색이란 생멸의 색이 아니기 때문에 색을 아무리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색을 찾아볼 수 있다면 이것은 생멸의 세계이지 묘유의 색이 아니며 중도의 색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공이란 진공의 공이요 있음이라나 묘유의 있음이므로 공과 있음이 서로 융통자재한 것입니다.

 

공이란 색의 성품이 스스로 공함이요 색이 없어져서 공한 것이 아니다함을 잘못 알게 되면 불교에 대해서 큰 착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공이라고 해서 일체 색이 다 없어져 버리는 것을 공이라고 하면 외도의 견해인 단멸의 공이 되고 중도정견의 공이 되지 못합니다.

 

색도 공한 성품이 스스로 색이지 색 그 자체로서 색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능히 자체로서의 색이라는 것은 생멸의 색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해야 즉색즉공이며 즉범즉성이니 이것은 양변이 완전히 떨어진 중도 정견 곧 생멸변견이 아닌 무애자재함에서 말하는 것이어서 이 중도정견을 불이법문이라 하기도 하고 묘법이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25. 無盡/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

 

經云 ,,,“경에서 이르기를

 

盡無盡法門如何,,,다함과 다함없음의 법문이란 무슨 뜻입니까?”

 

爲二性空故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까닭에

 

見聞無生 ,,, 보고 들음이 나지 않음이

 

是盡 ,,,다함이니

 

盡者 ,,,다함이란

 

諸漏盡 ,,, 모든 망루가 다함이며,

 

無盡者 ,,,다함이 없음은

 

於無生體中,,, 남이 없는 본체 가운데

 

具恒沙妙用 ,,, 항사의 묘용을 갖추고 있어서

 

隨事應現 ,,, 일을 따라 응하여 나타나서

 

悉皆具足,,, 모두 다 구족하여

 

於本體中,,, 본체 가운데에

 

亦無損減,,, 손감이 없음을

 

是名無盡,,, 다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

 

卽是盡無盡 ,,,이것이 곧 다함과 다함없는

 

法門也 ,,, 법문인 것이니라.”

 

 

<강설>

 

남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제8 아뢰야식의 미세망념까지 전체가 모두 끊어진 청정자성 자체를 말하는 것이니 일체 망루가 다 끊어지면 청정자성인 진여본성을 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다함[]이라고 했습니다. 일체 망루가 다한 청정자성체 가운데는 항사의 묘용이 갖추어져 있어서 손감이 없으며 불생불멸이기 때문에 미래겁이 다하도록 상주불멸하니 이것을 다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곧 자성청정이 다함이며 자성묘용이 다함 없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자성청정이 따로 있고 자성묘용이 따로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성청정 이대로 자성묘용이고 자성묘용 이대로가 자성청정인 것입니다.

 

 

2.

 

盡如無盡 ,,,“다함과 다함 없음은

 

爲一 ,,,하나입니까?

 

爲別 ,,, 다릅니까?”

 

體是一 ,,,“본체는 하나이나

 

說卽有別,,, 말하면 다름이 있느니라.”

 

 

3.

 

體旣是一 ,,,“본체가 이미 하나일진댄

 

云何說別 ,,, 어째서 다름을 말씀하십니까?”

 

一者 ,,,“하나라 함은

 

是說之體 ,,, 말의 본체요

 

說是體之用 ,,, 말함은 본체의 작용이니,

 

爲隨事應用故,,, 일을 따라서 응용하는 까닭에

 

云體同說別 ,,, 본체는 같으나 말함은 다르다고 하는 것이니라.

 

喩如天上一日下 ,,,비유하면 천상의 한 해 아래

 

直種種盆器盛水 ,,, 여러 가지 그릇들을 놓아두고 물을 채우면

 

一一器中 ,,, 하나 하나의 그릇 가운데에

 

皆有於日 ,,, 모두 해가 있어서,

 

諸器中日 ,,, 모든 그릇 가운데의

 

悉皆圓滿 ,,,해가 다 원만하여

 

與天上日 ,,, 하늘 위의 해와

 

亦無差別故 ,,, 아무런 차별이 없는 까닭에

 

云體同 ,,, 본체는 같다고 말하는 것이요,

 

爲隨器立名,,, 그릇에 따라 이름을 세워서

 

卽有差別,,, 곧 차별이 있으므로

 

所以有別 ,,, 다른 것이니라.

 

故云體同 ,,,그러므로 본체는 같으나

 

說卽有別 ,,, 말하면 다름이 있다고 하느니라.

 

所現諸日,,,그릇에 나타난 모든 해가

 

悉皆圓滿 ,,, 모두 원만하여

 

於上本日 ,,,하늘의 본래 해와

 

亦無損減故 ,,, 또한 손감이 없는 까닭으로

 

云無盡也,,, 다함이 없다고 하느니라.”

 

 

<강설>

 

그릇에 있는 해나 하늘의 해가 서로서로 구별이 있느냐 하면 구별이 없는 것이니 같음이 곧 다름이고 다름이 곧 같음이어서 하나와 다름이 원융무애한 것입니다.

 

26. 不生不滅/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

 

經云 ,,,“경에서 이르기를

 

不生不滅 ,,,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하시니

 

何法不生 ,,, 어떤 법이 나지 아니하며

 

何法不滅,,, 어떤 법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不善 ,,,“착하지 않음이

 

不生 ,,, 나지 않음이요

 

善法 ,,,, 착한 법은

 

不滅 ,,,없어지지 아니하느니라.”

 

 

2.

 

何者善 ,,,“어떤 것이 착함이며

 

何者不善,,, 어떤 것이 착하지 않음입니까?

 

不善者 ,,,착하지 않음이란

 

是染漏心 ,,, 염루심이요

 

善法者 ,,,착한 법이란

 

是無染漏心 ,,, 염루심이 없음이니

 

但無染無漏 ,,, 다만 염루가 없으면

 

卽是不善不生,,, 곧 착하지 않음이 나지 않음이며,

 

得無染無漏時,,, 염루가 없음을 얻었을 때에

 

卽淸淨圓明,,, 곧 청정하고 둥글고 밝아

 

湛然常寂 ,,, 담연히 항상 고요해서

 

畢竟不遷 ,,, 마침내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是名善法不滅也 ,,, 착한 법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니

 

此卽是 ,,,이것이 곧

 

不生不滅,,,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하느니라.“

 

 

<강설>

 

염루심이란 차별심분별심입니다. 염루심은 8식 전체를 말하는 것이니 그것이 완전하게 끊어질 것 같으면 8식 전체가 나지 아니하여 무생법인을 증하게 되니 이것이 나지 아니함인 것입니다. 거기서 항사묘용이 다함없이 현전하니 이것을 없어지지 아니함이라 하는 것입니다. 일체망념, 분별심이 다 끊어진 것을 나지 아니한다고 하니 이것이 무생법인이며 남이 없음이며 자성청정입니다. 자성청정이 될 것 같으면 항사묘용이 원만구족하니 이것이 없어지지 아니함인 것입니다. 결국 자성청정이 항사묘용이고 항사묘용이 자성청정이어서 이것을 돈오요 부처요 견성이요 열반이라 하는 것입니다.

 

27. 佛戒淸淨心/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菩薩戒云 ,,,“보살계에 이르기를

 

衆生 ,,,중생이

 

受佛戒 , ,,부처님 계를 받으면

 

卽入諸佛位 ,,, 곧 모든 부처님의 지위에 들어가는지라

 

位同大覺已,,, 지위가 대각과 같아서

 

眞是諸佛子,,, 참으로 부처님의 아들이다라고 하시니

 

基義云何 ,,, 그 뜻이 어떠합니까?”

 

佛戒者 ,,,“부처님의 계란

 

淸淨心是也 ,,, 청정한 마음이니

 

若有人 ,,,만약 어떤 사람이

 

發心 ,,,발심하여

 

修行淸淨行 ,,, 청정행을 수행하여

 

得無所受心者 ,,, 받는 바가 없는 마음을 얻은 사람은

 

名受佛戒也,,, 부처님의 계를 받았다고 하느니라.

 

過去諸佛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皆修淸淨無受行 ,,,다 청정하여 받음이 없는 행을 닦아서

 

得成佛道 ,,, 불도를 이룬 것이니,

 

今時 ,,,지금

 

有人 ,,,어떤 사람이

 

發心修無受淸淨行者,,,발심하여 받음이 없는 청정행을 닦는 사람은

 

卽是佛功德等用 ,,, 곧 부처님과 더불어 공덕을 균등하게 써서

 

無有異也 ,,,다름이 없느니라.

 

故云入諸佛位也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의 지위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니

 

如是悟者 ,,, 이렇게 깨달은 사람은

 

與佛悟同故 ,,, 부처님과 더불어 깨달음이 같으므로

 

云位同大覺已 ,,, 지위가 대각과 같아서

 

眞是諸佛子 ,,, 참으로 모든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從淸淨心生智 ,,, 청정한 마음으로부터 지혜가 나는지라

 

智淸淨 ,,, 지혜가 청정함을

 

名位諸佛子 ,,,이름하여 모든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하며,

 

亦名此佛子,,, 또한 이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니라.”

 

 

<강설>

 

부처님 지위에 들어가는 것은 성불한다는 뜻입니다. 중생이 성불하여 대각을 성취하면 부처님과 같은데 왜 부처님 아들이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것은 본말이 융통한 데서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 아들이 곧 묘각이고 묘각이 곧 부처님 아들이어서 진공묘유의 원융무애한 곳에서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중생이 모든 부처님 지위에 들어가 버리면 지위가 없어지는 것이니, 부처님과 중생 사이에 간격이 있거나 차별이 있는 데서 말함이 아니라 자유자재한 곳에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각이 부처님 아들이고 부처님 아들이 대각인 것입니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부처님 계를 받는다고 했으니 어떤 것이 부처님 계율이냐 하는 것입니다. 십주대계 이것을 부처님 계라 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사바라이 이것을 부처님 계라 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사십팔경계를 부처님 계라고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십중대계라는 이름, 사바라이라는 이름, 사십팔경계라는 이름에 따라 갈 것 같으면 부처님 계라는 것은 영원히 모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 부처님 계를 받는다고 하니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하면 부처님 계를 영원히 배반하고 마는 것입니다.

 

받지 아니하는 마음이 무엇인가 하면 부처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조사도 받아들이지 아니하며, 마구니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외도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나아가서는 일체를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한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거시에는 일체가 머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곧 자성이 청정한 진여본성에는 부처도 거기 가서 머물지 못하고 조사도 거기 가서 머물지 못하고 중생도 거기 가서 머물지 못하고, 외도도 거기 가서 머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체가 머물지 못하기 때문에 청정하여 때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때가 없다는 것은 진여본성을 가리킴이니 부처님 계를 받는다 하는 것은 중생이 공부를 해서 진여본성 즉 자성청정심을 완전히 증함으로써 부처님 계를 받는다고 하는 것이지, 언어문자로써 단순히 고기를 먹지 말라, 술을 먹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하는 등의 말을 듣는 것이 부처님 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에서 쓰이는 받을 자를 머물 자로 보면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無受行 - 받음이 없는 행은 無住行 - 머무름이 없는 행으로 바꿔보면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부처님 계율을 받는다는 것은 자성청정심을 확철히 깨쳐서 수용자재함에 있는 것이지 언어문자로 표현된 계의 이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각이란 부처님을 가리킨 것이니 자성청정심을 깨치면 대각의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므로 대각은 높고 부처님의 아들은 낮은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버지가 곧 아들이요 아들이 곧 아버지로서 근본이 곧 지말이고 지말이 곧 근본으로 본말이 원융무애해서 융통자재함을 의미하는 만큼 부처님 아들이라 해도 괜찮고 대각이라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청정한 마음을 좇아서 지혜가 난다함은 청정한 마음에서 일체종지가 현발한다는 것입니다.

 

이 청정한 마음에는 일체가 서지 못하여 한 포기 풀도 나지 아니하니 이것을 심청정이라 하며, 지혜가 난다는 것은 심광명을 말하는 것이니 청정한 마음의 묘용입니다.

 

청정한 마음에서 지혜가 남은 본체를 따라 활동을 나타내는 것[從體現用]이니 청정한 마음 그 자체에서 묘용인 일체지가 나타남이며, 지혜가 청정함은 활동을 따라 본체를 아는 것[從用見體]이니 일체종지가 청정한 마음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묘용 이대로가 청정한 마음이고 청정한 마음 이대로가 묘용이며, 지혜가 곧 청정한 마음이며 청정한 마음이 곧 지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여본성 곧 자성청정심을 확철히 깨친 것을 부처님 계를 받았다 하고, 확철히 깨친 사람을 부처님 계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렇게 알면 대주스님의 뜻을 바로 안 것이 됩니다

 

28. 先後/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

 

只是佛之與法 ,,,“부처님과 법에 있어서

 

爲是佛在先 ,,, 부처님이 앞입니까?

 

爲是法在先 ,,,법이 앞입니까?”

 

若法在先 ,,,“만약 법이 앞이라고 하면

 

法是何佛所說 ,,, 법은 어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이며,

 

若佛在先 ,,, 만약 부처님이 앞이라고 하면

 

承何敎而成道,,, 어떤 가르침을 이어 받아서 도를 이룬 것입니까?

 

,,,부처님은

 

亦在法先 ,,, 법보다 앞에 있기도 하고

 

亦在法後 ,,, 법의 뒤에 있기도 하느니라.”

 

 

<강설>

 

법이 먼저라면 법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 내놓고 법이란 없는 것이며, 부처님이 먼저라면 누구든지 성불하려면 법에 의지해서 깨쳐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성불할 수 없는데 부처님은 무엇을 의지해서 성불하셨겠느냐는 물음입니다. 곧 부처님과 법의 선후가 어찌 되느냐는 물음입니다. 부처님이 먼저 있었다 해도 안 되고 법이 먼저 있었다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 이 단의 문제입니다.

 

이런 어구들을 보고 보통 사람들은 흔히 선가에서는 궤변설을 많이 한다고들 합니다. 순전히 모순된 표현을 쓰기 때문입니다. 앞에 있으면 분명히 앞에 있고 뒤에 있으면 분명히 뒤에 있는 것이지 어떻게 앞에도 있고 뒤에도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법을 모르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 법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런 의혹이 없습니다.

 

 

2.

 

因何佛法先後 ,,,“어찌하여 부처님과 법에 앞뒤가 있습니까?”

 

若據寂滅法 ,,,“만약 적멸법에 의거하면

 

是法先佛後 ,,, 법이 앞이요 부처님이 뒤이며,

 

若據文字法 ,,, 문자법에 의거하면 부처님이 앞이요

 

是佛先法後 ,,, 법은 뒤이니라.

 

何以故 ,,, 왜냐하면

 

一切諸佛 ,,, 일체 모든 부처님이

 

皆因寂滅法而得成佛,,, 모두 적멸법에 의해서 성불을 했으므로

 

卽是法先佛後 ,,, 곧 법이 앞이요 부처님은 뒤이니,

 

經云 ,,, 경에서 이르기를

 

諸佛所師 ,,,‘모든 부처님의 스승됨은

 

所謂法也 ,,, 이른바 법이다라고 하였느니라.

 

得成道巳 ,,, 성도하고 나서

 

然始廣說十二部經,,,비로소 십이부경을 널리 설하여

 

引化衆生 ,,, 중생을 인도하여 교화시키니

 

衆生 ,,, 중생이

 

承佛法敎 ,,, 부처님의 법의 가르침을 받아서

 

修行得成佛 ,,, 수행하여 성불하므로

 

卽是佛先法後也,,, 곧 부처님이 앞이요 법은 뒤인 것이니라.”

 

 

<강설>

 

적멸법이란 자성청정을 말하니 자성이 고요하고 고요해 일체만법이 거기 서지 못함을 말합니다. 곧 법이 스승이라고 할 때 그 법은 적멸법을 말하며 성도하신 뒤 연설하신 십이부경은 문자법이 됩니다.

 

 

29. 說通宗通/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云何是說通宗不通 ,,,“어떤 것이 설법은 통하고 종취는 통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言行相違卽是說通宗不通,,,“말과 행동이 서로 틀림이 곧 설법은 통하고 종취는 통하지 못한 것이니라.”

 

云何是宗通說亦通 ,,,어떤 것이 종취도 통하고 설법도 또한 통한 것입니까?”

 

言行無差 卽是說通宗亦通 ,,,“말과 행동이 차이가 없음이 곧 설법도 통하고 종취도 또한 통한 것이니라.”

 

 

<강설>

 

이란 진여 자체, 청정자성을 말한 것이며 이란 항사묘용, 지혜를 말한 것입니다. 항사묘용 내놓고 청정자성이 없고 청정자성 내놓고 항사묘용이 없으니, 종이 곧 말이고 말이 곧 종이어서 말과 행동이란 것도 언제든지 융통합니다. 그래서 종을 확실히 통하면 말도 통하는 것이며 말을 확실히 통하면 종도 통하는 것인데 혹 중생이 오해할까봐 이런 분별을 가지고 말씀한 것이지 실제에 있어서는 이 둘이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30. 不到/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經云 ,,,“경에서 이르기를

 

到不到不到到之法云何,,, 이르되 이르지 아니하고 이르지 않되 이른 법이란 무엇입니까?”

 

說到行不到 ,,,“말은 이르러도 행은 이르지 못함이

 

名爲到不到 ,,,이르렀으나 이르지 못함이요,

 

行到說不到 ,,,행은 이르러도 말은 이르지 못함이

 

名爲不到到 ,,,이르지 않되 이르른 것이며,,

 

行說俱到 ,,,행과 말이 함께 이르름이

 

名爲到到 ,,,이르고 이름이라고 하느니라.”

 

 

<강설>

 

이른다[]는 말은 어디 갔다는 뜻이니 서울 갔다는 말이고, 이르지 아니함[不到]이란 못갔다, 서울 못갔다는 말이며, 이르지 않고 이른다[不到到]함은 못갔는데 갔다 즉 서울 못갔는데 서울 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진여자성을 아주 깊이 깨쳐야 알지 깨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열반경19권에 이르지 아니하고 이른다[不到到], 이르지 않고 이르지 않는다[不到不到], 이르러도 이르지 못한다[到不到], 이르고 이른다[到到]’라는 네 가지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단에서는 不到不到가 빠졌는데 행과 말이 같 이르지 못함[行說俱不到]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행과 말을 가지고 논하는데 행은 할 수 있으면서 말은 할 수 없고, 말은 할 수 있으면서 행은 할 수 없다면 이것이 불법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곧 분명히 말하자면 분명히 알기 전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고, 분명히 행한다면 말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도에 입각해서 해석해 본다면 이르지 못함이란 쌍차로서 일체 언설이 다 떨어진 청정 자체, 적멸자체를 말하며, 이른다 함은 쌍조로서 일체 언설을 무애자재하게 쓰는 것을 말합니다. 진공을 이르지 못함[不到]이라 하고 묘유를 이른다[]고 합니다. 실제에 있어서 행동 다르고 말 다르고 한 것이 아니라 원융무애한 줄 알면 됩니다. 이것을 확철히 알려면 화두참선을 부지런히 해서 자성을 바로 깨쳐야지 바로 깨치기 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열반경에서 말씀한 이 네 가지 이르름[四到]은 유명한 법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임제스님의 사료간도 알 수 있고 쌍차쌍조도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1. 不盡有爲不住無爲/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佛法 ,,,“불법은

 

不盡有爲 ,,, 유위에도 다하지 아니하고

 

不住無爲 ,,, 무위에도 머물지 아니한다 하니

 

何者是不盡有爲 ,,, 어떤 것이 유위에도 다하지 아니하고

 

何者是不住無爲 ,,, 무위에도 머물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不盡有爲者 ,,,“유위에도 다하지 아니한다 함은

 

從初發心 ,,, 처음 발심으로부터

 

至菩提樹下成等正覺 ,,, 드디어 보리수 아래에서 등정각을 이루시고

 

後至雙林入般涅般 ,,, 마침내 쌍림에 이르러 열반에 드실 때까지

 

於中 ,,, 그 가운데

 

一體法 ,,, 일체법을 모두 다 버리지 않음이

 

悉皆不捨卽是不盡有爲也 ,,, 곧 유위에도 다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不住無爲者 ,,, 무위에도 머물지 아니한다 함은

 

雖修無念 ,,, 비록 무념을 닦는다 할지라도

 

不以無念 ,,, 무념으로써

 

爲證 ,,,증함을 삼지 않으며,

 

雖修空 ,,, 비록 공을 닦으나

 

不以空爲證 ,,,공으로써 증함을 삼지 않으며,

 

雖修菩提涅般無相無作 ,,,비록 보리열반무상무작을 닦으나

 

不以無相無昨 ,,, 무상무작으로써

 

爲證 ,,, 증함을 삼지 않음이

 

卽是不住無爲也 ,,, 곧 무위에도 머물지 아니하는 것이니라.”

 

 

<강설>

 

유위에도 다하지 아니하고 무위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말은 있음도 버리지 아니하고 없음도 취하지 아니한다는 뜻이니 이러한 뜻을 물음으로써 무위와 유위를 밝혀 주는 것입니다.

 

유위에 다하지 아니한다함은 있음을 버리지 아니한다는 것이니 그렇다고 생멸의 있음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생활 전체가 진여대용이지 생멸법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만법이 원만구족하여 한 법도 버릴래야 버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위에도 머물지 아니한다함은 없음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념을 닦는다 해도 무념으로써 깨침을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념이라 하니 무슨 물건과 같아서 그걸 하나 집어서 이 사람도 주고 저 사람도 주고 자기의 호주머니에도 넣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무념이라는 것은 명상도 찾아볼 수 없고 사량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부처도 전할 수 없고 조사도 전할 수 없는 것이며, 전할 수 없는 가운데 분명히 또 전하는 것이니 이것이 우리 불법에 있어서 부사의묘법인 것입니다.

 

유위에 다함이 없음은 묘유이니 아무리 항사묘용을 쓰더라 해도 한 법도 버릴래야 버릴 수 없고, ‘무위에 머물지 않음은 진공이니 여기에 한 법도 세울래야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위가 즉 무위이고 무위가 즉 유위이며, 생사가 즉 열반이고 열반이 즉 생사이며, 제불이 즉 중생이고 중생이 즉 제불로서 서로 융통자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양변을 여읜 두 가지 성품이 공한 중도에서 하는 말이지, 중도를 성취하지 못하고 진여정각을 이루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유위는 유위이고 무위는 무위여서 영원히 서로 통하지 못합니다.

 

32. 地獄有無/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爲有地獄 ,,,“지옥이 있습니까?

 

爲無地獄 ,,, 지옥이 없습니까?”

 

亦有亦無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하느니라.”

 

云何亦有亦無,,,“어째서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합니까?”

 

爲隨心所造一體惡業 ,,,“마음을 따라 짓는 바 일체 악업이

 

卽有地獄 ,,, 곧 지옥에 있음이요,

 

若心無染 ,,,만약 마음이 물들지 아니하면

 

自性 ,,, 자성이

 

空故 ,,, 공한 까닭에

 

卽無地獄,,, 곧 지옥이 없느니라.”

 

 

<강설>

 

마음이 일체 망념을 따라 모든 악업을 지으면 분명히 지옥이 있고, 마음이 일체 망념을 다 끊어서 청정하면 자성이 공하여 일체 상대를 찾아볼 수 없으니 지옥이 없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성취해서 자성을 완전히 깨치고 보면 지옥이 없고 중생이 망념으로 엎치락뒤치락 업만 지으면 지옥이 분명히 있습니다.

33. 衆生佛性/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

 

受罪衆生 ,,, “죄를 지은 중생도

 

有佛性否 ,,, 불성이 있습니까?”

 

亦有佛性 ,,,“또한 불성이 있느니라.”

 

旣有佛性 ,,,“이미 불성이 있을진댄

 

正入地獄時,,, 바로 지옥에 들어갈 때에

 

佛性 ,,, 불성도

 

同入否 ,,, 함께 들어갑니까?”

 

不同入 ,,,“함께 들어가지 않느니라.”

 

正入之時 ,,,“바로 지옥에 들어갈 때에

 

佛性 ,,, 불성은

 

復在何處,,,다시 어느 곳에 있습니까?”

 

亦同入 ,,,“또한 함께 가지고 들어가느니라.”

 

旣同入 ,,,“이미 함께 들어갈진댄

 

正入衆生 ,,, 지옥에 들어갈 때 중생이

 

受罪 ,,, 죄를 받음에

 

佛性 ,,,,불성도

 

亦同受罪否,,, 또한 함께 죄를 받습니까?”

 

佛性 ,,, ,,,“불성이

 

雖隨衆生同入 ,,,비록 중생을 따라 함께 지옥에 들어가지만

 

是衆生 ,,, 중생이

 

自受罪苦 ,,,스스로 죄의 고통을 받는 것이요

 

佛性 ,,,,불성은

 

元來不受,,, 원래 고통을 받지 않느니라.”

 

 

<강설>

 

지옥천당은 중생의 업연으로 지옥천당이 있는 것이지 자성에 있어서는 지옥천당이 없습니다. 중생이 아무리 자기 업연으로 지옥에 가고 지옥고를 받는다 해도 지옥고는 업이 업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자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천당에 있는다 해도 불성은 천상낙을 받지 않는 것이고 아무리 지옥에 있다 해도 불성은 지옥고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은 중생업연의 환이지 실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2.

 

旣同入 ,,,“이미 지옥에 들어갔을진댄

 

因何不受 ,,,무엇 때문에 지옥고를 받지 아니합니까?”

 

衆生者 ,,,“중생이란

 

是有相 ,,,모양이 있음이니

 

卽有成壞 ,,, 모양이 있는 것은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있음이요,

 

佛成者 ,,, 불성이란

 

是無相 ,,, 모양이 없음이니

 

無相者 ,,, 모양이 없는 것은

 

卽是空性也 ,,, 곧 공한 성품이니라.

 

是故 ,,, 그러므로

 

眞空之性 ,,,참 공의 성품이란

 

無有壞者 ,,, 무너짐이 없는것이니라

 

喩如有人 ,,,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於空 ,,,허공에

 

積薪 ,,, 땔나무를 쌓으면

 

薪自受壞 ,,, 땔나무는 스스로 무너지나

 

空不受壞也,,, 허공은 무너지지 않음과 같으니

 

空喩佛性 ,,, 허공은 불성에 비유하고

 

薪喩衆生 ,,, 땔나무는 중생에 비유한 것이니,

 

,,,그러므로

 

云同入而不同受也 ,,, 함께 들어가나 함께 받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강설>

 

모양[]이란 업연이며 이루어지고 무너짐이란 생멸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업연이 있으므로 생멸이 있고 불성은 업연이 없으므로 생멸이 없습니다. 그래서 중생이 지옥에 들어가면 중생업으로 인해 모양이 있으므로 무너지고 이루어짐이 있어서 지옥고를 받으나, 중생의 불성은 모양이 없으므로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없어서 거기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아니합니다.

 

중생의 업이란 생멸이 있어 시작이 있고 끝이 있으니 천당에 가서 낙을 받기도 하고 지옥에 가서 고를 받기도 하지만, 불성, 근본자성은 생명이 없어 시작이 없고 끝이 없으니 천당에 가서 낙을 받아도 아무 영향이 없고 지옥에 가서 고를 받아도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이 들어가 있으나 같이 받지 아니한다고 한 것이니 같이 받지 아니하기 때문에 들어가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설사 고를 받는다 해도 중생업이 받는 것이지 불성이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두 갈래나 나는 것 같지만 이것은 중생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확철히 깨쳐서 무명의 실다운 성품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법신이라는 것을 바로 알면 이것은 일종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34. 三身四智./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

 

轉八識成四智 ,,,“팔식을 돌이켜서 네 가지 지혜를 이루며

 

束四智成三身 ,,, 네 가지 지혜를 묶어서 삼신을 이룬다고 하니,

 

幾箇識 ,,,몇 개의 식이

 

共成一智 ,,, 한 지혜를 이루며

 

幾箇識 ,,,몇 개의 식이

 

獨成一智,,, 한 지혜를 홀로 이루는 것입니까?”

 

眼耳鼻舌身 ,,,“몸의

 

此五識 ,,,이 다섯 식이 함께

 

共成成所作智 ,,,성소작지를 이루고

 

第六 ,,,6식은

 

是意 ,,, 의식이니

 

獨成妙觀察智 ,,, 홀로 묘관찰지를 이루고

 

第七心識 ,,, 7심식은

 

獨成平等成智 ,,, 홀로 평등성지를 이루고

 

第八含藏識 ,,, 8 함장식은

 

獨成大圓鏡智,,, 홀로 대원경지를 이루느니라.

 

此四智爲別 ,,,“이 네 가지 지혜는 각각 다른 것입니까?

 

爲同 ,,,같은 것입니까? ”

 

體同名別 ,,,“본체는 같으나 이름이 다르니라.”

 

 

<강설>

 

네 가지 지혜를 진여자성 가운데서 분별하여 말한 것이지 진여자성 내놓고 네 가지 지혜가 따로 없는 것입니다. 오식, 육식, 칠식, 팔식을 가지고 설명을 하자니 네 가지 지혜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지만 통팔식 전체가 모두 끊어져서 자성청정심을 깨치고 구경각을 성취할 것 같으면 모두가 다 하나인 데서 하는 말이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중생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런 명상을 세워서 설명할뿐입니다.

 

-------------------

 

2.

 

體旣同云何名別 ,,,“본체가 이미 같을진댄 어째서 이름이 다르며,

 

旣隨事立名 ,,,이미 일을 따라 이름을 세울진댄

 

正一體之時 ,,,바로 하나의 본체일 때에

 

何者是大圓鏡智 ,,, 어떤 것이 대원경지입니까?

 

湛然空寂 ,,,“담연히 공적하여

 

圓明不動 ,,, 둥글고 밝아 움직이지 아니함이

 

得大圓鏡智,,, 곧 대원경지요,

 

能對諸塵 ,,, 능히 모든 육진에 대하여

 

不起愛憎 ,,, 사랑함과 미움을 일으키지 않음이

 

卽是二性空,,, 곧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니

 

二性空 ,,,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

 

卽平等成智,,, 곧 평등성지요,

 

能入諸根境界 ,,, 능히 모든 육근의 경계에 들어가

 

善能分別 ,,, 잘 분별하되

 

不起亂想而得自在,,,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자재를 얻음이

 

卽是妙觀察智 ,,,곧 묘관찰지요,

 

能令諸根 ,,, 능히 모든 육근으로 하여금

 

隨事應用 ,,, 일을 따라서 응용하여

 

悉入正受 ,,, 모두 정수에 들어가서

 

無二相者 ,,, 두 가지 모양이 없음이

 

卽是成所作智,,, 곧 성소작지니라.”

 

 

<강설>

 

8식을 돌이켜서 대원경지가 되는데 제8 아뢰야식은 보통으로는 망념이지만 제6에서 볼 때는 공공적적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8 아뢰야식에 머물 것 같으면 공에 빠지고 고요함에 머물게 되는 것이니 그것까지도 벗어나야만 진공의 공적 곧 대적멸처 대적정처를 성취하게 됩니다. 이것을 담연히 공적하다고 합니다. 담연히 공적하다고 하여 캄캄하여 아무 것도 없는 공적뿐이냐 하면 그렇지 않고 여기에는 참으로 항사묘용이 원만구족하고 세 가지 몸과 네 가지 지혜가 두렷이 밝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담연히 공적한 본체에서 묘용이 일어나는 것을 둥글고 밝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묘용이 활동할 때 어떤 움직임이 있느냐 하면 움직임이 없습니다. 아무리 항사묘용이 발현해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쓸지라도 조금도 움직임이 없이 담연히 청정하여 삼신사지가 원만구족하므로 이것을 대원경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육진을 대할 때 사랑하고 미워하는 두 견해가 나지 아니함은 대무심을 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일체 양변이 다 떨어진 것을 평등성지라고 합니다. 또한 일체 만법을 분별하여도 분별심이 없음을 묘관찰지라 합니다. 그리고 외부의 일체 만법에 따라서 응용자재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는 것을 성소작지라 합니다.

 

두 가지 모양이 없다는 것은 양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 가지 모양이 없음이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것이고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 두 가지 모양이 없다는 말이니 표현은 달라대 내용은 같습니다.

 

네 가지 지혜를 묶어서 세 가지 몸을 이룬다 함은 몇 개의 지혜가 함께 한 몸을 이루며 몇 개의 지혜가 홀로 한 몸을 이룸입니까?”

 

대원경지는 홀로 법신을 이루고 평등설지는 홀로 보신을 이루며 묘관찰지와 성소작지는 함께 화신을 이루니,

 

이 세 가지 몸도 또한 거짓으로 이름을 세워 분별하여 다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한 것이니라.

 

만약 이 이치를 확실히 알면 또한 삼신의 응용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본체의 성품은 모양이 없어서 머무름이 없는

 

근본을 좇아서 서니 또한 머무름이 없는 근본도 없느니라.”

 

----------------------

 

3.

 

束四智成三身者 ,,,“네 가지 지혜를 묶어서 세 가지 몸을 이룬다고 함은

 

幾箇智共成一身 ,,, 몇 개의 지혜가 함께 한 몸을 이루며

 

幾箇智獨成一身 ,,, 몇 개의 지혜가 홀로 몸을 이룹니까?”

 

大圓鏡智 ,,,“대원경지는

 

獨成法身 ,,, 홀로 법신을 이루고

 

平等成智 ,,, 평등성지는

 

獨成報身 ,,,홀로 보신을 이루며

 

妙觀察智與成所作智 ,,, 묘관찰지와 성소작지는

 

共成化身 ,,, 함께 화신을 이루니,

 

此三身 ,,, 이 세 가지 몸도

 

亦假立名字,,, 또한 거짓으로 이름을 세워

 

分別 ,,, 분별하되

 

只令未解者看 ,,,다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한 것이니라.

 

若了此理 ,,, 만약 이 이치를 확실히 알면

 

亦無三身應用 ,,, 또한 삼신의 응용이 없느니라.

 

何以故 ,,, 왜냐하면

 

無相 ,,, 본체의 성품은 모양이 없어서

 

從無住本而立 ,,, 머무름이 없는 근본을 좇아서 서니

 

若無無住本 ,,, 또한 머무름이 없는 근본도 없느니라.”

 

 

<강설>

 

법신보신화신, 즉 이 세 가지 몸이 각각 따로 있는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약 각각 있다면 사지도 각각 따로 있어야 합니다. 삼신은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삼신이라 한 것은 거짓으로 이름을 세워 분별함으로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함입니다. 만약 이 이치를 알면 삼신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본래 진여자성이라는 것은 머무름이 없는 근본도 없는데 삼신이 어떻게 설 수 있으며 사지가 어찌 설 수 있겠습니까?“

 

8식을 돌이켜서 사지보리를 성취하고 사지보리를 묶어서 삼신을 성취한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중생이 알아듣지 못하므로 중생을 이익시키기 위해서 세운 방편가설이지 실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자성은 일체의 명상이 끊어져서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고 생각할래야 생각할 수 없으니 삼신을 어디 가서 따로 세우며 사지를 어디가서 따로 세우겠습니까?

 

결국은 머무름이 없는 마음, 곧 무념심이 사지이고 삼신이지 머무름이 없는 마음, 곧 무념심을 내놓고 사지가 따로 없고 삼신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삼신사지를 성취하려면 그것들을 따로 구해서도 안 되고 오직 자성청정을 확철히 깨쳐 중도를 정등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 되고 무념이 되고 모양이 없음이 되어 삼신사지를 원만구족하게 되니, 이것이 돈오이며 견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문자에 미혹하지 말고 참으로 발본색원하여 자성을 확철히 깨쳐야 할 것입니다. 四智./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

 

轉八識成四智 ,,,“팔식을 돌이켜서 네 가지 지혜를 이루며

 

束四智成三智 ,,, 네 가지 지혜를 묶어서 삼신을 이룬다고 하니,

 

幾箇識 ,,,몇 개의 식이

 

共成一智 ,,, 한 지혜를 이루며

 

幾箇識 ,,,몇 개의 식이

 

獨成一智,,, 한 지혜를 홀로 이루는 것입니까?”

 

眼耳鼻舌身 ,,,“몸의

 

此五識 ,,,이 다섯 식이 함께

 

共成成所作智 ,,,성소작지를 이루고

 

第六 ,,,6식은

 

是意 ,,, 의식이니

 

獨成妙觀察智 ,,, 홀로 묘관찰지를 이루고

 

第七心識 ,,, 7심식은

 

獨成平等成智 ,,, 홀로 평등성지를 이루고

 

第八含藏識 ,,, 8 함장식은

 

獨成大圓鏡智,,, 홀로 대원경지를 이루느니라.

 

此四智爲別 ,,,“이 네 가지 지혜는 각각 다른 것입니까?

 

爲同 ,,,같은 것입니까? ”

 

體同名別 ,,,“본체는 같으나 이름이 다르니라.”

 

 

<강설>

 

네 가지 지혜를 진여자성 가운데서 분별하여 말한 것이지 진여자성 내놓고 네 가지 지혜가 따로 없는 것입니다. 오식, 육식, 칠식, 팔식을 가지고 설명을 하자니 네 가지 지혜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지만 통팔식 전체가 모두 끊어져서 자성청정심을 깨치고 구경각을 성취할 것 같으면 모두가 다 하나인 데서 하는 말이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중생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런 명상을 세워서 설명할뿐입니다.

 

-------------------

 

2.

 

體旣同云何名別 ,,,“본체가 이미 같을진댄 어째서 이름이 다르며,

 

旣隨事立名 ,,,이미 일을 따라 이름을 세울진댄

 

正一體之時 ,,,바로 하나의 본체일 때에

 

何者是大圓鏡智 ,,, 어떤 것이 대원경지입니까?

 

湛然空寂 ,,,“담연히 공적하여

 

圓明不動 ,,, 둥글고 밝아 움직이지 아니함이

 

得大圓鏡智,,, 곧 대원경지요,

 

能對諸塵 ,,, 능히 모든 육진에 대하여

 

不起愛憎 ,,, 사랑함과 미움을 일으키지 않음이

 

卽是二性空,,, 곧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니

 

二性空 ,,,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

 

卽平等成智,,, 곧 평등성지요,

 

能入諸根境界 ,,, 능히 모든 육근의 경계에 들어가

 

善能分別 ,,, 잘 분별하되

 

不起亂想而得自在,,,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자재를 얻음이

 

卽是妙觀察智 ,,,곧 묘관찰지요,

 

能令諸根 ,,, 능히 모든 육근으로 하여금

 

隨事應用 ,,, 일을 따라서 응용하여

 

悉入正受 ,,, 모두 정수에 들어가서

 

無二相者 ,,, 두 가지 모양이 없음이

 

卽是成所作智,,, 곧 성소작지니라.”

 

 

<강설>

 

8식을 돌이켜서 대원경지가 되는데 제8 아뢰야식은 보통으로는 망념이지만 제6에서 볼 때는 공공적적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8 아뢰야식에 머물 것 같으면 공에 빠지고 고요함에 머물게 되는 것이니 그것까지도 벗어나야만 진공의 공적 곧 대적멸처 대적정처를 성취하게 됩니다. 이것을 담연히 공적하다고 합니다. 담연히 공적하다고 하여 캄캄하여 아무 것도 없는 공적뿐이냐 하면 그렇지 않고 여기에는 참으로 항사묘용이 원만구족하고 세 가지 몸과 네 가지 지혜가 두렷이 밝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담연히 공적한 본체에서 묘용이 일어나는 것을 둥글고 밝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묘용이 활동할 때 어떤 움직임이 있느냐 하면 움직임이 없습니다. 아무리 항사묘용이 발현해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쓸지라도 조금도 움직임이 없이 담연히 청정하여 삼신사지가 원만구족하므로 이것을 대원경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육진을 대할 때 사랑하고 미워하는 두 견해가 나지 아니함은 대무심을 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일체 양변이 다 떨어진 것을 평등성지라고 합니다. 또한 일체 만법을 분별하여도 분별심이 없음을 묘관찰지라 합니다. 그리고 외부의 일체 만법에 따라서 응용자재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는 것을 성소작지라 합니다.

 

두 가지 모양이 없다는 것은 양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 가지 모양이 없음이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것이고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 두 가지 모양이 없다는 말이니 표현은 달라대 내용은 같습니다.

 

네 가지 지혜를 묶어서 세 가지 몸을 이룬다 함은 몇 개의 지혜가 함께 한 몸을 이루며 몇 개의 지혜가 홀로 한 몸을 이룸입니까?”

 

대원경지는 홀로 법신을 이루고 평등설지는 홀로 보신을 이루며 묘관찰지와 성소작지는 함께 화신을 이루니,

 

이 세 가지 몸도 또한 거짓으로 이름을 세워 분별하여 다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한 것이니라.

 

만약 이 이치를 확실히 알면 또한 삼신의 응용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본체의 성품은 모양이 없어서 머무름이 없는

 

근본을 좇아서 서니 또한 머무름이 없는 근본도 없느니라.”

 

----------------------

 

3.

 

束四智成三身者 ,,,“네 가지 지혜를 묶어서 세 가지 몸을 이룬다고 함은

 

幾箇智共成一身 ,,, 몇 개의 지혜가 함께 한 몸을 이루며

 

幾箇智獨成一身 ,,, 몇 개의 지혜가 홀로 몸을 이룹니까?”

 

大圓鏡智 ,,,“대원경지는

 

獨成法身 ,,, 홀로 법신을 이루고

 

平等成智 ,,, 평등성지는

 

獨成報身 ,,,홀로 보신을 이루며

 

妙觀察智與成所作智 ,,, 묘관찰지와 성소작지는

 

共成化身 ,,, 함께 화신을 이루니,

 

此三身 ,,, 이 세 가지 몸도

 

亦假立名字,,, 또한 거짓으로 이름을 세워

 

分別 ,,, 분별하되

 

只令未解者看 ,,,다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한 것이니라.

 

若了此理 ,,, 만약 이 이치를 확실히 알면

 

亦無三身應用 ,,, 또한 삼신의 응용이 없느니라.

 

何以故 ,,, 왜냐하면

 

無相 ,,, 본체의 성품은 모양이 없어서

 

從無住本而立 ,,, 머무름이 없는 근본을 좇아서 서니

 

若無無住本 ,,, 또한 머무름이 없는 근본도 없느니라.”

 

 

<강설>

 

법신보신화신, 즉 이 세 가지 몸이 각각 따로 있는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약 각각 있다면 사지도 각각 따로 있어야 합니다. 삼신은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삼신이라 한 것은 거짓으로 이름을 세워 분별함으로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함입니다. 만약 이 이치를 알면 삼신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본래 진여자성이라는 것은 머무름이 없는 근본도 없는데 삼신이 어떻게 설 수 있으며 사지가 어찌 설 수 있겠습니까?“

 

8식을 돌이켜서 사지보리를 성취하고 사지보리를 묶어서 삼신을 성취한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중생이 알아듣지 못하므로 중생을 이익시키기 위해서 세운 방편가설이지 실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자성은 일체의 명상이 끊어져서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고 생각할래야 생각할 수 없으니 삼신을 어디 가서 따로 세우며 사지를 어디가서 따로 세우겠습니까?

 

결국은 머무름이 없는 마음, 곧 무념심이 사지이고 삼신이지 머무름이 없는 마음, 곧 무념심을 내놓고 사지가 따로 없고 삼신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삼신사지를 성취하려면 그것들을 따로 구해서도 안 되고 오직 자성청정을 확철히 깨쳐 중도를 정등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 되고 무념이 되고 모양이 없음이 되어 삼신사지를 원만구족하게 되니, 이것이 돈오이며 견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문자에 미혹하지 말고 참으로 발본색원하여 자성을 확철히 깨쳐야 할 것입니다.

 

35. 佛眞身/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

 

云何是見佛眞身 ,,,“어떤 것이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보는 것입니까?”

 

不見有無卽是見佛眞身,,,“있음과 없음을 보지 아니하는 것이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보는 것이니라.”

 

云何不見有無卽是見佛眞身,,,“어째서 있음과 없음으로 보지 않음이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보는 것입니까?”

 

有因無立 ,,,“있음은 없음으로 인해서 서고,

 

無因有顯 ,,, 없음은 있음으로 인해 나타나느니라.

 

本不立有 ,,, 본래 있음을 세우지 아니하면

 

無亦不存 ,,, 없음도 또한 존재하지 아니하니

 

旣不存無 ,,, 이미 없음이 존재하지 않는데

 

有從何得 ,,, 있음을 어디서 얻을 수 있으리오.

 

有之與無 ,,, 있음과 없음이

 

相因始有 ,,, 서로 인해서 비로소 있으니

 

旣相因而有 ,,, 이미 서로 인해서 있으니

 

悉是生滅也 ,,, 모두 생멸이

 

但離此二見 ,,,있음과 없음의양변을 떠나면

 

卽是見佛眞身,,,모두가 참된 몸을 보는 것이니라.”

 

 

<강설>

 

이 단의 뜻은 육조스님이 돌아가실 때 중도 유언을 하신 그 뜻과 같은 것입니다. 생멸법은 상대법이어서 상대가 없으면 서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상대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은 생멸법이지 상주법은 아니므로 불법이 아닙니다. 부처님 몸이라는 것은 상주신이지 생멸신은 아닙니다. 생멸신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서 결국은 無常으로 돌아가는데, 부처님 몸은 시작이 없고 끝이 없어서 언제나 상주불멸이기 때문에 절대로 상대적인 생멸법으로써는 부처님 몸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의 양변을 완전히 떠나 중도를 성취해야만 부처님의 진신을 볼 수 있는 것이지 중도를 성취하기 전에는 부처님의 진신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공부해서 반드시 중도를 정등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只如有無 ,,,“다만 있음과 없음도

 

尙不可交建立 ,,,오히려 서로 건립하지 못하거늘

 

眞身 ,,, 부처님의 진신이

 

復從何而立,,, 다시 무엇을 좇아서 설 수 있습니까?”

 

爲有問故 ,,,“물음이 있기 때문이니,

 

若無問時 ,,, 만약 묻지 않을 때엔

 

眞身之名 ,,, 진신의 이름도

 

亦不可立 ,,, 서지 못하느니라.

 

何以故 ,,, 왜냐하면

 

譬如明鏡 ,,, 비유컨대 밝은 거울이

 

若對物像時 ,,, 만약 물건의 모양을 대할 때는

 

卽現像 ,,, 모양이 나타나나

 

若不對像時 ,,, 만약 모양을 대하지 않을 때는

 

終不見像 ,,, 마침내 모양을 볼 수 없음과 같으니라.”

 

 

<강설>

 

물으니 방편가설로써 있고 없음을 말하고 진신을 말하는 것이지 실제는 부처도 찾아볼 수 없고 진신도 찾아볼 수 없는 부사의해탈경계를 부처님의 진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6. 常不離佛/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云何是常不離佛 ,,,“어떤 것이 항상 부처님을 떠나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心無起滅 ,,,“마음에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고

 

對境寂然 ,,,경계를 대하여는 고요하여

 

一切時中 ,,, 일체의 시간중에

 

畢竟空寂 ,,, 어느 때나 필경 공적하면

 

卽是常不離佛 ,,,이것이 곧 항상 부처님을 떠나지 아니함이니라.”

 

 

<강설>

 

필경공적함이란 대적정삼매를 말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보고 못보는 것은 필경공적인 대적정삼매를 성취하여 증애심을 완전히 떠나느냐 못떠나느냐 하는 여기에 달려있는 것이지 부처님이 딴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진신이란 시방세계에 충만해서 여기서는 보고 저기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생멸신이어서 상주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처님 몸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망상이 앞을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이므로 망상을 완전히 걷어 버릴 것 같으면, 구름이 걷히면 해를 보듯이 부처님을 항상 보아서 부처님 몸을 떠날래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항상 보고 부처님의 참된 몸을 떠나지 않으려고 한다면 유무의 양변을 여읜 중도를 정등각해서 기멸심 즉 생멸심을 완전히 여의어야 하는 것입니다.

 

37. 無爲法/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何者是無爲法 ,,,“어떤 것이 무위법입니까?”,

 

有爲是 ,,,“유위법이니라.”

 

今問無爲法 ,,,“지금 무위법을 물었거늘

 

因何答有爲是,,, 어째서 유위라고 답하십니까?”

 

有因無立 ,,,“있음은 없음으로 인해서 서고,

 

無因有顯 ,,, 없음은 있음으로 인해서 나타내느니라

 

本不立有 ,,, 본래 있음을 세우지 아니하면

 

無從何生 ,,,없음은 어디서 날 것인가?

 

若論眞無爲者 ,,, 만약 참된 무위를 논할진댄

 

卽不取有爲 ,,, 곧 유위도 취하지 아니하고

 

亦不取無爲 ,,,또한 무위도 취하지 아니함이

 

是眞無爲法也,,,참된 무위법이니라.

 

何以故 ,,,왜냐하면

 

經云 ,,,경에 이르기를

 

若取法相 ,,, 만약 법의 모양을 취하면

 

卽著我人 ,,,곧 아상과 인상에 집착하고

 

若取非法相 ,,, 만약 법의 모양 아닌 것을 취하여도

 

卽著我人 ,,, 곧 아상과 인상에 집착하는 것이니,

 

是故 ,,, 그러므로

 

不應取法 ,,,마땅히 법도 취하지 말고

 

不應取非法,,,법 아님도 취하지 말라고 하시니

 

卽是取眞法也 ,,,이것이 곧 참된 법을 취함이니라.

 

若了此理 ,,,만약이 이치를 밝게 알면

 

 

卽眞解脫 ,,,곧 참된 해탈이며

 

卽會不二法門,,,둘 아닌 법문을 아는 것이니라.”

 

 

<강설>

 

참된 법이란 앞의 진신과 마찬가지로 방편으로 참된 법이라 하는 것이니 부사의한 해탈경계 속에서 부득이하여 거짓으로 참된 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유위법도 버리고 무위법도 버리고 법의 모양도 버리고 법의 모양 아닌 것도 버려서 전체를 다 버리면 중도를 정등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둘이 아니고 융통자재하여 일체 무애경계가 현전하는 것이니 이것을 참다운 불법의 구경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8. 中道/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何者是中道,,,“어떤 것이 중도의 뜻입니까?”

 

邊義是 ,,,“()의 뜻이니라.”

 

今問中道 ,,,,,“지금 중도를 물었거늘

 

因何答邊義是,,, 무엇 때문에 가의 뜻이라고 답하십니까?”

 

邊因中立 ,,,“가는 가운데로 말미암아 서고,

 

中因邊生 ,,, 가운데는 가로 말미암아 나느니라.

 

本若無邊 ,,, 만약 본래 가가 없으면

 

中從何有,,,, 가운데는 무엇을 따라 있으리오.

 

今言中者,,,,지금 가운데라고 하는 것은

 

因邊始有故 ,,,가로 말미암아 비로소 있는 것이므로

 

知中之與邊 ,,, 가운데와 가가

 

相因而立 ,,,,, 서로 인하여 서 있어서

 

悉是無常 ,,,, 모두가 항상함이 없음을 일지니

 

色受想行識 ,,,, 식도

 

亦復如是,,,,, 이와 같느니라.”

 

 

<강설>

 

참으로 가운데, 곧 중도를 알려면 중도도 버리고 변견도 다 버려야 합니다. 만약 변견을 버리고 중도를 취한다고 하면 이것은 새로운 변견이 됩니다. 우리가 중도를 알려고 하면 중도도 버리고 변견도 버려서 실제로 참된 중도를 정등각해야지, 그렇지 아니하고 중도만 주장하고 변견을 배격한다면 중도병에 걸려서 진실의 중도는 영원히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조사들께서도 중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은 모든 양변을 여읜 데서 하시는 말씀이지 중도와 변견을 다시 상대로 하신 말씀은 절대로 아닙니다.

 

39. 五 陰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

 

何名五陰等 ,,,“어떤 것을 오음이라 하는가?”

 

:

 

對色染色 ,,,“색에 대하여 색에 물들어

 

隨色受生 ,,,색을 따라 남을 받는

 

名爲色陰 ,,, 것을 색음이라 하며,

 

爲領納八風 ,,,팔풍을 받아들인 까닭으로

 

好集邪信 ,,,,,삿된 믿음을

 

卽隨領納受生 ,, 즐겨 모아서 받아들임에 따라

 

名爲受陰,,,,,남을 받는 것을 수음이라 하며,

 

迷心取想 ,,,미혹한 마음이 생각을 취하여

 

隨想受生 ,,,생각을 받는 것을

 

名爲想陰 ,,, 상음이라 하며,

 

結集諸行 ,,,모든 행을 결집하여

 

隨行受生 ,,, 행을 따라,남을 받는 것을

 

名爲行陰 ,,,행음이라 하며,

 

於平等體 ,,,평등한 본체에

 

妄起分別繫著 ,,, 망령되이 분별을 일으키고 얽매어 붙어서

 

虛識受生 ,,, 허망한 의식이 남을 받는 것을

 

名爲識陰,,, 식음이라고 하는 것이니

 

故云五陰,,,그러므로 오음이라고 말하느니라.”

 

 

<강설>

 

객관적인 색이 근본이 되어 모든 생각이 색에 얽매여 자재하지 못함을 색음이라 합니다. 여기서 8풍은 객관적인 대상을 예를 들어 말한 것이니, 일체 객관적인 존재를 받아들여 삿된 믿음이 모이게 되어 그것을 받아들임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수음이라고 합니다. 오음을 순서대로 보면 수음이란 주관에서 객관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색음과 수음을 떠나서 독자적인 마음이 주관에 입각해서 분별망상이 주체가 되어 모든 활동이 전개됨을 상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관과 객관이 전체로 통합해서 모든 행을 행하는 것을 행음이라고 합니다. 다시 평등한 본체에 망념을 일으켜 분별하고 얽매여 허망한 식으로 생활함을 식음이라고 합니다.

 

이 단에서 대주스님이 해석하는 오음이 경에서 말씀하시는 오음하고는 좀 다른 면이 있다 해도 융통자재한 깨친 경계에 입각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통의 오음 행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자성을 깨치고 보면 분명히 이러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40. 二十五有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

 

經云 ,,,“경에 이르기를

 

二十五有 ,,, 이십오유라고 하니

 

何者是 ,,,, 어떤 것입니까?”

 

受後有身 ,,,“뒤의 몸을 받는 것이

 

是也 ,,,,,,,,,,이십오유이니,

 

後有身者 ,,,,뒤의 몸이란

 

卽六道受生也,, 곧 육도에 생을 받는 것이니라.

 

爲衆生 ,,,,,,,,,중생이

 

現世心迷,,,,,,,,,현세에 마음이 미혹하여

 

好結諸業 ,,,,, 기꺼이 모든 업을 맺어

 

後卽隨業受生故,,, 뒤에 업을 따라 생을 받는 까닭에

 

云後有也,,,,,,,,,,,, 뒤가 있다.(後有)고 하느니라.

 

世若有人 志修究竟解脫 ,,,, 세상에 만약 어떤 사람이 구경해탈을 닦을 뜻을 품고

 

證無生法認者 ,,,, 무생법인을 증득하면

 

卽永離三界 ,,,,,,,,곧 삼계를 영원히 떠나서

 

不受後有,,,,,,,,,,,,후유를 받지 않나니,

 

不受後有者 ,,,,,,,후유를 받지 않는 사람은

 

卽證法身,,,,,,,,,,,,곧 법신을 증득함이요

 

法身者 ,,,,,,,,,,,,,법신이란

 

卽是佛身,,,,,,,,,,,곧 불신이니라.”

 

 

<강설>

 

후유나 후유신은 내생입니다. 이 내생이라는 것은 격생 즉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만이 내생이 아니고 우리의 찰나찰나 현재 이대로가 내생입니다.

 

현전하는 바로 앞의 생각이 전생이고 지금의 생각이 금생이고 현재의 바로 뒷생각이 내생입니다.

 

한 한 생각에서 육도에 생을 받는 것이지 이것을 내놓고 육도에 생을 받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공부를 부지런히 해서 삼계의 이십오유의 근본망념을 완전히 타파하여 무생법인을 깨쳐 구경해탈을 얻으면 영원토록 삼계에서 이십오유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2.

 

二十五有名 ,,,“이십오유의 이름을

 

云何分別,,,,,,, 어떻게 분별합니까?

 

本體是一,,,,,,,,“본체는 하나이지만

 

爲隨用立名,,,,, 씀에 따라 이름을 세워서

 

顯二十五有,,,,,이십오유를 나타내니

 

二十五有,,,,,,,,이십오유는

 

十惡十善,,,,,,, 십악과 십선과

 

五陰 是,,,,,,,,, 오음이니라.”

 

 

<강설>

 

이십오유를 이렇게 설명하면 경에서 말씀하신 이십오유와는 전혀 틀리는데 대주스님은 어찌 해서 이렇게 말씀했겠습니까? 대주스님이 경에서 말씀한 삼계의 이십오유를 모르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삼계 이십오유의 근본이 십악십선오음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꼭 경에 말씀한 삼계 이십오유를 들어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 생각이 현전하여 행하는 십악과 십선와 오음 이대로가 이십오유로서 이것 이외의 다른 이십오유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현전하는 십악십선오음의 이십오유나 삼계의 이십오유는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똑같습니다. 십악과 십선과 오음이 근본되어 삼계의 이십오유가 벌어지는 것이고 삼계의 이십오유가 벌어지는 내용은 십악과 십선과 오음의 활동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을 들어 말할 때는 십악과 십선과 오음이고, 행상을 들어 말할 때는 삼계의 이십오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3.

 

云何是十惡十善...“어떤 것이 십악 십선입니까?”

 

十惡 殺盜婬 ,,,,,,“십악은 죽이는 것, 훔치는 것, 음행하는 것

 

妄言綺語兩舌惡口,,, 거짓말, 아첨하는 말, 이간질하는 말, 나쁜 말

 

乃至貪瞋邪見 ,,,,,,,내지 탐냄, 성냄, 삿된 견해이니

 

此名十惡 ,,,,,,,,,,이것이 십악이요,

 

十善者 ,,,,,,,,,,,,,, 십선이란

 

但不行十惡 ,,,,,,,,단지 십악을 행하지 않는

 

卽是也,,,,, 것이니라.”

 

 

<강설>

 

이십오유의 체는 하나라고 했으니 십악이나 십선이나 오음이나 전체가 일념심 가운데 하는 말이지 일념심을 내놓고는 이십오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 생각이 이십오유이고 이십오유가 한 생각이어서 이름은 각각 따로 세우지만 그 내용은 한 생각뿐이니 실제로는 이십오유가 없습니다. 일념심이란 진여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통팔식의 망념을 말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십오유에 대한 대주스님의 해석은 독자적인 것으로 전통 불교의 해석과는 틀립니다. 전통 불교의 이십오유에 대한 法數는 다음과 같으니 곧 욕계색계무색계로 나뉘어져 있는 중생의 삼계를 말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욕계에는 사악취(지옥아귀축생아수라)사주(동승신주남섬부주서우화주북구로주)육욕천(사왕천야마천도리천도솔천화락천타화자재천)의 십사유가 있고, 색계에는 초선천대범천제이선천無想天五淨居天의 칠유가 있으며, 무색계에는 空無邊處天識無邊處天無所有處天非想非非想處天四有가 있으니 이 모두를 합하여 이십오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41. 無念頓悟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無念

 

上說無念 ,,,“앞에서 무념을 말씀하셨는데

 

猶未盡決,,,아직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無念者 ,,,,“무념이란

 

一切處 ,,,, 일체처에

 

無心 是 ,,, 무심함이니

 

無一切境界,,, 일체 경계가 없어서

 

無餘思求是,,, 나머지 생각으로 구함이 없음이며,

 

對諸境色 ,,, 모든 경계와 사물에 대하여

 

永無起動 ,,,, 영영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이

 

是卽無念,,,,,, 곧 무념이니라.

 

無念者,,,,,,,,, 무념이란

 

是名眞念也,,,, 참된 생각을 이름함이니

 

若以念爲念者,,,만약 생각으로 생각을 삼는다면

 

卽是邪念 ,,, 곧 삿된 생각이요

 

非爲正念,,,, 바른 생각이 아니니라.

 

何以故 ,,,,, 왜냐하면

 

經云 ,,,,,,,,, 경에 이르기를

 

若敎人六念,,,만약 사람에게 육념을 가르치면

 

名爲非念 ,,,,,생각이 아님이다라고 하나니

 

六有念,,,,,,,,, 육념이 있으면

 

名爲邪念,,,,, 삿된 생각이요

 

無六念者 ,,,, 육념이 없으면

 

卽眞念 ,,,,, 곧 참된 생각이라 하느니라.

 

經云 ,,,,,,,, 경에 이르기를

 

善男子,,,,,,, 선남자야

 

我等 ,,,,,,,,,우리가

 

住於無念法中,,, 무념법 가운데 머물러서

 

得如是金色三十二相 ,,, 이와 같은 금색의 삼십이상을 얻어

 

放大光明 ,,,,,,,,,,,,,,,,,, 큰 광명을 놓아서

 

照無餘世界,,,,,,,,,,, 세계를 남김없이 비추나니,

 

不可思議功德 ,,,, 이 불가사의한 공덕은

 

佛說之,,,,,,,,,,,,, 부처님이 설명하여도

 

猶不盡 ,,,,,,,,,,,, 오히려 다할 수 없는데

 

何况餘乘能知也 ,,하물며 나머지 승들이 능히 알 수 있으리오 하였느니라.

 

得無念者 ,,,,, 무념을 얻은 사람은

 

六根 ,,,,,,,,,,, 육근이

 

無念故 ,,,,,,,,, 물들지 아니하는 까닭으로

 

自然得入諸佛知見 得如是者,,, 자연히 모든 부처님 지견에 들어가니

이러한 법을 얻는 사람은

 

卽名佛藏 亦名法藏,,, 부처님 곳집이며 또 법의 곳집이라 하니,

 

卽能一切佛 一切法,,,곧 능히 일체가 부처며 일체가 법이니라,

 

何以故 爲無念故,,,왜냐하면 무념인 까닭이니

經云一切諸佛等 皆從此經出,,,경에 이르기를 일체 모든 부처님들이

모두 이 경으로부터 나오신다, 고 하였느니라,

 

 

<강설>

 

돈오의 내용이 무념을 근본으로 하므로 무념을 완전히 성취하면 이것이 성불이고 견성이고 구경각이고 해탈이고 열반이라고 지금까지 많이 말해왔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돈오의 근본 내용 전체를 다 알려면 무념의 내용을 확실히 알아야 하는 것이지 무념의 내용을 확실히 모를 것 같으면 돈오요문의 근본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무념에 대하여 설명을 더하는 것입니다.

 

일체처란 모든 장소 모든 공간을 말하는데 일체처라고 해서 장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또한 일체시 즉 모든 시간도 다 포함하는 것이니 일체란 말속에서는 시공간의 의미가 다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념이란 일체처 일체시에 모든 무심함을 뜻합니다. 무심이란 주관적으로는 내 마음속에 일체 망념이 다 떨어져서 청정무구하여 일체의 바깥경계를 대할 때 물들지 아니하고 동요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안의 마음과 바깥의 경계가 함께 동요하지 않고 물들지 않음을 무념의 경계 무심의 경계라고 하는 것이니, 무심이 되면 팔풍에 움직이지 아니하고 일체에 자유자재하므로 이것을 돈오라고 합니다. 무념이란 곧 선악도 버리고 시비도 버리고 유무도 버리고 모든 차별을 버린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진념이라 하고 보리라고 하니 진여정념을 말합니다. 그러나 무념이라고 해서 생각이 아무 것도 없는 목석과 같은 단멸공이 아니라 항사묘용이 원만구족하여 수용자재함을 말하는 것이니 진념이란 모든 망념을 떠난 진여대용을 말합니다.

 

六念이란 부처님을 생각하고[念佛], 법을 생각하고, 승가를 생각하고, 계율을 생각하고, 보시를 생각하고, 하늘을 생각하는 여섯 가지 생각을 말합니다. 다른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하늘을 생각한다고 하는 하늘이라는 것은 천상이 아니냐고 볼 수도 있지만,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하늘 가운데 하늘[天中天]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높은 곳,

 

다시 말하면 究竟涅槃果를 말하는 것이지 천상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상만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불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천상이란 업을 따라가서 나는 생멸법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육념이란 涅槃果까지 말하는 것이지만 색계에서 보면 모두 생멸법입니다. 진실로 청정한 무념에서 볼 때는 모두가 생멸이지 실제의 진념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진념을 성취하려면 부처란 생각도 버리고 법이라는 생각도 버리고 승이라는 생각도 버리고 계라는 생각도 버리고 법이라는 보시라는 생각도 버리고 천상천하에 유아독존한 비교할 수 없는 높은 것도 버려서 조금이라도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념이란 세간법도 출세간법도 버리고 유위법도 무위법도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유위법은 버리고 무위법을 취하거나 세간법을 버리고 출세간법을 취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육념이 없으면 진념인 것입니다.

 

무념법 가운데 머물러서 금색의 삼십이상을 갖추어 큰 광명을 놓아서 시방세계를 다 비춘다고 하는 것은 무념이란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그대로 말씀한 것입니다. 그 마음자리의 공덕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아무리 미래겁이 다하도록 설명한다 하여도 티끌만큼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고 이것을 누구에게 전해주려고 해도 전해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부처님의 마음자리인 무념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열심히 공부해서 모든 망념을 제거하여 진여본성을 확철히 깨쳐 돈오해야만 이 불가사의한 해탈경계를 알고 그 공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경에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께서 이 경을 좇아서 나온다하는 이 '은 진여자성 즉 무념을 말하는 것으로서, 부처님 말씀을 적어놓은 종이 조각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종이조각에 쓴 글자만 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사마외도로 떨어져 불법을 영원히 모르고 맙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말씀한 이 을 알려면 무념을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

 

1-1.

 

旣稱無念 ,,,“이미 무념이라 하면서

 

入佛知見 ,,, 부처님 지견에 들어간다고 하니

 

復從何立 ,,, 다시 무엇을 쫓아 세웁니까?”

 

從無念立 ,,,“무념을 좇아서 세우니

 

何以故 ,,,,,,,무슨 까닭인가?

 

經云 ,,,,,,,,경에 이르기를

 

從無住本,,,,,머무름이 없는 근본을 쫓아서

 

立一切法,,,,일체법을 세운다고 하였고

 

又云喩如明鑑 ,,, 또 이르기를 비유컨대, 밝은 거울과 같다고 하였으니

 

鑑中 ,,,,,,,,,,,,,,,거울 가운데

 

雖無像而能現萬像,, 비록 모양이 없으나 능히 만 가지 모양이 나타남이라.

 

何以故,,,,,,,,,, 왜냐하면

 

爲鑑明故,,,,,, 거울이 밝은 까닭에

 

能現萬像 ,,,,, 능히 만 가지 모양이 나타나느니라.

 

學人 ,,,,,,,,,,, 배우는 사람의

 

爲心無染故,,,, 마음이 물들지 아니하는 까닭에

 

妄念 ,,,,,,,,,,,,망념이

 

不生,,,,,,,,,,,,, 나지 아니하고

 

我人心 滅 ,,,, 아인심이 없어져서

 

畢竟淸淨,,,,,, 필경 청정하니

 

以淸淨故 ,,,,,청정한 까닭으로

 

能生無量知見 ,,, 능히 한량없는 지견이 나느니라.

 

頓悟者 ,,,,,,,,,, 돈오란

 

不離此生,,,,,,,,,금생을 떠나지않고,

 

卽得解脫,,,, 곧 해탈을 얻으니

 

何以知之 , ,,무엇으로써 그것을 아는가?

 

譬如師子兒,,, 비유컨대 사자새끼가

 

初生之時,,, 처음 태어날 때도

 

卽眞師子,,, 사자인 것과 같으니

 

修頓悟者,,, 돈오를 닦는 사람도

 

亦復如是,,, 또한 이와 같아서

 

卽修之時,,, 돈오를 닦을 때에

 

卽入佛位,,,곧 부처님 지위에 들어가느니라.

 

如竹春生筍 ,,, 마치 대나무가 봄에 순이 나서

 

不離於春 ,,,,, 그 봄을 여의지 않고

 

卽與母齊,,,,,, 곧 어미 대나무와 같게 되어 함께 다름이 없는 것과 같음이니,

 

何以故 ,,,,,,,, 왜냐하면

 

爲心空故,,,,,, 마음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

 

2. 頓悟

 

修頓悟者 ,,,“돈오를 닦는 사람도

 

亦復如是 ,,, 또한 이와 같아서

 

爲頓除妄念 ,, 순식간에 망념을 없애버리고

 

永絶我人,,,,, 영원히 아인심을 끊어서

 

畢竟空寂,,,,, 필경 공적하여

 

卽與佛齊,,,, 부처님과 같게 되어

 

等無有異故 ,, 다름이 없는 까닭에

 

云卽凡卽聖也,,, 범부가 성인이라고 하느니라

 

修頓悟者 ,,, 돈오를 닦는 사람은

 

不離此身 ,,, 이 몸을 떠나지 아니하고

 

卽超三界,,,, 곧 삼계를 뛰어나나니

 

經云 ,,,,,,,,, 경에 이르기를

 

不壞世間而超世間 ,, 세간을 무너뜨리지 아니하고 세간을 뛰어나며

 

不捨煩惱而入涅槃 ,, 번뇌를 버리지 아니하고 열반에 들어간다고 하였느니라.

 

不修頓悟者 ,,, 돈오를 닦지 않는 사람은

 

猶如野干 ,,,,,,,마치 여우가

 

隨逐師子 ,,, 사자를 따라 쫓아다녀서

 

經百千劫 ,,, 백천 겁을 지나더라도

 

從不得成師子,,, 마침내 사자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느니라.”

 

------------------

 

3. 眞如無心

 

又問 ,,,또 물었다

 

眞如之性 ,,,“진여의 성품은

 

爲實空 ,,,, 실로 공한 것입니까?

 

爲實不空 ,,,실로 공하지 않은 것입니까?

 

若言不空 ,,, 만약 공하지 않다고 말하면

 

卽是有相,,, 곧 모양이 있는 것이요,

 

若言空者 ,,, 만약 공하다고 말하면

 

卽是斷滅 ,,, 곧 단멸이니,

 

一切衆生 ,,, 일체 중생이

 

當依何修 ,,, 마땅히 무엇을 의지해서 닦아야

 

而得解脫,,,,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까?”

 

眞如之性 ,,,“진여의 성품은

 

亦空亦不空 ,,, 공하면서 공하지 않느니라.

 

何以故 ,,,,,,,, 왜냐하면

 

眞如妙體 ,,, 진여의 묘한 본체는

 

無形無相 ,,, 형상이 없어서

 

不可得也,,, ,얻을 수 없으므로

 

是名亦空 ,,, 또한 공하다고 하느니라.

 

然 於空無相體中 ,,, 그러나 공하여 모양이 없는 본체 가운데에

 

具足恒沙之用 ,,, 항사묘용이 구족하여

 

卽無事不應 ,,, 곧 사물에 응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是名亦不空,,, 또한 공하지 않다고 하느니라.

 

經云 ,,,,,,,,,, 경에 이르기를

 

解一卽千從 ,,, 하나를 알면 천 가지가 따라 오고

 

迷一卽萬惑,,,, 하나를 미혹하면 만 가지를 미혹한다고 하니

 

若人 ,,,,,,,,,,, 만약 사람이

 

守一 ,,,,,,,,,,, 하나를 지키면

 

萬事畢,,,,,,,,,만 가지 일을 마치는 것이니

 

是悟道之妙也,,, 이것이 오도의 묘함이라고 하니

 

經云 ,,,,,,,,,,경에 이르기를

 

三羅及萬像 ,,,삼라 만상에

 

一法之所印 ,,,한 법이 있다면

 

云何一法中而生種種見 ,,,어떻게 해서 한 법 가운데에서 갖가지 견해가 나오는 것인가?

 

如此功業 ,,,이러한 공업은 행함으로 말미암아

 

由行爲本,,,,근본이 되니

 

若不降心 ,,, 만약 마음을 항복 받지 아니하고

 

依文取證 ,,, 문자를 의지해서 증득 하려 하면

 

無有是處 ,,, 옳지 못함이라.

 

自誑誑他 ,,,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여서

 

彼此俱墮 ,,, 피차가 함께 떨어질 것이니

 

努力努力 ,,,노력하고 노력하여

 

細細審之,,,, 자세히 그것을 살필지니라.

 

只是事來 ,,,다만 일이 닥쳐옴에

 

不受,,,,,,,,,,받아들이지 아니하여

 

一切處 ,,,, 일체처에

 

無心 ,,,,,,, 무심함이니

 

得如是者 ,,,이렇게 얻은 사람은

 

卽入涅槃 ,,, 열반에 들어

 

證無生法忍,,,무생법인을 증득하느니라.

 

亦名不二法門 ,,, 이것을 불이문이라 하며

 

亦名無諍 ,,,,,,,,, 또 다툼이 없다고 하며

 

亦名一行三昧 ,,, 일행삼매라고 하나니,

 

何以故 ,,,,,,,,,,왜냐하면

 

畢竟淸淨 ,,,,, 필경 청정하여

 

無我人故,,,,,,,,아상과 인상이 없는 까닭이니라.

 

不起愛憎 ,,,, 애증을 일으키지 않음이

 

是二性空 ,,,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며

 

是無所見 ,,, 보는 바가 없음이니,

 

卽是眞如無得之辯,,,곧 이것이 진여의 얻음이 없는 변론이니라.”

 

 

<강설>

 

진여자성을 돈오해야 하기 때문에 그 돈오의 내용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공이란 진여 자체가 본래 형상이 없어서 부처도 그것을 볼 수 없고 조사도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단멸이 아니라 항사의 묘용이 구족해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우리가 자유자재하게 활용할 수 있으니 이것을 공하지 아니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여를 바로 안 사람이면 공함이 공하지 않음이며 공하지 않음이 공함임을 아는 것이니, 공함이나 공하지 않음에 집착되면 중도를 모르는 동시에 진리는 영원히 모르고 돈오도 모르고 무념도 모르는 것입니다.

 

무념의 없음이란 공함을 말하니 일체가 공해 버렸다는 말이며,

 

생각이란 진여의 바른 생각이니 공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함과 공하지 않음이란 무념의 뜻을 표현한 것입니다.

 

경에 말씀함과 같이 일체만법이 진여묘용 아님이 없기 때문에 한 법을 알면 일체만법을 알 수 있는 것이고 한 법에 미혹하면 일체만법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를 지키면 만 가지 일을 마치게 되는 것이니 여기서 하나를 지킨다 함은 한 가지 공부만 하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공부만 할 것 같으면 일체 만사가 성취되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오도의 묘라는 것입니다. 오도의 묘라는 말이 무엇을 지적하느냐 하면 일체만법이 모두 진여자성에서 나온 것이고 진여자성의 근본은 바로 무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공부해서든지 무념인 이 진여자성을 확철히 깨치면 일체가 원만구족하여 여기에 한 법을 더할래야 더할 수도 없고 덜래야 덜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공부를 하다가 저 공부를 하다가 갈팡질팡하지 말고 오직 진여본성을 깨치는 무념을 증하는 돈오법문만 의지하여 돈오문에 들어가면 전체가 원만구족한다는 것입니다. 이 공부 저 공부를 겸해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원만한 공부를 성취할 수 없지 않나 하는 이런 의심을 다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해탈을 하려고 한다면 언제든지 마음을 닦아서 깨쳐야 되는 것이지 문자를 의지해서 증득하려고 하면 참다운 공부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대주스님이 강력히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돈오란 양변을 여읜 중도이며 무념이며 구경각이며 성불이며 열반임을 전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두 가지 성품이 공하다는 것을 가지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42. 衆生自度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此論 ,,,“이 논을

 

不傳無信 ,,,믿지 않는 이에게는 전하지 말며

 

唯傳同見同行 ,,, 오직 견해가 같고 행함이 같은 이에게 전할 것이요

 

當觀前人 ,,, 마땅히 앞 사람이

 

有誠信心 ,,, 성실한 신심이 있어

 

堪任不退者 ,,, 감당하여 물러가지 않는

사람인가를 관찰할 것이니,

 

如是之人 ,,,,, 이러한 사람을

 

乃可爲說 ,,, 위해 설명하고

 

示之令悟 ,,, 보여 깨닫도록 해야 하는 것이니라.

 

悟作此論 ,,, 내가 이 논을 지은 것은

 

爲有然人,,,, 인연 있는 사람을 위함이요

 

非求名利 ,,, 명리를 구하고자 함이 아니니라

 

只如諸佛所說千經萬論 ,,,. 다만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 천가지 경 만가지 논은

 

只爲衆生 ,,, 중생이

 

迷故 ,,,, 미혹하기 때문에

 

心行不同 ,,,마음과 행동이 한결같지 아니하여

 

隨邪應說 ,,, 삿된 것을 따라 대응하여 설명한 것이므로

 

卽有差別,,,, 곧 여러 차별이 있으나,

 

如論究竟解脫理者 ,,, 구경해탈의 이치를 논하는 경우 일진댄

 

只是事來不受 ,,, 다만 일이 다가와도 받지 아니하고

 

一切處無心 ,,, 일체처에 무심하여

 

永寂如空 ,,, 영원히 고요함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畢竟淸淨 ,,, 필경에 청정하여

 

自然解脫,,,, 자연히 해탈할 것이니라.

 

汝莫求虛名 ,,, 너희들은 헛된 이름을 구하여

 

口說眞如 ,,, 입으로는 진여를 말하되

 

心似猿猴,,,,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서는 안되느니라.

 

卽言行 ,,,, 말과 행동이

 

相違 ,,,,, 서로 어긋나서

 

名爲自誑 ,,, 스스로 속임이니

 

當墜惡道 ,,, 마땅히 악도에 떨어지느니라.

 

莫求一世虛名快樂 ,,, 한세상의 헛된 이름과 쾌락을 구하지 말라.

 

不覺長劫受殃 ,,,, 모르는 사이에 억겁의 재앙을 받게 되는 것이니

 

努力努力,,,,,,, 힘쓰고 힘쓸지니라.

 

衆生 ,,,,,,,,,,,,, 중생이

 

自度 ,,,,,,,,,,,, 스스로 제도함이요

 

佛不能度 ,,,,, 부처님이 능히 제도하지 못하나니,

 

若佛能度衆生時 ,,, 만약 부처님이 능히 중생을 제도할 때엔

 

過去諸佛 ,,,과거 모든 부처님이

 

如微塵數 ,,,티끌 수와 같아서

 

一切衆生 ,,,일체 중생을

 

總應度盡 ,,,모두 제도하여 마쳤을 것이어늘

 

何故 ,,,,,,,,,, 무엇 때문에

 

我等 ,,,,,,,,,,우리들은

 

至今流浪生死 ,,, 지금까지 생사에 유랑하며

 

不得成佛 ,,, 성불하지 못하였는가?

 

當知衆生 ,,, 중생이

 

自度 ,,,스스로 제도함이요

 

佛不能度,,, 부처님이 능히 제도하지 못함을 마땅히 알라.

 

努力努力自修 ,,, 노력하고 노력하여 스스로 닦아

 

莫徛他佛力 ,,,다른 부처님의 힘을 의지하지 말지니

 

經云 ,,,,,,,,,,, 경에 이르기를

 

夫求法者 ,,, 무릇 법을 구하는 자는

 

不著佛求,,,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라고 하였느니라.”

 

 

<강설>

 

나의 이 법문을 신심 있는 사람에게 전해주어야지 신심 없는 사람에게는 전해주지 말라는 대주스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대주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누구든지 이런 신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공부하여 하루 빨리 불법을 성취하라는 자비심에서 하신 말씀이지, 신심 없는 사람이라고 무조건 책을 덮어놓고 일러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얼른 믿고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을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불법을 믿지 않고 비방하는 사람은 지옥에 가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냐 하면 부처님 말씀은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에게 불법을 더 많이 설명해 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불법을 비방하고 비방하지만 결국은 다른 것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을 비방하는 것이므로 그 불법을 비방한 공덕으로 그 사람이 성불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을 믿는 사람도 성불하게 되고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도 성불하게 된다는 것이니 인연 있는 중생도 제도하게 되고 인연 없는 중생도 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대주스님이 하신 말씀은 이런 불법을 만나게 되거든 어떻게 하든지 용맹심을 내어서 신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해서 하루 빨리 깨치라는 경책의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지 진정으로 하신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중생이 스스로 제도하고 부처님이 제도하지 못하며 스스로 닦고 다른 부처님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의타심을 배격한 말씀입니다. 나의 자성 가운데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하여 있는데 다시 딴 곳에 가서 빌 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自家寶藏 즉 자성이 부처라는 것을 확철히 믿고 철저히 깨달아서 부처도 믿지 말고 달마도 믿지 말고 오직 내 마음만 철저히 믿고 내 마음만 닦아서 자성을 깨치면 그것이 참 부처이니 절대로 남을 믿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석가모니불이나 달마대사는 우리의 자성이 부처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큰 공덕이 있는 분들일 뿐이지 석가불도 중생을 부처로 만들 수 없고 달마대사도 중생을 부처로 만들 수 없고 천불이 출세해도 중생을 제도하지 못합니다. 오직 자기의 마음을 바로 보고 자기의 마음을 닦아서 스스로 제도하는 자력수행을 대주스님이 강조하신 것이니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여야 될 줄로 믿습니다.

 

43. 同處不同住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

 

於來世中 ,,,내세에 있어서는

 

多有雜學之徒 ,,, 잡된 배움의 무리가 많을 것인데

 

云何共住 ,,,어떻게 함께 살겠습니까?”

 

但和其光 ,,,“다만 그 빛을 온화하게 할 뿐이요

 

不同其業 ,,, 그 업은 같이하지 말지니

 

同處不同住,,,장소는 같이하나 같이 살지는 아니 하느니라.

 

經云 ,,,, 경에 이르기를

 

隨流而性常也 ,,, 흐름을 따르나 성품은 항상하다고 하였느니라.

 

只如學道者 ,,,, 다만 도를 베우는 사람은

 

自爲大事因然解脫之事 ,,, 스스로 일대사 인연인 해탈의 일을 위할지니,

 

俱勿輕未學 ,,, 아울러 처음 배우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敬學如佛 ,,, 부처님 같이 공경하고 배우며,

 

不高己德 ,,, 자기의 덕을 높이고

 

不疾彼能 ,,,남의 능력을 질투하지 말며,

 

自察於行 ,,, 자기의 행동을 살피고

 

不擧他過 ,,,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춰내지 아니하면,

 

於一切處 ,,, 일체처에 있어서

 

悉無妨礙 ,,, 방해되고 장애됨이 없어

 

自然快樂也,,,자연히 쾌락할 것이니라.

 

重說偈云 ,,,거듭 게송을 설하여 말하리라.

 

忍辱 ,,,,인욕이

 

第一道 ,,, 제일의 도라

 

先須除我人,,,먼저 아인심을 없앨지니

 

事來 ,,,,,,,,일이 옴에

 

無所受 ,,,받는 바 없으면

 

卽眞菩提身,,,참다운 보리의 몸이니라.”

 

 

<강설>

 

우리들의 목적은 도를 구하여 성불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사는 곳은 중생의 세계이기 때문에 영산회상일지라도 용과 뱀이 함께 섞여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참으로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고 승려도 있고 속인도 있고 외도도 있고 해서 여러 가지 근기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들대로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들대로 따로 분류하여 살아야 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모여 사는 그 목적이 성불이라는 한 곳에 있으므로 갖가지 근기를 가진 사람들이 같이 모여 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만 가장 화합하고 성불의 목적에 맞게 살 수 있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和光同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도덕이 높다 하여도 조금도 꾸밈없이 마음을 낮추어 일체중생을 섭수하여 함께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중생이 동쪽으로 간다고 자기도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간다고 자기도 서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오직 바른 길로만 나가고 잘못된 업은 같이 걷지 않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과 같이 앉아서 함께 술을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술 먹는 사람과 살기는 같이 살지만 그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고 섭수하여 가르쳐서 옳은 길로 끌어주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같은 처소에서 살기는 살지만 근본행동은 같이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실제로 공부하는 데 있어서 근본 요령인데 실행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공부를 잘 지어가는 사람은 어떤 곳을 가든지 간에 흐름을 따라서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술먹는 사람을 만나 같이 살아도 같이 술을 먹지 아니하고, 싸움을 잘하는 사람을 만나 살아도 싸움을 같이 하지 아니하고, 그밖의 각각의 중생의 업을 따라 나쁜 짓을 많이 하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도 절대로 그 사람들에게 동화되어 같이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처음 도를 배우는 사람들을 부처님 같이 공경하고 아무리 자기가 도덕이 높다 해도 잘난 체 말며,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질투하지 않으며, 자기의 행동만 살피고 남의 허물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이 일대사인연인 해탈을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근본자세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살면 어디에 살고 있든지 그 사람은 참으로 극락세계에 사는 사람이며 그렇지 못하고 항상 너니 나니 하는 잘난 마음으로 다투고 살게 되면 지옥세계에 사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몇마디 부연할까 합니다. 우리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돈오법으로 중도를 정등각하여 성불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중살이에 있어서는 대주스님 말씀을 따라 철두철미하게 마음을 낮추어 남의 허물을 보지 말고 자기 허물만 보아서 모든 일에 물듦이 없이 하고 공부만 부지런히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공부를 지어가야만 돈오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보면 대중에 살면서 자기만 항상 옳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르다고 생각하여 저런 나쁜 놈들과 어떻게 같이 살며 함께 무슨 공부가 되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다가 살림 중에 달아나는 사람들도 많고, 혹 달아나지 않더라도 늘 그런 응어리를 가지고 대중살이하는 사람들이 선방에 꽉 찼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참으로 발심하지 못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공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자기 화두만 열심히 할 것 같으면 옆 사람의 잘하고 못하는 것이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남의 잘잘못이 보이고 여러 가지 일이 눈에 보인다고 하면 그때 벌써 그 사람에게는 화두가 없을 때이며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정해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인욕하고 하심하는 근본은 화두만 들고 목숨 떼놓고 성불하기 위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옆에서 불이 나도 모르는 것인데 어찌 옆 사람의 잘잘못이 보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대중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시비심이 다 떨어지는 것이고 시비심을 가진 사람은 공부 안하는 사람이라고 선을 긋습니다. 누구나 대중에 살면서 이 대주스님의 말씀을 깊이 믿고 마음속에 새겨서 열심히 정진하도록 합시다.

 

44. 一切處無心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金剛經云 ,,,“금강경에 이르기를

 

菩薩 ,,,,,,,,,‘보살이

 

無我法者,,, 아법이 없는 사람은

 

如來說名眞是菩薩,,,여래가 참다운 보살이라고 말씀하시며,

 

又云 ,,,,,,,,,,,,,,, 또 이르기를

 

不取卽不捨,,,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여

 

永斷於生死,,, 영원히 생사를 끊어서

 

一切處 ,,,,,,,, 일체처에

 

無心 ,,,,,,,,,,, 무심하면

 

卽名諸佛子,,, 곧 모든 부처님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느니라.

 

涅槃經云 ,,,,,,열반경에 이르되

 

如來證涅槃,,,,여래가 열반을 증득하여

 

永斷於生死,,,,영원히 생사를 끊었다고 하였느니라.

 

偈曰,,,,,,,,,,,,,게송을 지어 말하노라.

 

我今意况大好 ,,,나는 지금 뜻이 매우 좋아서

 

他人罵時無惱 ,,,남이 욕할 때도 괴로움이 없고

 

無言不說是非 ,,,말없이 시비를 말하지 않나니

 

涅槃生死同道 ,,,열반과 생사가 같은 길이로다.

 

識達自家本宗,,,,내 집의 근본 종지를 사무쳐 알아

 

猶來無有靑皁,,,본래로 푸르고 검은 분별이 없나니

 

一切妄想分別,,, 일체 망상의 분별은

 

將知世人不了,,,세상 사람이 밝게 알지 못함임을 알지니라.

 

寄言凡夫末代,,,말세의 범부에게 이르노니

 

除却心中藁草,,,마음 가운데 우거진 풀을 없애 버려라.

 

我今意况大寬,,, 내 지금 뜻이 크게 넓어서

 

不語無事心安,,, 말하지 않고 일 없어 마음이 편안하니

 

從容自在解脫,,, 조용하여 자재해탈이라

 

東西去易不難,,, 동서어디를 가도 쉬워 어렵지 않도다.

 

終日無言寂寞,,,종일토록 말없이 적막하여

 

念念向理思看,,, 생각 생각에 이치를 향해 생각해 보니

 

自然逍遙見道,,,자연히 소요하여 도를 보아

 

生死定不相干,,, 생사와 결정코 상관치 않도다.

 

我今意况大寄,,,내 지금 뜻이 몹시 기특하니

 

不向世上侵欺,,,세강의 침해와 속임을 향하지 않음이라,

 

榮華總是虛誑,,, 영화는 모두 헛된 속임수이니

 

弊衣麤食充飢,,, 해어진 옷 거친 음식으로 굶주림을 채우도다.

 

道逢世人賴語,,, 길에서 세상 사람을 만나 말하기를 게을리 하니

 

世人咸說我癡,,,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를 바보라 하네.

 

外現瞠瞠暗鈍,,,겉으로는 질린 듯 암둔해 보이나

 

心中明若瑠璃,,,마음 가운데는 밝기가 유리 같아서

 

黙契羅睺密行 ,,,라후라의 밀행에 묵묵히 계합하나니

 

非汝凡夫所知,,, 너희 범부들이 알 바 아니로다.

 

吾恐汝等 ,,,,,,,내 너희들이

 

不會了眞解脫理,,, 참 해탈의 이치를 알지 못할까 두려워서

 

再示汝等,,,,, 다시 너희에게 말해보이노라

 

 

<강설>

 

대주스님 자신의 심경과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경책하신 말씀입니다.

 

공부를 다 마친 사람은 무심을 증했기 때문에 일체 분별망상이 다 떨어져서 어떠한 환경이라도 그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는 것이며, 공부를 마치지 못한 사람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시비, 선악 등의 분별망상이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공부를 공부답게 하려면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이 참 어렵습니다. 동풍이 불면 서쪽으로 자빠지고 서풍이 불면 동쪽으로 자빠지고 바람 부는 대로 자빠지기만 하는 것은 내 마음 속에 주인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대중들 중에서 참선하는 사람은 화두를, 경을 배우는 사람은 경을 내 마음 속의 주인으로 삼아 열심히 공부하면 분별망상의 잡초가 시들지 않을래야 시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화두를 주인으로 삼고 경을 주인으로 삼아 전심전력을 다하여 공부할 것 같으면 일체 세상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렇다고 세상과는 별도로 사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공부를 성취해 가지고서는 일체 중생을 위해, 남을 위해 영원토록 살게 될 터이니 우선 잠깐동안 방편으로 내 개인적인 공부만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 공부만 열심히 하는 이것 자체도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되므로 내 공부만 한다고 해서 보살행에 절대 모순이 없으니 공부에만 열중하고 주위 환경에 휩쓸리지 말아서 대주스님의 이런 경계를 우리도 하루 빨리 증득해야겠습니다.

 

45. 畢竟淨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維摩經云 ,,,“유마경에 이르되

 

欲得淨土 ,,, 정토를 얻고자 할진댄

 

當淨其心 ,,, 마땅히 그 마음을

 

云何是淨心,,, 깨끗이 하는 것입니까?”

 

以畢竟淨 ,,,“필경 청정으로

 

爲淨,,,,,,,,,,깨끗함을 삼느니라.”

 

云何是畢竟淨,,, “어떤 것이 필경 청정으로

 

爲淨,,,,,,,,,,,,,,,,,,깨끗함을 삼는 것입니까?

 

無淨無無淨 ,,,“깨끗함도 없고 깨끗함이 없음도 없음이

 

卽是畢竟淨,,,, 곧 필경 깨끗함이니라.”

 

云何是無淨無無淨,,,깨끗함도 없고 깨끗함이 없음도 없는 것입니까?”

 

一切處無心 ,,,,“일체처에 무심함이

 

是淨 ,,,,,,,,,,,,, 깨끗함이니

 

得淨之時 ,,,,,,, 깨긋함을 얻었을 때에

 

不得作淨想 ,,, 깨끗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음이

 

卽名無淨也 ,,,곧 깨끗함이 없음이며,

 

亦不得作無淨想,,, 깨끗함이 없음을 얻었을 때에 또한 깨끗함이 없다는 생각도 하지 않음이

 

卽是無無淨也,,,,,,, 곧 깨끗함이 없음도 없는 것이니라.”

 

 

<강설>

 

누구든지 참으로 정토를 얻으려면 무심을 증해야 하는 것입니다.

 

47. 眞解脫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云何解脫心,,,“어떤 것이 해탈한 마음입니까?”

 

無解脫心 ,,,,“해탈한 마음이 없음이며,

 

亦無無解脫心 ,,, 또한 해탈한 마음이 없음도 없음이

 

卽名眞解脫也,,,, 곧 참 해탈이니라.

 

經云 ,,,,,,,,,,,, 경에 이르기를

 

法尙應捨 ,,,,,,오히려 법도 마땅히 벼려야 하거늘

 

何况非法也 ,,, 하물며 법 아닌 것이리오 하였으니

 

法者 ,,,, 법이란

 

是有 ,,,, 있음이요

 

非法 ,,, 법 아님이란

 

是無也 ,,, 없음이니,

 

但不取有無 ,,, 다만 있음과 없음을 취하지 아니하면

 

卽眞解脫,,,,,,,,,,, 곧 참 해탈이니라.”

 

*********************

 

48. 畢竟得

 

 

云何得道 ,,,“어떻게 도를 얻습니까?”

 

以畢竟得 ,,,“필경에 얻음으로써

 

爲得 ,,,얻음을 삼느니라.”

 

云何是畢竟得,,,“어떤 것이 필경의 얻음입니까?”

 

無得無無得 ,,,“얻음도 없고 얻음이 없음도 없음이

 

是名畢竟得,,, 필경의 얻음이라 하느니라.”

 

 

 

 

**************************

 

49. 畢竟空

 

云何是畢竟空 ,,,“어떤 것이 필경의 공함입니까?

 

無空無無空 ,,,“공함이 없고 공함이 없음도 없음이

 

卽名畢竟空,,,,,,, 필경 공함이라고 하느니라.”

 

 

<강설>

 

앞에서 말한 해탈심이든지 증함이든지 얻음이든지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같은 것이니 유무 양변을 떠나 중도를 정등각한 대무심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무심을 내놓고는 증함도 없고 도도 없고 공함도 없고 해탈도 없는 것입니다.

 

50. 眞如定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云何是眞如定,,,“어떤 것이 진여의 선정입니까?”

 

無定無無定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음도 없음이

 

卽名眞如定 ,,, 곧 진여의 선정이니

 

經云 ,,,,,,,,,,,경에 이르기를

 

無有定法,,,,정한 법을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것이 없으며 또한 여래가 설명할 정한 법이 없다고 하였느니라.

 

經云 ,,, 또 경에 이르기를

 

雖修空 ,,, 비록 공을 닦으나

 

不以空爲證 ,,, 공으로써 증함을 삼지 않는다고 하니

 

不得作空想 ,,, 공한 생각을 짓지 않음이

 

卽是也 ,,,,,,,,,,곧 이것이며,

 

雖修定,,,,,,,,,,, 비록 선정을 닦으나

 

不以定爲證 ,,, 선정으로써 증함을 삼지 아니하여

 

不得作定想 ,,, 선정이라는 생각을 짓지 않음이

 

卽是也 ,,,,,,,,, 곧 이것이며,

 

雖得淨 ,,,,,,,,, 비록 깨끗함을 얻었으나

 

不以淨爲證 ,,, 깨끗함으로써 증함을 삼지 아니하여

 

不得作淨想 ,,,깨끗하다는 생각도 짓지 않음이

 

卽是也,,,,,,,,,, 곧 이것이니라.

 

若得定得淨 ,,, 만약 선정을 얻고 깨끗함을 얻어서

 

得一切處無心之時 ,,, 일체처에 무심함을 얻었을 때에

 

卽作得如是想者 ,,,,, 이와 같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皆是妄想 ,,,,,,,,,,,,,, 모두 망상이니

 

卽被繫縳,,,,,,,,,,,,,,, 곧 얽매이게 되어

 

不名解脫 ,,,,,,,,,,,,,, 해탈이라고 할 수 없느니라.

 

若得如是之時 ,,,,, 만약 이와 같이 얻었을 때에

 

了了自知 ,,,,,,,,,,, 밝고 밝게 스스로 알아

 

得自在 ,,,,,,,,,,,,,, 자재를 얻되

 

卽不得將此爲證 ,,,이것을 가져 증함을 삼지 않으며

 

亦不得作如是想時 ,,, 또한 이와 같다는 생각도 하지 아니할 때에

 

得解脫 ,,,,,,,,,,,,,,,, 해탈을 얻느니라.

 

經云 ,,,,,,,,,,,,,,,,,, 경에 이르기를

 

若起精進心 ,,,,,,,,정진심을 일으키면

 

是妄非精進也 ,,,,이는 망념으로서 정진이 아니니라.

 

若能心不妄 ,,,,, 만약 능히 마음이 망령되지 않으면

 

精進無有涯,,,,,정진이 끝이 없다고 하였느니라.”

 

 

<강설>

 

금강경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흔히 해석해, ‘정한 법 있음이 없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으나, 그렇게 해석한다면 이름할 수 있다는 것이 있어 정한 법이 있음이 없음은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한 법이 없음과 정한 법이 없음도 없다는 것을 함께 부정하는 해석이어야 되므로 정한 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것이 없다고 해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 방식은 금강경의 범어 원문에도 그렇게 되어 있으므로 원문에 부합된 해석이라고 합니다.

 

51. 中道一切處無心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

 

云何是中道 ,,,“어떤 것이 중도입니까?”

 

無中間亦無二邊 ,,,“중간도 없고 또한 이변도 없음이

 

卽中道也 ,,,, 곧 중도이니라.”

 

云何是二邊 ,,,“어떤 것이 이변입니까?”

 

爲有彼心 ,,,“저 마음이 있고

 

有此心 ,,, 이 마음이 있음이

 

卽是二邊,,, 이변이니라.”

 

 

<강설>

 

너와 내가 있고 시비가 있고 선악이 있고 있음과 없음이 있는 것이 즉 이변이니, 저 마음 이 마음이라는 것이 딴 망음이 아니고 변견의 전체를 말합니다.

 

 

2.

 

云何名彼心此心,,,“어떤 것을 저 마음, 이 마음이라고 합니까?”

 

外縳色聲 ,,,“밖으로 색과 소리에 얽매임을

 

名爲彼心 ,,, 저 마음이라 하며

 

內起妄念 ,,,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名爲此心 ,,, 이 마음이라고 하니라

 

若於外 ,,,. 만약 밖으로

 

不染色 ,,, 색에 물들지 아니하면

 

卽名無彼心,,, 곧 저 마음이 없음이요

 

內不生妄念 ,,,안으로 망념이 나지 아니하면

 

卽名無此心 ,,, 곧 이 마음이 없음이니,

 

此非二邊也 ,,, 이것은 두 변이 없는 것이니라.

 

心旣無二邊 ,,, 마음이 이미 두변이 없으니

 

中亦何有哉,,, 중간이 또한 어찌 있을 것인가?

 

得如是者 ,,, 이와 같음을 얻는 것을

 

卽名中道 ,,, 곧 중도라 하는 것이니

 

眞如來道 ,,, 참된 여래의 도이니라.

 

如來道者 ,,, 여래의 도란

 

卽一切覺 ,,,곧 일체 깨친

 

人解脫也,,, 사람의 해탈이니

 

經云 ,,,,,,,경에 이르기를

 

虛空 ,,,,,,,허공에

 

無中邊 ,,, 가운데와 가장자리가 없으니

 

諸佛身亦然 ,,, 모든 여래의 몸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하느니라.

 

,,,,,,,,,,,,,,,, 그리하여

 

一切色空者 ,,,일체색이 공한 것은

 

卽一切處無心也,,, 곧 일체처에 무심함이요

 

一切處無心者,,,,,일체처에 무심함은

 

卽一切色性空 ,,, 곧 일체색의 성품이 공함이니,

 

二義無別 ,,,,,,,,,,두 가지 뜻이 다르지 아니하여

 

亦名色共 ,,,,,,,,,,이것을 또한 색이 공함이라 하며

 

亦名色無法也,,, 또 색이 법이 없음이라 하느니라.

 

汝若離一切處無心,,, 너희가 만약 일체처에 무심함을 떠나서

 

得菩提解脫 ,,, 보리해탈과 .

 

涅槃寂滅 ,,,,,,열반적멸과

 

禪定見性者 ,,,선정견성을 얻는다는 것은

 

非也,,,,,,,,,,,,,,옳지 않느니라

 

一切處無心者 ,,, 일체처에 무심함이란

 

卽修菩提解脫涅槃寂滅 ,,, 곧 보리해탈과 열반적멸과

 

禪定乃之六道皆見性處 ,,, 선정 내지 육바라밀을 닦음이니,모두 성품을 보는 곳이니라.

 

何以故 ,,,무슨 까닭인가.

 

金剛經云 ,,,금강경에 이르기를

 

無有少法 ,,,조그마한 법도

 

可得 ,,, 얻을 수 있음을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느니라.”

 

 

<강설>

 

가운데란 양쪽 가장자리가 전제가 되어 가운데라 하는데 양쪽의 가장자리가 없으면 무엇을 표준삼아 가운데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일체처에 무심을 얻으면 구경각을 성취한 사람이니 시방세계를 둘러보아도 견성할 곳 아닌 곳이 없고 전체가 진여의 항사묘용이 현전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열반의 길에서 일체 중생을 돕게 되는 것입니다.

 

52. 一切處無心解脫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

 

若有修一切諸行 ,,,“만약 일체 모든 행을 닦아서

 

具足成就 ,,,구족하여 성취하면

 

得受記否,,, 수기를 얻을 수 있습니까?”

 

不得,,,“얻을 수 없느니라.”

 

 

<강설>

 

수기란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 너는 이렇게 수행한 공덕으로 뒷 세상에 성불하여 무슨무슨 이름의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미리 인가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수기라는 것은 미래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에도 공부를 성취하면 수기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일체 모든 행을 닦아 육도만행을 원만구족하였다 하여도 이것으로 수기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니 그것으로는 구경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若以一切法無修 ,,,“만약 일체의 법을 닦지 아니하고서

 

得成就 ,,,성취하면

 

得修記否,,, 수기를 얻을 수 있습니까?”

 

不得,,,“얻을 수 없느니라.”

 

 

<강설>

 

육도만행을 닦지 않고 가만있으면 수기를 받을 수 있느냐는 물음인데 그것도 안 된다고 답한 것입니다.

 

 

3.

 

若恁麽時 ,,,“만약 이럴 때에는

 

當以何法而得受記,,, 마땅히 무슨 법으로써 수기를 얻을 수 있습니까?”

 

不以有行 ,,,“행 있음을 쓰지도 않고

 

亦不以無行,,, 행 없음을 쓰지 않으면

 

卽得受記 ,,,곧 수기를 얻느니라.

 

何以故 ,,, 왜냐하면

 

雜摩經云 ,,, 유마경에 이르기를

 

諸行性相 ,,, 모든 행의 성품과 모양이

 

悉皆無常 ,,,모두 다 무상하다고 하였으며

 

涅槃經云 ,,, 열반경에 이르기를

 

不告迦葉 ,,, 부처님이 가섭에게 말씀하시되

 

諸行 ,,,,,,,, 모든 행이 항상함이 있다면 옳지 못하다라고 하셨느니라.,,,

 

亦無無行 ,,,너희는 다만 일체처에 무심하면 곧 모든 행이 없으며 또한 행이 없음도 없어서

 

卽名手記 ,,,곧 이것을 수기라 하느니라

 

所言一切處無心者 ,,, 이른바 일체처에 무심이란

 

無憎愛心是 . ,, 증애심이 없음이니

 

言憎愛者 ,,,증애라고 말함은,

 

見好事 ,,, 좋은 일을 보고도

 

不起愛心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함을

 

卽名無愛心也,,, 곧 사랑하는 마음이 없음이라고 하고

 

見惡事 ,,,,, 나쁜 일을 보고도

 

亦不起憎心 ,,,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함을미워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느니라

 

卽名無憎心也 ,,, 사랑함이 없음이란 곧 물든 마음이 없음을 이름하니곧 색의 성품이 공함이요,

 

無萬緣俱絶 ,,,. 색의 성품이 공함이란 곧 만 가지 인연이 다 끊어짐이요

 

萬緣俱絶者 ,,, 만 가지 인연이 다 끊어짐은

 

自然解脫 ,,,,,,자연 해탈이니라.

 

汝細看之 ,,,너희들이 이것을 자세히 보아서

 

若末惺惺了時 ,,, 만약 두렷이 밝게 알지 못할 때엔

 

卽須早問 ,,, 모름지기 빨리 물을 것이요

 

勿使空度 ,,, 헛되이 보내지 말지어다.

 

汝等 ,,,,, 너희들이

 

若依此敎修 ,,, 만약 이 가르침을 의지해 닦아서

 

不解脫者 ,,, 해탈하지 못한다면

 

吾卽終身爲汝受汝大地獄 ,,, 내가 곧 종신토록 대지옥에 떨어지고

 

吾若誑汝者 , 만약 내가 너희들을 속인 사람이면

 

吾當所生處 ,,,내가 마땅히 나는 곳마다

 

爲師子虎狼所食,,, 사자나 호랑이나 이리의 밥이 될 것이다.

 

汝若不依敎 ,,,너희가 만약 이 가르침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自不勤修 ,,, 스스로 부지런히 닦지 아니하면

 

卽不知也 ,,,내 알 바 없느니라.

 

一失人身 ,,,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萬劫不復 ,,, 만겁에 다시 돌이킬 수 없으니

 

努力努力 ,,, 노력하고 노력해서

 

須合知爾,,,,모름지기 합당히 알아야 할지니라.”

 

 

<강설>

 

여기서 말하는 수기는 현재의 수기를 말하는 것이지 다음 세상의 수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체처 무심이란 구경의 깨달음을 말한 것이지 중간을 말한 것이 아니므로 이 수기를 당래의 수기로 본다면 큰 오해입니다.

 

증애심이 없음이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라고 앞에서도 많이 말했는데 두 가지 성품이 공하면 곧 묘각입니다. 그래서 신심명의 첫머리에서도 다만 미워하고 사랑함이 없으면 지극한 도가 통연히 명백하다고 한 것입니다. 즉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완전히 끊어지면 지극한 대도가 홀연히 명백하여 구경각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미워하고 사랑함을 버린다는 것이 참말로 어렵습니다. 이 증애는 일상의 증애뿐만 아니라 법의 미워하고 사랑함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십지등각도 법애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성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연이 다 끊어짐이란 세간 인연도 다 잊어버리고 출세간 인연도 다 잊어 버리는 것을 말하니 세법은 버리고 불법을 집착하면 만연이 다 끊어짐이 아닙니다. 청정한 자성을 완전히 깨친 데서 만연이 다 끊어지는 것이지 거기에 다만 조금이라도 불법이 서든지 세법이 서든지 부처가 서든지 중생이 서든지 하면 만연이 다 끊어짐이 되지 않는 동시에 자성청정이 아니며 무심이 아닙니다.

 

옛 조사스님들은 가사를 입고 사람 몸을 잃음이 제일 원통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어렵고 불법을 만나기도 어려운데 항차 사람의 몸 그것도 장부의 몸을 받아 나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도 믿지 아니하고 조사스님들 말씀도 믿지 아니하고 허송세월하다가 사람 몸을 잃어버리고 예전과 같이 생사윤회를 하게 되면 이것보다 더 크게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참으로 노력하고 노력해서 하루빨리 공부를 성취하여 성불합니다.

 

*** ***

 

 

 

 

 

 

 

 

 

 

 

 

 

 

 

 

 

 

 

 

 

 

 

 


'나 無' 카테고리의 다른 글

唯 識 學 槪 論  (0) 2019.04.03
二入四行論  (0) 2019.04.03
禪門撮要  (0) 2019.03.31
대승불교의 이해  (0) 2019.03.31
金剛三昧經  (0) 2019.03.15